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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1)
황동규 시인과의 대담
1) 황동규,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의 한 구절
토요일 오후는 언제나 인간이 가장 외로운 오후다. 생의 다정한 실패들과 함께 구정물이듯 머리 위로 쏟아지는 토요일 오후 ! 몸 가진 자의 자유를 무한으로 늘이고 생기는 전무(全無)한 시간의 틈 속으로 밀어놓는다. 겨울 날씨치고는 춥지 않다. 말간 하늘 아래에 서니 집단적 악과 개체의 악들이 이전투구를 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아득한 변방으로 밀려나온 느낌이다. 적막과 함께 동맥의 출혈로 몸에서 한없이 새나간 듯 이 빈혈의 느낌은 무엇일까, 무장해제 된 듯 이 나른한 이완감은 무엇일까. 겨우 견딤만이 허용된 이 삶의 무게로 어깨는 한없이 무거웠다. 오후 2시가 되면 어디에도 희망이 없을 것이다. 내 안의 모차르트는 오래 전에 죽어 버렸다. 어쩐지 물기 한 점 없이 고갈되어버린 사막의 가슴으로 황동규 시인을 만나러 나선다. 약속장소는 서울 사당동의 한 커피전문점이다. 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오후 1시, 엘빈 커피전문점. 신예 평론가 금은돌이 대담녹취와 사진촬영을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황동규 선생이 “뿔테안경 낀 성성(猩猩)”이가 아니라 소년의 호기심 많은 눈을 갖고 성큼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선다. 선생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나는 원두커피를 시켰다. 주말 오후의 커피전문점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다소 어수선하고, 성능이 그리 좋지 않은 오디오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향(音響)은 귀에 다소 부담스러운 데시빌로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 깨어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1)
장석주 :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해가 1938년이니까, 작년에 칠순을 맞으셨고,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한 해가 1958년도니까, 등단한 지도 어느덧 50년을 맞으셨습니다. 특별한 감회 같은 게 있으셨을 것 같아요.
황동규 : 사실은 감회가 없었어요. 작년 1월 초에 『출판저널』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요청이 있었는데, 매정하게 거절했어요.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너무 박정하게 거절했다 싶어서 아주 후회가 많았어요. 그렇다고 전화 걸어서 다시 하자고 할 수도 없었고요.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나중에 조선일보하고 중앙일보에서 요청이 있었을 때는 선선이 인터뷰에 응했어요. 내가 좀 무심한 사람이긴 해요. 어떨 때는 제 생일도 모르고 지나가요. 그만큼 무슨 날이나 해를 따져 기념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죠.
장석주 :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게 몇 년이죠?
황동규 : 2003년 8월이예요.
장석주 : 서울대학교 교수를 오래하셨죠?
황동규 : 34년 반 했지요.
장석주 : 오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맞는다는 것은 일과 직업에서의 해방이잖아요. 일의 구속, 관계의 구속, 시간의 구속에서 자유를 얻은 건데, 어떠세요, 정년퇴임 뒤에 일상생활이나 의식에 변화가 있었나요 ?
황동규 : 처음에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있었어요. 3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일상의 궤도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거잖아요. 시에도 나오죠?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이 있었어요. 생활이나 의식의 변화보다는, 뭔가 늘 튕겨나가는 걸 붙들었던 끈 같은 게 사라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장석주 : 의외로 담담하시네요. 심적 전환의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황동규 : 그랬을 겁니다.
장석주 :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세요?
황동규 : 일주일에 네 번쯤 현충원을 산책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달째 쉬고 있어요. 발꿈치에 탈이 나서 한 달 가까이 고생했어요. 다음 달부터는 산책을 다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장석주 : 산책 하시는 것 말고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
황동규 : 내가 퇴임하고 나서 1년 반 뒤에 서울대학교에 연구교수동이 생겼어요. 큰 방 하나를 칸막이 해가지고 네 사람이 쓰는데, 일삼아 그곳을 나가지요. 다른 사람이 안 나올 때는 혼자 음악도 틀어놓고 책을 읽고 글을 쓰지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홍대 앞에 있는 문학과지성사의 목요일 저녁 모임에 나가죠. 김병익, 김주연, 김치수, 김원일, 정문길 같은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고 들어오지요. 발뒤꿈치가 아파서 요즘은 몇 번 빠졌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두 번씩 만나는 사당동패가 있죠. 김명인, 이숭원, 홍신선, 하응백, 김윤배 씨 등이 나와요.
