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문 관(無 門 關)
* 무문관(無門關)에 대한 槪要 *
무문관은 중국 남송의 선승인 무문 혜개(無門慧開)가 48개의 화두를 모아 엮은 불서로,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과 함께 선종의 대표적인 책이며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고도 합니다. 48개의 화두(話頭)를 모아 엮은 이 책에는 본칙(本則)과 무문 스님이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48개의 화두 모두에 평창(平唱)과 송(頌)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특히 맨 처음 나오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는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평생을 씨름하는 화두의 하나로 유명합니다.그런데 여기에 담겨 있는 화두들은 무문 스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조사(祖師) 스님네들로부터 내려오던 고칙(古則)이며 무문 스님도 '조주무자' 화두를 받아 대오(大悟) 하는데 6년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무문 스님이 깨쳤던 그 상황은 [중집속전동록]에 잘 남아 있는데 무문 스님이 어느 날 제(齊)를 알리는 큰 북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고 하며 이 때의 상황이 "청천백일에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雷聲)이 울렸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조심할 것은 큰 북소리에 깨달음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무문 스님의 수행이 이미 무르익어 있었으며 단지 큰 북소리와 더불어 깨달음이 열렸을 뿐입니다. 이후 스님은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제자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알맞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화두들을 부과해 수행시켜 오다가 그것들이 어느덧 48개나 쌓이게 되자 1228년 남송(南宋) 이종황제(理宗皇帝)의 즉위를 기념하여 이들을 한데 모아 선 수행의 지침서로서 [무문관]을 엮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무문관은 첫 번째 '조주무자'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나머지 47칙은 모두 이 '조주무자'를 철저히 투과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주무자에서 무문은 '無'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 부르고, 이 일관을 뚫고 나아가면 몸소 조주로 모실 뿐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더불어 견문을 나누는 즐거움을 같이 하게 된다고 합니다.
조주의 '無'는 유무의 분별을 끊은 절대적 '무’를 가리키며. 깨달음의 절대 경지를‘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무문관에는 이 ‘무자(無字)’의 탐구가 전편에 깔려 있습니다
무문 선사 서문(序文)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宗)을 삼고 문 없음으로 법문(法門)을 삼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문이 없다면 어떻게 사무칠 것인가? 허나 부처님께서는 또한 "문으로 든 이는 이 집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니, 반연(攀緣)을 따라 얻은 이는 시작과 마침이 있고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다."라고 이르시지 않았던가.이렇게 말한 것도 바람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요, 성한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과 같다. 하물며 말이나 글구를 헤아려 찾으려는 것은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때리려 하는 것과 같고, 옴에 걸려 가려운 발가락을 구두를 신고 긁는 것과 같으니, 무슨 교섭(交涉)이 있으랴. 혜개(慧開, 무문 선사 자신)는 소정(紹定) 무자년(戊子年) 여름에 동가(東嘉)의 용상사(龍翔寺)라는 절 수좌(首座) 자리에 앉아 옛 선지식들의 공안(公案)을 두드리는 와자(瓦子)가 되어 법을 물어 오는 납자(衲子)들을 인도하였다. 이것들을 간추려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집성(集成)이 되었다.
처음부터 앞뒤 순서를 두지 않고 엮어 48칙이 되니 이를 무문관(無門關)이라고 이름한다. 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한 이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하면 팔이 8개 붙은 나타의 힘으로도 막아 낼 재간이 없을 것이고, 서천(西天)의 47조사와 동토(東土)의 23조사들까지도 목숨을 빌게 될 것이나 주저하기만 하다가는 窓을 통하여 말이 달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아 눈 깜빡할 사이에 어긋나 버릴 것이다.
大道無門 대도(大道)는 문(門)이 없다 千差有路 천차만별로 길이 있으나 透得此關 이 관(關)을 꿰뚫어 얻으면 乾坤獨步 하늘 땅에 홀로 걸으리라.
禪宗無門關
佛語心 爲宗 無門 爲法門 旣是無門 且作磨生透 豈不見道 從門入者 不是家 珍 從緣得者 始終成壞 恁마說話 大似無風起浪 好肉완瘡 何況滯言句 覓解會 掉捧打月 隔靴爬痒 有甚交涉 慧開 紹定戊子夏 首衆于東嘉龍翔 因衲子請益 遂將古人公案 作鼓門瓦子 隨機引道學者 竟爾抄錄 不覺成集 初不以前後서 列 共成四十八則 通曰無門關 若是箇漢不顧危亡 單刀直入 八臂那타 란他不 住 縱使西天四七 東土二三 只得望風乞命 設惑躊躇 也似隔窓看馬騎 貶得眼
來 早己蹉過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무자(無字)]
趙州和尙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조주화상 인승문 구자환유불성야무 주운 무
조주스님에게 어느 스님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 대답했다. "無!(없다)"
[평창(評唱)]
無門曰,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 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字, 乃宗 무문왈, 참선 수투조사관 묘오 요궁심노절 조관불투 심로부절 진시의초 부목정영 차도 여하시조사관 지자일개무자 내종 門一關也. 遂目之曰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 把手共行, 眉毛시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문일관야 수목지왈선종무문관 투득과자 비단친견조주 변가여역대조사 파수공행 미모시결 동일안견 동일이문 기불경쾌 莫有要透關底마.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시.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箇熱鐵 막유요투관저마 장삼백육십골절 팔만사천호규 통신기개의단 참개무자 주야제시 막작허무회 막작허무회 여탄요개열철 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 환상사 토우토불출 탕진종전악지악각 구구순숙 자연내외 타성일편 여아자득몽 지허자지 맥연타발 경천동지 여탈득관 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且作마生提시.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 장군대도입수 봉불살조 봉조살조 어생사안두 득대자재 향육도사생중 유희삼매 차작마생제시 진평생기력 거개무자 약 不間斷, 好似法燭 一點便著. 불간단 호사법촉 일점변착
무문스님이 이르되 선을 참구함에 있어 옛 조사들이 세워놓은 장벽을 뚫어야 한다. 오도(悟道)하려고 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차별심을 버려야 한다. 그 장벽을 뚫지 않고 차별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가 초목에 숨어 나타나곤 하는 귀신들이다. 자, 말해봐라 무엇이 선의 장벽인지, 바로 이 "無" 공안이 선의 장벽이다. 그래서 이것을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칭한다. 이 장벽을 넘어선 사람은 조주를 명확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대 조사들과 손을 잡고 같이 동행할 것이고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보게 될 것이다. 같은 눈으로 보게 되고 같은 귀로 듣게 될 것이다. 어찌 경쾌한 일이 아니요! 그 장벽을 뛰어넘어 보지 않겠는가? 너희들이 360개 골절과 84.000 털구멍, 그리고 온몸으로 의심을 일으켜 이 무자(無字)에 참구하여라. 주야로 열심히 공부해라. 허무한 생각이나 차별심을 일으키지 마라. 이는 마치 하나의 작열하는 쇠구슬을 급히 삼킨 것 같느니라. 토하려 해도 토할 수 없다. 여태까지 쌓아둔 모든 지식과 생각을 다 버리고 더울 열심히 참구하라. 어느 시간이 지나면 결실이 맺혀질 것이고 자역적으로 내외(內外)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 마치 놀란 사람, 좋은 꿈을 꾼 사람과 같으리라.
앎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앎이니라. 돌연히 그 장벽을 뚫고 나가게 될 것이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진동시키니, 삶과 죽음을 넘어서 큰 자유를 얻어 육도(六道) 사생(四生) 가운데에 즐거운 삶을 누리리라. 평생의 힘을 총 동원하여 무자(無字)에 참구하고 무(無)와 하나가 되어라. 만약 중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계속 투쟁하면 어둠이 즉시 걷히고 법의 촛불이 켜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송(頌)]
頌曰. 狗子佛性, 全提正令, 재涉有無, 喪身失命 송왈, 구자불설 전제적령 재섭유무 상신실명
개의 불성,
불타의 바른 명령을 전체 드러냈다. 유무(有無) 분별로 건너려 하면 어느새 목숨만 잃고 말리.
[蛇足]
이 화두의 핵심은 경전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라고 할 때의 '없다'라는데 걸리면 이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유(有) 무(無)를 초월할 것인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체득할 일입니다. 사실 조주 스님은 불성(佛性) 자체에 관한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본인도 우주도 '무(無)'와 일체가 되어 물음을 던진 스님 앞에 그 답을 내던진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부처님게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개라고 할지라도 불성이 있는 것이나 조주 스님은 어떤 스님의 질문에는 "무(無)!"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은 다른 스님이 똑같이 물었는데 이때는 "유(有)!"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유'와 '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뜻의 유나 무가 아닌 것이며 팔만사천의 법문을 다 뒤져보아도 이에 대한 견해는 걸코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체득해야만 조주 스님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제2칙 [백장야호(百丈野狐)/백장과 여우]
百丈和尙凡參次 有一老子 常隨衆聽法 衆人退 老人亦退 忽一日不退 師遂問 面前立者, 復是何人. 老人云, 諾. 某甲非人也. 백장화상범참차 유일노자 상수중청법 중인퇴 노인역퇴 홀일일불퇴 사수문 면전입자 부시하인 노인운 낙 모갑비인야 於過去迦葉佛時, 曾住此山. 因學人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某甲對云, 不落因果. 五百生墮野狐身. 今請和尙代一轉語, 어가거가섭불시에 증주차산 인학인문 대수행저인 환락인과야무 모갑대운 불락인과 오백생타야호신 금청화상대일전어 貴脫野狐. 遂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師云, 不昧因果. 老人於言下大悟. 作禮云, 某甲已脫野狐身, 住在山後. 敢告和尙, 귀탈야호 수문 대수행저인 환락인과야무 사운 불매인과 노인어언하 대오 작례운 모갑이탈 야호신 주재산후 감고화상 乞亡僧事例. 師令維那 白槌告衆, 食後送亡僧. 大衆言議, 一衆皆安, 涅槃堂 又無人病, 何故如是. 食後只見師領衆, 至山後巖下, 걸망승사례 사령유나 백추고중 식후송망승 대중언의 일중개안 열반당 우무인병 하고여시 식후지견사령중 지산후암하 以杖挑出 一死野狐, 乃依火葬. 師至晩上堂, 擧前因緣. 黃蘗便問, 古人錯祇對一轉語, 墮五百生野狐身. 轉轉不錯, 合作箇甚마 이장도출 일사야호 내의화장 사지만상당 거전인연 황벽변문 고인착지대일전어 타오백생야호신 전전불착 합작개심마 師云, 近前來, 與伊道. 黃蘗遂近前, 與師一掌. 師拍手笑云, 將謂胡鬚赤, 更有赤鬚胡. 사운 근전래 여이도 황벽수근전 여사일장 사박수소운 장위호수적 경유적수호
백장 회해 선사께서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와서 늘 대중들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대중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더니 어느 날은 설법이 끝나 대중이 다 물러갔는데도 그 노인만은 남아 서 있었다. 백장 선사께서 이상히 여겨 누구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노인 말이 "저는 사람이 아니옵니다. 옛날 가섭불(迦葉佛) 당시에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學人)이 '대수행인(大修行人)은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오백생(五百生)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으니 선사께서 한 말씀으로 이 여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이 때 백장 선사께서 "인과에 매(昧)하지 않느니라."라고 가르치시자 노인이 그 말끝에 대오(大悟)하여 인사하고 "제가 이미 벗어 버린 여우의 몸이 뒷산에 있을 것이오니 스님께서 죽은 승(僧)같이 장례를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백장 선사께서 유나(維那)를 시켜 식후에 죽은 스님네 장례가 있다고 대중에게 고하게 하시니 모두 평안하여 열반당(涅槃堂)에 한 사람의 병자도 없었는데 어째서 죽은 스님네 장례가 있다고 하느냐고 대중이 수근대었다. 식후에 백장 선사께서 대중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를 끄집어 내어 화장(火葬)을 하셨다. 백장 선사께서 저녁에 법당에 나와 앞의 인연을 이야기하셨다. 이 때 황벽(黃蘗) 스님이 일어나서 "고인(古人)이 잘못 대답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는데 만약 잘못 대답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까요?" 하니 백장 선사께서 "앞으로 가까이 오라. 그대를 위해 가르쳐 주리라." 하셨다. 황벽이 가까이 나아가자마자 백장 선사의 뺨을 한 대 후려치자 백장 선사께서 박수를 치고 웃으시며 "과연 그렇구나.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더니 붉은 수염 오랑캐가 있구나."라고 하셨다.
[評唱]
無門曰, 不落因果, 爲甚墮野狐. 不昧因果, 爲甚脫野狐. 若向者裡 著得一隻眼, 便知得前百丈 영得風流 五百生 무문왈, 불락인과 위심타야호 불매인과 위심탈야호 약향자리 착득일척안 변지득전백장 영득풍류 오백생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여우 몸이 되었으며 인과에 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여우 몸을 벗어났을까. 만약 여기에 대해 외눈(一隻眼)을 얻었다면 문득 전 백장의 오백생 여우 생활이 도리어 풍류(風流)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頌]
頌曰. 不落不昧, 兩采一賽, 不昧不落, 千錯萬錯. 송왈, 불락불매 양채일새 불매불락 천착만착
불락(不落) 불매(不昧)는 한번의 승부로 두번의 승리. 불매라고 해도 불락이라고 해도 모두 다 틀린다.
[蛇足]
백장선사와 노인(여우)이 말한 인과란 삼세인과(三世因果), 즉 우리들이 금생에 가지고 있는 상태는 전생에서 행한 업인(業因)에 의한 결과(果)요, 금생에 짓는 바는 내생에 인(因)이 된다는 말이다. 즉, 노인(여우)은 "공부를 많이 해서 도를 닦은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때문에 오백생동안 여우가 되었다. 그런데, 노인(여우)가 눈물을 흘리며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 까닭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여우의 몸이 되었을때는 어떻고, 여우를 벗어났을 때는 어떨까? 만약 여우가 여우의 몸을 벗어났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 개가 될것인가. 말이 될것인가...
사람이 사람에 만족 못하면 그때가 여우이고, 만족할 때 만족 못하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것이 아니겠는가... 즉, 사물에 열중하여 그 사물과 한 몸이 되어 딴 마음을 갖지 않을 때에 완전한 자아를 발견한다. 불법은 자아를 배우는 것이다. 자아를 배운다는 것은 자아를 잊는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를 잊을 때 전 우주가 자아 아님이 없다. 그래서 선의 요점은 일단 나를 "무(無)"로 돌리는 것이다. 무와 한 몸이 될 때 "도처위주(到處爲主)"로서 천하를 주름잡게 된다. 그리고 또한가지 살펴볼 부분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인과에 매(昧)하지 않는다"는 이 두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선은 문자나 언구에 얽매여서는 아니 된다. 얽매이면 부자유스럽다. 말에 얽매어 어느 쪽 말이 정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닌가!!! 이는 결국 중심점이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심점이란 바로 "무자(無字)"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벽스님은 왜 가르쳐 준다는 스승인 백장스님의 빰을 때린 것일까? 그리고 백장스님은 왜 화를 내를 않고 오히려 칭찬을 했을까? 여기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와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이것은 수행자의 실력에 맡겨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백 명의 대중 가운데서 황벽만이 알아차렸던 것이다. 뺨을 힘차게 때릴 때 스승인 백장스님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는 천지 일체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제3칙 [구지수지(俱?竪指)/구지의 손가락]
俱지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수指頭 지聞 遂以刀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구지화상 범유힐문 유학일지 후유동자 인외인간 화상설화법요 호자역수지두 지문 수이도단기지 동자이통호곡이거 지復召之 童子廻首 지却수起指 童子忽然領悟 지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受用不盡 言訖示滅 지부소지 동자회수 지각수기지 동자홀연영오 지장순세 위중왈 오득천용일지두선 일생수용부진 언흘시멸
구지 화상은 누가 와서 법을 물으면 언제나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화상의 처소에 한 동자가 있었다. 한번은 구지 화상이 출타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다.
"화상께서 어떻게 법을 설하시던가?" 동자는 구지스님의 흉내를 내어 말없이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뒤에 구지스님이 이 말을 듣고 동자의 손가락을 칼로 잘라 버렸다. 동자는 아파서 울고 나갔다. 구지스님이 다시 "동자야" 하고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번엔 구지스님이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를 본 순간 동자는 홀연히 깨우쳤다.구지스님이 열반에 들 즈음에 문하의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룡(天龍) 선사(禪師)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은 후로 평생을 쓰고도 다 쓰지 못하였다." 말을 마치자 멸도(滅道)에 들었다.
[評唱]
無門曰, 俱지竝童子 悟處不在指頭上 若向者裡見得 天龍同俱지竝童子 與自己 一串穿却 무문왈, 구지병동자 오처부재지두상 약향자리견득 천용동구지병동자 여자기 일관천각
무문스님이 평하기를, 구지도 동자도 그 깨달음은 손가락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안다면 천룡도 구지도 동자도 그대 자신도 다 한 꼬챙이에 꿰는 것이 된다.
[頌]
頌曰. 俱지鈍置老天龍 利刃單提勘小童 巨靈대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 송왈, 구지둔치노천룡 이인단제감소동 거령대수무다자 분파화산천만중
구지는 스승인 천룡을 바보라 하고 예리한 칼로 동자를 시험했다. 거령(巨靈神)이 별 조작도 없이 손을 들어 화산의 천만겁을 나눈 것처럼.
