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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욥이 대답하였다.
2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3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4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5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6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7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8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9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10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11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12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
13 그러나 그분이 한번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으랴? 한번 하려고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고 마시는데,
14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계획 가운데, 나를 두고 세우신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겠기에
15 나는 그분 앞에서 떨리는구나.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이 두렵구나.
16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
17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욥 23장, 새번역)
◈ 주해
1. 욥은 영혼육의 삼중적 고통과 관계의 파괴로 친구들의 동정과 경청을 구하나 거절당한다.
1) 욥은 친구들에게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본다.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화가 나서 비방하고, 들어달라고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고 위로를 받지 못한다.
2) 친구들은 첫 번째 대화에서 “욥이 죄를 지음으로 인한 재앙임으로 회개하여 회복하라”고 하였다.
3) 두 번째는 “욥은 악인이며, 그 악으로 인한 재앙”임을 비유적으로 말했지만, 세 번째는 직접적으로 “욥이 악인이며 이런 죄들을 지었다”라고 정죄한다.
4) 욥은 선을 행하여 왔는데 욥이 죄 짓는 것을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면서 이런 죄를 지었다고 모함한다.
2. 엘리바스는 너무나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말로 욥을 모함하고 정죄하고 괴롭힌다.
1)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을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라. 겸손하게 전능자에게 돌아가면 “만사형통, 문제해결, 축복의 통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한다.
3. 욥은 자신을 모함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엘리바스의 발언을 반박한다.
1)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욥의 대답은 엘리바스의 말을 직접 반박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변론이 주를 이룬다.
2) 아마 친구들과의 대화를 포기한 듯하다. 더 이상 친구들과의 논쟁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한다.
4.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욥이 대답하였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1-2절, 새번역).
5.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것은 원래 욥이 바라는 바다.
1) 다만 욥은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가 없다. 엘리바스는 회개를 위해 하나님께 돌이키라고 하였지만,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3-7절, 새번역).
6. 친구들을 고통하는 욥의 말을 듣지 않고 다투고 비방했다. 그래서 친구들과는 변론이 않된다.
1) 그러나 하나님은 도리어 욥의 말을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얼마든지 높은 논리로 욥을 책망하며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들과 달리 하나님은 욥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므로 하나님께는 자신의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할 수 있다.
3)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준 후에, 욥의 말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4)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반박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한다.
7. 그런데 욥의 어려움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 앞, 뒤, 왼편, 오른편 곧 동서남북 사방을 헤매어 찾아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2)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다(9)
8. 아무리 찾아도 대답이 없는 하나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만날 수 없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이 자기의 길을 아신다고 말한다.
1) 자신은 이 고통의 이유를 모르지만, 이 과정은 광석물을 제련하는 과정이며, 그 후에는 자신이 정금 같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시지. 그분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겠지”(10절, 쉬운성경).
2) 자신은 왜 이 고통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욥이 가는 길을 알고 있다.
- 자신은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죽음만을 소망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정금같이 하시려고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욥은 절망하는 자신의 관점과 자신을 아시고 정금같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점을 구분한다.
- 욥은 메타인지가 상당히 잘되는 명석한 사람이다.
9.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가 않된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부정하지 않는다.
1) 내 편에서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고난의 이유를 아시고, 나의 길을 아시며, 나를 정금 같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2) 그래서 만나지지 않는 하나님께 계속 나아가며, 대답 없는 하나님께 계속 말하며, 까닭 없는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한다.
10. 욥은 무엇을 근거로 시험을 통해 자신이 정금 같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가?
1) 11-12절에서 그의 선한 행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간 길,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하는 등 그의 의로운 행위를 근거로 정금같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2)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할 바를 행하였으니,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하여 정금 같게 하신다는 것이다.
3) 욥의 태도는 지극히 지혜롭다. 우리가 하나님께 할 바를 하면서 하나님의 선함을 기대한다.
4) 그런데 욥기에서는 이것이 맞지 않다. 하나님은 욥이 너무나 의로워서 정금 같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창세전에 욥을 택하신 은혜대로 욥을 정금 같게 하신다.
11. 13-15절에서 욥의 감정이 다시 요동친다.
1) 잠시 정금 같이 되는 희망에 찼으나 다시 낙심하고 절망한다.
2) 하나님은 욥에게 고통을 주시기로 뜻을 정하셨는데, 그의 뜻을 돌이킬 자는 없다.
-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에 욥은 두려워하고 절망한다.
3) 하나님이 나를 두고 세우신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신다(13-15절).
12. 이것은 욥에게 한편으로는 소망이고, 한편으로는 절망이다.
1)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을 정금 같게 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위해 영혼육의 고통을 주는 하나님을 막을 방법이 없어 절망한다.
2) 하나님은 욥이 버티고 있는 용기를 꺾으셨고 그 앞에 두려워하고 떨게 하셨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그에게 임한 어둠이나 흑암이 아니다. 곧 그에게 임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다.
13. 신약에서 정금같이 되는 방법은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는 믿음의 도키모스(연단)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도키모스)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5:1-4, 새번역).
2) 베드로는 불로 믿음은 단련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벧전 1:7, 새번역).
