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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전라 중조방장(全羅中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경기(京畿)로 향하다.
○ 창녕(昌寧)ㆍ청도(淸道)의 적이 절도사라 자칭하고, 밀양(密陽)의 적은 군왕이라 자칭하고 일시에 올라오면
서 길을 닦는다 하다.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옴.
○ 이러한 통분하고 해괴한 말들을 보니 이 적을 만세에 잊을 수 없다 하겠다.
○ 적이 영천(永川)으로부터 봉고어사(封庫御史)라 칭하고 신녕(新寧)으로 향하는데 안동(安東)의 병장 권응수
(勸應銖)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誠) 등과 더불어 박연(朴淵)에서 적을 만나서 크게 이겨
벤 것이 매우 많고 병기와 돈과 곡식과 문서 등 물건을 빼앗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영천의 의병(義兵)과 선비들이 본 고을에 둔(屯)치고 있는 적을 멸하기를 도모하여 계책을 이미
정하고 권응수ㆍ홍천뢰(洪天賚)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다. 응수가 두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신해(申海)ㆍ
정대임ㆍ조성 등과 영천으로 나아가서 추평(楸坪)에 있는 적에게 군사의 위엄을 보여 추격하여 강변(江邊)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고 다음날에 또 그와 같이하였더니 적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또 다음날에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나아가 포위하여 성문을 쳐부수고 북치고 부르짖으며 들어가니 적이 황급
하여 달아나 관사(官舍)로 들어갔으므로 바람을 따라 불을 질러 거의 다 태워 죽이고 혹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으며, 수백여 급(級)을 베다.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치계(馳啓)하여 응수는 통정대부에 승급되고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 여러 사람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기를 등차(等差)가 있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3일. 김면(金沔)이 지례(知禮)에 둔친 적을 토벌하여 거의 다 태워 죽이다. 전라도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함께 다 태워 죽이다.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도 5천여
명이다. 남은 적이 도망하여 성주(星州)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군사가 무찔러서 남김 없이 멸하다.
이때에 김면은 거창(居昌)에 주둔하여 지례ㆍ금산(金山)의 길을 막고 정인홍(鄭仁弘)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
(高靈)ㆍ합천(陜川)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서 함안(咸安)ㆍ창녕ㆍ영산
(靈山)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하니 우도(右道) 일대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안동의 적이 나와서 풍산(豐山)에 둔치므로 박진이 청송(靑松)으로부터 안동에 들어가 성을 수습하다.
이보다 먼저 적이 군위(軍威)ㆍ의성(義城)ㆍ안동ㆍ예천 등의 고을에 나누어 둔쳐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하더니 영천에서 섬멸당한 뒤로는 군위의 적은 철수하여 개령(開寧)으로 향하고 의성ㆍ안동ㆍ예천의 적도
또한 동류를 이끌고 풍산 구담(九潭)에 물러와 둔치니 경상좌도의 인민이 조금 생기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풍산의 적이 또한 상주(尙州)로 물러와 합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아! 우리나라 3백 고을에 적이 없는
데가 몇 고을인고. 이것으로 미루어 추한 무리의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4일.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팔결군(八結軍)에게 명하여 호(壕)를 파도록 하였는데 5일 만에 끝마치다.
이때 본부(本府)에서 사역에 응한 사람이 1천 7백여 명이다.
○ 부산의 적이 칡 줄기를 가지고 왜인의 손바닥을 꿰어 우리나라의 봉비(封臂)와 같이하여 차사(差使)라
칭하고 상도(上道)에 있는 적에게 보내어 내려오기를 재촉한 때문에 모든 적이 흘러내려 길에 가득 찼는데,
우도 각 고을 의병이 곳곳에 구름처럼 일어나서 진주(晉州)ㆍ함양(咸陽)ㆍ거창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쏘아대고 있다니 지금 이때에 무찔러 멸하지 못하면, 위로 임금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 백성이 살육된 것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민간에 포고하여 겁내지 말고 선등(先登)하게 하라. 함양 전통(傳通) 통문(通文).
○ 경주(慶州)의 부윤과 판관(判官)이 모두 도망해 숨었으므로 초유사(招諭使)가 우도에 있으면서 전령(傳令)
하여 본부(本府) 사람 훈련봉사(訓練奉事) 김호(金虎)로 도대장(都大將)을 삼고,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로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진사 최신린(崔臣隣)으로 소모유사(召募有司)를 삼다. 김호 등이 이미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하다.
2일에 적 5백여 기(騎)가 언양(彦陽)으로부터 노곡(奴谷)으로 몰려 왔는데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하여 싸워서 김호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고 싸우니 적이 달아나
본주(本州)의 대진(大陣)으로 돌아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었으니 경주 전후의 승전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동궁(東宮)이 처음에 평양(平壤)에서 대가(大駕)와 서로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각자 헤어져 영상(領相) 최흥원
(崔興源) 등을 거느리고 영변(寧邊)으로 달아났다가 적병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또 정주(定州)로 달려갔다가
정주로부터 비밀리 황해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하였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행(行)하여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伊川)에 행차를 머물렀는데 전라도 의병들이 근왕(勤王) 하러 바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손수 글을 써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전해 보내기를, “내가 외람되이 임시섭정[權攝)의 명령을 받아
회복의 계책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재주와 덕이 엷어서 감당치 못할까 두렵다. 대가를 멀리 떠난 것이 이제 이미
천 리이니 다만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늘날에 국사(國事)는 이미 10에서 8, 9는 틀렸고 밤낮
오직 근왕하는 군사만 바랄 뿐인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한창 근심과 걱정이 절박하던 즈음에 여러분이
의병을 일으켜 이미 경성(京城)에 가까이 왔다 하니 이는 실로 천지 종묘 사직의 영(靈)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한 것이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오직 여러분이 힘을 서로 합하느냐의 여하에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여 큰 공을 세우기에 힘쓸 일이다.” 하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첨지 정염(丁焰)에게 통첩한 것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 전하께서 이천현(伊川縣)에 계시면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신 것을 보았는데, 반도 다
읽지 못하여 슬픈 느낌이 먼저 생겨 눈물이 절로 흘렀소. 이어 들은즉 주상 전하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 군사를 따라 이미 서울로 향하셨다 하오. 흉한 적의 화(禍)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고 군부의 바람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날에 신자된 자는 죽느니만 못하오.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의기
(義氣)를 주창하여야 할 것인데, 부사인 나는 사람됨이 지극히 둔하여 봉직(奉職)이 형편없고 일마다 조치를
잘못하여 난을 감당하는 재주가 못 되니, 능히 군사와 백성을 통솔하지 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는
즈음에 두 번이나 군사가 붕괴되었소.