장석주 : 사당동패와는 만나시면 뭘 하세요?
황동규 : 주로 술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얘기나 글 쓰는 고통에 대해 얘기해요. 전부 다 술을 할 줄 아니까. 그게 기본이지요. 그들과 어울려 여행도 꽤 했지요.
* 저 세상 불빛을 한순간 미리 본 적이 있는가 ?2)
장석주 :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여행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전집을 보면 여행에서 건져올린 시편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황동규 : 문학평론가 김현이 죽기 전에 함께 여행을 다니던 멤버들이 있었어요. 그 뒤로는 사당동패 하고 여행을 가요. 김명인 씨 고향이 후포항인데 거기를 일 년에 한 번씩 갔어요. 2박 3일 정도로 다녀오기 맞춤한 곳이예요. 오가는 길에 영주 부석사도 들리고, 안동이나 강릉도 들리고요. 한 열 번 가량은 갔을 거 같아요. 김명인 씨가 그 별장을 팔았어요. 이젠 거기 갈 일이 없어져버린 거지요.
장석주 : 여행을 빼놓고는 선생님의 시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없을 듯싶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주로 여행에서 시적 영감을 얻나요 ?
황동규 : 내 시를 여행시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워요. 여행시에는 반드시 여행 풍물이 나와야 하는데, 내 시에는 그게 없어요. 내 시를 여행시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여행은 익숙한 삶을 비켜서서 보는 계기를 주지요. 일상적인 데서 벗어났기 때문에 일상이 가리고 있던 안 보이는 본질과 부딪치기 쉬워지지요. 여행에서 시적 착상을 얻지만 여행지 얘기가 안 나오니까 여행시가 아니라는 거지요. 현대문학사에서 올봄에 나올 시집 『겨울밤 0시 5분』의 3부에도 여행 얘기가 많지만, 여행시는 없어요. 아니, 여행시도 있긴 있어요. 「구도나루 포구」라는 시인데, “별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 민짜 여행시를 하나 쓰자.”라고 시작하지요.
장석주 : 『창작과 비평』 2008년도 겨울호에 발표한 시지요?
황동규 : 민짜 여행시라는 건 진짜 여행시가 아니라는 거지요. “타곳에서 불현듯 돋을새김되는 삶의 요철 쓸어보고 / 그동안 뭘 살았지 ?”라는 물음은 나오지만 여행지 얘기는 거의 없어요.
장석주 :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겨울밤 0시 5분」이라는 시를 읽는데, 선생님의 최근 마음의 근경(近景)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본 느낌이 들었어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거나, 마지막 구절이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와 구절들에는 선생님이 맞이한 노년의 삶에 대한 감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녹아있다고 봤습니다. 새 시집의 다른 시편,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의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이라는 구절도 시의 화자가 최근 가 닿은 적막한 실존의 시각을 가리킵니다. 발밑의 캄캄한 어둠을 저는 죽음에 앞선 불안의 모호성을 드러낸 기표적 기호로 읽었거든요. 이때의 느낌은 “이제 철렁 세상이 굳는 / 기이한 느낌”(「무(無)추억을 향하여」)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 때문에 직관으로 다가오는 이 어둠을 보고, 또 이 어둠 앞에서 불가피하게 떨 수밖에 없는 ‘겁먹은 별들’들이지요. 서정적 주체의 현존은 빛이 사라지기 직전의 문턱에 걸쳐져 있습니다. 아직 이 어둠은 당도하지 않았고, 그것은 선취된 예감으로만 부재의 현전을 예시합니다. 지금-여기의 실존을 감싼 무(無)로 충만한 이 어둠 때문에 역설적으로 ‘나’의 살아있음을 환합니다. 어둠 속에서 “이 환한 살아있음 !”(「삶의 맛」)은 조만간 그 생명의 불을 끄고 대지의 무 속으로 스며들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시인은 예언잡니다. 그러니까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삶을 살아낸다는 건」)라는 어조가 가능하겠지요. 바로 이런 예감과 느낌들이 섬광처럼 터져나오는 건 선생님께서 막 도착한 실존의 시각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
황동규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죠. 오생근 씨는 「겨울밤 0시 5분」를 상당히 신비한 면이 있는 시다, 라고 말하더군요. 이 시에서는 화자가 별과 대화를 하잖아요.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 안 올지 모르는 사람 ? / 어둠이 없는 세상 ? 먼지 가라앉은 세상 ? /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으면서 빛 내뿜는 / 혜성의 삶도 살맛일텐데.’” 장 선생이 아까 한 그 얘기도 맞을 거예요. 지금도 느끼는데, 나이 들어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는데 상상력은 오히려 더 풍부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 시인, 그 ‘어두운 더듬음이여’3)
장석주 : 어쩌다가 시인이 되셨어요?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에 보면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그 피의 불가결한 기질이 만들어낸 운명적 부름인가요, 혹은 계통발생의 문학적 DNA의 내림인가요 ?