[蛇足]
구지스님은 "구지불모다라니"를 평소에 읽었기 때문에 구지라는 별명이 본명이 되었던 스님이시다. 구지스님은 천룡스님이 아무 말없이 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그후 구지스님은 누가 무엇을 물어도 손가락만을 번쩍 들어 보일뿐이었다. 즉, "오늘은 매우 덥습니다" 해도 손가락을 들고, "불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해도 손가락을 들고, "부처가 무엇입니까?" 해도 손가락을 들었다. 그래서 천지간에는 손가락 하나밖에 없는 구지스님이었다.도대체 구지스님의 손가락이 무엇이기에. 그리고 누구나 손가락 하나 들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손가락 하나 들 때, 천지와 내가 하나일 때, 그렇게 값싼 손가락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천룡스님이나 구지스님, 그리고 동자의 손가락을 드는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손가락을 들 때 그와 자기가 한 몸이 되는 경지를 말한다. 즉 손가락을 들 때 손가락 든다는 것도 없고 자기도 없을 때 일체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선(禪)에서 입버릇처럼 일상생활이 모두 선의 입장이고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선의 활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선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선 경지에 이르고 보면, 일상의 모든것이 선 입장이 아닌 것이 없다. 구지스님은 열반에 들실때, 대중을 모아놓고 나는 천룡스님이 손가락 드는 것을 보고 깨달은 뒤 그를 일평생 두고 쓰고도 다 못썼다고 하면서 돌아가셨다. 손가락 하나가 천지와 하나이고 보면 천지간에 그로써 더할 나위가 있을 수 없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함은 이런 데서 쓰이는 말이다. 삼라만상이 제각기 펼쳐지고 있지만 모아놓으면 결국은 하나다. 그런데 하나라고 해서 어떤 "일(一)이 있는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하나라는 것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胡子無鬚)/달마에게 수염이 없다]
或庵曰 西天胡子 因甚無鬚 혹암왈 서천호자 인심무수
혹암(或庵) 선사가 말했다. "서천(西天)의 호자(胡子/오랑캐)는 왜 수염이 없는고?"
[評唱]
無門曰 參須實參 悟須實悟 者箇胡子 直須親見 一回始得 說親見 早成兩箇 무문왈 참수실참 오수실오 자개호자 직수친견 일회시득 설친견 조성양개
무문스님이 평하기를, 선 수행은 모름지기 실천적인 참된 수행이 아니면 안되며 깨달음은 반드시 참된 깨달음이 아니면 안된다. (따라서) 이 달마를 직접 반드시 한 번은 직접 친견親見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만일) '친견이라 말한다면 이미 (보여지는 자와 보려는 자) 둘로 나뉘어져 버리고 만다.
[頌]
頌曰. 癡人面前 不可說夢 胡子無鬚 惺惺添몽 송왈 치인면전 불가설몽 호자무수 성성첨몽
바보 앞에서는 꿈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 '수염이 없는 달마' 라는 등 원래 확실한 것은 일부러 애매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
[蛇足]
혹암(或庵)선사(1108-1179)는 혹암사체(或庵師體) 선사를 말한다. 선문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공안집의 하나인 '벽암록(碧巖錄)'의 저자로 유명한 원오극근 선사의 법손이다. 위의 공안에서 서천은 인도를 가리킨 말이다. 중국에서 볼 때 인도는 서쪽이기 때문에 서천이라고 통칭했다. 호자는 오랑캐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달마스님'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달마 스님은 왜 수염이 없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달마 스님의 그림을 보거나 조각을 보면, 달마스님처럼 수염이 많은 사람도 보기 드물다. 이렇게 수염이 많은 달마스님을 가리켜 왜 수염이 없느냐고 물었으니 이를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대체 알고도 모를 일이다. 수염으로 얼굴을 덮다시피 한, 달마스님을 무엇 때문에 수염이 없느냐고 물은 스님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암스님 나름대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 까닭을 알아내야만 혹암스님의 배짱과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선(禪)은 일단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한 데 뭉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 데 뭉친다는 것은 '무(無)'에 돌입해야 한다. '무'에 돌입했을 때 삼라만상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수염이 없는고?" 한 것은, 일단 부정한 것이다. 부정을 다시 부정하면 긍정이 된다는 것은 일반철학에서 하는 말이지만, 선에서는 뭉쳐서 '무'에 돌렸다가 그 '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다시 '유(有)'에 돌아와야 한다. 이 작용을 유즉무(有卽無) 무즉유(無卽有)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킨 말이다. 그러므로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수염이 없다고 하면 없다는 데 걸리고, 있다고 하면 있다는 데 걸리게 마련이다.
선(禪)에서는 자성(自性)이란 말을 쓴다. 이는 스스로의 성품이라는 뜻인데, 우리들의 원래의 본성은 자연스러워서 이를 누가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또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가르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면 자연이 못된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있다면 있다는 데 끌리고, 없다면 없다는 데 얽매이고 해서 제 몸을 자승자박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래서 우리들 사회에는 질투와 중상모략이 난무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중심이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심이란 확고부동한 신념을 뜻한다. 그 신념을 기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선은 개(箇)를 초월하여 이쪽에도 쏠리지 않고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말에 끌리지 말고, 자기 소신대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선(禪)의 힘이다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향엄이 나무에 오르다]
香嚴和尙云, 如人上樹, 口啣樹枝, 手不攀枝, 脚不踏樹. 樹下有人, 問西來意, 不對卽 違他所問, 若對 又喪身失命. 正恁마時, 作 향엄화상운, 여인상수 구함수지 수불반지 각불답수 수하유인 문서래의 부대즉 위타소문 약대 우상신실명 정임마시 작 마生對. 마생대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가 물었다.
"그대가 나무 위에 올라가 손으로 가지를 잡지 않고 발로도 나무를 밟지 않고서 오직 입으로만 나뭇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무 밑에 와서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데, 이때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질문을 외면하는 것이 되고, 만일 대답하고자 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때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評唱]
無門曰, 縱有懸河之辨, 總用不著. 說得一大藏敎, 亦用不著. 若向者裡 對得著, 活却從前 死路頭, 死却從前 活路頭. 其或未然, 直 무문왈, 종유현하지변 총유불착 설득일대장교 역용불착 약향자리 대득착 활각종전 사로두 사각종전 활로두 기혹미연 직
待當來 問彌勒 대당래 문미륵
무문스님이 평하기를, 예를들어 거침없이 흐르는 폭포수같은 유창한 말솜씨도 여기서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또 대장경을 설할 수 있어도 역시 어떤 도움도 못된다. 만약 여기에 딱 들어맞게 대응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 죽어있던 것을 살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것을 죽여버리게 될 것이다. 혹 대응할 수 없다면,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나나타신다는 미륵보살에게 물어보라.
[頌]
頌曰. 香嚴眞杜撰, 惡毒無盡限, 啞却衲僧口, 通身병鬼眼 송왈, 향엄진두찬 악독무진한 아각납승구 통신병귀안
향엄은 참으로 황당무계한 사람 근성 나쁘기 그지없다. 선승의 입을 벙어리로 만들고 온 몸에는 망령의 눈 번뜩거리네.
[蛇足]
향엄스님은 중국 등주의 향엄지한 (香嚴智閑)선사를 말한다. 어릴때 책 읽기를 좋아했고 처음에 백장스님 밑에서 공부하다가 백장스님이 입적하시니 위산스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위산스님은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그의 심안(心眼)을 열어 주려고 하루는 향엄스님을 불러 "난 네가 책을 통해 배운 것을 듣고 싶지 않고, 너의 공부가 무엇이었고, 네 생각이 어떻든 그건 듣고 싶지 않다. 다만 네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나에게 보여라" 라고 말했다. 이에 향엄스님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리 저리 생각하고 책을 뒤져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향엄스님은 위산스님께 답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위산스님이 말하길, "비록 내가 그 답을 네게 준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말이지 너의 답하곤 하등의 관계가 없다" 라고 잘라버렸다. 향엄스님은 크게 실망하고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하는 말이 "그림의 떡이 배고픔을 덜어주지 않는구나" 하고 위산스님의 곁을 떠나 혜충국사의 무덤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돌 하나가 대나무에 날아가 부딪쳐서 '탁' 소리를 냈다. 이때 향엄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번 향엄상수(香嚴上樹)의 화두 역시 양변(兩邊)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답하지 않을 수도 없다" 와 "답하면 죽게된다" 고 하는 이 양변을 뛰어 넘었는가 하는 테스트에 안중을 둔 화두이다. 선에서의 견성(깨달음)의 그 순간은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삶의 양변을 뛰어넘는 순간인 것이다. 즉 좋고 싫고, 높고 낮고, 길고 짧고, 삶과 죽음 등 차별적 견해를 떠난 평등체(중도)에 이르는 것이 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런데 꼭 나무 꼭대기에서만 이러한 난처한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일상생활 가운데 이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사업에 실패하여 궁지에 이르렀을 때 이를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것이 모두 이 공안의 해결이 될 것이다. 즉 공안을 해결하는 힘이 곧 일상생활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무문관 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世尊 昔在靈山會上, 拈花示衆. 是時 衆皆默然, 惟迦葉尊者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세존 석재영산회상 염화시중 시시 중개묵연 유가섭존자 파안미소 세존운, 오유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교외별전 부촉마하가섭
세존께서 옛날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이 때 대중이 모두 그뜻을 몰라 묵묵했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고 하셨다.
[評唱]
無門曰, 黃面 瞿曇, 傍若無人, 壓良爲賤, 懸羊頭 賣狗肉. 將謂多少奇特. 只如當時 大衆都笑, 正法眼藏 作마生傳. 設使迦葉不笑, 正法眼藏 무문왈, 황면 구담 방약무인 압량위천 현야두 매구육 장위다소기특 지여당시 대중도소 정법안장 작마생전 설사가엽불소 정법안장 又作마生傳. 若道正法眼藏有傳授, 黃面老子, 광호閭閻. 若道無傳授, 爲甚마獨許迦葉. 우작마생전 약도정법안장 유전수 황면노자 광호려염 약도무전수 위심마독허가섭
황면의 구담(부처님) 방약무인하여 양을 누르고 천을 삼고, 양두를 걸어 놓고 구육을 파는 격이로다. 더욱 어떤 뾰족한 수나 있는 줄 알았는데..... 다만 당시 대중이 모두 웃었다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만약 가섭이 웃지 않았다면 정법안장을 또 어떻게 전했을까? 그리고 정법안장에 전수할 것이 있다고 하면 황면의 노자 사람들을 속였다고 할 것이고 만약 전수할 것이 없다고 하면 무엇때문에 홀로 가섭에게 허락하였는가.
[頌]
頌曰. 拈起花來, 尾巴已露, 迦葉破顔, 人天罔措 송왈, 염기화래 미파이로 가섭파안 인천망조
꽃을 들어 올렸을 때 불법의 정체 환히 드러났다. 가섭은 그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지만 인간이나 천인은 아무 대꾸도 못했네.
[蛇足]
이 공안은 선종의 기원이자 동시에 선의 생명이다. 선에서는 흔히 이심전심을 말한다. 이는 삼처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삼처전심이란 다자탑전분반좌,영산회상 거염화,사라쌍수곽시쌍부다. 이와 같이 이 공안은 삼처전심 가운데 2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세존께서 가섭의 미소가 자기의 뜻에 계합된다고 하시고, 또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교외별전이 있으니, 이를 부촉한다고 했다. 그러면 정법안장이란 꽃가지를 든 내용이고 열반묘심도 역시 같은 의미인데, 그 내용이 또한 실상무상이다.
실상은 현상계(차별이나 有)이고 무상은 본체(평등이나 無)를 말한 것이로 실상이면서 무상이고 무상이면서 실상, 이를 바꾸어 말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한 것이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점이 우리 일반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해되지 않으니 미묘법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법문은 글자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이치를 캘 수도 없기 때문에 따로 전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즉 이심전심일 뿐인데, 가섭만이 미소 지은 것은 세존이 꽃가지를 든 이유를 알아차렸으므로 가섭에게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의 공안에서 보듯이, 우리들은 깨달음이나 진리를 대단히 어려워서 좀처럼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단지 꽃가지를 들어 보이는 것처럼 쉬울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무 가깝고 쉽기 때문에 도리어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등잔밑이 어둡다' 라는 말이 있다. 밝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어두우니 이를 밝혀 내는 것이 바로 수행이요, 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문관 제7칙 [조주세발(趙州洗鉢)/조주의 발우씻기]
趙州因僧問, 某甲乍入叢林, 乞師指示. 州云, 喫粥了也未. 僧云, 喫粥了也. 州云, 洗鉢盂去. 其僧有省. 조주인승문 모갑사입총림 걸사지시 주운 끽죽요야미 승운 끽죽요야 주운 세발우거 기승유성
조주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총림(선방)에 처음 왔습니다. 잘 지도해 주십시오.” 조주 선사가 말하였다.
“죽을 먹었느냐, 아직 안 먹었느냐?” 스님이 대답했다.
“죽을 먹었습니다.” 조주 선사가 말하였다.
“발우는 씻었겠구나.” 그 말에 그 스님은 깨쳤다.
[評唱]
無門曰, 趙州開口見膽, 露出心肝. 者僧聽事不眞, 喚鐘作甕. 무문왈, 조주개구견담 노출심간 자승청사부진 환종작옹
무문스님이 평하기를, 조주는 입을 벌려 쓸개를 보이고 심장도 보이고 간장도 휜히 드러냈다. 그런데 그 스님은 참된 것은 듣지 못하고 종을 항아리라고 잘못 생각했다.
[頌]
頌曰. 只爲分明極, 현令所得遲, 早知燈是火, 飯熟已多時. 송왈, 지위분명극 현령소득지 조지등시화 반숙이다시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알아보지 못하네 등이 곧 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밥은 이미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
[蛇足]
이 공안은 간단하고 평범하나 禪의 선지(禪旨)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천하의 대진리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위의 공안에서 보듯이 선방에서의 아침은 죽을 먹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아마도 스님이 아침 죽을 먹고 스님을 찾아뵈었던 모양이다. 또한 자신의 발우를 자신이 씻는것은 승가의 기본이며, 또한 일상생활이다. 이렇듯 진리라는것, 깨달음이라는 것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일상생활 가운데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를 체득하는건 그리 쉬운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일체 모든 존재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개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들 일상생활 전부가 깨달음이요, 또한 선의 입장이 아님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죽을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그러면 발우를 씻어라" 이말에 스님이 깨쳤다 함은 자연법이(自然法爾) 그대로를 반영한다. 자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는 道와 천리만리의 거리에 놓이게 된다.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는 말이 모두 자연 그대로를 의미한 말들이다
무문관 제8칙 [奚仲造車(해중조차)]
月庵和尙問僧, 奚仲造車 一百輻, 拈却兩頭, 去却軸. 明甚마邊事. 월암화상문승, 해중조차 일백폭 염각양두 거각축 명심마변사
월암 스님이 한 스님에게 말하였다. “해중이 일백 폭의 수레를 만들었는데 두 바퀴를 떼어내고 축까지 빼버리니 무엇을 밝히려 하는 것인가?”
[評唱]
無門曰, 若也直下明得, 眼似流星, 機如체電. 무문왈, 약야직하명득 안사유성 기여체전
만약 바로 밝혀 얻으면 눈은 유성처럼 재빠르고, 마음은 번개불 번쩍임과 같으리라.
[頌]
頌曰. 機輪轉處, 達者猶迷, 四維上下, 南北東西 송왈, 기륜전처 달자유미 서유상하 남북동서
바퀴가 구르는 곳 도인도 오히려 헤맨다 사유 상하 동서남북 (세상은 넓고도 넓다)
[蛇足]
월암 스님은 대위월암선과선사를 말한다. 무문스님의 師祖다. 해중이란 사람은 수레를 처음 발명한 사람으로 黃帝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우 시대 사람이라고도 하나 그 연대는 확실치 않다. 월암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 해중이 만든수레를 두 바퀴 떼어버리고 축마저 제거해버렸다. 그리곤 왜 그랬냐는 것이다. 수레는 짐을 나르기위항 교통수단이다. 그것을 만든사람이 왜 축을 제거했는가? 대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고약한 월암 스님인가? 아닐것이다. 바퀴가 없고 축이빠진 수레를 일백폭이나 만들 이유도없고 해중이 만든 수레는 사람들이 짐을싣고 잘다니고 있다. 모든공안이 다 그렇듯이 不立文字요 言語道斷이다. 문자의 문맥을 파악하려하면 그곳이 死地다. 수레는 수레의 기능이 있고 천지는 막힘이없다
무문관 제9칙 [大通智勝(대통지승)]
陽陽讓和尙因僧問, 大通智勝佛, 十劫坐道場, 佛法不現前, 不得成佛道時如何. 讓曰, 其問甚諦當. 僧云, 旣是坐道場, 爲甚마不得 흥양양화상인승문, 대통지승불 십겁좌도량 불법불현전 부득성불도시여하 양왈 기문심제당 승운 기시좌도량 위심마부득 成佛道. 讓曰, 爲伊 不成佛. 성불도 양왈 위이 불성불
흥양 양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은 십겁의 오랜 세월을 좌선도량에서 공부하고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 성불을 못했다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양 선사가 말하였다.
“듣고 보니 그렇구나.” 스님이 말하였다.
“이미 도량에 앉았는데 무엇 때문에 불도를 이루지 못했습니까?” 양 선사가 말하였다.
“그가 성불을 못했기 때문이다.”
[評唱]
無門曰,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凡夫若知, 卽是聖人. 聖人若會, 卽是凡夫. 무문왈, 지허노호지 불허노호회 범부약지 즉시성인 성인약회 즉시범부
노호는 다만 깨달음은 허락하거니와 알았다 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범부가 깨달으면 곧 성인이거니와 성인이 알았다 하면 곧 범부이다.