지난달 3일에 이르러 헛소문 때문에 뭇 군사가 무너지고 난민이 되어 필경에는 도적질이나 약탈을 함부로
하여 관가와 민간이 텅텅 비어 있었소. 이때를 당하여 내가 홀몸으로 성에 있으면서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렸
더니, 국가의 위령(威欞)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도망했던 백성이 이미 모여 들었고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안정되었소. 큰 변을 여러 번 당하여 마음이 두서가 없을 뿐 아니라 성의가 부족하여 능히 인심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비록 위에 말한 왕세자의 간절한 말씀을 보아도 저 줄지어 늘어선 이들에게 능히 명령할 수 없소.
그러니 경내(境內)의 부로 기구(父老耆舊)는 이 곡절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 힘쓰고 격려하여 혹은 의병에 달려
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이상과 같이 첨지 정염에게 통첩한다.
○ 정염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이극(貳極)이 내리신 수서에 이와 같이 목마르게 기대하시고 주상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셨
다 하니, 신자 된 자로서 어찌 제 집에서 밥 먹고 잠자면서 사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만 있겠습니까.
부사의 하체(下帖)에 이른바 혹은 의병으로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한 것은 분수에 따라
할 일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지마는 다만 지금 민가에 전연 일이 없는 이가 없어 성을 지키고 물건을 운반
하는 데도 또한 미칠 겨를이 없는데, 또 기운을 내어 일하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독촉하여 나약한 사람들을
억지로 몰아서 싸움터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조금 활을 쥘 줄 아는 이와 장정(壯丁)으로 군적(軍籍)에서 빠진 자가
반드시 없다고 속일 수 없으니, 부락에서 한두 사람을 내어 준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인정만
보아서 평상시처럼 하지 말고 이미 그런 사람을 뽑았거든 온 부락이 힘을 합하며 밑천을 대어 보내면 국가의
바람을 거의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정염과 같이 늙고 정신없는 것이 감히 스스로 권하고 격려함이
아니라 이미 성주(城主 부사)의 하체를 받고 나서 저의 소견을 부친 것이니 여러분은 알아주십시오.
○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치보(馳報)에, “적세(賊勢)를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경상도 고성(固城) 감치[柹峙]에
보내었더니 복병장(伏兵將)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회답하기를, ‘사천(泗川)의 도훈도(都訓導) 최막금(崔莫金)이라
고 하는 자가 고성의 적중(賊中)에 들어가 있었는데 제 집에 왕래하다가 복병이 있는 곳에서 잡혀 공술(供述)
하기를 「적중에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왜놈을 만나 포로가 되어 살려 달라 애걸하고 인하여 적중에
들어갔더니, 적이 먼저 진주의 창고에 있는 곡식이 얼마인 것과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과 얼굴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므로, 아름다운 여자는 모르고 진주의 곡식은 대충 말해 주고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은
하동(河東)이라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방금 진주의 관(官)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통보
한다.” 하다.
○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 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오므로 따라간 모든 재상과 더불어 밤에 곡산
(谷山)으로 가서 강동(江東)으로 가고 강동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갔다가 도로 영변으로 향하니, 중도에
위태로운 변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각 도의 의병에게 내린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섬 오랑캐가 방자히 만행을 부리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 의사(義士)들이 있는
덕분으로 군사가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이에 한마디 말로 여러 사람에게 고하노라. 생각건대, 분수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초여름에 쳐들어오자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감사(監司)들은 대개 앉아서 보고만 있었고, 진장(鎭
將)과 수령들은 거의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많았다. 도성에 개도 닭도 남은 것이 없으니 뭇 백성들의 도탄을
어찌 차마 보며, 나라에 예악(禮樂)을 지키지 못했으니 종묘가 폐허 됨을 어이하랴. 대가가 멀리 한구석으로
행차하시고 적의 칼날이 8도에 두루 미쳤네.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파천(播遷)하심 어인 일이냐.
벌써 한 달이 되었구나. 대동강에 사람 없으니 적을 뉘 막으리. 못난 내가 분조(分朝)의 책임을 맡아, 이리저리
다니던 끝에 용안(龍顔)을 천 리에 이별하였구나. 흩어지고 도망한 군사를 수습하여 한 성(城)에서 분조의 체통
을 보전하였네. 비록 나라가 이와 같으나 아마도 때를 기다림이 있으리. 중국에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니 황제
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니 신하의 절개를 오늘에 보겠도다.
나는 큰 난을 감당하지 못하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으리라. 평안도에서 이천(伊川)으로 갈 때 여러
번 변고를 겪었고, 곡산(谷山)으로 해서 성천에 도달할 때 온갖 고생을 맛보았네. 감히 위험한 데를 피해
편안함을 찾음이 아니라, 오직 국가 회복의 대계를 생각함이다. 항상 원수 갚아 수치를 씻을 것을 생각하여 적
과는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한다. 비록 왕래하느라 헛고생을 하더라도 또한 온갖 위험도 꺼리지 아니하리라.
원수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내가 안존할 땅 없는 것이 민망하도다. 섶에 누우며 창을
베고 자는 마음이 어찌 잠깐인들 해이하랴. 마음이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 너의 군사와 백성들이 협조하고
따라서 다행히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열성(列聖)의 은택이 미친 바이며 또한 너희들의 정성과
절개가 드러난 바이로다. 난리가 너무 크매 토벌하기 더욱 괴롭구나. 뒤돌아 볼 겨를이 없으니 민생이 살 곳을
안정하지 못하고, 싸움에 쉬지 않으매 사졸이 또한 밖에서 오래 있었네. 갑옷과 투구에 이[虱]가 생기니 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이 있을 것이요, 해 저물어 소와 양이 내려오니 언제 오려느냐는 탄식이 응당 간절하리.
하물며 가을 날씨가 점점 차지는데 일찍 추워지는 서도(西道)는 어이하랴. 거처할 곳도 없으니 얼고 배고픔의
걱정을 뉘라서 면해 주리. 어떻게 해를 넘길꼬. 살 준비를 마련하지 못했네. 너희들은 비록 애써서 나를 따르
건만 나는 홀로 무슨 마음으로 너희들을 수고시키랴.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몸에 병이 든 것 같도다.
너희들의 옷 없는 것을 보매 비단옷 겹으로 입음이 부끄럽고, 배고프고 목마름을 애처롭게 여기매 쌀밥 먹는
것이 어찌 마음 편하랴.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식 약간을 베푸노라. 소를 잡아 군사 먹이고 술을 쏟아 물을 마시게 하니 역사에
있는 말을 감히 잊으랴. 그윽히 옛사람의 일을 사모한다. 내가 이미 속마음을 너희들에게 전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라 위해 몸을 바치라. 옛적 신릉군(信陵君)이 출병할 때에,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軍中)에 있는
자는 아비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며, 형제 없는
외아들은 전장에 가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이 책에 있는데 내가 어찌 모르랴. 다만 사세가 급박하므로 징발이
소요(騷擾)스럽게 되었다. 뉘라서 부모가 없으랴. 거리에 나와 기다리는[倚閭] 생각을 위로하기 어렵구나.