14. 욥은 정금 같은 믿음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서 온다고 믿고 있다.
1) 내가 할 바를 다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는 것은 바른 태도이나, 자신의 의에 근거하여 도키모스를 이룬다는 것은 착오다.
2) 하지만 신약에서 도키모스를 이루는 생명의 교제라는 방법도 욥에게 단순히 적용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 즉 욥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의 교제가 않되고,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되지 않고 있다.
3) 욥기는 인간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성경의 방법 즉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생명의 교제를 하라는 것도 잘 되지 않는다.
15. 물론 넓은 범위에서는 "복음을 통해 생명의 교제를 하라"는 말이 욥에게도 맞고, 실제로 욥은 이렇게 하고 있다.
1) 복음을 통하여 생명의 교제를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된다는 말은 욥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
2)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은 나를 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찾고 말하는 파레시아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3) 욥의 파레시아는 메마르지만, 어찌보면 욥처럼 하나님께 파레시아를 준행하는 사람도 없다. 욥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으시면서도 파레시아를 준행한 아들처럼 하나님께 나간다.
4) 요한의 "영혼의 어두운 밤", 잔느 귀용의 "겨울 나무"를 그대로 행하고 있다. 비참하고 메마름의 상태가 계속 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파레시아를 준행한다.
5) 그러므로 성경대로 행하여도 생명의 교제가 잘 되지 않아도, 욥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나를 아시고, 하나님 편에서는 나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파레시아를 준행해야 한다.
◈ 나의 묵상
까닭 없음을 말하는 욥기는 참 특이하다. 파레시아도 독특하게 가르쳐 준다. 복음생명캠프에서 나를 소개할 때 "서형섭 목사님은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전문가지만, 저는 왜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지 못하는가에 대한 전문가"라고 한 적이 있다.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은 도키모스를 위해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행하여야 하는 너무나 성경적인 진리다. 그런데 욥과 같은 예외도 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파레시아가 파레시아의 예외다. 보통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 생명을 얻고, 삼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하늘에 속한 기쁨과 평강이 주어진다. 그런데, 가끔은 아무리 해도 허공을 치는듯한 파레시아가 있다. 욥처럼 자기 의를 주장하던, 내 마음의 완악함이던, 하나님편에서의 거절이던...이유는 모르지만, 메마른 파레시아가 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도 그런 때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나 겨울나무로 설명해 주었다.
복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주의 영광안에 거하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 그리고 나는 왜 잘 않될까를 계속 고민한다. 많은 이유를 발견했지만 어찌보면 까닭이 없다.
욥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고난의 까닭을 모르겠고,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는 까닭을 모른다. 그러나 까닭을 모름은 자신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편에서는 까닭이 있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의 길을 아시고, 나를 향한 계획이 있고, 그 일을 이루실 것임을 알고 확신한다. 내 편에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 내 편에서는 절망밖에 없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작정하신 일을 이루신다. 이것이 욥이 파레시아를 끝까지 준행하는 이유다. 내편에서는 파레시아를 중단할 이유가 많지만, 하나님 편에 보면 파레시아를 중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욥은 이 믿음으로 끝까지 파레시아를 준행한다.
하나님 편에는 욥이 어리석다. 욥이 자신의 의를 근거로 정금같이 될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 있으면 어떠랴? 이것이 욥이 아는 최선인것을...사람은 자신의 최선 이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욥처럼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신다. 잘못 알면 어떻고, 잘못 하나님께 나가면 어떤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나를 다 알고, 성경을 다 알고, 하나님을 다 알아서 하나님께 나가겠는가? 내가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면 족하다고 하신다. 아기는 정중하게 부모를 찾지 않고 울부짖는다. 땡강을 부린다. 아기가 아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서다. 아기는 최선을 다해 부모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족하다.
그러고 보면 복음을 통해 생명의 교제로 나아가는 파레시아를 그대로 준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많은 자녀들을 만나주셨다. 성경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만나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기꺼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이해하시며 받아 주신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십자가 공로 의지하여 아들 안에 있음을 감사드린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은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래서 이 상태 이대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욥기를 통해서 주님이 저를 공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인생을 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난, 갈등, 어리석음, 약함을 주님이 얼마나 잘 아시는 지를 봅니다. 그 주님이 저를 아십니다. 저는 저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 속이는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겸손히 복음을 통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나를 내가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통해,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교제가 풍성하고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메마른 생명의 교제, 메마른 파레시아도 주님은 기뻐합니다. 욥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생명을 얻지 못해도, 주님 편에서는 나를 아시고, 나를 위하여 일하고 있으니,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욥처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생명의 교제와 예배와 기도를 중단한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들을 다시 불러 주시고, 연약해서 그러하오니 만나 주십시오. 임직을 받은 분들에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다음세대가 부모 때문에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으로 아는 복음으로 인하여 예배하며 묵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교회 안에 갇힌 분이 아니라, 공부와 관계와 나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임을 알게 하옵소서. 신정아 전도사님과 그 가정에 부활생명이 가득하여 주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교사들과 그 가정에도 주님의 생명이 충만하여 사망을 삼키고 생명을 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