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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족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며 사람의 시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메시지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동네에는 한 달이 넘도록 장례식이 이어졌다.
온 마을이 상가(喪家)였다.
나, 백살까지 살려구요
2학년 4반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 씨 이야기
나 대신 이모(수녀인 건우 이모)가 들어가서 건우를 보고 나와서는,
누워 있는 내 손을 잡으며 '이건 건우 만진 손이야'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건 건우 이마에 입 맞춘 입이야'
하면서 제게 건우의 온기를 전해주더라고요.
죽은 뒤 지킨 딸의 약속, 아빠와 함께한 하늘여행
2학년 1반 유미지 학생의 아버지 유해종 씨 이야기
"미지가 나하고 농담을 잘해.
생전에 나랑 팔짱 끼고 드러누워서 '아빠, 이 다음에 내가 아빠 비행기 태워줄게'했어.
그 말 많이 하잖아.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한 200번(시신수습순서) 전까지는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거야.
그 뒤부터는 훼손이 많이 돼서 바로 바로 올라가야 하니까 헬리콥터를 타고 간 거야.
근데 미지가 나왔는데 그 생각이 딱 나는 거야. 헬리콥터를 딱 탔는데.
아유,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 비행기를 태워주는구나.
내가 왜 연관을 거기다 지었는지, 그러면 안 되는건데, 그때 딱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
봐봐, 먼저 나왔으면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건데 늦게 올라와갖고 헬리콥터 탄 거,
그것도 비행기잖아. 그죠?
그때 울음이 나더라고 헬리콥터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관 옆에서 울었어.
와,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도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을까."
진도에서 왜 울고만 있었을까
2학년 3반 신승희 학생의 어머니 전민주 씨 이야기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서 생존자 명단을 확인했는데 승희가 없어요.
도착해서 한시간쯤 지나니까 그 명단이 전부래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마치 전쟁통 같았죠.
(사고 나기 한달 전, 천안함 4주기를 추모하는 '나라 사랑 대회'에서 승희가 입상한 시)
항해
-신승희
어느 고요한 밤
잔잔한 바다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
계속
콕, 콕 찌른다.
그 아픔에
우리의 눈물이 비가 되어
잔잔한 바다와
뒤섞인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영원히
함께 항해하리.
세상에 딸하고 나, 둘만 남겨졌는듸 그 아이를 잃었어유
2학년 3반 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 씨 이야기
수학여행 가기 전에 제가 딸에게 100만원을 줬시유.
그랬더니 소연이가 그러더라구유.
"아빠, 이건 주부에게 살림하라고 주는 돈이지 학생이 받을 돈이 아니에요."
"소연아, 수학여행 가서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두 사먹구.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 선물도 사오구. 니 용돈도 하구…"
마음이 그렇게 주고 싶었어유. 모르겠어요. 제가 왜 그렸는지.
이렇게 마지막이 되려고 그랬나벼유.(울음)
딸이 그래유.
"아빠, 돈을 아껴야지. 나 대학 가려면 등록금이랑 많이 들잖아요. 이렇게 쓰면 저 대학 못 가요."
나중에 딸 물건 정리하면서 서랍을 열어보니 조금밖에 안 가져가고 그대로 있더라구요.
그걸 보고 무지 울었어유. 다 가져가지.
그 돈을 다 태워주었어유.
엄마하고 나하고는 연결되어 있잖아, 그래서 아픈 거야
2학년 6반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 씨 이야기
아빠가 애 입힌다고 옷 넣은 배낭을 항상 들고 다녔는데
배에 사람이 하도 많고 우왕좌왕하다 보니까 그때 배낭을 놓고 내려버렸어요.
팽목항에서 그 배를 찾으려고 돌아다녀봤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담배 피우면서 애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이놈의 새끼가 갔나봐… 추워서 옷을 입었나봐… 진짜 갔나봐…"
(호성이가 쓴 시)
나무
-신호성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맨날 잔소리해서 가깝게 못 지낸 게 제일 후회스럽지
2학년 5반 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 씨 이야기
어쨌든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지만 내가 끝장을 봐야해, 내가 결과를 내야해 그런 생각은 아니에요.