또한 아내가 있을지니 집을 떠난 한이 오랫동안 맺혔으리. 아! 공(功)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에는 반드시
징계함을 감히 오늘날에 어기지 않으리라.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을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요망한 적을 쾌히 소탕하지 못하면 어찌 평일의 품은 뜻을 이루리오. 원하노니, 함께 전장으로 달려
가서 천하의 형세를 일신하는데 같이 도모하며, 궁궐을 맑게 하고 능침(陵寢)에 절하여 왕가(王家)를 다시 세울
것이며, 삼경(三京 한성(漢城)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회복하고 대가를 돌아오시게 하여 다함께 영원토록
태평을 누리자. 황신(黃愼)이 지음.
○ 경상도 선산부(善山府)가 순차로 전통(傳通)하기를, “지난달 18일에 충청 감사의 사통(私通)과 공주 목사의
관문(關文)에, 평택현(平澤縣)의 치보(馳報)에 이르기를, ‘총병(總兵) 양원(揚元)이 평양의 적을 이기자, 개성ㆍ경
성의 적이 모두 나와서 광나루로부터 양천 해구(楊川海口)에 이르도록 결진(結陣)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동시에 도부(到付)한 감사의 관문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의 말에, 적이 중국의 군사가 대대적
으로 이른다는 말을 듣고 밤낮 없이 내려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이달 초에 경상 우수사가 전라 좌수사와
더불어 고성(固城)에서 적과 접전하여 배 70척을 부수고 머리 3백 급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군사를 효유하여 수합해 모아서 적을 치도록 약속한 일입니다.” 하였다.
○ 김수(金睟)를 불러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하고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순찰사를 두어 초유사
(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성일의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5월 이후에 신이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행재(行在)
의 기별을 알 길이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평양을 또 지키지 못하여 대가가 의주로
옮겨 가시고 동궁은 안협(安峽)에 와 머문다 하니, 오장이 무너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신이 좌도 순찰
사에 임명된 지 이미 오래었는데도 교서(敎書)와 인신(印信)이 아직 내려오지 않으니 이것은 반드시 적병이
가득 차서 길이 통하기 어려운 소치일 것입니다.
좌도의 적세를 말하면, 6월 초순 이후까지도 흥해(興海)ㆍ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영해(寧海)ㆍ진보(眞寶)ㆍ청송
(靑松)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풍기(豐基)ㆍ영천(永川)ㆍ예천(醴泉)ㆍ용궁(龍宮)등 10여 고을이
아직 적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가 이미 함몰되어 대개 30여 성(城)에 한 치도
깨끗한 땅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동쪽으로 강을 건너도 다시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 변이 난 뒤로부터 좌우
도가 나뉘어 호령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좌도에는 앞장서 일어나 적을 치는 이가 없었으므로 적이 더욱 거리
낌이 없어 땅을 저들이 차지하여 각기 고을의 원이라 칭하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어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선비 중에 유식한 자를 선택하여 소모관(召募官)을 지키고 무변(武弁) 가운데
재주 있는 자로 가장(假裝)을 삼았습니다. 영산(靈山)에는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 생원 신방즙(辛邦楫),
창녕(昌寧)에는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성안의(成安義), 급제(及第) 성천유(成天裕), 보인(保人) 조열(曺
悅), 유학(幼學) 곽찬(郭趲), 업무(業武) 신의일(辛義逸)이 각기 군사 6백여 명을 모아서 매복을 시켜 적을 쳐서
연달아 괵(馘)을 바치고, 이달 4일에 조열ㆍ성천유 등이 군사 1천여 명을 합하여 창녕을 포위 엄습하여 종일토
록 교전하여, 고을 원이라 칭하는 백마 탄 왜놈을 소아 죽이자 사흘 만에 적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하였습
니다.
신녕(新寧)의 권응수(權應銖)는 신이 통문을 돌리기 전에 이미 군사를 일으켜 적을 쳤으므로 그대로 의병
대장을 시켰더니, 지난달 27일에 병사 박진의 명령을 받고 하양(河陽) 의병장 신해(申海)와 더불어 네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에 성을 점령한 적을 쳐서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하양(河陽)ㆍ신녕ㆍ의흥(義興)ㆍ군위(軍
威)ㆍ의성(義城)의 적은 모두 달아나고 안동의 적은 또 풍산현(豐山縣)으로 이둔(移屯)하였습니다.
박진이 부성(府城)에 들어가 있으면서 바야흐로 진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며, 현풍(玄風)ㆍ영산(靈山)의 적도
역시 공격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고령(高靈)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의 의병으로 하여금 현풍을 치게 하고
창녕ㆍ의령(宜寧)의 군사로 영산을 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가 이보다 먼저 현풍ㆍ영산
등 고을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서 또 적이 있다 한 것은 적의 오고 감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우도에는 전 좌랑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 현의 경계를 지켜서 금산(金山)ㆍ무주(茂朱)의
적을 방비하고 가장 전 주부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 제말(諸沫) 등으로 하여금 나누어 고령을 지켜서
성주(星州)의 적을 막게 하였으며,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으로 가목(假牧)을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
(金俊民)으로 가장을 삼아서 유학 이대기(李大期)ㆍ전치달(全致達)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함께 초계를 지켜서
초계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방비하였으며, 봉사(奉事) 윤탁(尹鐸)은 박사제(朴思齊)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의령ㆍ승진(昇津) 및 신반현(新反縣)을 지키고 유학 곽재우ㆍ봉사 권난(權鸞) 등은 그 모집한 군사 및
전 목사 오운(吳澐)이 모은 군사를 거느려 영산ㆍ창녕ㆍ현풍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지키며 진주 판관(晉州
判官) 김시민(金時敏)은 관군 및 군수 김대명(金大鳴)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막고,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ㆍ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ㆍ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렬(鄭得悅)ㆍ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은 각기 그 성으로 돌아와서 싸우고 지킨 공이 많았습
니다. 함창(咸昌)ㆍ상주(尙州)ㆍ지례(知禮)ㆍ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ㆍ고성 밖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달 3일에 김면이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 등을 거느리고 지례를 화공(火攻)하여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적을 태워 죽이자 남은 적이 금산으로 도망해 갔습니다. 김면이 현재 다시 화구(火具)를 준비하여 금산 의병장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 가장 권응성(權應星) 등과 더불어 동군(同郡 금산)을 공격하려 합니다.
7일에 창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함안ㆍ칠원 등지의 군사와 더불어 나가 본부(本府)를 포위하여 적 10여
급을 베니 남은 적이 패하여 김해로 달아나고 군량이 남아 있으므로 의국이 그 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진해ㆍ고성의 적은 모두 배를 잃고 빠져 나갈 길 없는 도적이 되어 죽을 각오로 지키므로 진주ㆍ함안의 군사
가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본진(本鎭)을 버린 뒤에 다만 전선(戰船)
네 채가 있었는데, 전라 좌우도의 수군을 청해 와서 세 번 해전을 벌여 아울러 크게 이겨서 수백 급을 베고
적선 백여 척을 부수었으며,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습니다.
