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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4:11).
그런데 어찌하여 나란 인간은 어김없이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지요.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소서.
물론 그 자리는 흑암과 어둠의 자리일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으로는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자로서 밭을 사고 소를 사며 장가 든 자입니다.
이런 나는 주님이 초청하신 그 자리에 가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종들을 보내어 가난한 자와 소경들을 부르셨고 그들 안에 내가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소유에 내 마음이 있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품에 거하기를 원하오니 내가 가난한 자가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을 사모합니다.
그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습 3:9-20
제목 : 천국의 맛을 알고, 진짜 좋은 영생의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하다.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나의 묵상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잘못을 하고 나면 엄마에게 들킬까봐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엄마가 나의 잘못한 것을 알기까지 아이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이에게는 지옥의 경험일 수 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아이에게 매를 대거나 혼을 낼 때 그것은 아이에게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아이에게는 평화가 찾아온다.
다시 아이는 엄마 품속으로 들어가 안길 수 있다.
엄마는 아이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고, 아이도 엄마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
그것도 암이 말기라면 그는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낼 것이다.
육신적으로 그 시간은 그에게 지옥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어떤 약초를 먹고 기적적으로 그 암이 치유되었다고 하자.
그는 그 순간 최고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 기쁨은 무엇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이다.
그 기쁨을 누리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일이 여러 가지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하셨으며,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다.
그런데 이런 일이 주님의 사역의 본질은 아니었다.
주님은 이런 일을 통해서 그들에게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시위하신 것이다.
조금 전에 이야기 한 것처럼 날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는 말기 암 환자에게 암이 치유되었다는 것은 곧 그 자리가 천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천국을 보았듯이 진짜 그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을 전하시기 위하여 바로 치유와 축사와 가난한 자를 먹이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흩어졌던 예루살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다시금 시온 산이요 예루살렘 성인 하나님의 거룩한 산, 하나님의 성산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사로잡혔던 포로지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던 자들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의 기쁨이야 무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들보다 더 기뻐하시는 이가 계셨으니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포로에서 회복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4-17) 시온의 딸들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기쁘지 않니? 기쁘게 외쳐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제 하나님께서 너에 대한 심판을 그치셨다. 그리고 네 원수들을 쫓아 버리셨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이제는 두려워하지 마라. 손을 늘어뜨려 절망할 필요도 없다.
너의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지 않니? 그분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분은 능치 못함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너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구나. 하나님께서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보시고 즐겁게 노래하며 기뻐하신다.
엿의 맛을 모르는 아이는 엿을 쉽게 사먹을 수 없다.
그러나 엿 맛을 아는 아이는 얼른 집으로 달려가서 나중에 혼날지언정 할아버지 새 고무신을 찢어서라도 엿을 바꿔먹는다.
그 엿 맛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엿장수 아저씨가 아이에게 엿을 조금 떼서 맛보기를 주면 된다.
맛보기로 주는 엿이 아까워서 맛보기 엿을 주지 못하면 오히려 장사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엿 맛을 알아야 엿을 사먹듯이, 천국의 맛을 알아야 천국을 소망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 위에 여러 가지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그 천국의 맛을 보여주시는 방법으로 질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질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고, 먹을 것을 먹고 배가 불러도 다시 아프다가 죽고, 또 다시 귀신이 들어올 수 있으며, 다시금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야곱의 우물과 똑같다.
야곱의 우물은 마시면 그 순간은 잠시 시원하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목이 마르게 된다.
그렇다고 그 물조차 마시지 않으면 진짜 생수의 맛이 어떤지 알 수조차 없기에 그는 목이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야곱의 우물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야곱의 우물을 떠서 마시면서, 비록 순간이지만 그 맛을 알게 된다.
이 맛을 아는 자가 이것보다 더 짜릿하고 시원한 생수를 찾게 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내가 아는 많은 분들이 바로 이 야곱의 우물에서 그런 순간적인 짜릿함과 맛을 보고 진짜 생수를 찾아 전전하시던 분들이다.