전에는 저쪽 길로 갔다면 지금은 방향을 틀어서 이 길로 가는건데, 그냥 끝까지 갈 뿐이지요.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 길 가다보면 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 난 뒤에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 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 사람들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면 되니까.
대통령과의 5분간의 통화 그리고 헤어릴 수 없는 긴 고통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 씨 이야기
근데 빨간 아이다스 운동복, 키 160으로 되어 있는데 그 종이가 나를 부르더라고,
렌즈를 줌으로 쑥, 당기면 미끄러지듯이 따라오는 그런 모습으로 오는 게 아니라
'쿵! 쿵! 쿵!' 그렇게 점점 다가오는거야.
진상규명은 우리 아들이 내준 숙제인데 안 할 수 없잖아요
2학년 4반 박수현 학생의 아버지 박종대 씨 이야기
"감정적으로 굴어선 안 될 때다."
"나, 우리 아들 사랑한 만큼만 나댈 거다."
엄마 없는 세상을 살아갈 딸을 걱정했는데 딸을 먼저 보냈어요
2학년 2반 길채원 학생의 어머니 허영무 씨 이야기
슬픔 속에서도 어머니는 한걸음씩 내딛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는 슬픔을 멈추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내 마음을 자꾸 키워가려고 해요
2학년 7반 이준우 학생의 어머니 장순복 씨 이야기
…내가 보니까 속옷도 내 아들이고 가슴 밑에 점 있는 것도 나랑 똑같고 딱 내 아들인거야.
나는 맨날 애들 팬티를 빨았고 준우 목욕할 때 등도 밀어줘서 아는 거죠.
준우 엄지랑 검지는 없어졌지만 나머지 손가락은 내가 잘라준 손톱모양이었어…
하늘이 통곡하는 듯했어…
진도에 빈 자리가 많아지니 더 못 떠나겠더라고요
2학년 9반 임세희 학생의 아버지 임종호 씨 이야기
실종자 가족들은 배를 타도 실내에 안 들어가요.
땡볕에도 밖에 있어요.
비바람이 치면 배 처마 밑에 서있고.
물안개 날려도 그냥 서 있어요.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
2학년 10반 김다영 학생의 아버지 김현동 씨 이야기
그런데 다영이가 다른 아이 명찰을 달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런거냐고 물었더니 명찰이 옆에 있기에 달아놨다고 했어요.
배 어디서 꺼내왔냐고 물었을 때도 처음엔 배 옆에서 떠다니는 아이를 건져왔다고 하더니
나중엔 배 4층 선미에서 찾았다면서 말이 바뀌었어요.
다른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된 시간에 감사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갈 시간을 바라며
2학년 8반 김제훈 학생의 어머니 이지연 씨 이야기
제훈이는 사고 후 8일 째에, 그러니까 23일에 138번째로 나왔어요.
(제훈이가 쓴 천안함 추모시)
-김제훈
빨간색으로 노을진
백령도 바다
구슬피 파도치는
슬픔의 바다
용감한 영혼들이
정처없이 떠도는 곳
북풍의 바람에
꺾어진 하얀 꽃
바다에서 떠내려왔네
하얀꽃이 되어 돌아왔네
우리의 가슴속에
눈물이 되어 돌아왔네
(실종자 9명)
아직 4월 16일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야 겨우, 304명이 희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8시 52분. "배가 침몰하고 있어요." 최초 신고가 있은 후, 배에서 나온 방송은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불안을 달래며 서로를 응원했다.
9시 36분. "살아서 만나자!" 연안경비정 123함정이 도착했다. 구명조끼를 챙겨주며 아이들은 구조를 기다렸다.
10시 17분. "지금 더 기울어…" 구조는 없었다. "난 꿈이 있다고!" 국가는 그 꿈들을 버렸다.
이 시간들은 아직 하나의 기억이 되어 묻힐 수 없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죽어야 했느냐고 묻는 희생자들에게 건넬 대답을 구하기 전까지 4월 16일은 지속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11시 1분, '학생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방송으로 퍼져나갔다.
17시 15분, 대통령이 중대본에 모습을 드러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왜 못 구하냐고.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혀 수장된 그때.
이미 구조되어 어딘가에 흩어져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던 부모들은 번호가 붙어 돌아온 죽은 아이를 만나야 했다.