[頌]
頌曰. 了身何似了心休, 了得心兮身不愁, 若也身心俱了了, 神仙何必更封侯. 송왈, 요심하사요심후 요득심혜신불수 약야신심구료료 신선하필경봉후
몸을 가다듬음이 마음 깨침만 하겠는가 마음이 요득하면 몸에 근심 없는 것을 만약 몸과 마음이 더불어 요득하다면 신선이 무엇 하러 고관대작을 찾겠는가
[蛇足]
흥양 양 스님은 백장스님의 오대 법손이며 위앙종을 창설한 앙산의 삼세법손이다. 대통지승불의 얘기는 [법화경]의 "化城喩品"가운데 있다. 대통지승불은 방일하지 않고 끈질기게 공부하는 이로 유명하다. 하지만 마조가 좌선만 하는 것을 보고 남악스님은 기와장을 갈면서 마조를 깨우쳐주는 것처럼 무작정 공부많이 한다고 깨치는것은 아니다.
禪에서는 시공을 초월해있기 때문에 겁이란 별 의미가없다. 그래서 깨침은 시간의 오래가 아니라 끝없는 정진과 시절인연이 있어야된다. 여기서는도 대통지승불에 구애받지말고 깨치고 안 깨치고에도 얽매이지 말고 어휘를 떠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십만팔천리를 벗어나버린다. 이미 부처인데 십겁이나 앉아 있어도 부처가못되는 것은 무슨이유인지를 물으니 양 선사는 성불하지못했기 때문이라고한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인고, 묻는 중의 성급함이 보인다. 수박이 먹고싶다고 설익은 수박을 불위에 올려놓는다고 익을까...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움직이나. 마조는 좌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승을 통해알았다. 선이란 좌선은 일부분이다. 動적이든 靜적이든 語默動靜 行住坐臥 한결같은 수행이 중요하다. 범성의 분별도 놓아야하며 참다운 좌선으로 깨친다면 신선이 따로 없을것이다.
무문관 제10칙 [淸稅孤貧(청세고빈)]
曹山和尙, 因僧問云, 淸稅孤貧, 乞師賑濟. 山云, 稅사梨. 稅應諾. 山曰, 靑原白家酒, 三盞喫了 ' 조상화상 인승문운 청세고빈 걸사진제 산운 세사리 세응락 산왈 청우백가주 삼잔끽료 猶道未沾脣 유도미첨순
조산 스님에게 한 중이 와서 물었다.
“저, 청세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좀 베풀어주십시오” 조산 스님이 그 중을 불렀다.
“세사리야!” 중 청세가 '네"하고 대답하자 조산스님 가로되,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아직 입술도 안 축였다고 하느냐?”
[評唱]
無門曰, 淸稅輸機, 是何心行, 曹山具眼, 深辨來機. 然雖如是, 且道, 那裡是稅사梨 喫酒處. 무문왈, 청세수기 시하심행 조산구안 심변래기 연수여시 차도 나리시세사리 끽주처
무문스님 가로되, 청세의 수기, 이게 무슨심사인고? 조산의 안목이 건너오는 수작을 벌써 간파했다네. 그렇더라도 어디 말해보라. 대체 어디가 청세가 술을 마신 자리인가.
[頌]
頌曰. 貧似范丹, 氣如項羽, 活計雖無, 敢與鬪富 송왈, 빈사범단 기여항우 활계수무 감여투부 가난하기는 범단과 같고 기개는 항우와 같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감히 부를 다투다니
[蛇足]
조산 스님(839~901)은 천주태생으로 동산스님의 문하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스승 동상과 함께 조동종을 창설한분이다.蕪州(무주)의 曹山에거주하여 조산이라불럿고 이름은 本寂이고 시호는 元證大師라고 불렀다. 어느때 청세라는 중이 찾아와서 "저는 외롭고 가난하니 스님께서 배고품을 면케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여기서 孤貧은 외롭고 배고품의 뜻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외롭고 배고픈 것으로 조산 스님에게 깨우쳐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뜨내기 중이 스님의 道力을 시험해보려는 속셈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산스님은 미리 그 뜻을 알고 "세사리야!" 하고 엄하게 부르고, 청세는 자기도 모르게 "네!"하고 대답했다.그리고는 "청원의백가에서 만든술을 세되나먹고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 라고 쏘아부쳤다. 心外無法이요 脚下照顧라, 그 의기 또한 높게 보네만은 "세사리야!" "네!" 이 문답에서 모든것은 종결되었다.
무문관 제11칙[州勘庵主(주감암주)/암주를 시험하다]
趙州到一庵主處問, 有마有마. 主수起拳頭. 州云, 水淺不是泊舡處. 便行. 又到一庵主處云, 有마有마. 主亦수起拳頭. 州云, 能縱 조주도일암주처문 유마유마 주수기권두 주운 수천불시박강처 변행 우도일암주처운 유마유마 주역수기권두 주운 능종 能奪, 能殺能活. 便作禮 능탈 능살능활 변작례
조주 선사가 한 암주를 찾아가 말했다.
“있느냐? 있느냐?” 그 암주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조주 선사가 말했다.
"이곳은 물이 얕아서 배를 댈 수 없군!" 그리고는 가 버렸다. 또 다른 암주를 찾아가서 말하였다.
“있느냐? 있느냐?” 그 암주 역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조주 선사가 말하였다.
“능히 주기도 하고 능히 빼앗기도 하며, 살리고 죽이고 자유자재하구나!” 그리고는 문득 절을 하였다.
[評唱]
無門曰, 一般수起拳頭, 爲甚마肯一箇, 爲甚마不肯一箇. 且道, 효訛在甚處. 若向者裡下得 一轉語, 便見趙州舌頭無骨, 扶起放倒, 무문왈, 일반수기권두 위심마긍일개 위심마불긍일개 차도 효와재심처 약향자리하득 일전어 변견조주설두무골 부기방도 得大自在. 雖然如是, 爭奈趙州却被, 二庵主勘破. 若道二庵主 有優劣, 未具參學眼. 若道無優劣, 亦未具參學眼. 득대자재 수연여시 쟁나조주각피 이암주감파 약도이암주 유우열 미구참학안 약도무우열 역미구참학안
무문스님가로되 주먹을 치켜들기는 매한가지인데 왜 하나는 긍정하고 하나는 부정하는가? 자 말해보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이에 대해 한 마디 바로 이른다면 문득 조주 선사의 변설이 얼마나 거침없고 혹은 붙들어 일으키고 혹은 내동댕이쳐 놓아줌에 크게 자유자재한 도리를 얻은 것을 가히 볼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어찌할꼬, 조주가 오히려 두 암주에게 간파 당한 것을! 만약 두 암주에 우열이 있다고 하면 아직 참학의 안목이 없다 할 것이요, 우열이 없다고 하더라도 역시 참학의 안목이 없다 할 것이다.
[訟]
頌曰. 眼流星, 機체電, 殺人刀, 活人劍 송왈, 안유성 기체전 살인도 활인검
눈은 유성과 같고 기지는 번갯불 같아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린다
[蛇足]
조주스님은 80세에 再行脚 한분으로 유명하다.행각이란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문답도하고 의견교환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험을 해보는것, 지도를 받는것,또는 보임을위해 하는것 등이 있다. 조주스님의 경우 자신이 무르익은 후이니 후학들을 시험해보고 가르침을 주기위한 것에 해당될 것이다. 왜 조주스님은 똑같은 주먹에 한사람은 꾸짖고 한사람은 극구 칭찬을 했을까? 선이란 무엇인가... 선의 경지는 절대평등의 세계다. 거기엔 나와남이없는 무분별 무심의 세계 즉 주먹하나에 천지가 하나가된다. 능수능란하고 자유자재한 세계, 그 곳엔 물이얕고 깊음도없고 살리고 죽이는 것도 없다.
사족을 달기 시작하면서 계속 강조해 왔지만 이런 言句에 휘둘리면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져 모든공부가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아진다. 하지만 염려할 것 없다. 캄캄한 그대로 계속 疑團을 지켜나가라. 그러다보면 언젠가부터 조금씩 언구의 함정이 보이기 시작하고 해답은 言句 以前에 이미 전해짐을 알것이다. 조주의 선의 경지는 무애자재하여 추호도 거리낌이 없다. 꾸짖고 칭찬함이 살인도와 활인검 이라지만 이둘다 活人劍임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조주스님의 가르침이 있음입니다
무문관 제12칙 [巖喚主人(암환주인)/서암이 주인공을 부른다]
瑞巖彦和尙, 每日自喚主人公, 復自應諾. 乃云, 惺惺著, 諾. 他時異日, 莫受人瞞, 諾諾. 서암언화상 매일자환주인공 부자응야 내운 성성착 낙 타시이일 막수인만 낙낙
서암언 선사는 날마다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르고 “예.” 하고 스스로 대답하고는 이내 “정신차려, 깨어 있는가?” 하고 “예.” 하고 대답하고 “어느 날 어느 때도 남에게 속지말라!” 하고는 “예, 예.” 하고 자문자답하였다.
[評唱]
無門曰, 瑞巖老子, 自買自賣, 弄出許多神頭鬼面. 何故. 一箇喚底, 一箇應底. 一箇惺惺底, 一箇不受人瞞底. 認著 依前還不是. 무문왈 서암노자 자매자매 농출허다신두귀면 하고 일개환저 일개응저 일개성성저 일개불수인만저 인착 의전환불시 若也효他, 總是野狐見解. 약야효타 총시야호견해
서암 늙은이는 자기가 팔고 자기가 산다. 어쩌려고 수많은 도깨비가면을 가지고 노는 것일까. 저것 보게, 하나는 부르고 하나는 대답하고 하나는 깨어 있으라고 하고 하나는 남에게 속지 말라고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를 붙들어도 잘못이긴 마찬가지. 만약 서암 흉내를 내려 들면 여우의 견해에 떨어진다.
[頌]
頌曰. 學道之人 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송왈 학도지인 불식진 지위종전인식신 무량겁래생사본 치인환작본래인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도 진실을 모른다 다만 본래의 신령함을 식으로 삼은 것이 무량겁으로 나고 죽음의 근본이 되었거늘 어리석은 이는 사람에게 본래 생사가 있다 한다.
[蛇足]
서암언 스님(850~910)은 절강성 태주의 서암사언 선사를 말하며 암두스님의 제자다. 서암스님은 천성이 매우 둔하여 스승인 암두 스님마져 佛緣이 없다고 그다지 돌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大器晩成이라 느린 소가 천리를 가듯이 선가에선 이런사람들이 결국은 成功한다.
"주인공"은 누구이며 "예"하고 대답하는이 누구인가? 자신이 대답했으니 서암 자신인가? 선의 세계는 절대경지, 無心無我로 주인공과 자신과의 일체성으로 주인공이랄 것도 없고 자신이랄 것도 없다. 즉 깨달은 자리를 의미한다. 너와나의 모든 분별에서 떠난 無의세계로 일체에서 초월한 자리다.
"성성착" "막수인만" 정신바짝차리고 깨어있어라! 남에게 절대 속지말라!. 나열된 言句에 현혹 되거나, 누군가 "주인공"하고 부르는 것과 서암스님이 "주인공"하고 부른 것을 착각하면 野狐禪(제2칙 백장야호에서 나온 말로 설익은 깨달음으로 大悟한 것 처럼 행세하는 것)이라. 나도 마찬가지지만 수행을 한답시고 제대로 깨치지도 못한 주제에 문자를 세워 그나마 양심은 있어 蛇足이라지만 뻔뻔하게 글을 올리는 이런학인들에게 서암 스님은 경고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을 불러 일깨워야하나 결코 머무르려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제가 "주인공!" 하고부르면 누가 대답합니까?
무문관 제13칙[德山托鉢(덕산탁발)]
德山一日 托鉢下堂, 見雪峰問, 者老漢 鐘未鳴 鼓未響, 托발向甚處去, 山 便回方丈. 峰 擧似巖頭. 덕산일일 탁발하당 견설봉문 자노한 종미명 고미향 탁발향심처거 산 변회방장 봉 거사암두 頭云, 大小德山 未會末後句 두운 대소덕산 미회말후구 山 聞 令侍者 喚巖頭來, 問曰, 汝不肯老僧那. 巖頭密啓其意. 山 乃休去. 明日陞座, 果與尋常 산 문 영시자 환암두래 문왈 여불긍노승나 암두밀게기의 산 내휴거 명일승좌 과여심상 不同. 巖頭至僧堂前, 부掌大笑云, 부동 암두지승당전 부장대소운 且喜得, 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 不奈伊何 차희득 노한회말후구 타후천하인 불나이하
하루는 덕산 선사가 발우를 들고 당으로 내려갔다. 설봉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 노스님이 아직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를 가시는가?” 덕산 선사는 말없이 방으로 되돌아갔다. 설봉이 암두에게 이 말을 하니 암두가 말하였다.
“대단하신 덕산도 말후구를 모르는구려.” 덕산 선사가 이 말을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놓고 말하였다. “그대가 나를 긍정하지 않는가?” 암두는 스님의 귀에 입을 대고 가만히 그 뜻을 말하였다. 덕산 선사께서 아무 말 없다가 다음 날 법상에 오르셨는데 과연 다른 때와 그 태도가 달랐다. 암두가 법문하는 방 앞에 가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기쁘도다. 우리 노스님이 말후구를 아셨다. 이후로는 천하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評唱]
無門曰, 若是末後句, 巖頭 德山 俱未夢見在. 點檢將來, 好似一棚傀儡. 무문왈 약시말후구 암두 덕산 구미몽견재 점검장래 호사일붕괴뢰
만약 이것이 말후구라면 덕산과 암두 둘 다 꿈에도 말후구 도리는 보지 못했다. 알고 보면 덕산, 설봉, 암두 모두가 한 누각의 꼭두각시니라.
[頌]
頌曰. 識得最初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송왈 식득최초구 변회말후구 말후여최초 불시자일구
최초구를 깨달아 얻으면 문득 말후구를 알리라 말후구니 최초구니 하면 어느 한 구도 모르는 자이니라
[蛇足]
덕산스님(德山 : 782~865)은 선감(宣鑑)선사라고도 불리며 덕산방(德山棒)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탁발은 外部의 시주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內部의 堂내 持鉢을 말한다. 여기서 말후구는 무엇이며 귀속말은 무엇인가? 또 무엇을 가르치려는 화두인가?
무문스님은 덕산스님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말후구라면 도리를 보지 못했고 세스님이 모두 괴뢰 즉 꼭두각시라 했다. 그리고 頌에서 말후니 최초니하면 한구도 모른다고 했다. 여기에 해답은 다 나왔다. 話頭는 言語道斷의 시험이다. 내자신을 없앰으로서 無가되고 그곳에 머무르지 말고 자신을 찾는것이다. 이것은 言句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禪의 세계는 言語와 時空이 초월된 세계로 無始無終으로 말후구니 최초구니 하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귀속말이니 다른 태도니 하는 것은 꼭두각시 즉 요즘말로 쇼에 지나지않는다. 마지막 부분의 암두의 한마디가 없었으면 三十棒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악한 각본이다
무문관 제14칙 [南泉斬猫(남전참묘)/남전이 고양이를 베다]
南泉和尙, 因東西兩堂 爭猫兒, 泉乃提起云, 大衆 道得 卽救, 道不得 卽斬却也. 衆無對. 泉 遂 남전화상 인동서양당 쟁묘아 전내제기운 대중 도득 즉구 도불득 즉참각야 중무대 전 수 斬之, 晩趙州外歸. 泉擧似州. 州 乃 참지 만조주외귀 전거사주 주 내 脫履安頭上 而出. 泉云, 子 若在 卽救得猫兒 탈리안두상 이출 전운 자 약재 즉구득묘아
남전 스님이 어느 날 동당과 서당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로 시비가 벌어지자 남전 스님이 고양이 새끼를 치켜들고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도득하면(對句가 맞으면:고양이를 든 이유) 살리고 도부득하면(對句가 맞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대꾸가 없자 남전 스님이 드디어 고양이 베어버렸다. 밤 늦게 조주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전 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조주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 남전 스님이 말하였다.
“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을...”
[評唱]
無門曰, 且道, 趙州頂草鞋意 作마生. 若向者裏 下得一轉語, 便見南泉令不虛行. 其或未然, 險. 무문왈 차도 조주정초혜의 작마생 약향자리 하득일전어 변견남전영불허행 기혹미연 험
무문스님이 말하기를, 자, 말해보라!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얹은 뜻이 무엇인가? 만약 이것에 대해 한 마디 이를 줄 알면 곧 남전의 행동이 헛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위험하리라.
[頌]
頌曰. 趙州若在, 倒行此令, 奪却刀子, 南泉乞命. 송왈, 조주약재 도행차령 탈각도자 남전걸명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영을 거꾸로 시행했을 것을 칼자루를 뺏어 쥐어 남전이 목숨을 구걸했으리
[蛇足]
남전스님(843~886) 육조 혜능 스님의 법손이며 趙州禪師의 스승으로 '池州南泉普願禪師'를 말한다. 본칙은 1700공안중에 살생으로 교육한 유일한 것이 아닌가한다. 大乘의 持犯開遮로 大를 위해 小를 버릴 수 있다.
남전이 일러보라는 한마디는 무엇인가? 대꾸가 없으니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답은 조주의 행위 같은데 여기선 무엇을 남전은 보여 주었나? 선을공부하는 자들이 동당 서당하여 고양이 한 마리로 분별하고 있다. 아마 이후론 동서양당하여 분별하는 일은 없어 졌으리라.