적이 크게 겁내어 호남으로 가겠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마침내 움직이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려는 자는 반드시
산에 올라 망을 보아 서해에 배가 없는 것을 알고야 떠나니, 변고가 생긴 뒤로 전공(戰功)은 양도(兩道) 수사가
제일입니다. 지금 또 들은즉 호남의 수군이 크게 이르러 장차 모든 섬을 토벌하고자 한다 합니다.
6월 중에 전라 감사라 자칭하는 왜놈이 창원으로부터 바로 함안에 이르러 의령의 승진을 건너고자 하다가
곽재우가 막으니 곧 김해로 돌아갔고, 거창에 침범하려 하다가 김면에게 퇴각을 당하였으며, 지례를 경유하여
무주현으로 향해 충청도의 적과 합하여 금산(錦山)에 들어가서 연달아 무주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 모든
고을을 함락시키자, 전주(全州)의 위급함이 아침, 저녁에 임박하였는데, 다행히 적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1천여
명이 몰래 본도(本道)로 오는 것을 김면이 지례의 지경에 매복을 시켰다가 불시에 뒤를 밟아 치니 적이 패하
여 달아나서 이로부터 적이 감히 다시 오지 못하고 대부분 옥천(沃川)의 지경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은 적은
현재 금산ㆍ무주에 머물고 있는데 호남 사람들이 감히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이 소리치기를, “여러 곳의 왜병
을 합하여 다시 들어와 침략하겠다.” 합니다.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능히 근왕하여 적을 치지 못하는 것을 순찰사에게 허물을 돌렸는데 이 도에는 곽재우가
감히 도주(道主)에 격문을 보낸 것을 신이 겨우 진정시켰고, 호남에서는 광주 목사 권율(權慄) 등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직무를 행하여 적을 치지 못하여 모르는 체하고 있다고 그 죄를 열거하여 도내에 통문을 돌렸습
니다.
대개 본도의 형세는, 좌도는 위에 진술한 바와 같으므로 신이 비록 강을 건너가더라도 일은 할 수가 없고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일부는 버티어 부지할 수 있겠으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지체하여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좌도의 숨어 있는 수령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영접하도록 하였으니,
그 보고가 이르기를 기다려 칼을 집고 강을 건너 사생결단을 하려 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러 회복함이 희망이 있다 하니 신이 그동안 죽지 않아 난이 평정되어 환도하시는 날을 보게 된다면
비록 군량만 허비한 죄로 만 번 죽음을 받아도 뉘우침이 없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장흥(長興) 선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문을 돌리다.
의병을 일으킴이 유생으로부터 주창되었은즉 이름이 사류에 참여한 자는 마땅히 분기하여 사졸의 선봉이 되어
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식하고 어리석은 병졸들과 게을리 놀던 무리 또한 모두 의기로 달려오고 있는데
도, 장흥은 큰 부(府)이면서 동지 1, 2명 외에는 모두 겁내고 움츠려 여기에 종사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여러분은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로서는 요행히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여러분은 홀로 임금을 생각하지 않는가.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면 정거(停擧)함이 늦을 것이다.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한데 지금 우선 기다리고 있으니,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여 일제히 모일 것이요 후회를 남기지 말라.
종사(從事) 정자(正子) 정사제(鄭思悌)가 지었다. 뒤에도 다 이와 같다.
○ 임계영이 낙안(樂安)에서 본군(本郡)에 이르러 격문을 돌린 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오늘날 일은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이다. 금산(錦山)의 패전에 의기가 저상되어 다시 진작할
길이 없으므로 우리들이 세상일에 어두움을 생각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다 같은 사람의 마음에 거의 흥기
됨이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 군성(郡城)에 와 주둔하여 이웃 고을 의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본군의 사람들
은 응모는 그만두고라도 한 사람도 나와 보는 이가 없으니 별다르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듣자 하니 당초
에 의병의 격문이 올 때에 본 읍에서 물리칠 뜻이 있으나 믿을 수 없다 하더니, 지금으로 보건대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군수의 뜻도 군인(郡人)과 같으니 군인이 시킨 것임을 알겠다. 우리들의 이 의거는 공사(公事)를
위함이요 나라를 위함인데 이 고을서는 사(私)라고 보니, 아! 이 고을 사람들은 홀로 임금이 없는가. 우리에게
는 손익이 될 것이 없지마는 후일에 공론이 없을까.
○ 임계영이 순천(順天)에 이르러 본부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켜 적개(敵愾)함은 사람의 마음이 함께 바이며 동궁의 수찰(手札)이 의병을 장려하매 말이 심히
정성스럽고 슬프며 뜻이 심히 애통하니, 신자 된 이로서 누군들 감개하고 눈물을 떨구며 온 힘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왜적이 천병에게 쫓겨 남도로 흩어져 내려왔는데 곤경에 몰린 짐승처럼 싸워 당할
길이 없어, 불사르고 약탈하는 화가 도처에 마찬가지이니 가정과 재물을 장차 누가 보전하랴. 그러니 하루아침
에 적의 소유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내놓아 군수(軍需)에 약간의 도움이 되게 함이 나을 것이다.
승평(昇平)은 큰 부(府)라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으며, 또 풍년이 들어 벼가 구름처럼 많으니, 어찌 앉아서
풍족한 것을 누리면서 국가의 일을 모르는 체하겠는가. 명가우족(名家右族)은 다 국가의 은혜를 알고 또 사체
(事體)를 살필 것이니 타이르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요, 촌락의 평민에게도 또한 이 뜻을 전파하여 널리
거두고 부지런히 모아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주장하여 때에 맞춰 잇달아 원조한다면 승평 한 부가 옛날
한(漢) 나라를 일으킨 관중(關中)이 될 것이다. 원하건대 여러분은 힘써서 태만하지 말지어다.
○ 좌의병장 임계영이 순천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으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군사를 끌고 남원으로 향하여
각 고을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키는 말은 전의 격문에 다하였으니 여러분은 다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수천 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서 바야흐로 적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최(崔)의 군사와 더불어 협력하려 하므로 준비가 한창 급한데,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두어 고을에서 판출(辦出)하니 유장(儒將 선비로서 장수가 된 이)으로서 계속 시킬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들만이 맡을 걱정이 아닌데 여러 귀읍(貴邑)에 이름난 허다한 선비들이 일찍이
그 책임을 함께 나눈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에게도 다 같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분함이 있는데
이 의거들을 보고 어찌 차마 마음에 모르는 체한단 말인가.