그 생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이런 야곱의 우물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 나라, 천국의 맛을 모르면 누가 그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기쁨을 주신다.
아픔을 고쳐주시기도 한다.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오게도 하신다.
고통이 변하여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맛이 바로 천국의 맛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 자체가 천국은 아니다.
그러나 천국의 맛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고, 이제는 더 나은 천국, 진짜로 좋은 영생의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하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기쁨은 아무리 천국의 맛이라도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요,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이 땅 위에 살지만, 영원한 나라요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창세전, 만물 위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기 원하시는 영생의 나라이다.
나는 그동안 수도 없이 스바냐 3:17절의 말씀을 찬양으로 불렀다.
가사가 은혜롭고, 곡조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 노래를 사랑했고, 그 찬양을 즐겨 불렀다.
물론 이 말씀이 은혜롭고 선율이 아름다워서 노래로 부르고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 이 말씀을 믿음의 고백으로 삼고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부를 수 있는 참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그 심판의 무덤 안에서 자신이 장사되고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과 함께할 성소를 세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며, 그런 자가 누리는 기쁨이다.
따라서 이 기쁨의 완성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진다.
추수하는 농부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추수감사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이다.
그 때, 진짜 추수감사절에는 알곡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기는 영생의 공동체와 우리 주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기쁨보다도 더 하실 것이다.
나는 그런 기쁨을 알지도 못했고 맛도 보지 못한 자였다.
물론 질병을 고침 받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것이 천국의 맛이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나는 그 맛을 알지 못했다.
단순히 아픔에서 해방되었기에 누리는 기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철저히 현세주의적이고 이 땅에서 무언가를 해결하고 누리려는 인간이었다.
사역의 열매가 있을 때도 기뻤지만, 그 기쁨 뒤에는 환난과 곤고가 임하였다.
그것은 사망의 증상으로써, 선하지 않은 자가 선한 일을 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자기주장의지의 발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쁨은 천국의 맛일 수가 없었다.
상급학교 입시에 합격을 하는 기쁨, 장학금을 타는 기쁨, 사업이 잘 되어 부요해지는 기쁨, 질병의 고통이 변하여 회복되는 기쁨 등을 맛보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천국의 맛은 보지 못하였다.
내가 아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가는 천국이 전부였다.
누구나 교회에 다니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금 성숙해서는 교회에 다닌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좀 잘 믿어야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었고, 이 땅에서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에 대한 보장보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알고 보니 나는 도무지 천국에 갈 수 없는 자였다.
그것이 나의 실상이었다.
나야말로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기로 작정된 자였다.
정말 내가 나를 봐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자이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용납해 주시고 주님 품에 품어주셨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난 자, 즉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라고,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악한 나를 용납해 주신 주님을 용납하는 일이다.
내가 용납받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임을 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높이 들리신 주님을 믿는 자는 바로 그곳으로 이끌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는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믿고 이제 영생을 얻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영생을 은혜로 얻은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이 땅에서의 삶 따로, 죽어서 가는 천국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사는 삶이 영생이요, 또한 우리가 죽어서도 완전한 그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와 주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누릴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기쁨의 맛이 오늘 여기에 임한다.
나의 묵상의 자리인 크로노스에 카이로스로 임한다.
크로노스에 틈입한 영원의 시간은 나에게 영원이다.
나의 영혼은 주님이 계신 곳에 거한다.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나는 안다.
오늘도 그 은혜와 영광을 누리는 기쁨이여 영원하라. 아멘.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결말은 곧 기쁨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기쁨의 신학입니다.
아니 기쁨 그 자체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하며 받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잠시이지만, 그 나라의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의 사람들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누릴 기쁨은 수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나의 남은 사명은 바로 하늘의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기쁨이 땅의 고통을 넉넉히 삼키고 수용하여 항상 기뻐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그런 영생의 맛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 모인 영생의 공동체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그것이 제가 누리는 기쁨이요 주님의 기쁨입니다.
오늘도 주의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영광과 함께 주님의 품안에서 안식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