다음은 조주의 행동이다.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간 이 행위가 무엇이길래 남전은 고양이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고 했는가... 선의경지는 동서의 분별도없고 나도없는 절대 평등의 세계다. 즉 無요 一切며 平等이다. 자! 말해보라! 조주의 신은 무엇이고 몸은 무엇인가? 밖으로 나간 것은 누구인가... 수행자의 몫이다!
무문관 제15칙 [洞山三頓(동산삼돈)/동산의 방망이 육십대]
雲門因洞山參次, 門 問, 近離甚處. 山云, 査渡. 門曰, 夏在甚處. 山云, 湖南報慈. 門曰, 幾時離彼. 山云, 八月二十五. 門曰, 放汝 운문인동산참차 문 문 근리심처 산운 사도 문왈 하재심처 산운 호남보자 문왈 기시이피 산운 팔월이십오 문왈 방여 三頓棒. 山 至明日, 却上問訊, 昨日蒙和尙放三頓棒, 不知過在甚마處. 門曰, 飯袋子, 江西湖南, 便恁마去. 山 於此 大悟. 삼돈방 산 지명일 각상문신 작일몽화상방삼돈방 부지과재심마처 문왈 반대자 강서호남 변임마거 산 어차 대오
운문 선사에게 동산이 참례하였을 때, 운문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고?” “사도에서 왔습니다.” “여름에는 어디에서 지냈는고?” “호남의 보자사에서 지냈습니다.” “언제 그 곳을 떠나왔는고?” “팔월 이십오일입니다.” “너에게 3돈방을 내릴 것을 용서해 준다.” 이튿날 동산이 운문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어제는 화상께서 3돈방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만, 저의 허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운문 선사가 말하였다.
“이 밥자루야, 강서 호남으로 잘도 쏘다녔구나!” 동산이 이때 크게 깨달았다.
[評唱]
無門曰, 雲門當時, 便與本分草料, 使洞山別有生機一路, 家門 不致寂寥. 一夜在是非海裡 著倒, 直待天明再來, 又與他注破. 洞山 무문왈 운문당시 변여본분초료 사동산별유생기일로 가문 불치적요 일야재시비해리 착도 직대천명재래 우여타주파 동산 直下悟去, 未是性燥. 且問諸人, 洞山三頓棒 合喫 不合喫. 若道合喫, 草木叢林 皆合喫棒. 若道不合喫, 雲門 又成광語. 向者裡明 직하오거 미시성조 차문제인 동산삼돈방 합끽 불합끽 약도합끽 초목총림 개합끽봉 약도불합끽 운문 우성광어 향자리명 得, 方與洞山 出一口氣 득 방여동산 출일구기
무문왈, 운문은 그때 본분의 양식을 주어 동산으로 하여금 살아날 길을 마련해 주었더라면 집안이 적요함을 면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시비의 바다에 빠뜨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설파해 주자, 동산이 곧 깨달았지만 그래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다. 동산이 3돈방을 맞았어야 했겠는가? 만약 맞아야 한다면 산천초목 모두가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이요, 만약 안 맞아야 한다면 운문이 헛소리를 한 것이 된다. 여기서 사태를 분명히 인지한다면 동산과 더불어 깊은 한숨을 토할 것이다.
[頌]
頌曰. 獅子敎兒迷子訣, 擬前跳擲早번身, 無端再敍當頭著, 前箭猶輕後箭深 송왈 사자교아미자결 의전도척조번신 무단재서당두착 전전유경후전심
사자가 새끼를 가르치는 비결일세 전날을 의논하러 들어가 깨달았네 살림 없는 동산에게 거듭 펴 계합하게 함이여 앞 화살이 가볍다면 뒤 화살은 깊다 하리
[蛇足]
이 칙의 동산은 조동종의 동산양개 선사가 아니고 운문 선사의 제자 수초중혜 선사를 말한다. 운문선사(? ~949)는 운문종을 창설한 선사로 生知의 俊才라고한다. 사람의 천품(天稟)을 세가지로 나누어 生知(나면서부터 아는사람),學知(배워서 아는 사람),苦知(배우되 어렵게 아는사람)로구분, 일반에서는 生知를 환영하나 禪에서는 苦知를 환영한다.물론 운문의 비하는 아니다.
"어디서 왔는고?" "사도에서 왔습니다." 계속질문해도 그 뜻을 모른다. 오직 답답 했을까,한돈방이 20방이니 삼돈방은 60방이다. 봐주지말고 그 자리에 삼십돈방을 내려쳐버렸으면 어떻했을까? 어쨌던 삼돈방을 허한 것이 의단이 되어 밤새 뒤척거려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다시 찾으니 일반인 같으면 화가나도 단단히 났을것이다. 선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다. 그곳엔 사도,여름, 호자사, 날짜도 초월된 평등지다. 여기서 무문선사는 동산이 삼돈방을 맞으면 산천초목이 다 맞아야 된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헛소리를 한 것이라했는데 왜 그럴까? 앞화살보다 뒤 화살이 깊은 이유가 무언가? 깊이 참구해 볼일이다. "이 밥통아! 호남강서로 잘도 쏘다녔구나!"
무문관 제17칙[國師三喚(국사삼환)/국사가 세번부르다]
國師三喚侍者, 侍者三應. 國師云, 將謂吾辜負汝, 元來却是汝辜負吾 국사삼환시자 시자삼응 국사운 장위오고부여 원래각시여고부오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르니 시자가 세 번 대답했다. 국사가 가로되. “내가 너를 저버렸는가 했더니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評唱]
無門曰, 國師三喚, 舌頭墮地. 侍者三應, 和光吐出. 國師年老心孤, 按牛頭喫草. 侍者未肯承當, 美食不中飽人餐. 且道, 那裡是他 무문왈, 국사삼환 설두타지 시자삼응 화광토출 국사년로심고 안우두끽초 시자미긍승당 미식부중포인손 차도 나리시타 辜負處. 國淸才子貴, 家富小兒嬌. 고부처 국청재자귀 가부소아교
국사가 세 번 부르니. 혀 끝이 땅에 떨어졌다. 시자가 세 번 대답하니. 근본(禪智)을 몽땅 드러내었다. 국사는 나이가 들어 고적한 마음에 소머리를 눌러 풀을 먹게 하려 하였는데, 시자는 이를 받들지 못했다. 좋은 음식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법이다. 말해 보라. 어디가 시자가 저버린 곳이냐. 나라가 맑으면 인재가 대접받고, 집안이 부유하면 아이들이 교만해진다.
[頌]
頌曰. 鐵枷無孔要人擔, 累及兒孫不等閑, 欲得撑門幷주戶, 更須赤脚上刀山. 송왈, 철가무공요인담 누급아손부등한 욕득탱문병주호 경수적각상도산
구멍 없는 쇠칼을 머리에 쓰라 하니 자손에까지 누가 미쳐 한가하지 못했네 가문을 받치고 집을 지탱하고자 한다면 다시 맨발로 칼산을 올라야 하느니
[蛇足]
국사는 육조혜능 문화의 서경의 광택사 혜충 국사(775년입적)를 말한다. "시자야" 하고 부르니 "네"하고 대답한다. 하등의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선의 입장에선 한번 부르고 대답하면 다 통하여 끝이다. 하지만 시자는 그것을 모르니 세번이나 불러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그런줄알면서도 부른내가 잘못이고 선지를 모른 시자너도 잘못이다.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과일도 順熟되어야 과일의 제맛이 나는 법이다. 억지로 덜익은 감을 따서 온돌방에 온기를 쬐어 익힌다고 제 맛이 나겠는가? 자식 귀여운줄만 알고 얼우어 키우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모름지기 사자처럼 새끼를 키울줄 알아야 제대로 키우는 것이다. 자, 이제 한마디 해보라!.
무문관 제18칙[洞山三斤(동산삼근)]
洞山和尙, 因僧問, 如何是佛. 山云, 麻三斤. 동산화상 인승문 여하시불 산운 마삼근
동산 수초 선사에게 한 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이 대답하였다.
“삼 세 근이다“
[評唱]
無門曰, 洞山老人 參得些蚌蛤禪, 재開兩片, 露出肝腸. 然雖如是, 且道, 向甚處 見洞山. 무문왈 동산노인 참득사방합선 재개양편 노출간장 연수여시 차도 향심처 견동산
동산노인은 방합선(蚌蛤禪)을 참구하여 얻을 수 있어, 양 껍질을 여니 간장(肝臟)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러 보라. 대체 어디에서 동산을 볼 것인가.
[頌]
頌曰. 突出麻三斤, 言親意更親,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송왈 돌출마삼근 언친의경친 내설시비자 변시시비인
난데없이 삼 세 근이라 말은 친절하고 뜻은 절실하다 와서 시비를 말하는 이가 곧 시비하는 자이다.
[蛇足]
이 칙의 동산선사는 운문선사의 법을 이은 동산수초 선사를 말한다. '마삼근'이나 '정전백수자'나 '간시궐'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나의 존재를 없애면... 이것이 禪旨다. 조개가 입을 벌린것 처럼 간장을 다 들어냈다. 이것이 마삼근인데 도대체 동산의 뱃속은 무엇인가? ' 마삼근'은 천하의 진리를 가장 친절하게 가장 간명하고 숨김없이 드러내 놓았다. 자, 이제 동산의 意中을 말해보라!
[제19칙]平常是道(평상시도)
南泉因趙州問,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州云, 還可趣向否.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남전인조주문 여하시도 전운 평상심시도 주운 환가취향부 전운 의향즉괴 주운 불의쟁지시도 전운 도불속지 불속부지 知 是妄覺, 不知 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 廓然洞豁, 豈可强是非也. 州於言下 頓悟. 지 시망각 부지 시무기 약진달부의지도 유여태허 확연동활 기가강시비야 주어언하 돈오
남전 보원 선사에게 조주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 선사가 대답하였다. “평상심이 도이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닦아 나갈 방향이 있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향하고자 하기만 하여도, 어긋나느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앎이 없다는 것은 무기(無記)이니라. 참으로 의심 없는 도에 사무쳤다면 오직 태허의 확연하여 통할함과 같을지니 무엇 때문에 굳이 시비할 것인가.” 조주가 단번에 크게 깨달았다.
[評唱]
無門曰, 南泉 被趙州發問, 直得瓦解氷消, 分疏不下. 趙州縱饒悟去, 更參三十年 始得. 무문왈 남전 피조주발문 직듣와해빙소 분소불하 조주종요오거 경참삼십년 시득
남전은 조주의 물음을 받고, 다만 기와가 깨지고 얼음이 풀리듯 해 버려서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비록 조주가 이에 깨달았다고 해도 다시금 삼십년을 참구해야 할 것이다.
[頌]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춘유백화추유월 하유양풍동유설 약무한사괘심두 변시인간호시절
봄에는 백가지 꽃 가을에는 달 여름 시원한 바람 겨울의 눈 마음에 걸어놓은 일 없다면 이것이 인간의 좋은 시절
[蛇足]
'平常心是道'면 '還可 趣向否'라고 물으니 '의향즉괴' 즉, 알려고 하면 도리어 어긋난다고 했다. 중생은 자기 눈섶을 못보듯이 모르지만 禪旨에서 보면 일상생활 자체가 도이나 닦는다는 생각 안다 모른다는 생각도 놓아야 된다. 진정 분별없는 도에 이르면 태허와 같이 환할것인데 시시비비를 왜 가리려 하느냐.. 고 했다. 참으로 귀여운 어린자식에게 생선 뼈다귀 발라서 입에 넣어 주는 꼴이다. 그 당시에도 참다운 제자 전법제자 한사람 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동산수초는 죽은지 30년후에 제자가 나타났다고 하지 않는가...
선은 단도직입이어야한다. 즉 망서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무문스님은 이런저런 물음끝에 깨달은 조주를 30년이상은 悟後修行(깨달은 후의 수행:보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의 訟은 깨달은 후의 안목이다. 山은 山인 境地로 전후의 차이는 없다. 다만 悟後는 모두 빈 허공상태로 마음에 비친 모든 상의 진면목을 알아 언제든지 비워진다. 마치 빈 항아리처럼머무름, 즉 집착이 없다. 그에비해 중생은 가득찬 항아리로 물을 부으면 바로 넘치는 것과 같다. 즉 집착 덩어리다.
즉, 이정도의 친절은 일찌기 없었다. 다행이 마조 또한 훌륭한 인물이라 오후수행의 증득또한 훌륭해 남전의 노력이 결코 헛되 않아 그 빛을 찬란히 이어 이 무문관의 주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 그리고 무문의 송의 의미를 느껴보라! 이칙이 현재까지는 가장 덜 부담스러운 칙이다. 자, 이제 한마디 해보라! 조주가 깨달은 마음을...
[제20칙]大力量人(대역량인)
松源和尙云, 大力量人, 因甚擡脚不起. 又云, 開口不在舌頭上. 송원화상운 대력양인 인심대각불기 우운 개구부재설두상
송원 선사가 말하였다.
“큰 역량 있는 사람이 왜 발을 들어 일어서지 못하는가?” 또 말하였다. “말한다는 것은 혀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評唱]
無門曰, 松源可謂, 傾腸倒腹, 只是欠人承當. 縱饒直下承當, 正好來無門處 喫痛棒. 何故 니 要識眞金 火裡看. 무문왈 송원가위 경장도복 지시흠인승당 종요직하승당 정호래무문처 끽통방 하고 니 요식진금 화리간
송원 선사가 창자를 기울여 뱃속을 털어보였으나 다만 사람들이 받아들여 감당하지 못하네. 비록 곧 받아들여 감당해 즐길지라도 무문의 처소에 오면 정말로 매서운 방망이를 먹이리니 어떤 까닭인가?('니'는 조사) 진짜 금을 알려거든 불 속을 보라.
[頌]
頌曰. 擡脚踏飜香水海, 低頭俯視四禪天, 一箇渾身無處著, 請續一句 송왈 대각답번향수해 저두부시사선천 일개혼신무처착 청속일구
다리를 들어서 향수해를 밟아 뒤집고 머리를 숙여서 사선천을 볼지라도 온통 한 몸 뿐이라 청컨대 일구를 일러보라
[蛇足]
송원선사(1202년 입적)은 송원 숭악선사를 말한다. 송원선사의 室中垂語(실중수어)에는 三傳語가 있다. 그의 일전어와 이전어는 이 칙의 大力量人 因甚擡脚不起,開口不在 舌頭上이며 삼전어는 '明眼衲僧因 甚마脚下紅絲線不斷(명안납승인 심마각하 홍사선불단/큰 선지식이 왜 발에매인 붉은 실을 끊지 못하는가?)'인데 이를 三傳語라 하며 차후 상세히 언급 하기로하자. 큰역량이 있는사람, 즉 대장부가 왜 다리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가... 그리고 말하는 것은 혀에 있지않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여기서도 言句에 걸리면 평생가도 머리만 아프다. 들은 다리는 누가 들었으며 혀없는 말은 누가 하였는가....다리는 들면되고 말은 하면 된다.
무문선사의 평창과 송 또한 이 칙에 버금가는 난제다. 배속을 다 보여줘도 모르고 알아도 무문곁에오면 방망이를 먹인다 그랬으니 어느장단에 춤을 춰야하나. 선지는 실참실수다. 언구에 걸리지 않고 다리들고 말해도 한방망의 뜻은 순금을 알려거든 불속에 넣어 봐야 안다고 했다. 즉 야호선(거짓선, 깨달은척하는 무리)을 경계하는 경고성이다.
香水海는 수미산의 九山八海중의 하나인 큰바다를 말한다. 그리고 사선천은 삼계(욕계,색계,무색계)위의 불교의 이상세계를 말한다. 무문선사는 선의 기개를 마음껏 일으켰다. 한발로 태평야같은 바다를 밟아버리고 머리한번 움직여 사선천을 한눈에 본다.즉 전세계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무문선사는 청한다. 자 , 이제 일구를 일러보라!.
제21칙[雲門屎궐(운문시궐)]
雲門 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궐. 운문 인승문 여하시불 문운 간시궐
운문 문언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른 똥막대기니라.(간시궐)”
[評唱]
無門曰, 雲門 可謂家貧 難辨素食, 事忙 不及草書. 動便將屎궐來, 撑門柱戶. 佛法興衰 可見. 무문왈 운문 가위가빈 난변소식 사망 불급초서 동변장시궐래 탱문주호 불법흥쇠 가견
운문은 가세가 가난하여 소식(素食)조차 차리기 어려웠고, 일이 바쁘니 초서(草書)로 조차 끄적거릴 겨를이 없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뜻을 모르는 자들이 자칫하면 이 똥 막대기를 들고 나와서 가문을 지탱해 가고 문호를 떠받치니 불법의 흥망성쇠를 가히 알 만하다.
[頌]
頌曰. 閃電光, 擊石火, 잡得眼, 已蹉過. 송왈 섬전광 격석화 잡득안 이차과
번갯불이 번쩍하고 부싯돌이 튀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지나 버린다
[蛇足]
운문선사는 운문산의 문언선사를 말하며 운문종을 창설한 분이다. 여기서 간시궐이란 옛날 중국에선 변소에서 뒤를보고 훔칠때 공동으로 사용하던 막대기다. 웃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년후인 우리 어릴때만해도 육이오 직후라 공용 막대기는 아니라도 막대기나 돌 또는 짚, 풀 등으로 뒤를 훔쳤다.그만큼 힘든세월을 살았었다, 요즘애들은 먼나라 얘기처럼 듣더라만은..