하물며 금산ㆍ무주의 적이 소굴을 만들어 한 도의 형세가 털끝 하나처럼 위태로운 마당에, 여러분은 아침
저녁으로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라면 감히 제 몸을 제 것이라 생각
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재물을 제 것으로 생각하여 한자 한치를 아끼겠다는 것인가.
지금 비록 내도록 요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민간에서 곤하고 쪼들리지마는 숨이 아직 붙어 있는
동안에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록 혹 병이나 사고가 있어 의병에 종사 하려 하지 않더라도,
군량을 계속해 원조하는 것만은 오히려 힘써 도모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군사들이 풍우를 무릅쓰는 고생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흉한 적이 분탕질하는 화를 생각하여 각기 분발하고 격려하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양식을 보내고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먼저 국경의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
근왕의 뜻을 다하여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車駕)를 모셔 환도하게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여 끊이지
아니하던 옛날의 소하(蕭何)가 한 나라에 세운 공만을 장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서
태만함이 없을지어다.
○ 천병 중에 점을 치는 자가 우리 국가의 운수를 점치고 말하기를, “문교(文巧)로 풍속이 폐단이 되었으매
장차 큰 질박[大質]으로 돌아가리라. 엎어져 죽은 이가 삼대[麻]와 같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 떠서 흐르며
사람들이 그 어미만 알고 그 아비를 모르리라. 그런 뒤에야 난리가 그치리라.” 하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머물다.
○ 광주 목사 권율로 나주 목사를 삼다.
○ 진주 판관 김시민이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 사천 현감 정득렬 등과 더불어 사천ㆍ고성ㆍ진해에 있는 적을
습격하니, 적이 점차로 도망하여 가다. 함안 군수 유숭인과 칠원 현감이 방좌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
여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들어가다.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여 가다. 시민이 드디어 연도의 각 고을을 수복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 등이 서해로 해서 십생구사(十生九死)로 행조(行朝)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방의 소식을 묻고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전라도의 사민들에게 내리는 교서를
선포하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王若曰].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
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병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인민은 어육이 되었다. 창창(蒼蒼)한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붕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병을 기다릴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로와 육로를 거쳐 도달하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쳤다고 보고하니, 덕이 없는 나로서 남이 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줌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우리 조종들의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되어 맺혀진 것이, 아! 지극한 것이로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여 곧 양산숙 등을 보내어 너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그대 다사(多士)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제 25년째이다. 비록 사랑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으나, 본심인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해
진 것을 보고는, 오직 성이 높고 참호가 깊으며 갑옷만 견고하고 칼날만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이 더욱 견고할수록 국세는 더욱 약해지고 참호를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일찍
이 가을 뽕잎이 떨어지고 기왓장들이 풀어지듯이 점차 이 지경에 이를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권까지 그물질하고 형벌이 정당함을 잃어서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점령하자 세민(細民)들이 생업을
잃어 걱정하였다. 백성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니 내가 무슨 변명이 있으리오. 이에 유사로 하여금 모두
파하여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들 역시 어찌 내가 다 알았던 것이리오.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차라리 내 몸을 희생으로 삼아 천지 종사 모든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미 이러하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들은 나에게 허물을 고치어 새로
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여다오. 나의 잘못은 대략 이미 진술하였거니와 이번의 전란은 실로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쏘려는[射天] 꾀를 내어, 혹은 우리더러 저의 반역에 편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혹은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므로 내가 대의에 의거하여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올빼미의 성질이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분을 풀려하였다.
나는 종사가 망하고 신민을 버릴 수가 있을지언정 군신(君臣)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신다 하여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가슴속을 해와 별에 밝게 헤쳐 위아래 신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천조(天朝)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요동 총병
관(遼東總兵官)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진격도록 허락
하여 서울까지 이르러 왜적을 소탕하려고 기약하니 천병의 소식이 미치는 곳에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천조에서 또 호(湖)ㆍ절(浙)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을 징발하여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이 또한 수만이 모였으니
응당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경명(敬命)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도 기세가 이미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만
제지하면 나머지 지엽의 적은 싸우지 않고도 절로 평정될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
으나 오직 호남 한 도가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어디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京)
ㆍ호(湖)의 국고를 너희들이 먹도록 맡길 것이요, 무기가 다되거든 너희들이 쓰도록 맡기리니 각기 힘쓸지어
다.
이제 경명을 공조 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천일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승진시켜 창의사
(倡義使)를 겸하며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忠義)는
벼슬과 상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도착하거든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ㆍ전라도 등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
(宣諭)하고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함을 뽐내라. 용만(龍
灣 의주) 한구석에서 국세가 위험하여 땅의 한계가 이미 다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사람의 일이
이미 극도에 다다랐으니 이치가 마땅히 회복함을 구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함이 동하자마자 국경은 일찍 차가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 압록강)을 보건대 역시 동으로
흐르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한 생각이 물처럼 흐르누나.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로 장소(張所)가
능묘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바람에 어서 부응하여 내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 아! 멀리 서쪽 국경에 파천하시어 임금께서 몽진하시는데 남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신자가 이제 애통
의 교서를 보니 어찌 슬픈 회포가 없으랴. “죄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것은 성덕의 겸손함이 지극하심이고,
“다시는 남으로 바랄 수 없으니, 신정(新亭)에서 서로 만나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라.”는 말씀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와 같다.” 하신 말씀은
입으로 차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군신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본다.”는 말씀은 비록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가히 격동할 만하며,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한 생각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초야에 벌레 같은 신하는 미천한 정성을 견딜 수 없어 애오라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어 서쪽으로 바라며
눈물을 흘린다. “궁궐에는 벼와 기장이 났고 용암에는 우림(羽林: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이 체류하네. 한관(漢
官)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주도(周道)는 마침내 찾기 어렵네. 북쪽을 바라보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요 동으로
돌아오길 생각하는 성주(聖主)의 마음일세. 열 줄의 애통교시를 보고 나니 뜻이 침침하네.” 하다.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
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
(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𧺝)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
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
(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
(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상동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
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
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상동
○ 처음에 정철이 강계(江界)의 적소(謫所)로부터 풀려와서 행조(行朝)에 따라갔다가 이미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 또 호남의 소식을 듣고는 초토사 고경명에게 편지하기를, “살아 돌아와서 차마 오늘의 일을 보게
되어 조복(朝服)으로 눈물을 닦으니 눈물이 말라 피가 이어 흐릅니다. 어찌 차마 말하랴, 어찌 차마 말하랴.
좌랑 상산숙이 와서, 형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켜 호산(壺山 여산(礪山))까지 왔다고 들으니, 친구의
사사로운 정으로 배나 기쁠 뿐이 아니라 천안(天顔 임금의 안색)에 기쁨이 있고 백관들에게 희색이 돕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복을 내리는 하늘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모름지기 기운을 내고
전진하여 회복에 한결같이 뜻을 두어 임금의 행차를 봉영(奉迎)하기를 날로 바랍니다.