마지막에 남는 한 사람이 될까 하는 두려움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피할 수 있고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인데 미안해하는 책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언론과,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정보경찰은 있었으나,
아무도 상황에 대한 신중하고 신속한 정보를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았다.
침몰의 원인을 되짗기 위한 항적도도 완성되지 않았고,
교묘하게도 침몰 시점에 즈음해 멎은 각종 기록장치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이제 밝혀야 할 진실도 물어야 할 책임도 더는 없는 듯 세상이 굴러간다.
그러나 4월 16일은 떠나온 과거가 아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미루고 미뤘던 책이야
사고 이후에도 관련 이야기들을 볼 자신이 없어서 피해다녔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세월호는 꼭 유가족분들만의 일이 아닌 거 같은거야
'내 나라에서 일어난 내 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저렇게 생각하니까 비로소 마주할 용기가 생기더라
내가 지난 4월 11일하고 18일 광화문에 다녀오고 느낀건
언론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자식이 죽었는데 싸워야하는 상대가 정부라니, 너무 서럽다
언론을 통해 본 것과 현장에서 직접 본 것들은
아주 많이 다르더라
그냥 다른 세상이더라
'우리 아이가 며칠에 몇 번째로 나왔어요'
'장례식을 하려고 진도 체육관을 떠나면서 축하를 받았어요'
죽은 자식을 찾았다고 축하를 받다니
참 기가 차
나는 여전히 내가 뭘 해야하는지를 모르겠어
싸워야하는 상대는 너무 단단하고 강해보여서 겁이 나기도 해
그런데
겁 먹은 채로 끝까지 가보려고
실종자도 다 찾아야되고
'왜'로 시작하는 수많은 질문들에
속시원하게 답변이 되는 것들이 왜 없는건지
책을 읽어보면 진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어
얼마나 답답하게 일처리들이 되었는지
당시 언론에서 우리가 본 것들이 얼마나 거짓투성이었는지
여시도 언젠가는 책을 마주하길 바라며
문제시 세월호 리본 공구 총대함.
첫댓글 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안산여시인데 처음 분향소 설치된곳과도 가까운곳에 살아서 버스타고 왔다갔다하면서 안산을 보는데 진짜 버스안에서 몇번을 울었는지몰라 9월까지도 계속 눈물이나더라.. 처음에는 그냥 안산사는 주민들이 나와서 분향소를 바라보며 울고 시간이 조금 지나니 전국에서 추모를 위해 몰려들고 그러다 시간이 더 많이지나서 분향소도 다른곳에 설치되고 남들이 이 사건에 대해 잊어갈때에도 안산은 서명도 받고 노란리본은 항상 걸려있었어.. 어디 나갔다 오는데 돌아오는길에 유가족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타고다니는 버스에 그 아이들이 무사히 타있을수도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참 아프다
잊지않을께요...
너무 무서워서 내가 자꾸 피한거 같다..가슴이아프다.. 힘내야지. 나도 세월호에 탈 수있는 사람이니까...
난 지금도 가방에 리본달고 뱃지달고 팔찌도 차... 이제 없으면 허전해
다들 내 가족같고 그래... 마음이 너무 아파
다들 잊지 말아줬음 하는데...
다시 읽어보는데도 가슴이 아프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노님들인데... 아직 산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아이들이였는데... 이 슬픔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어서 슬픔이 배가 되는 것 같아
올려줘서고마워 여시야..
나 산지 꽤 됐는데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어 ㅠㅠ 휴우 읽어야 하는데 ㅠㅠ
..잊고지내서 미안해 ... 올려줘서 고마워 여시야
어떻게 그만해....뭐 해결된게있어야 그만두는거지. 아직 진상조사도, 해결도 안됐는데 뭘 그만둬? 이제 시작이지.
잊지않고 기억하고 끝까지 함께할거야
3번쨰 글읽다가 나왓어......마음이 찢어질것 같다......글써줘서 고마워 잊지 않게 해줘서
나도 책 읽었는데 진짜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몰라. 잊지말자 우리
미안해...
나도 두 번째 글 읽다가 글 내렸다 못 읽겠어서, 다음에 책 사서 혼자일 때 읽어보려구 너무 잊고 살았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