그런데 운문선사는 어떤것이 부처냐는 질문에 하필이면 그 많은 것 놔두고 왜 똥막대기라고 했을까... 부처라하면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운문선사는 이를 여지없이 박살 내버린 것이다. 자, 그러면 이 간시궐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간시궐을 더럽다 깨끗하다는 분별심을 내지마라, 禪旨에선 깨끗하고 추함이없다. 간시궐이나 향나무나 차이가 없는 것이다. 悉有佛性(실유불성)라했다. 차별에 집착하지마시라. 禪宗은 淸貧이 생활이다. 道도 貧道가 으뜸이다. 즉 깨친뒤 깨쳤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려야 貧道라 한다. 간시궐이란 화두로 지탱함을 선종의 흥망성쇠와 연결지우지 말라. 번갯불처럼 일촌의 여유없이 재빠른 '간시궐'은 정말 훌륭하다. 잠시 망설임이 있으면 눈깜박할 사이에 그르치고 만다.
제22칙 [迦葉刹竿(가섭찰간)]
迦葉 因 阿難問云, 世尊 傳金欄袈裟外, 別傳何物. 葉喚云, 阿難. 難 應諾. 葉云, 倒却門前刹竿著. 가섭 인 아난문운 세존 전금란가사외 별전하물 섭환운 아난 난 응낙 섭운 도각문전찰간착
아난이 가섭 존자에게 물었다.
“세존께서 금난가사를 전하신 이외에 따로 무엇을 전해주었습니까.” 가섭 존자가 말하였다. “아난아!” 아난이 대답하였다. “네.” 가섭 존자가 말하였다. “문 앞의 찰간을 꺾어 버려라.”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 下得一轉語 親切, 便見靈山一會 儼然未散. 其或未然, 毘婆尸佛 早留心, 直至而今 不得妙. 무문왈 약향자리 하득일전어 친절 변견영산일회 엄연미산 기혹미연 비바시불 조류심 직지이금 부득묘
만일 여기서 한 마디를 적실히 내릴 수 있다면 영산의 회상이 흩어지지 않아 지금도 엄연함을 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바시불이 일찍이 마음에 머물러 지금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묘함을 얻지 못했다 하리라.
[頌]
頌曰. 問處何如答處親, 幾人於此眼生筋, 兄呼弟應揚家醜, 不屬陰陽別是春. 송왈 문처하여답처친 기인어차안생근 형호제응양가추 불속음양별시춘
질문은 어찌 되었건 대답은 적실하다 몇 사람이나 여기서 눈에 핏발 섰을까 형이 부르고 아우가 대답하여 집안 망신 시켰는데 음양(계절)에 속하지 않은 별도의 봄이라니
[蛇足]
아시겠지만 가섭은 불조법맥의 제1조 祖師다. 막내 사제 아난을 얼마 후에 깨우치게한 화두로 2조로 법맥을 잇게했다. 가섭은 영산회상에서 破顔微笑(파안미소)로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았지만 십대제자중 막내인 아난은 多聞第一이나 깨달음 측면에선 하근기였다. 그러니 파안미소, 즉 염화시중의 미소의 뜻을 알리없는 아난이 징표로 물려받은 금란가사외에 별도의 무엇을 물려받아서 깨우친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사형에게 그런것이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달라는 아난의 請이다. 가섭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다. 이에 가섭이 "아나아!"하고 불렀다."네!"하고 대답은 했지만 꿀먹은 벙어리다. 웬만하면 "네"라는 대답속에세 선지를 보련만 별반응이 없자 "문앞의 찰간을 꺾어버려라."하고 일갈한다. 난데없는 문앞의 찰간은 무언가? 찰간에 얽매이지 말라.
評唱은 영산회상시 거염화의 뜻을 파안미소로 답한 그 이치를 모르면 가섭이 "아난아!"하고 부른 의미도 모를것이므로 영산회상은 해산되고 좌선만하면서 머무른 비바시불이 된다면 부처님의 법은 끊어지고 만다는 얘기며 頌은 가섭의 "아난아!"하고 부르니 "네!"하고 대답한데서 질문과 대답은 훌륭하지만 깨닫지 못한 아난의 나무람이다. 자, 이제 본칙에 한마디 일러보라!.
제23칙[不思善惡(불사선악)]
六祖 因 明上座진至大庾嶺, 祖見明至, 卽擲衣鉢於石上云, 此衣 表信, 可力爭耶, 任君將去. 明 遂擧之, 如山不動, 지주悚慄. 육조 인 명상좌진지대유령 조견명지 즉척의발어석상운 차의 표신 가력쟁야 임군장거 명 수거지 여산부동 지주송률 明曰,我來求法, 非爲衣也. 願行者 開示. 祖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마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明 當下大悟, 遍體汗流, 泣淚 명왈 아래구법 비위의야 원행자 개시 조운 불사선 불사악 정여마시 나개시명상좌본래면목 명 당하대오 변체한류 읍루 作禮 問曰, 上來密語密意外, 還更有意旨否. 祖曰, 我今爲汝說者 卽非密也. 汝若返照自己面目, 密却在汝邊. 明云, 某甲雖在 작례 문왈 상래밀어밀의외 환갱유의지부 조왈 아금위여설자 즉비밀야 여약반조자기면목 밀각재여변 명운 모갑수재 黃梅隨衆, 實未省自己面目. 今蒙指授入處, 如人飮水, 冷暖自知. 今行者 卽是某甲師也. 祖云, 汝若如是, 則吾與汝 同師黃梅. 황매수중 실미성자기면목 금몽지수입처 여인음수 냉난자지 금행제 즉시모갑사야 조운 여야여시 즉오여여 동사황매 善自護持. 선자호지
육조 혜능 선사가 명 상좌에게 쫓겨 대유령에 이르러 명 상좌가 뒤쫓아오자 곧 의발을 바위 위에 던지고 말하였다.
“이 의발은 믿음을 표하는 것인데 힘으로 빼앗을 것인가? 그대가 가져가려면 가져가라.” 명 상좌가 들려고 하였으나 산같이 움직이지 않자 깜짝 놀라 벌벌 떨면서 말하였다.
“나는 법을 구하려고 온 것이지 의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니 원컨대 행자께서는 가르쳐 주소서.” 육조 혜능선사가 말하였다.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아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명 상좌가 크게 깨닫고 전신에 땀을 쏟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위의 비밀한 말, 비밀한 뜻 외에 다른 뜻이 있습니까?” 육조 혜능선사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하여 설한 것은 비밀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만약 자기의 면목을 돌이켜 보았다면 비밀하다는 것이 곧 그대에게 있느니라.” 명 상좌가 말하였다.
“내가 오조의 회하에서 대중으로 따랐으나 실은 나의 면목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 가르침을 받아 깨우치니 사람이 물을 마시고 나서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행자께서는 나의 스승이십니다.” 육조 혜능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진정 이렇다면 나와 함께 오조 황매선사를 스승으로 섬길지니 스스로 잘 보호해 가지라.”
[評唱]
無門曰, 六祖可謂, 是事出急家, 老婆心切. 譬如新려支剝了殼 去了核, 送在爾口裡, 只要爾嚥一嚥. 무문왈 육조가위 시사출급가 노파심절 비여신려지박료각 거료핵 송재이구리 지요이연일연
육조의 이 일은 몰려서 한 일이고, 지나친 노파심의 결과이다. 이를테면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내어 입에 넣어 주어 다만 삼키게만 한 것과 같구나.
[頌]
頌曰. 描不成兮화不就, 贊不及兮休生受, 本來面目沒處藏, 世界壞時 渠不朽 송왈 묘불성회화불취 찬불급회휴생수 본래면목몰처장 세계괴시 고불후
본 뜰 수 없고 그림 그릴 수 없고 찬탄도 미칠 수 없으니 낳고 받음 관두시게 본래면목은 감출 수도 없어서 우주가 무너져도 그것은 썩지 않으리
[蛇足]
'不思善 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萬法歸一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니 이름이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로다.
明 上座 어떤 연유던 자상한 육조의 보살핌으로 時節因緣을 만났으나 悟後修行에 放日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본래면목이란 비록 찰나에 볼지언정 그만한 수행과정의 결과로 영원한 것이다..
제24칙[離却語言(이각어언)/말을 떠나다]
風穴和尙 因 僧問, 語默涉離微. 如何通不犯 穴云, 長憶江南三月裡, 자고啼處百花香. 풍혈화상 인 승문 어묵섭이미 여하통불범 혈운 장억강남삼월리 자고제처백화향
풍혈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말이나 침묵이 진리를 건널 때 어떻게 해야 진리를 다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풍혈 선사가 말하였다.
“내 항상 강남의 삼월을 생각하노니 자고새 우짖는 곳에 백화는 향기롭다.”
[評唱]
無門曰, 風穴機如체電, 得路便行. 爭奈坐前人舌頭不斷. 若向者裡 見得親切, 自有出身之路. 且離각語言三昧, 道將一句來. 무문왈 풍혈기여체전 득로변행 쟁나좌전인설두부단 약향자리 견득친절 자유출신지로 차이각어언삼매 도장일귀래
풍혈 선사의 기지는 번개불과 같아서 길을 확인하면 곧바로 나아간다. 그런데 어찌 앞에 앉은 이의 혀끝쯤 끊지 않았을까. 만약 이에 대하여 바로 보아 친하면 스스로 출신의 길이 있으리라. 언어 삼매를 떠나서 일구를 일러 보라.
[頌]
頌曰. 不露風骨句, 未語先分付, 進步口남남, 知君大罔措. 송왈 불로풍골구 미어선분부 진보구남남 지군대망조
풍류구니 골구니 할 것 없이 말하기 전에 이미 보였네 입을 열어 지껄이는 것은 그대를 크게 속이는 것인 줄 알라
[蛇足]
풍혈선사(896~973)는 여주남원 혜옹선사의 제자다. 여기서 語默涉離微 如何通不犯(어묵섭이미 여하통불범)은 말을해도 진리를 범하고 안해도 범하니 어떻하면 좋으냐는 질문에 강남에 삼월이되면 꾀꼬리 우는 곳에 백화가 향기롭다고 했다. 어묵섭이미에 끄달리지 말라.
'장억강남삼월리 자고제처백화향/강남에 삼월이되면 꾀꼬리 우는 곳에 백화가 향기롭다.'는 풍혈선사의 대답이 잘한 것인가? 한 승의 당돌한 질문의 자리를 알면 벗어나리라. 犯 不犯을 초월한 자리는 語默動靜 行住坐臥가 일체된 자리이다. 且道.
제25칙[三座說法(삼좌설법)/앙산의 꿈 이야기]
仰山和尙, 夢見 往彌勒所, 安第三座. 有一尊者, 白槌云, 今日當第三座說法. 山乃起白槌云, 摩訶衍法, 離四句絶百非, 諦聽諦聽 앙산화상 몽견 왕미륵소 안제삼좌 유이존자 백추운 금일당제삼좌설법 산내기백추운 마하연법 이사구절백비 제청제청
앙산 혜적 선사가 꿈에 미륵불이 있는 곳에 가서 세 번 째 좌석에 앉았는데 한 존자가 죽비를 치고 대중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세 번 째 자리에 앉은 이의 설법이 있겠습니다.” 앙산 선사는 곧 일어나 죽비를 치고 말하였다. “마하연의 법은 사구를 여의고 백비까지 끊어졌으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評唱]
無門曰, 且道, 是說法 不說法. 開口卽失, 閉口又喪. 不開不閉, 十萬八千 무문왈 차도 시설법 불설법 개구즉실 개구우상 불개불폐 십만팔천
일러 보라. 이것이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입을 열면 곧 잃고 입을 닫고 있으면 죽은 것이라. 열지도, 닫지도 않는다 해도 또한 십만 팔천 리나 멀다.
[頌]
頌曰. 白日靑天, 夢中說夢, 捏怪捏怪, 광호一衆. 송왈 백일청천 뭉중설몽 날괴낭괴 광호일중
밝은 대낮에 꿈 가운데 꿈을 설하네 괴이하고 괴이하다 대중을 속이지 말라
[蛇足]
앙산선사(890년입적)는 스승 위앙영우 선사와 함께 위앙종을 창설한 스님이다. 禪旨는 時空을 초월한 경지다. 마하연은 大乘을 의미하며 四句는 一,異, 有,無범주를 말하며 백비는 사구에 四非를 생하고 다시 과거, 현재, 미래삼세로 분류하고 다시 旣起와 未起로 나누어 四句를 넣으면 백비가된다. 존재를 여읜 그것마저 놓아라. 어묵동정 행주좌와와 꿈과 현실이 얽매이지 말라.
제26칙[二僧卷簾(이승권렴)/두중이 발을 말아 올리다]
淸凉大法眼, 因 僧齋前上參, 眼 以手指簾. 時有二僧, 同去卷簾. 眼曰, 一得一失.
청량대법안 인 승제전상참 안 이수지렴 시유이승 동거권렴 안왈 일득일실
청량 대법안 선사가 선승들의 점심 공양 전에 상참하였다. 법안 선사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두 선승이 함께 일어나 발을 말아 올렸다. 법안 선사가 말하였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評唱]
無門曰, 且道, 是誰得誰失. 若向者裡 著得一隻眼, 便知淸凉國師敗闕處. 然雖如是, 切忌向得失裡 商量. 무문왈 차도 시수득수실 약향자리 착득일척안 변지청량국사패궐처 연수여시 절기향득실기 상량
자! 일러 봐라. 누가 얻고 누가 잃었는가? 만약 이에 대하여 외눈을 얻었다면 곧 청량 국사의 허물을 알리라. 비록 그러하나 얻고 잃었다고 한 의중을 헤아리는 것을 꺼린다.
[頌]
頌曰. 卷起明明徹太空, 太空 猶未合吾宗, 爭似從空都放下, 綿綿密密不通風 송왈 권기명명철태공 태공 유미합오종 쟁사종공도방하 면면밀밀불통풍
발을 걷으니 환한 하늘이나 훤한 하늘도 선의 근본 아니어라 어찌 그 하늘마저 내던지지 않았나 꼼꼼 촘촘하여 바람도 통하지 않네
[蛇足]
청량 대법안 선사(958년 입적)는 법안종의 祖師 청량원의 문익선사를 말한다. 절에서는 아침을 죽좌(粥坐) 점심을 齋坐 저녁식사를 藥石이라하며 上參이란 조실스님에게 證悟바기위해 입실하는 것을 말하며 입실에는 獨參, 總參, 朝參,午參,晩參이 있다. 得失은 言句요 외눈은 평등지이며 두눈은 차별지이다
제27칙[不是心佛(불시심불)/마음도 부처도 아닌것]
南泉和尙, 因 僧問云, 還有不與人說底法마. 泉云, 有. 僧云, 如何是不與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남전화상 인 승문운 환유불여인설저법마 전운 유 승운 여하시불여인설저법 전운 불시심 불시불 불시물
선승이 남전 선사에게 물었다.
“사람에게 설하지 못한 법이 있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있다.” 선승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못한 법입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니라.”
[評唱]
無門曰, 南泉被者一問, 直得췌盡家私, 郎當不少. 무문왈 남전피자일문 직득췌진가사 낭당불소
남전이 이 한 질문을 받고서 자기 살림살이를 모두 털어놓았으니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頌]
頌曰. 정영損君德, 無言眞有功, 任從滄海變, 終不爲君通 송왈 정영손군덕 무언진유공 임종창해변 종불위군통
친절이 도리어 군자의 덕 손상하니 말문 닫았던들 참 공덕이었을 것을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된다고 해도 나는 결코 그대에게 말하지 않으리
[蛇足]
불립문자라 했는데 세존의 수백의 설법과 공안들은 무엇인가... 정말로 설하지 못하는 법이 있는 것입니까?
마음도 부처도 존재도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설하지 못하는 법을 설한것은 또 무엇인가? 郎當不少는 쓸데없는 짓을 말하며 不是心佛이든 卽心是佛이든 불법은 변하지 않는다.
제29칙 [非風非幡(비풍비번)]
六祖 因 風양刹幡, 有二僧對論, 一云 幡動, 一云 風動, 往復曾未契理. 祖云,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二僧 悚然. 육조 인 풍양찰번 유이승대론 일운 번동 일운 풍동 왕복증미계리 조운 불시풍동 불시번동 인자심동 이승 송연
육조 혜능 선사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두 중을 보았다.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또 한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서로 다투고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였다. 이에 육조 혜능 선사가 말하였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이 말을 듣고 두 중은 깜짝 놀랐다.
[評唱]
無門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不是心動, 甚處見祖師. 若向者裡 見得親切, 方知二僧買鐵得金. 祖師 忍俊不禁, 一場漏逗. 무문왈 불시풍동 불시번동 불시심동 심처견조사 약향자리 견득친절 방지이승매철득금 조사 인준불금 일장루두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무엇이 6조의 견해인가? 만약에 이에 대하여 바로 보아 친하면 두 선승이 쇠를 팔아 금을 얻으려 한 것과 6조께서 참지 못한 것이 한바탕 실수였다는 것을 알리라.
[頌]
頌曰. 風幡心動, 一狀領過, 只知開口, 不覺話墮. 송왈 풍번심동 일장령과 지지개구 불각화타
바람, 깃발, 마음 무엇이 움직이나 하나의 구비를 썩 지나 가면 그가 입을 연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실수였음을 알리라
[蛇足]
찰간의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두고 깃발이 움직이느냐 바람이 움직이느냐 하고 옥신각신한다. 이는 곧 상대적 개념으로 절대경지가 아닌 차별지로 본것이다. 육조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라했다. 육조는 그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가. 선지는 머무름이 없어야된다. 바람에 머무르고 깃발에 머무르고 마음에 머무르면 십만팔천리를 벗어나버린 것이다. 육조가 이것을 모를리 없을텐데 마음이라 했으니... 하지만 두 승의 논쟁을 한마디로 막았다. 선지란 일체속에 평등하다.