나는 외람되이 도체찰사의 명을 받아서 장차 내일 발정(發程)하려 하였다가 길이 막힐 것이 염려가 되므로
당분간 기다릴 뜻이 있으니 어떻게 귀결이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다되고 말은 길어 우선 여기서
줄입니다. 철(澈) 배(拜).” 하다. 교지와 이 편지가 왔는데, 경명은 이미 한을 머금고 전사하였으니, 슬프도다.
○ 이광ㆍ윤선각(尹先覺)의 벼슬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나주 목사 권율로서 전라 순찰사를
삼았으며, 공주 목사 허욱(許頊)으로 충청 순찰사를 삼고 이순신(李舜臣)에게 자헌대부의 계자(階資)를 내리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다. 교지에,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경상좌도는
아직 보존되었으나 다만 도내에 감사ㆍ병사ㆍ수사가 없어서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인심이 붙일 데가
없다. 그래서 비록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는 사람이 있으나 통솔하기에 어려운데, 좌감사 김성일은 길이 통하
지 않아 아직 간 곳을 모르고 사기(事機)는 심히 급하다. 이제 그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토포사를 겸하게
하노니 성일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그대는 군현(郡縣)을 통솔하여 적을 치는 일을 맡고 또 성일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급히 부임하도록 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 군사나 백성으로 공이 있는 자는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후일에 논공(論功)할 증거를 삼고 공사(公私)의 종은 곧 면천(免賤)해 주도록 하라. 장기 현감
(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은 각 고을이 연달아 무너질 때에 적을 베어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하다.
역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사람도 역시 예(例)에 따라 논상(論賞)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다. 이 교서는 길이 막혀서 서너 달을 지나서 효순이 감사가 된 뒤에 도착하였다.
9일. 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엿보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고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순
(韓諄)은 적에게 죽었으며, 죽은 군인이 5백여 명이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을 본주(本州)의 목사로 승진시키다. 변란이 처음 났을 때에 시민이
순찰사의 명령으로 날랜 기병(騎兵) 50여 인을 거느리고 영산(靈山)으로 달려가 진군하여 작원(鵲院)에서 맞아
쳤는데 참퇴장(斬退將) 윤탁(尹鐸)과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이 모두 붕궤되다. 거느린 군사 1백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숭인은 홀로 강물에 빠져 헤엄쳐 나왔는데, 시민이 옷을 벗어 입혀서 함께 돌아오다.
김수(金睟)가 군관을 시켜 시민에게 전령하기를, “적이 이미 고성(固城)의 길로 향하였으니 빨리 막아 끊으시
오.” 하다. 시민이 곧 고성으로 달려오니 적이 이미 고성을 점령하여 전진할 수가 없어서 본주로 돌아온즉,
성중의 사졸들이 이미 흩어졌다가 차차로 돌아와 모여서 기세가 점차로 떨치다. 시민이 사졸과 더불어 고락(苦
樂)을 같이하면서 사수할 계책을 하다. 사천을 점령하였던 적이 장차 본주를 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精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사천성 밑에 이르렀더니, 적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다.
이튿날에 또 진군하여 적을 십수교(十水橋)에 만나니 현에서 5리쯤의 거리다. 군사가 모두 죽도록 싸워서 머리
몇 급(級)을 베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갔다가 돌아
오다. 이로부터 군사들의 기운이 배나 되다. 얼마 안 되어 적이 밤에 도망가 고성의 적과 합하다. 시민이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고성의 적을 습격하고자 하다.
드디어 정병을 뽑아서 진주(晉州)의 남쪽 영선현(永善縣)에 진을 쳤다가 밤중에 군사들로 하여금 재갈을 머금
게[啣枚] 하고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서 새벽에 고성의 성 밑에 이르러 북치고 고함치며 위엄을 뽐내다. 적이 두렵고 위축되어 수일 만에 밤에 도망하여 진해(鎭海)에 있는 적과 합세하여 철병하여 창원(昌原)으로
가니, 세 고을이 연달아 수복되어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다. 이때에 이르러 목사가 되다. 김면은 시민이 장수
와 군사의 인심을 얻은 줄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응원하게 하다. 시민이 곧 정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쳐서 머리 수십 급을 베고 수 일 있다가 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벤 것이 역시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이 상하자, 김면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
얼마 안 되어 금산 등지의 적이 잇달아 도망가자, 시민이 진주로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좌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미 좌도의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右道)의 일은 마땅히 아뢸 것이 아니나, 다만 소신이 처음부터 의병을
주관하였으니 지금 만일 상례에 맡겨두고 근심스러운 기회를 눈으로 보고도 아뢰지 아니한다면 실로 신하된
의리가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두 가지 조건을 외람되이 진술하여 직무 외의 일을 간섭한다는 혐의를 피하지
못하나이다. 당초에 김면은 고령(高靈)ㆍ거창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각기 적을 쳐서 기세가 떨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은명을 받아 합천 군수가 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매, 고령ㆍ합천ㆍ거창 세 고을의 군사가 모두 그 장수를 잃고 마음이 해이하여
적을 칠 뜻이 없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일이 진정될 동안에는 각기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대로
적을 치게 하소서.
전 군수 곽일(郭𧺝)은 초계(草溪)의 가수(假守)가 되어 직무를 잘 보아 군사와 백성들이 사모하여 모두 진군수
(眞郡守)가 되기를 바라고 군수 정눌(鄭訥)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곽일로 본군의 군수를 삼으소서.
전 목사 오운(吳澐)은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온 현을 타일러 군사 2천여 명을 모아서 노약자는 빼내어 보(保)
를 삼고 군기를 주조하여 전투에 쓰게 하여 의령(宜寧) 한 고을이 온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니, 이 몇 사람의 공은 실로 도내에서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일이 의병에 관계되므로 감히 직책을 넘어
외람되게 아뢰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으로 본도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다.
○ 전라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는 담양(潭陽)ㆍ순창(淳昌)으로 해서,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은
구례(求禮)로 해서 남원(南原)에 모이다. 경회가 본부 전 첨사 고득뢰(高得賚)로 부장(副將)을 삼으니, 남원의
선비와 백성으로 의병에 모집된 자가 거의 6, 7백 명이 되다. 두 군사가 장수(長水)에 이르러 유둔(留屯)하고
부장으로 하여금 금산(錦山)ㆍ무주(戊州)의 적을 잡을 조치를 하게 하였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 등이 장단(長湍)에서 적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처음에 경기에서 피란
한 조관(朝官)들과 의병들이 모두 강화(江華)에 있다가 두 군사가 근왕(勤王)하는 것을 보고 흔연히 기운이
나서 여러 차례 적을 치도록 권하였고 두 장수도 역시 군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본 지방의
군사와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에서 적을 엿보았는데 적이 군사를 감추고 약한 체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하
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사를 시켜 육지에 내려가 잡게 하였더니 적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기세가 바람을
탄 불길 같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쪽배를
타고 달아나다. 수일이 지난 뒤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당일에 죽음을 면하고 숨어 있는 자 들을 몰래 불러
모으게 하니 겨우 1천여 명을 얻다.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
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
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
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
(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공주를 점령하매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가 붕궤되었다.
