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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숲해설가광주전남협회
 
 
 
카페 게시글
♤ 숲에서 스크랩 화순 만연사
숲향기(박향) 추천 0 조회 214 05.11.13 00: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전남대학교 암센터에 "암" 선고를 받고 치료중인 지인들을 병문안하고

돌아오는길에 만연사에 들렀다. 

 

만연사는 고려 희종 4년(1208)에 만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무등의 주봉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다가 만연산 중턱에 이르러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가고자

앉은 사이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을꾸었다.

잠을 깨서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백색인데 신기하게도

선사가 누운 자리 주변만 녹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그 길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를 하다가 만연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6.25 이전까지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승당, 선당, 동상실, 서상실, 동병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등  3전 8방과 대웅전 앞의 큰설루, 설루 아래 사천왕문과 삼청각이 있던 대찰이었다.

또 부속암자로는 학당암, 침계암, 동림암, 연혈암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1978년 이후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가 복원되었고

암자로는 선정암과 성주암이 있다.

 

경내에는 1783년에 제작된 도 지정 문화재 제185호로 괘불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젊은 시절

부친이 화순현감으로 부임하던 때에 만연사 동림암에 거쳐한 적이 있으며 국창 임방울 선생이

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이 곳을 찾아 피나는 연습을 하였던 곳이기도하다.

 

 

만연사라는 이정표를 보고 들어서는 길목에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느티나무가 한그루 버티고 서 있다.

적어도 2-300년은 되어 보임직한 느티나무인데

이 나무때문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편도 1차선인 도로에 이부분만 4차선 넓이의 공간을 확보하여 두었다.

 

어느 마을어귀에서나 흔히 볼수있는 나무이긴하지만

수형이 잘생기고 가지 뻗음도 균형을 이룬것이 참 멋져보인다

 

만연사이정표가 나타나기전 다산정약용선생독서기비 먼저 눈에띈다.

 

 

 

 “전라도 화순읍의 북쪽 5리에 만연사(萬淵寺)가 있고 만연사의 동쪽에 조용하게 도를 닦는 

사원이 있고 거기에는 불경(佛經)을 강설하는 스님이 살았으니 동림사라는 절이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화순현감으로 발령받아 다산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1778년 무렵으로 다산의 나이 16~17세 때의 일입니다.

위의 인용문이 들어있는 글이 <동림사 독서기>(東林寺 讀書記)라는 소년시절의 글이고 

<독서 동림사>라는 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17세의 소년 다산과 21세의 정약전 형제는 눈 내리는 겨울에 40여일동안 그곳 절에서 

독서를 하며 젊은 날의 꿈을 키웠습니다. 

아우 다산은 <맹자>(孟子)를 읽고 형은 <서경>(書經)을 읽으면서 

동양의 이상사회인 요순(堯舜)시대를 만들자는 욕구를 토로 했노라는 글이 전해집니다.


“옛날 무술년(1778년) 겨울 아버지께서 화순현감으로 계실 때 나와 형님은 동림사에서 

책을 읽었는데, 40여일 만에 <맹자>를 완독했다. 미묘한 말과 뜻에 허락해 주심이 많았다. 

얼음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며 눈 내리는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순군민(堯舜君民)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동림사도 사라졌고, 그 옛날의 절터는 밭으로 변해 있을 뿐입니다. 

세월의 흐름을 탓할 수는 없다 해도,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 사라짐이 매우 안타까웠으나, 

다행히도 몇 년 전, 화순 출신 강동원(姜東遠)박사의 후원으로 ‘동림사 독서기’라는 원문과 

역문을 새긴 ‘다산 정약용 선생 동림사 독서기비’가 절터의 곁 길가에 세워졌습니다.

아마 개인의 힘으로 다산의 유적지를 알리는 비를 세우기는 그 일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 글의 번역과 내력을 적는 일을 담당했던 저로서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선생 독서기비 옆면에 한자로 뒷면에 한글로 씌여있는 내용이다.

전반부는 다산의 글이고, 후반부는 기념비 건립을 추진한 박석무님의 글인 것 같다.

 

드디어 만연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누가 숲해설가 아니랄까봐 800년 되었다는 전나무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길목을 들어서서는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은 뒤로하고 전나무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만연폭포 가는길을 공사하느라 일주문 입구부터 공사자재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웅전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제비꽃이 낙엽에 쌓인채  보랏빛을 꽃망울을 터뜨렸고

 

 

 

약수터 한 귀퉁이 바위앞에는 개망초꽃이 앙증스럽게 피어있었다.

 

 

범종각을 바라보며 전나무를 바라보니 그 높이가 거의 일치한다. 

 

 

뇌종양수술을 한 중학교 1학년 아이와

말기 위암 판정을 받고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선배님을 보고와서인지

명부전 앞 느티나무 줄기를 감고오르는 담쟁이 이파리를 본 순간

쌩뚱맞게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오른다.

 

"이 세상 사람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성불하지 않은 이가 있다면 나 또한 부처가 되지않으리라"

하는 서원을 세워 석가 입멸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56억7천만년 동안을 줄곧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제도하겠다 하여 여태 "부처"라 불리지 않고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존숭되시는 "지장보살" 을 본존으로 삼는 "명부전"

 

모진 비바람에도 결코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잎새" 걸작을 남긴 무명화가 베어만도

또 한 분의 지장보살이 아닐까...

 

 

요사채 뒷편 감나무 아래 외롭게 앉아있는 노인네가 "까치밥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구..." 하면서 꾸짖는 듯 감나무를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리신다. 

 

 

다시 한 번 그 전나무를  바라보고 아쉬움을 남긴채 절밖을 나섰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들를것을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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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11.14 10:38

    첫댓글 박향선생님, 안녕하싲ㄴ지요? 뵙고 싶군요. 뵌지 오래되었지요? 안부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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