제30칙[卽心卽佛(즉심즉불)/마음이 곧 부처]
馬祖 因 大梅問, 如何是佛. 祖云, 卽心卽佛. 마조 인 대매문 여하시불 조운 즉심시불
마조 도일 선사에게 대매 스님이 물었다.
마조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다.”
[評唱]
無門曰, 若能直下領略得去, 著佛衣, 喫佛飯, 說佛話, 行佛行, 卽是佛也. 然雖如是, 大梅引多少人, 錯認定盤星. 爭知道說箇佛字, 무문왈 약능직하영략득법 착불의 끽불반 설불화 행불행 즉시불야 연수연시 대매인다소인 착인정반성 쟁지도설개불자 三日漱口. 若是箇漢, 見說卽心是佛, 掩耳便走. 삼일수구 약시개한 견설즉심시불 엄이변주
만약 능히 이 말을 곧 알아듣는다면,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밥을 먹으며,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동을 하리니 그가 곧 부처이다. 과연 그렇다 하더라도 대매는 여러 사람을 이끌어 저울눈금을 잘못 읽게 했다. 어찌 이르고 설하는 것으로서 부처를 알랴. 삼일간 입을 씻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참으로 된 놈이라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듣고는 귀를 막고 천리는 달아났을 것이다.
[頌]
頌曰. 靑天白日, 切忌尋覓, 更問如何, 抱贓叫屈. 송왈 청천백일 절기심멱 경문여하 포장규굴
푸른 하늘 아래 밝은 태양 절대 뭘 찾아 나서지 말라 다시 부처가 무어냐고 묻는가 훔친 물건을 안고 결백을 외치는 격
[蛇足]
마조선사(788년입적)는 남악회양선사의 제자로 보봉대적마조도일 선사를 말한다. 당시대 선계의 거장으로 120여명의 대선지식을 배출하였고 그 중에서도 백장회해, 남전보원, 천왕도오등이 가장 걸출하였다. 이로부터 선종의 종풍이 전성기를 이루어간다. 이칙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후의 진행된 얘기를 알아야하니 간략하게 알아본다.
즉심시불에 확철대오한 대매선사는 梅子眞의 구은에 은거하여 悟後修行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마조선사가 한 스님을 보내어 대매를 시험한다. 한스님이 대매에게 "스님은 마조스님께 參했을때 무어라고 들었기에 이 산중에 은거하고 무엇을 합니까?" 하니 대매가 대답하기를 "마조스님께서 나보고 '즉심시불'이라고 헀으므로 나는 지금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님이 다시 말하기를 "마조스님은 요즘은 '비심비불'이라 하십니다." 하니 대매는 "노장님(마조), 사람을 혼란케해도 유분수지 비심비불이란 말은 노장님께 맡기고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이다." 이 사실을 마조선사에게 알리니 크게 기뻐하면서 대중앞에서 "매실이 익었구나."하고 선언했다.
즉심시불을 알아들으면 부처요, 하지만 대매는 정반성(저울눈금) 처럼 즉심즉불에 매달려 비심비불을 원융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하지만 실유불성이라 청천백일처럼 명약관하한 사실을 비심비불로 혼란을 주니 즉심즉불로 이를 배격하였구나.
제31칙 [趙州勘婆(조주감파)/조주,노파를 감파하다]
趙州因 僧 問婆子, 臺山路向甚處去. 婆云, 驀直去. 僧 재行三五步. 婆云, 好箇師僧, 又恁마去. 後有僧擧似州. 州云, 待 我去與爾 조주 인 승문파자 대산로향심처거 파운 맥직거 승 재행삼오보 파운 호개사승 우임마거 후유승거사주 주운 대 아거여이 勘過這婆子. 明日便去 亦如是問, 婆亦如是答. 州歸謂衆曰, 臺山婆子, 我與爾勘破了也. 감과저파자 명일변거 역여시문 파역여시답 주귀위중왈 대산파자 아여이감파료야
한 선승이 노파에게 물었다.
“대산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 노파가 대답하였다. “곧장 가시오.” 선승이 몇 발짝 가는데 노파가 말하였다. “점잖은 스님이 또 저렇게 가는구나.” 선승이 조주 선사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자 조주 선사가 말하였다. “가만히 있거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노파를 감파해 보마.” 그 이튿날 가서 선승과 똑같이 물으니 노파 역시 똑같은 대답하였다. 조주 선사가 돌아와서 대중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대산 노파를 감정하여 마쳤노라.”
[評唱]
無門曰, 婆子只解坐籌유幄, 要且著賊不知. 趙州老人, 善用偸營劫塞之機, 又且無大人相. 檢點將來, 二俱有過. 且道, 那裡是趙州 무문왈 파자지해좌주유악 요차착적부지 조주노인 선용투영겁새지기 우차무대인상 검정장래 이구유과 차도 나리시조주 勘破婆子處. 감파파자처
노파는 휘장 속에 앉아서 셈대를 놀릴 줄은 알았어도 도적은 몰랐다. 조주 노장은 겁을 채우는 기지를 구차하리 만치 잘 썼으나 또한 대인의 격이 못된다. 점검해 보면 둘 다 허물이 있다. 일러 보라. 어디가 이 조주 선사가 노파를 감파한 곳인가?
[頌]
頌曰. 問旣一般, 答亦相似, 飯裡有砂, 泥中有刺. 송왈 문기일반 답역상사 반리유사 니중유자
물음이 똑같으니 답도 또한 같을 수밖에 밥 속에 모래가 있고 진흙 가운데 가시가 있다
[蛇足]
대산은 중국의 오대산을 말하며 문수보살의 정토로서 유명한 성지이다. 우리나라도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성지이듯이...
이 오대산의 길목에서 팔순의 할머니가 찻집을 운영하는데 차팔기보다 수행자들 길안내에 더 바빴다. 한 스님이 오대산 가는 길에 찻집 할머니에게 "오대산가려면 어다로 갑니까?"하고 물었다. "곧장 가시오." 하여 스님이 서너걸음가면 "저스님 보게, 어디로 가는 거요?" 하고 핀잔을 준다. 여기서 好箇師僧은 수행이나좀하여 점잖아보이는 스님을 말한다. 아마 할머니의 눈에 수행자란 心外無法이라 자기마음속에서 佛法을찾아야지 성지라해서 모여들어 수행하려하는것이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거량삼아 수작을 걸어보는 것이 아닐까... 곧장가라 해놓고 가면 어디로 가는거요 하고 물으니 변변이 답하는 중 하나없다. 이에 한스님이 조주선사에게 擧似했다.거사란 일일이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조주선사 그 할머니를 찾아가서 똑 같은 질문에 똑같은 행동하고서 바로 되돌아와선 '내가 직접가서 오대산 할머니를 그 스님을 위해서 감파했다."고 의기양양했다. 자 그 스님과 조주선사의 행동이 뭐가 다른가? 똑 같은 물음에 똑같은 행동에 조주선사는 감파했다고 했다. 언구에 걸리지마라. 그 할머니의 속셈과 조주의 속셈은 무엇인가... 밥에 돌이들어있고 진흙에 가시가 들어있다. 다시이르면 이미 조주선사는 그 스님의 얘기를 듣고 할머니의 속셈을 훤히 알고서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했다. 선지에선 언구를 떠나고 차별지와 평등지를 바로보고 불이로 원융하면 그것이 선지이다.
제32칙[外道問佛(외도문불)/외도가 부처에게 묻다.]
世尊 因 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據座. 外道贊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乃具禮而去. 阿難尋問佛, 外道 세존 인 외도문 불문유언 불문무언 세존거좌 외도찬탄운 세존대자대비 개아미운 영아득입 내구예의거 아난심문불 외도 有何所證, 贊歎而去. 世尊云, 如世良馬, 見鞭影而行. 유하소증 찬탄이거 세존운 여세양마 견편영이행
세존에게 외도가 와서 물었다.
“말 있음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습니다. 말없음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에 외도가 말하였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써 미혹의 구름을 열어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찬탄하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아난이 세존에게 물었다.
“저 외도가 무엇을 깨쳤기에 저렇게 찬탄하고 갑니까?” 세존이 말하였다.
“준마는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評唱]
無門曰, 阿難乃佛弟子, 宛不如外道見解. 且道, 外道與佛弟子, 相去多少. 무문왈 아난내불제자 완불여외도견해 차도 외도여불제자 상거다소
아난은 불제자인데 도리어 외도의 견해만 못하구나. 자 어디, 말해 보라. 외도와 불제자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
[頌]
頌曰. 劍刃上行, 氷稜上走, 不涉階梯, 懸崖撒手. 송왈 검인상행 빙릉상주 불섭계제 현애살수
칼날 위를 걷고 얼음의 모서리를 달린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딛지 않고 낭떠러지에서 잡은 손을 놓았네
[蛇足]
外道란 세존재세시 세존 가르침 이외의 학파들을 말한다. 즉 心外無法이 세존의 가르침이라면 心外有法이 外道라 할 수 있다. 據座란 좌에거함 이란 말로 묵묵히 앉아있는것을 말한다. '불문유언 불문무언'에 답이 거좌이다. 절묘하지 않은가...초월된 거좌이니 이를 알아본 외도 또한 시절인연을 만났으니 훌륭하다. 多聞第一인 아난도 깨치지 못했을때이니 선지를 알리 없으니 거리를 얘기 할 것도 없다. 외도의 일촉즉발의 생사의 일검이 몰골송연할 정도다. 하지만 單刀直入으로 頓悟케한 세존의 탁월함은 그 무엇과도 견줄바가 없다.
제33칙[非心非佛(비심비불)]
馬祖 因 僧問, 如何是佛. 祖曰, 非心非佛. 마조 인 승문 여하시불 조왈 비심비불
마조 도일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라.”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見得, 參學事畢. 무문왈 약향자리견득 참학사필
여기서 보는 바가 있다면 공부를 마쳤다.
[頌]
頌曰. 路逢劍客須呈, 不遇詩人莫獻, 逢人且說三分, 未可全施一片 송왈 노봉검객수정 불과시인막헌 봉인차설삼분 미가전시일편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치고 시인이 아니거든 시를 바치지 마라 사람을 만나면 3할 만 설할 것이지 전체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
[蛇足]
마조선사는 佛法의 大意는 卽心卽佛이라더니 이젠 非心非佛이다. 마조선사의 법손인 조주는 개의 佛性을 無라더니 有라한다. 대매선사는 스승인 마조가 즉심즉불이 비심비불로 바뀌었다 해도 자기는 오직 비심비불이라했다. 분별에 머물지 말라.
參學事畢이란 조주선사에대한 칭송이며, 화두란 대기설법으로 근기에 따라 대하며 비심비불처럼 다 들어낸것도 옳지않다는 얘긴데 이러는 無門은 보따리까지 다 보여주는 격이지만 조주선사의 애정이 지나침을 말한 것이다.
제34칙[智不是道(지불시도)/智慧는 道가 아니다.]
南泉云, 心不是佛, 智不是道. 남전운 심불시도 지불시도
남전 보원 선사가 말하였다.
“마음도 부처가 아니며 지혜도 도가 아니니라.”
[評唱]
無門曰, 南泉 可謂, 老不識羞, 재開臭口, 家醜外揚. 然雖如是, 知恩者少. 무문왈 남전 가위 노불식수 재개취구 가추외양 연수여시 지은자소
남전 선사에 대해 말하자면 수치를 무릅쓰고 냄새나는 입을 열어 집안의 추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아는 사람 적으리라.
[頌]
頌曰. 天晴日頭出, 雨下地上濕, 盡情都說了, 只恐信不及. 송왈 천청일두출 우하지상습 진정도설요 지공신불급
맑은 하늘에 해 솟아오르고 비 내린 땅 위는 촉촉하다 모든 정을 쏟아 설하셨으나 다만 믿지 않을까 두렵다.
[蛇足]
마음(心)도 부처(佛)도 도(道)도 지혜(智慧)도 모두 道가 아니라했다. 입을여는 순간 벗어 나버렸다. 道가 道가아니것은 道에머물면 이미 道가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열어 마음도 智慧도 道가아니라는 말을 하는 추태를 부렸다. 추태임을 알면서 추태를 부린 은혜를 모두 알면 좋으련만 하늘이 맑으면 해가 보이는 이치를 손에 쥐어주어도 믿지않으면 다 헛일이다. 동쪽에 구름끼니 서쪽에 비내린다!.
제35칙[천女離魂(천녀이혼)/ 천녀 혼이 떠나다]
五祖問僧云, 천女離魂, 那箇是眞底. 오조문승운 천녀이혼 나개시진저
오조 법연 선사가 한 선승에게 물었다. “천녀의 혼이 떠났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가?”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悟得眞底, 便知出殼入殼, 如宿旅舍. 其或未然, 切莫亂走. 驀然地水火風一散, 如落湯방蟹, 七手八脚. 那時莫言 不道. 무문왈, 약향자리오득진저 변지출각입각 여숙여사 기혹미연 절막난주 맥연지수화풍일산 여락탕방해 칠수팔각 나수막언 부도
만약 여기서 진짜를 깨칠 수 있다면 껍질을 들고나는 것이 객사를 출입하는 것 같음을 알 것이다. 그러한 이치를 모를 양이면 함부로 어지러이 날뛰지 마라. 문득 물 불 바람 흙으로 한번 흩어지면 뜨거운 물솥에 떨어진 게와 같을 것이니 손이 일곱, 발이 여덟인들 어쩔 것인가? 이때 이를 수 없다고도 말하지 마라.
[頌]
頌曰. 雲月是同, 溪山各異, 萬福萬福, 是一是二. 송왈 설운시동 게산각이 만복만복 시일시이
구름과 달은 같고 개울과 산은 각기 다르다 복 많고 복 많은 이들이여 이 하나인가 둘인가
[蛇足]
이제 무문관도 종반을 접어들었다. 조계종 본사에서 늦게나마 화두해설집을 낸것은 고육지계라 할 수 있지만 , 어찌하겠는가?
현실여건이 뒷짐만지고 큰기침이나 하고 있으면서 화두해석은 이러니저러니 하고 있을때 비파사나를 비롯한 유사한 수행법들이 일반화되어 대중속을 파고든지 옛날이다. 화두선 보급을위한 무차대회를 열어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은 때늦은 감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본인이 굳이 간화선만을 수행법으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너무 옥탑방에 가둬놓아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다 수행도 비파사나보다 솔직이 더 어렵다. 이유야 어떻든 이제라도 해설집의 발간은 여러측면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번칙의 천녀이혼은 앞서 선이야기 메뉴에서 다뤘던 중복된 내용중의 하나인데 우선 천녀이혼의 얘기부터 알아야 되니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이 화두는 당나라 시대의 전기(傳記) 소설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형주(衡州)에 사는 장감(張鑑)이란 사람의 장녀에 천녀라는 미녀가 있었고 장감의 외조카인 왕주(王宙)란 미남이 있어서 서로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런데 장감은 후에 딸 천녀를 부잣집 아들인 빈료(賓僚)에게 출가시키기로 했다. 천녀는 한사코 이를 거절했으나 엄한 아버지의 명령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 고민하다가 그만 상사병이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왕주도 화가 나서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 가서 살기로 작정하고 배를 탔다. 강 언덕에 배가 닿으려고 할 무렵 어떤 여자가 "여보!" 하고 부른다. 왕주가 돌아보니 천녀였다. 이게 웬일이냐고 하며 두 남녀는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촉(蜀)으로 가서 두 사람은 5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아들을 하나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녀가 고향 부모를 그리워하며 왕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아들까지 낳았으니 이제와서 부모님도 어쩌지는 못하실 것이니 고향에 돌아가서 부모님께 과거를 사죄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를 간청합시다."라고 하기에 왕주도 이에 동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왕주가 배에서 내려 장인되는 장감을 찾아 뵙고 지난 일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장감은 깜짝 놀라며 하는 말이 "천녀는 그 후 병석에 누워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을 했다. 왕주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문밖에 있는 천녀를 데려오자 병중의 천녀가 이를 맞아 두 천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오조 法演 선사(1104년 입적)는 무문선사가 법손이된다.
여기서는 소설의 내용이나 육신과 영혼의 眞僞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禪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이다. 선지란 相對를 떠나 절대경지의 세계란 것을 주지하면 이 요상한(?)화두도 별개아니다. 여관을 드나들듯이 육신과 혼이 다르지않음을 모르면, 어떠한 삶을 살았던 간에 인간이 죽으면 사대(地水火風)로 분리되어 뜨거운 물속의 게와 같이 사라질것이니 원망치 말라. 달이 있어 구름이 있고 산과 골은 서로 다르다. 절대경지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요, 차별경지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 두 경지 또한 다르지 않으니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어떤가..그저 (禪旨)는 좋고 좋구나.
제36칙[路逢達道(노봉달도)/길에서 달인을 만나다.]
五祖曰, 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 且道, 將甚마對 오조왈 노봉달도인 부장어묵대 차도 장심마대
오조 법연 선사가 말하였다. “길에서 도에 이른 사람을 만났을 때 말이나 묵언으로 상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일러보아라.”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 對得親切, 不妨慶快. 其或未然, 也須一切處著眼. 무문왈 약향자리 대득친절 불방경쾌 기혹미연 야수일체처착안
만약 이에 대해서 친절한 대답을 한다면 어찌 경쾌하지 않으랴. 혹 그렇지 못하다면 모름지기 모든 곳에 주의를 기울이라.