공이 청주(淸州)로 진군하여 8월 1일에 바로 성의 서문 밖을 두드려서 승장(僧將) 영규와 진(陣)을 연합하였다.
공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부터 충청 좌도 여러 둔(屯)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날랜 군사를 가려서
바로 행조(行朝)로 달려가려고 온양(溫陽)까지 이르자, 금산에 있는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장차 충청ㆍ전라도를
침범하려 하였다.
순찰사가 공의 동지를 소개로 하여 공을 만나 금산의 적을 치는 것에 대해 의론하자고 청하였다. 부하 장교들
도 역시 대부분 말하기를, “국가의 땅이 모두 적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충청ㆍ전라도만이 침범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중흥의 열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충청ㆍ
전라도가 없어지는 것이요, 또 먼저 금산의 적을 무찔러서 뒤를 밟을 적을 끊은 뒤에 북으로 가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다.” 하므로, 공이 이에 공주로 돌아왔더니 순찰사와 뜻이 또 서로 틀어졌다.
대개 의병을 일으킬 처음에 공이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하고 근왕하는 데는
뜻이 없어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운을 누른다고 책하였더니 순찰사가 사감을 품은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돌려 무릇 공의 취하에 모집되어 있는 자에 대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또 관군에 영을 내려 서로 응원하지 않게 하니, 휘하의 군사가 이미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다만 의사 7백
명이 공을 따라 사생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8월 25일에 군사를 옮겨 금계(錦溪)로 가려 하니 별장(別將) 한 사람이 극력 말리기를, “적이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호남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여 지금 금계를 점령한 자는 특히 정예한 부대요 수효도 수만인데,
어찌하여 우리의 오합(烏合)한 군사를 가지고 당적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고 또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다. 공이 울면서 맹세하기를, “임금께서 지금 어디 계시건대, 감히 승패를 말하리오.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을 알 뿐이다.” 하고, 드디어 영규와 군사를 연합
하여 진군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27일에 일제히 협공(夾工)하기를 약속하였었는데 권율이 글을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글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금산군에서 10 리의 거리에 당도하여 전라도 군사를
기다렸다. 적이 정찰해 알고 맞아 공격하여 우리가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번갈아 나
와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공이 이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오늘에는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명을 따라 감히 어기지 못하였
다. 힘껏 싸운 지 한참 만에 적이 세 번 패하여 겨우 다시 정돈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되었다.
적이 드디어 막하로 몰려 들어오자, 군사가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웃으며,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위태로
움에 이르러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북채를 들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로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적을 치면서도 오히려 행오(行伍)를 이탈하지 않고 마침내 공과 함께 죽어서,
삶을 바라고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다. 적도 역시 그만큼 죽어서 세력이 드디어 꺾이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가면서 곡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그 송장을 사흘 동안 운반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이내 쌓아서 불태웠으며, 마침내 무주에 있는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충청ㆍ전라가 보존되어 국가가 그 덕에 오늘날의 중흥이 있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충청ㆍ전라를 보존하여 왜적을 꺾고 막은 공이 어떻다 하겠는가. 공이 군사를 일으킨 몇 달 동안 일찍이 형벌
을 쓴 적이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하여 이르는 곳마다 숙연히 정제하여 시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멀고 가까운 데서 달려와 모여서, 비록 관에게 극력 방해를 당하여
처자가 옥에 갇혔으면서도 또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의 패함을
듣자 거리에 곡성이 서로 들리며 전사한 집에서도 사사로운 원망을 하지 않고 오직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에 처져서 죽지 아니한 자도 자기의 죽음 면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탁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여서 충청 우도의 사람들은 천한 하인까지도 모두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공의 덕이 사람에게 감동됨이
깊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일이 위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애도하시어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금부 춘추관사로 증직하고 그 아들
완도(完堵)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제수하였으며 달마다 집에 곡식을 내렸으니 아! 이로써 군신 관계를
보겠도다. 아! 평상시에는 큰 소리를 하다가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피하여 앞으로 갔다가 물러갔다
가 하는 자가 많은데, 공과 같은 이는 전일에 곧은 상소를 올리고 국사(國事)를 말하여 여러 번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곧은 말을 한다는 명성이 일시에 진동하였고, 한가히 물러나 처하다가 국난을 듣고는 곧
분발하여 먼저 의병의 깃발을 날려 비록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어 몸에 화살을 맞고 순국하였으니, 그가 전날
말한 바와 맞추어 보매 부절(符節)이 합한 듯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국가에 문관으로서 전쟁에 달려가야 할 책임이 없고 공은 또 당시에는 관직도 없었는데도 한갓 의로써
일어났으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아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누군들 불가하다 하리오마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에게 항거하여 죽어서 후회가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랴.
공이 신묘년(1591, 선조 24)에 왜적의 사신이 왔을 때에 문득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사신을 베어 천조(天朝)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색과 의연한 말이 바로 해나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호방형(胡邦
衡)의 봉사(封事) 뒤로 공의 한 장의 상소를 보겠다. 또 천문에 특히 밝아서 하루는 동남쪽에서 큰 우레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공이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천고(天鼓)라는 것이니, 왜적이 이제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과연 증험되어 날짜도 틀리지 않았으니, 공은 이인(異人)이 아니고 무엇인고.
역적 정(鄭)가를 배척하면서 예(羿)와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그 뒤에 그 말이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친 것 같았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전해 외우는 바이다. 기타 사적과 행실이 탁월하고 빛나는 것도 진실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지마는, 이제 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한 가지 일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8대조 휘(諱) 천성(天性)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박주(博州)에서 두 번 이기고 안주(安州)에서
패하여 순국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그 조상의 충절에 강개하여 탄복하고 추모하며 칭도하기를 좋아하더니
지금 마침내 능히 닮았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휘는 헌(憲)이요,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문과에 올랐다. 집이 가난하여 처자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몸소 밭 갈아 끼니를 대면서도 여가에는 항시
성현의 글을 대하여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은 것이
아닌가. 인륜과 의리를 외우고 말하여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기를 기약하였고, 생사에 분명하여 본래 마음에
정한 까닭에 창졸의 즈음에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 성취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공경할 만하도다.
행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교서를 내려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또한
미처 보지 못하였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에 공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지에 들어가니, 공은
기(旗) 밑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조범이 곧 공의 시체를 지고 옥천으로 돌아
와서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여서 성낸 기운이 발발(勃勃)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흐늘거리므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줄을 몰랐다.