[頌]
頌曰. 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 난시劈面拳, 直下會便會. 송왈 노봉달도인 부장어묵대 난시벽면권 직하회편회
길에서 깨달은 도인을 만나서는 말이나 침묵으로 대하지 말라 뺨을 갈기고 얼굴을 내질러 곧바로 알아보게 하리
[蛇足]
오조법연선사는 達道人 즉 대오각성한 선지식을 길에서 만나면 말로서도 대하지말고 침묵으로서도 대하지 말라고 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信心銘에보면 揀擇(간택/분별)을 꺼린다고 했다. 行住坐臥 語默動靜이 절대평등의 세계로 차별이 없는 세계이니 語默이란 말에 걸리지 말라. 차별과 평등은 相入한다. 무문선사의 정말 친절한 평창이다. 법연선사의 의중을 알면 선지의 경계이니 통쾌하기 짝이없고 그렇지 못하면 일체처에 착안하라 했으니 두눈으로 보지말고 한눈으로 보란 말이다. 하지만 법연선사의 이 화두를 못알아들으면 난시벽면권(뺨을 세차게 갈긴다는 뜻) 하여야 정신을 차리고 알아 들을것이다. 선방에선 깨치는 한 방편으로 지독한 매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제38칙 [牛過窓령(우과창령)/소가 창살을 지나다]
五祖曰, 譬如水고, 牛過窓령, 頭角四蹄 都過了, 因甚마 尾巴過不得. 오조왈 비여수고 우과창령 두각사제 도과료 인심마 미파과부득
오조 법연 선사가 말하였다. “비유컨대 소가 창살(외양간) 사이로 지나갈 때 머리와 뿔, 네 발은 모두 나왔는데 꼬리가 나오지 못한 것과 같으니 무엇 때문에 꼬리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가?”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 顚倒著得一隻眼, 下得一轉語, 可以上報四恩, 下資三有. 其或未然, 更須照顧尾巴 始得. 무문왈 약향자리 전도착득일척안 하득일전어 가이상보사은 하자삼유 기혹미연 경수조고미파 시득
만약 이에 대하여 뒤집어 외눈을 얻어서 바른 한마디를 한다면 위로는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할 것이고 아래로는 세 가지 존재에 보탬을 주리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꼬리를 비추어 보아야 비로소 얻으리라.
[頌]
頌曰. 過去墮坑塹, 回來却被壞, 者些尾巴子, 直是甚奇怪. 송왈 과거타갱참 회래각피괴 자사미파자 직시심기괴
지나가면 구렁에 빠지고 돌아가면 부서질 터 이 꼬리란 놈 심히 기괴하구나
[蛇足]
왜? 무엇 때문에, 꼬리에걸려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구나.... 정말 난감하다. 끝임없는 의단으로 참구해 나가야할 것이다. 꼬리가 중생심의 차별을 일으켜 천지가 깜깜하다. 사실 공안을 풀려면 걸리는 언구를 평등지에서 보면 쉽게 풀린다. 하지만 머리로서 이해하려들면 감옥속이다. 저 꼬리는 이름뿐이다. 머리도 뿔도 네 발도.... 萬有一體라. 나오고 들어감이 무엇인고!
一隻眼(일척안)이란 외눈(한쪽눈/ 평등지 : 무분별지)을 말한다. 즉 두눈으로보면 입체적으로 보여 분별하니 한쪽눈으로 보아 그 뜻을 깨우쳐 말한다면 사은(부모,국가,스승,중생)에 보답하고 삼유(삼계:욕계,색계,무색계)도 초월된다. 그렇지 않으면 깊이 조고하면 언젠가 깨우칠 것이다.
제39칙[雲門話墮(운문화타)/말에 떨어지다]
雲門 因 僧問, 光明寂照遍河沙. 一句未絶, 門遽曰, 豈不是張拙秀才語. 僧云, 是. 門云, 話墮也. 後來死心 拈云, 且道, 那裡是者僧 운문 인 승문 광명적조편하사 일구미절 문거왈 기불시장졸수재어 승운 시 문운 화타야 후래사심 점운 차도 나리시자승 話墮處. 화타야
운문 문언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모래와 같은 세계에 광명이 고요히 두루 비침이여...” 하고 다음 귀절을 아직 채 읽기도 전에 운문 선사께서 급히 말하였다.
“아니 그것은 장졸수재의 말이 아니냐.” 선승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운문 선사가 말하였다. “말에 떨어졌느니라.” 후에 사심 선사가 이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일러라. 어디가 이 선승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 見得 雲門用處孤危, 者僧因甚話墮, 堪與人天爲師. 若也未明, 自救 不了. 무문왈 약향자리 견득 운문용처고위 자승인심화타 감여인천위사 약야미명 자구 불료
만약 이에 대하여 홀로 높은 운문 선사의 용처와 이 선승이 무슨 말에 떨어졌는가를 보아 얻으면 충분히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겠지만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자신도 구하지 못하리라.
[頌]
頌曰. 急流垂釣, 貪餌者著, 口縫재開, 性命喪却. 송왈 급류수조 탐이자착 구봉재개 성명상각
급류에 낚시를 드리우니 먹이를 탐하는 놈들이 걸린다 입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蛇足]
死心은 死心悟新선사를 말하며 장졸수재는 석상선사에게 서 得悟한 사람으로 '광명적조변화사 ~...'는 그의 득오후의 偈頌이다. 운문선사는 장졸수재의 偈를 다 읊기도 전에 잘못되었다며 말문을 막아버렸다. 말에 떨어진 곳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절대평등지에서는 분별이 없음은 익히 아는바이나 체험하여 얻어보라.
孤危란 험준한 산꼭대기에 앉은 자세를 말하는데 백척간두에 선것과 같은 말로 진퇴유곡의 위험천만이지만 최고 정상의 자리로 굳건히 자리한 상태다. 운문의 용처와 배속을 알면 대도사요 모르면 자신도 구제못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마 이 승은 얕은 지식으로 운문선사와 법거량 할 요양 이었던 모양이다. 운문선사가 누군가... 되려 운문의 낚시에 걸렸으니.....
제40칙[적倒淨甁(적도정병)/정병을 걷어차다]
위山和尙, 始在百丈會中 充典座. 百丈 將選大위主人, 乃請同首座對衆下語, 出格者 可往. 百丈遂拈淨甁置地上, 設問云, 不得喚 위산화상 시재백장회중 충전좌 백장 장선대위주인 내청동수좌대중하어 출격자 가왕 백장수점정병취지상 설문운 불득환 作淨甁, 汝喚作甚마.首座乃云, 不可喚作木突也. 百丈却問於山.山乃적倒淨甁而去. 百丈笑云, 第一座輪却山子也. 因命之爲開山 작정병 여환작심마 수좌내운 불가환작목돌야 백장각문어산 산내적도정병이거 백장소운 제일좌수각산자야 인명지위개산
위산 화상이 백장 선사 회상에서 전좌역을 맡고 있을 때였다. 백장 선사가 대위산의 주인을 선발하는데 수좌를 비롯한 대중에게 격을 초월한 이를 보내겠다고 하고 정병을 땅 위에 놓고 말하였다.
“이것을 정병이라 불러서는 아니 된다. 너희는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수좌가 말하였다. “장작이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백장 선사가 위산 화상에게 물으니 위산 화상은 정병을 차버리고 나갔다. 백장 선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수좌가 촌놈에게 졌다..” 그리고는 위산 화상을 개산조로 삼았다.
[評唱]
無門曰, 위山一期之勇, 爭奈跳百丈圈궤不出. 檢點將來, 便重不便輕. 何故, 니. 脫得盤頭, 擔起鐵枷. 무문왈 위산일기지용 쟁나도백장권궤불출 점검장래 편중불편경 가고 니 탈득반두 담기철가
순간적으로 발한 위산의 능력이니 어찌 백장 선사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랴. 살펴보면 무거운 데에도 가벼운 데에도 속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가? 그물을 벗어났다 하면 도리어 쇠 멍에를 메는 것이로다.
[頌]
頌曰. 下 籬幷木杓, 當陽一突絶周遮, 百丈重關欄不住, 脚尖적出佛如麻. 송왈 양하조리병목표 당양일돌절주차 백장중관란부주 각첨적출불여마
조리와 바가지를 던져버리고 힘차게 나아가 어수선한 논의를 잘라버렸다 백장의 여러 관문도 그를 막지 못했으니 발끝에 차여 흩어지는 수많은 부처들
[蛇足]
위산은 위앙종을 창설한 潭州의 위산영우 선사(853년입적)를 말한다. 전좌는 밥짓는 역할을 하는 공양주를 말하고 수좌는 상좌(제일좌)를 말한다. 정병(물병)이란 무언가?
절대평등지에선 일체라 이름이 없다. 백장의 뱃속을 꿰뚫은 위산의 뱃짱이 갸륵하다. 대위산의 주인이라는 힘든 멍에를 짊어졌으며 위산의 禪力은 부처도 못당하리라.
제41칙[達磨安心(달마안심)/마음을 가져오너라]
達磨面壁. 二祖立雪 斷臂云, 弟子心未安, 乞師安心. 磨云, 將心來, 與汝安. 祖云, 覓心 了不可得. 磨云, 爲汝安心竟. 달마면벽 이조입설 단비운 제자심미안 걸사안심 마운 장심래 여위안 조운 멱심 요불가득 마운 위여안심경
달마 대사가 면벽을 하고 있을 때, 2조 혜가가 눈 위에 서서 칼을 빼어 팔을 자르고 말하였다. “제자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오니 바라건대 스승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
달마 대사가 말하였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를 위하여 편안하게 해 주리라.” 2조가 말하였다.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달마 대사가 말하였다. “그대를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했노라.”
[評唱]
無門曰, 缺齒老胡, 十萬里航海, 特特而來. 可謂是無風起浪. 末後接得一箇門人, 又却六根不具.익, 謝三郎 不識四字. 무문왈 결치노호 십만리항해 특특이래 가위시무풍기랑 말후접득일개문인 우각육근불구 익 사삼랑 불식사자
이 빠진 노호가 십만 리를 항해하여 특별히 오셔서 바람 없는 곳에 파도를 일으켰다 하리. 최후에 문 안의 한 제자를 얻었으나 그가 육근(六根)에 있어서 불구라 할 것이니. 허 참! 그러나 세 벼슬(법신, 보신, 화신)까지 끊어 버렸으니 사대 육신 따위 알 바 아니라네.
[頌]
頌曰. 西來直指, 事因囑起, 撓괄叢林, 元來是爾. 송왈 서래직지 사인촉기 요괄총림 원래시이
서쪽에서 와 곧바로 가리킨 것 그 부촉으로 하여 사단이 벌어졌네 총림을 소란시킨 장본인이 본시 너 아니더냐
[蛇足]
해동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원효대사 께서는 求法차 당나라로 가던길에 해골바가지의 물을통해 .'一體唯心造'를 깨달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마음작용이란 것이다. 세계 어느종교를 막론하고 마음을 주제로 삼지않는 종교는 없을것이다. 하지만 禪에서는 모든 존재는 일시적 현상이라 그 상(마음)은 일단 부정한다. 그 부정된 것은 절대 평등지로 나를 버림으로서 일체만유가 하나로 평등하여 일체 차별이 없으며 하나라는 것도 인정치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선이란 평등지인 절대적 경지에 머물러있어서는 안된다. 일종의 中道로서 차별지(현상계)를 떠나고 평등지를 관하며 그 평등지에도 머물지 말고 차별지와 相入한다. 그래서 현상계의 실체를 보며 우주를 꿰뚫어 보는 것이 선이다. 그래서 평등지(깨달음)뒤의 차별지는 현상계를 인정하지만 탐진치 삼독을 여읜 상태의 현상계이므로 이 단계가 平常心是道요 卽心卽佛, 非心非佛의 세계다.
혜가의 그 찾을수 없는 마음이란 존재를 비로소 알아 차리게하니 무심을보아 편안함이니 이를 아는 인연을 이루게하였다. 불법의 대의를 얻음에 목숨도 걸어야 할 것인데 사지하나쯤 잃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달마의 西來義로 禪과 敎의 시비를 일으켰으나 그 공덕은 지대하다는 반어법.
제42칙[女子出定(여자출정)/삼매에서 깨우다]
世尊, 昔因文殊 至諸佛集處, 値諸佛各還本處. 惟有一女人, 近彼佛坐, 入於三昧. 文殊乃白佛云 何女人 得近佛坐, 而我不得. 佛告 세존 석인문수 지제불집처 치제불각환본처 유유일여인 근피불자 입어삼매 문수내백불운 하여인 득근불자 이아부득 불고 文殊, 汝但覺此女, 令從三昧起, 汝自問之. 文殊요女人三잡, 鳴指一下, 乃托至梵天, 盡其神力 而不能出. 世尊云, 假使百千文殊, 문수 여단각차녀 영종삼매기 여자문지 문수요여인삼잡 명지일하 내탁지범천 진기신력 이불는출 세존운 가사백천문수 亦出此女人定不得. 下方 一十二億河沙國土, 有罔明菩薩, 能出此女人定. 須臾 罔明大士, 從地湧出, 禮拜世尊. 世尊勅罔明. 却至 역출차여인정부득 하방 일십이억하사국토 유망명보살 능출차녀인정 수유 망명대사 종지용출 예배세존 세존칙망명 각지 女人前, 鳴指一下, 女人 於是 從定而出. 여인전 명지일하 여인 어시 종정이출
세존께서 계시던 때 문수가 모든 부처님 모인 곳에 이르니 모든 부처님께서 각기 본래 처소로 돌아갔는데 다만 한 여인만이 부처님 가까이에서 삼매에 들어 있었다. 이에 문수가 부처님께 물었다. “왜 여인은 부처님 가까이 있는데 저는 그러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하였다. “이 여인을 삼매로부터 깨워 그대가 직접 물으라.” 문수가 여인을 세 번 돌고 손가락을 한 번 탁 퉁겨서 범천(梵天)에 이르러 그 신통력을 다해도 깨울 수 없었다. 세존께서 말하였다.
“가령 백천의 문수라도 이 여인을 정(定)에서 나오게 하지는 못하리라. 아래로 12억이란 모래 수와 같은 국토를 지나 망명(罔明) 보살이 있는데 그가 능히 이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잠깐 사이에 망명 보살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세존께 예배를 하였다. 세존께서 망명에게 명을 내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퉁기자 여인이 정에서 깨어났다.
[評唱]
無門曰, 釋迦老子 做者一場雜劇, 不通小小. 且道, 文殊 是七佛之師, 因甚出女人定不得. 罔明 初地菩薩, 爲甚却出得. 若向者裡見 무문왈 석가노자 주자일장잡극 불통소소 차도 문수 시칠불지사 인심출여인정부득 망명 초지보살 위심각출득 약향자리견 得. 親切, 業識忙忙 那伽大定. 득 친절 업식낭낭 나가대정
석가 늙은이가 일장의 잡극을 연출했으나 조금도 통하지 못했다. 일러 보라. 문수 보살은 일곱 부처의 스승이거늘 왜 이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없었으며 망명은 초지의 보살인데 어째서 나오게 할 수 있었는가? 만약 이에 대하여 바로 보아 친하면 망망한 업식이 나가대정이리라.
[頌] 頌曰. 出得出不得, 渠농得自由, 神頭幷鬼面, 敗闕當風流. 송왈 출득출부득 거농득자유 신두병기면 패궐단풍류
깨우든 못 깨우든 그 놈의 자유다 귀신 머리 귀신 낯이여 허물 그대로 풍류임을
[蛇足]
난제다. 문수는 과거 칠불의 스승이었는데 그런그가 백 천의숫자라도 깨우지 못한다고하며 항하강모래숫자의 십이억배의 국토를지나 있는 망명이라는 초지보살은 여인을 깨울수 있다한다. 여기서 선에서는 시공을 초월하기때문에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수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깨어나지 않는것을, 백 천의 문수가 아니라 세존본인이라도 못깨울 것이다. 말에게 물을 먹이는것은 억지로 되지 않는법이며 망명보살도 의미가 없다. 깨우고 못깨우는 것은 선지에서 의미없는 말이다. 말이 목이마르면 스스로 물을 찾는다.
제43칙[首山竹비(수산죽비)]
首山和尙, 拈竹비示衆云, 汝等諸人, 若喚作竹비則觸.不喚作竹비則背. 汝諸人 且道,喚作甚마. 수산화상 점죽비시중운 여등제인 약환작죽비즉촉 불환작죽비즉배 여제인 차도 환작심마
수산 성념 선사가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너희들, 만일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범하는’ 것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는’ 것이다. 어디 말해보라. 무어라고 불러야 하겠느냐.”
[評唱]
無門曰, 喚作竹비則觸, 不喚作竹비則背. 不得有語, 不得無語, 速道速道. 무문왈 환작죽비즉촉 불환작죽비즉배 부득유어 부득무어 속도속도
죽비라고 부르면 경계를 이루게 되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을 해도 안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얼른 말해보라, 말해보라.
[頌]
拈起竹비, 行殺活令, 背觸交馳, 佛祖乞命. 점기죽비 행살활영 배촉교치 불조걸명
죽비를 들어올려 죽고 사는 영을 내렸다 경계를 이룬다 하겠느냐 등진다 하겠느냐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구걸할 판
[蛇足]
수산선사(993년입적)는 汝州의 首山省念선사를 말한다. 죽비라부르면 觸하고 즉 저촉되어 범하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背 즉, 위배된다고 했다. 여기서는 죽비가 관건이다. 죽비가 무언가? 죽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죽비 또한 인간들이 편리상 붙인 이름 뿐인 것을 알아야한다. 무어라고 불러야 될까... 화두가 다 그렇듯이 이 칙 또한 언구로 진퇴양난이다. 죽비하나로 꼼짝도 못하게 옭매여 놓았다. 하지만 선지에선 일체가 다 空으로 존재의 否定이니 虛名임을 알고 또 그 허명이 虛名 아님을 알아야하니 죽비 또한 다를바 없다.
제44칙[芭蕉주杖(파초주장)/파초의 주장자]
芭蕉和尙 示衆云, 爾有주杖子, 我與爾주杖子, 爾無주杖子, 我奪爾주杖子. 파초화상 시중운 이유주장자 아여이주장자 이무주장자 아탈이주장자
파초 혜청 선사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내 주장자를 주리라.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빼앗으리라”
[評唱]
無門曰, 扶過斷橋水, 伴歸無月村. 若喚作주杖자 入地獄如箭. 무문왈 부과단교수 반귀무월촌 약환작주장자 입지옥여전
의지해 다리가 끊긴 물을 건넜고, 벗삼아 달 없는 마을을 찾아들었다네. 만약 주장자라 부르면 지옥에 화살같이 들어가리라.
[頌]
頌曰. 諸方深與淺, 都在掌握中, 撑天幷 地, 隨處振宗風. 송왈 제방심여천 도재장악중 탱천병주지 수처진종풍
이 모두가 내 손안에 있다 하늘을 괴고 땅을 떠받쳐 이르는 곳마다 종풍을 휘날린다
[蛇足]
파초선사는 백제사람으로 일찌기 당나라에 들어가 위앙종을 창설한 앙산의 법손이다. 중국선종의 四祖 道信의 법을 이은 신라의 법랑 선사가 650년에 선종을 신라에 도입했는데 파초선사는 그 이전에 중국에 들어갔지만 국내에 다시 돌아온 기록이없다. 파초선사가 대중들에게 말한 이 공안은 한마디로 숨통을 그대로 조여버린 형색이다. 앞선 칙에도 언급되었지만 진퇴유곡의 언구다. 어떻게 수습할까? 우리의 상식은 없는자는 필요하고 있는자는 불필요한데 이건 완전히 역행이다. 이것이 바로 言語道斷이 아닌가.
여기서도 언구는 즉 상식은 일호의 가치도 없다. 언구를 초월한 절대적 경지, 禪旨에서 보면 우선 주장자의 정체다. 이 주장자는 그냥주장자가 아니다. 여기엔 나를여읜 일체의 절대적인 경지의 대상이다. 즉 진리의 당체인 것이다. 다만 나툼자체를 편의상 주장자란 虛名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있고 없고의 분별이 있을수 없고 주고 빼앗을 분별이 어디있겠는가....
禪이란 自我의 否定속에서 그를 초월(절대 평등지)하고 그 부정을 부정함, 즉 초월을 현상계에 재 비춤으로서 현상계의 당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평상심시도이다. 그래서 그 주장자라는 것은 가명이니 차별지(현상계)의 주장자가 아니고 초월된 절대평등지의 當體이니 다리없는 강물 건널땐 다리요 그믐밤엔 횃불이되고 하는 것은 자유자재다. 물론 이것도 편의상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상황이니 이 주장자의 정체를 모르면 바로 지옥이다. 지옥 천당은 어떤곳인가. 心外無法이라 禪에선 다 내안에있다. 즉 모든법은 내안에 있는 것이니 주장자의 정체를 알면 천당이요 모르면 바로 현상계의 無明속이니 생노병사우비뇌고에 허덕이는 지옥인 것이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이러한 상황을 주장자 하나로서 결정을 지우니 파초선사의 위력은 정말로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 칙에선 언설을 많이 할애하였는데 조금만 觀하면 알음알이로도 충분히 得할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실로 체험하지 못하면 독이 될 수 도있으니 여러분은 꼭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일어나는 허상의 의 정체를 파악하시기 바람니다. 이것이 뭣 인고!!!
제45칙[他是阿誰(타시아수)/그는 누구냐]
東山演師祖曰, 釋迦彌勒 猶是他奴. 且道, 他是阿誰. 동산연사조왈 석가미륵 유시타노 차도 타시아수
동산 연사 선사가 말하였다.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놈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評唱]
無門曰, 若也見得他分曉, 譬如十字街頭 撞見親爺相似, 更不須問別人道 是與不是. 무문왈 약야견득타분효 비여십자가두 당견친야상사 경불수문별인도 시여불시
만일 그를 분명히 알아본다면, 마치 네거리에서 찾던 아버지를 만난 것과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를 묻지 않느니라.
[頌]
頌曰. 他弓莫挽, 他馬莫騎, 他非莫辨, 他事莫知. 송왈 타궁막만 타마막기 타비막변 타사막지
다른 이의 활을 당기지 말고 다른 이의 말을 타지 말라 다른 이의 잘못을 말하지 말고 다른 이의 일을 알려하지도 말라
[蛇足]
동산연사조는 오조법연 선사를 말하며 무문선사가 그의 오세 법손이라 師組라 칭했다. 이 공안은 개성각로라는 스님이 오조법연선사를 찾아와서 청하기를
"잘가르쳐 주십시오."하니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胡張三黑李四(이씨나 김씨입니다)" 이에 법연선사는 맞았다고 許했다. 그런데 그의 같은 회하에 있던 圓悟佛果(벽암록의 저자) 선사는 이 얘기를 듣고는 각로스님에게 말했다.
"그 대답은 좋기는 하나 아직 미숙하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다음날 각로가 다시 법연선사에게 입실하니 법연선사는 어제물은 질문을 다시물었다.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그것은 어제 스님께서 물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제 무어라고 대답했는가?" "호장삼흑이사라고 대답 했습니다."하니 "틀렸어, 틀렸어." "어제는 맞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맞았지만 오늘은 맞지 않았어." 이에 개성각로스님은 대오했다고 한다.
본칙에서 세존이나 미륵부처를 그놈의 종이라고 했다. 他 즉 그놈은 도대체 누군가가 이칙의 관건이다. 각로가 이씨나 김씨라고 대답하니 맞았다고 했다가 뒷날은 틀렸다고 했다. 우선 장삼이사는 우리의 갑남을녀와 마찬가지로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즉 우리중생이다. 중생의 종놈이라는 것인데 틀리지 않은 말이 아닌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것이 불보살의 本願이니 틀린말이 아니다. 왜 현대의 대통령도 국민의 심부름꾼이라고 하지않는가. 하지만 그정도의 대답을 바란것은 아니다. 석가니 미륵이니 부처니 이것이다 무언가? 그리고 갑남을녀 장삼이사는 무엇인가? 석가니 미륵이니 하는것은 명칭이 그러한 것일 뿐이다. 장삼이사는 모두 悉有佛性이다. 즉 그놈이란 불성즉 眞我를 말한다.
他란 누구인가? 이를알면 본래의 나인 참나를 찾았으니 일러 뭣하겠는가? 無明을 걷어내고 미생전 본래모습을 찾았으니... 그래서 그놈이란 他 즉 남이아니고 나(我)인것이다. 남에게 신경쓰지말고 우선 자신의 일부터 먼저 하라는 頌이다. 자기자신을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모미생전 본래모습을 찾는것이.....
제46칙[竿頭進步(간두진보)/장대 끝에서 앞으로가다]
石霜和尙云, 百尺竿頭, 如何進步. 又古德云, 百尺竿頭坐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現全身. 석상화상운 백척간두 여하진보 우고덕운 백척간두좌저인 연수득입미위진 백척간두수진보 시방세계현전신
석상 경제 화상이 말하였다. “백 척 되는 장대 끝에서 어떻게 걸어 나갈 것인가? 옛 어른들께서는 백 척 되는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참경지에 들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백 척 된 장대 끝에서 앞으로 나아간 이라야 시방세계가 온통 자신의 몸 나툼이리라.”
[評唱]
無門曰, 進得步, 번得身, 更嫌何處 不稱尊. 然雖如是, 且道, 百尺竿頭, 如何進步. 애. 무문왈 진득보 번득신 경혐하처 불칭존 연수여시 차도 백척간두 여하진보 애
걸음을 내딛고 몸을 뒤집으면, 이르는 곳마다 거룩하다는 칭송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디 말해보라. 백 척의 장대 끝에서 어떻게 내디딜 것인가. 어허!
[頌]
활却頂門眼, 錯認定盤星, 拌身能捨命, 一盲引衆盲. 활각정문안 착인정반성 반신능사명 일맹인중맹
정수리의 눈을 멀게 하고 저울눈금을 잘못 읽는다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짓이니 한 맹인이 뭇 맹인을 이끄는 것일세
[蛇足]
석상화상(1040년입적)은 담주석산의 경제(慶諸)선사를 말하고 고덕은 남전선사 문화의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를 말한다.
'백척간두에서 어떻게 걸을 것인가?' 이칙은 이미 본카페에서 여러번 인용되었던 공안이다. 이젠 다 아시겠지만 평등지에선 言句를 떠나야되니 백척이나 일척이나 高低長短은 의미가 없다. 무분별의 평등의 세계이니 백척간두가 저 푸른 초원이 될수도 있음이다. 그러니 간두에 앉거나 진일보하는 것은 백척간두의 의미를 알면 가소롭기가 짝이없는 언구들이다. 문제는 체험으로서 터득하는것이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를 체득한다면 시방세계에 현신하며 이르는 곳마다 칭송을 받을 것이니 자 이제 말해보라.
정문안이란 외짝눈을 말한다. 평등지는 한눈으로 보아야한다. 두눈은 분별을 일으키니 한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두눈으로 보기전에 한눈으로 평등지를 관한후에 두눈으로 본다면 저울 눈금을 잘못 읽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몸과 목숨을 던져 죽을 각오로 수행을 하여야 평등지를 얻을 수 있으니 잘못하면 한맹인이 무리의 맹인을 이끄는 것과 같이 한사람의 잘못으로 전부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제47칙[兜率三關(도솔삼관)/ 도솔의 세관문]
兜率悅和尙, 設三關 問學者, 撥草參玄, 只圖見性, 卽今上人 性在甚處. 識得自性, 方脫生死, 眼光落時, 作마生脫. 脫得生死, 便知 도솔열화상 설삼관 문학자 발초참현 지도견성 즉금상인 성재심처 식재자성 방탈생사 안광낙시 작마생탈 탈득생사 변지 去處, 四大分離, 向甚處去. 거처 사대분리 향심처거
도솔열 선사께서 도를 배우는 이에게 세 가지 통과해야 할 법문을 베풀어 물었다.
“번뇌의 풀을 헤치고 깊은 이치를 참구하는 것은 다만 견성(見性)하기 위한 것이니 지금 그대의 성품(性品)은 어디에 있는가?” “자성(自性)을 알았다면 곧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을 것이니 눈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해탈하려는가?”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다면 가는 곳을 알 것이니 물 불 바람 흙이 각기 흩어지면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評唱]
無門曰, 若能下得此三轉語, 便可以隨處作主, 遇緣卽宗. 其或未然, 추餐易飽, 細嚼難飢. 무문왈 야능하득차삼전어 변가이수처작주 우연즉종 기혹미연 추손이포 세작난기
만약 능히 이 세 질문에 바로 이를 수 있다면 곳곳마다 주인이리니 연(緣)을 대하는 것이 곧 근본이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거친 음식은 배부르기 쉬우며 잘게 씹으면 굶주림을 면키 어려우니라.
[頌]
一念普觀無量劫, 無量劫事卽如今, 如今처破箇一念, 처破如今처底人. 일념보관무량겁 무량겁사즉여금 여금처파개일념 처파여금처저인
한 생각에 무량겁을 꿰뚫어 보니 무량겁의 일이 지금 여기에 있구나 이 한 생각을 뚫어볼 수 있다면 지금 꿰뚫어 보는 자를 꿰뚫어 볼 수 있으리
[蛇足]
도솔열스님(1091년 입적)은 황룡파의 융흥부 도솔열 선사를 말한다. 제1관에서 발초참현의 초는 번뇌, 망상, 아집을 말하고 참현은 불법으로 보면된다. 참선은 견성하기위함인데 그대(上人)의 性은 어디있는가? 글세요 어디에 있을까... 마음 안도 아니요 밖도 아니요 중간도 아니라했다. 且道!
제2관은 自性을 알았다면(제1관을 통과 했다면)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인데 눈빛이 떨어질때(죽을때) 어떻게 벗어나는가?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 하지만 見性을 하면 生卽死 死卽生으로 無始無終이요 不生不滅이라 했으니 어떻게 벗어 날것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없이 생사를 초월한 自性이 자유롭기만 하구나.
제3관은 생사를 초월했다면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죽으면 사대(地,水,火,風)으로 분리된다고 했는데 이 사대가 흩어지면 어디로가는가? 일체가 緣에의하여 작용하니 사대가 모이면 생이요 흩어지면 죽는다. 禪에서는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영혼과 육신을 따로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성 즉 當體(眞我)는 如如하여 오고감이 없이 언제나 그 자리로다.
삼관을 통과하면 천하에 주인공으로 자유로우며 그렇지 못하면 매사에 걸림이 많을것이다. 일념에 무량겁을 觀하니 무량겁이 지금의 일이라 이를 관하는자를 볼수 있을 것이다.
제48칙[乾峯一路(건봉일로)]
乾峰和尙, 因僧問, 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 未審路頭在甚마處. 峰拈起주杖 劃一劃云, 在者裡. 後僧請益雲門. 門拈起扇子云, 건봉화상 인승문 시방박가범 일로열반문 미심노두재심마처 봉점기주장 획일획운 재자리 후승청익운문 문점기선자운 扇子발跳 上三十三天, 築著帝釋鼻孔. 東海鯉魚, 打一棒 雨似盆傾. 선자발조 상삼십삼천 축착제석비공 동해이어 타일봉 우사분경
건봉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시방의 제불은 모두 열반의 문으로 간다 하셨는데, 대체 그 길은 어디 있습니까.” 건봉 선사가 주장자를 잡아 일으켜 한 번 긋고 말하였다.
“여기 있다.” 나중에 그 선승이 운문 선사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운문선사가 부채를 들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부채가 튀어올라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이르러, 제석(帝釋)의 콧구멍을 쑤셨다. 동해의 잉어를 쳤더니 동이를 기울인 듯 큰 비가 쏟아졌다.”
[評唱]
無門曰, 一人 向深深海底行, 파土揚塵. 一人 於高關山頂立, 白浪滔天. 把定放行, 各出一隻手, 扶竪宗乘. 大似兩箇馳子 相撞著, 무문왈 일인 향심심해저행 파토양진 일인 어고관산정립 백량도천 파정방행 각출일착수 부수종승 대사양개치자 상당착 世上應無直底人. 正眼觀來, 二大老 總未識路頭在. 세상응무직저인 정안관래 이대노 총미식노두재
한 사람은 깊고깊은 바다 속에서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고, 한 사람은 높디높은 산꼭대기에서 허연 파도를 일으킨다. 정(定)을 지키고 행(行)을 놓아, 각각 한 손을 내서 종승(宗乘)을 붙들어 세웠다. 흡사 두마리 말이 맞부딪친 것 같으니 세상에는 이를 간파한 사람이 없으리라. 바른 눈으로 보건대 두 늙은이는 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頌]
未擧步時先已到 / 미거보시선이도 未動舌時先說了 / 미동설시선설요 直饒著著在機先 / 직요착착재기선 更須知有向上竅 / 경수지유항상규
발을 들기 전에 이미 이르렀고 혀를 움직이기 전에 말해 마쳤다 곧 넉넉히 저절로 착착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다시 향상의 도리가 있음을 알라
[蛇足]
벌써 무문관도 이제 마지막 칙이다. 그동안 보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얕은 알음알이로 감히 사족을 단 누를 어여삐 여겨주시고 다행이 화두나 공안이라는 것이 나와는 별개인 범접하기 힘든 어려운 것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한번 도전해 볼만한 것이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일으켰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동국대 성본 교수(스님)는 '이뭣고'는 화두가 아니고 참 화두는 '무'자라고 주장해 논란의 소지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즈음에 무문관은 더 의미가 있지않나 하는 생각도 가져보면서 마지막 사족을 달아봅니다.
조동종의 창시자인 동산 양개의 제자이며 운문은 건봉선사의 제자이다. 박가범은 불법이나 부처로보면된다. 온세상의 부처들이 열반문으로 가는데 그 길머리가 어디냐는 것이다. 이에 건봉선사는 허공에 한줄을 긋고 여기있다하고 운문은 부채가 틔어올라 제석천의 콧구멍을 쑤시고 동해잉어를 치니 물동이 기울이듯 비가 쏟아진다고 했다.
두 대답이 다 황당하기가 비슷하다. 무문관을 시작하면서 부터 얘기한것이 언구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끝으로 다시 강조하는데 선이란 절대 평등지로, 무차별 무분별의 세계로 언어나 문자를 초월한 세계임을 알고 이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공에 줄을 그은것이나 부채가 제석천의 콧구멍을 쑤시던 입을 쑤시던 동해아니고 서해 잉어를 치던 말던 비가 오던말던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 평등지에선 어던 아던 순간에 마음이 하나로 통해버리기 때문에 그 한순간 서로의 마음의 통함같은 것이겠지요. 이는 아주 부분적일지라도 스스로의 체험만이 열쇠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수행이 깊은분은 전광석화같이 찰나에 통할것이고 부족한 분들은 마음의통함이나 이해가 늦을것이니 더욱 용맹 정진을 해야겠지요.
평창부분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바다속먼지나 산꼭대기 파도나 물속에서 불이나도 상관없습니다. 원리를 체득하면 선이란 온우주가 내손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頌에 강조하듯이 이런정도의 체득에 머물면 절대로 안되니 정진 또 정진하라는 경책의 송이다. 자 이젠 서서히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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