공을 따라 전사한 7백 명은 대개 공의 열렬함을 사모하여 듣고 보면서 격동된 자들로서 몸을 버리는 데 뒤질
까 두려워하여 온 군사가 모두 충의의 귀신이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특히 이번 전란 이래로 다른 군중에
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에 상고 하여 보아도 또한 듣기 드문 바이다. 또 그 중에 더욱 드러난
이로 참봉 이광륜 중임(仲任)은 효도와 우애가 타고났으며 강개히 절개가 있어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실로 시종일관 공을 돕다가 마침내 죽음을 함께 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한데다가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있어서 척후병을 거느리고
진(陣) 밖에 있다가 형세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돌진하여 왜놈 두엇을 쳐 죽이고 죽었다.
선비 김절(金節)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맨 먼저 따라서 전공이 많았다. 이려(李勵)는 바로 고(故) 수상(首相)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그의 가풍을 계승하더니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의기로 따라왔다가 진중에서 함께 죽었다.
또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
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충서(姜忠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
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偏裨)로서 혹은 선등(先登)하여 견고한 적을 꺾고
혹은 적을 죽이기를 많이 하여 용맹과 열렬함이 남의 이목에 빛난 자들이다.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득시(徐得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
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혹은 문학으로 혹은 행실로
알려진 이들인데, 살아서는 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가 전장에서 공과 죽음을 같이한 자들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씩씩한 용모에 체격이 듬직하였으며 성질이 남보다 뛰어났었는데, 군사가 패하자
일부러 그 의관을 화려하게 하여 공의 죽음을 대신하려 하니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부숴버렸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의 문도(門徒)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이 곧 가서 7백 의골(義骨)을 수습하여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정량은 기특한 선비라 옛 도리를 힘써 행하고 승업은 단아하여 경학(經學)에 통하고 행실을 다듬었는데, 공의
막하에 있다가 마침 임무를 받아 밖에 나갔었기 때문에 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비석을 세
워서 영원히 전하기를 선창하였더니 불행히 연달아 병들어 죽었다. 동문(同門) 민욱(閔昱)은 의를 즐기는 자라,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이어 경영하여 충청도 선비들 및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론이 합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또한 비용을 보조하여 돌을 다듬기를 이미 마치자, 진사 송방조(宋邦
祚)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참판 조헌의 마음과 일을 아는 이가 몇 분인데 모두 세상에 살아 있지 아니하니
감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내가 참판을 잘 알았는데 그가 순국한 초기 내가 행조에 있다가 듣고 특히
슬퍼하였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바라보면서 순국한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어서 예전 마음을 풀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글을 짓고 사적을 적어서 이 일을 돕게 되었으니 어찌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리오마는, 다만
노쇠한 나머지에 어찌 능히 그 사적을 빛나게 써서 땅 밑에 7백의 충혼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할 수 있으랴. 아! 상심된다. 일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끝에 부치노라, 하고, 그 시에,
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臣有大綱
목숨을 바쳐 직분을 갚음은 / 授命酬分
지사의 당연함이건만 / 志士所程
이해가 그것을 빼앗아 / 利害奪之
진실로 실천한 이가 적으니 / 允蹈者鮮
난에 임해서야 나타나네 / 臨難乃明
강직한 조공은 / 侃侃趙公
학문이 이미 실천되어 / 學旣踐實
충성에 합하고 바른 것을 밟았네 / 合忠履貞
전년 용사의 해가 / 昔歲龍蛇
운이 양구를 당하여 / 連屬陽九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네 / 島夷構兵
금탕이 험함을 잃어 / 金湯失險
감히 막아내는 이 없어 / 莫敢儲胥
바로 한경에 처들어 왔네 / 直抵漢京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매 / 鑾輅西遷
공이 피눈물을 흘리니 / 公泣其血
의는 중하고 몸은 가벼웠네 / 義重身輕
팔을 걷고 한 번 외치매 / 振袂一呼
의병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 義旅齊奮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하였네 / 如響赴聲
강개히 창을 베고 자면서 / 慷慨枕戈
군사를 멈춤이 없이 / 誓無留陣
청주에서 적을 멸하기로 맹세하였네 / 覆賊于淸
흉한 기세가 심히 치성하여 / 兇焰孔熾
금계를 차지하였는데 / 盤據錦溪
누가 그 고래를 잡아 죽일꼬 / 孰剪奔鯨
공은 우리 군사에게 / 公激我師
이 놈들을 멸한 뒤에 조반을 먹자고 맹세하고 / 滅此朝食
바로 나아가 감히 공격했네 / 直前敢攖
혈전하기 한참 만에 / 血戰逾時
화살은 다되었으나 / 矢盡途窮
북소리는 오히려 울렸네 / 枸鼓猶鳴
적을 많이 죽여서 / 殺賊過當
임금의 은혜를 갚았으니 / 以報主恩
비록 패했으나 오히려 이긴 것이네 / 雖敗亦嬴
임금 위해 죽는데 어찌 피하며 / 殉君胡避
장수 따르는데 어찌 두려워하랴 / 從師胡惘
열렬하다! 한 군영이여! / 烈哉一營
일이 행조에 알려지자 / 事聞行朝
충의를 표창하고 벼슬을 내려 / 褒忠錫秩
특별히 임금의 정을 표시하셨네 / 特軫震情
옛사람이 말하기를 / 人亦有言
부서져서 완전함이 있고 / 有碎而完
떨어질수록 꽃이 핌이 있다고 하였네 / 有殞而榮
마침내 그 몸은 죽었으나 / 竟毁其魄
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여 / 實全其天
그 신령이 위로 올라가리 / 其神上征
끓어오르는 기운과 울려 퍼지는 소리가 / 騰氣犇音
우레가 되고 벼락이 되어 / 爲雷爲霆
우루루 쿵쾅쿵쾅 / 殷殷轟轟
저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 掃彼欃槍
남방의 기강을 지키니 / 以桿南紀
국토가 편안케 되었네 / 彊塲載寧
진 터의 구름은 아득하고 / 陣雲莾蒼
들새는 슬피 우는데 / 野鳥哀吟
충의의 넋이 한 구덩에 묻혔구나 / 毅魄同坑
서대는 구름에 솟고 / 西臺陵雲
진악이 옆에 있어 / 震岳在傍
아울러 이 무덤을 표시하누나 / 幷表厥塋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이 큰 비를 읽으면 / 讀此豐碑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듯하리라 / 其人若生
하였으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그 뒤 권필(權鞸)의 시에,
몇 번이나 운대의 난간을 꺾었으며 / 幾折雲臺檻
초수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長吟楚水醒
종래로 큰 군자는 / 從知大君子
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알겠네 / 不處小朝廷
곧은 기운은 천지를 베고 / 直氣斬天地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 孤忠炳日星
높디높은 금산의 빛은 / 崔嵬錦山色
만고에 이렇듯 푸르네 / 萬古只摩靑
하였으니, 중봉을 위해 지은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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