황동규 : 처음엔 작곡가가 되려고 했어요. 작곡 선생은 따로 없었고, EM이라는 책 가지고 독학을 했지요. 미군 부대서 나온 필드 매뉴얼이지요. 일종의 전술교본인데, E는 에듀케이션의 약자예요. 화성학 책을 구해갖고 혼자 공부를 했는데 영어만 알면 그런 책은 어렵지 않아요. 집에 있는 낡은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하다가 포기했어요. 어머니는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라셨지요. 그때는 문과 이과가 갈라지기 전이니까, 대학에서 수학 시험만 따로 보고 전공을 결정했어요. 수학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의대나 법대를 갈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원서만 쓰면 20만 환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때 20만 환이면 시집을 출판하고도 남았거든요. 그 당시 이중한이란 친구가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시집을 냈고, 훨씬 후의 일이지만 시인 문정희도 고등학교 때 시집을 냈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의대 원서를 쓰고 그 돈을 받아 시집을 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요. 아니면 술을 진탕 마시든가 여행을 하든가. 이삼일 생각하다가 아버님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요. 어머님을 말려 달라고요. 말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도 의대나 법대 가기를 원했어요. 그때는 요새보다도 사는 게 힘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시 쓰겠다, 그랬죠.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죠. 1960년대 말부터 대학이 갑자기 커지면서 대학교수 자리가 많아져서 운좋게 대학교수가 된 거죠. 시를 쓴 건 다른 출세를 생각 안하고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출발한 거니까, 운명이라고도 볼 수 있죠. 서울고등학교 재학 중에 학교신문에 소설도 몇 개 쓴 게 있어요. 근데 그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장석주 :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요?
황동규 : 내가 아직 찾아가 보지는 않았어요. 갖고 있던 것은 이사 가고 그러는 동안에 사라졌어요. 당시 그 소설을 보고 한 선생이 나를 문학가로 인정하고 그랬어요. 좀 긴 꽁트죠. 그런데 소설보다는 시가 더 재미있어요. 시는 언어 자체를 가지고 굴리는 맛이 있지만 소설은 그런 거 없잖아요. 시가 소설보다 더 음악적이라는 것도 시를 선택한 이유가 되겠죠. 만약에 내가 시를 한만큼 소설을 썼으면 돈을 제법 벌었을지도 모르죠.
장석주 : 선생님께서 만 스무 살 때인 1958년에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하셨는데, 추천을 받고난 뒤에 ‘나는 시인이다’라는 의식이 있었나요?
황동규 : 그게 말이죠. 『현대문학』 추천작들을 쓰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거예요. 고등학교 교지에 실렸으니까, 18살 때가 맞죠. 「시월」은 대학교 1학년 때 쓴 작품이죠. 선배들이 추천을 받은 뒤 너무 시인 행세를 하며 으스대는 게 보기 싫었어요. 그리고 좋은 시인이 되려면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땐 장 선생 세대와는 달리 외국어가 없으면 세계문학을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영문과에 간 것도 마땅히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이 없어서예요. 기껏 해봐야 박목월 씨가 일본어에서 중역(重譯)한 『좁은 문』정도가 있었지요. 지금 읽어보면 오역도 많았을 거예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날림으로 영어 원서들을 읽었는데, 예이츠, 엘리엇, 보들레르, 랭보를 읽으며 내가 시인이라고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사람들은 너무 깊어서 내가 범접하지 못하는 어떤 경지가 있다고 생각했죠. 지금 본다면 그들의 시중에도 별 거 아니다, 하는 것도 있겠죠. 그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추천을 받고도 내가 시인이라는 뚜렷한 자의식은 엷었지요.
장석주 : 첫 시집『어떤 개인 날』이 나온 게 몇 년입니까 ?
황동규 : 내가 대학 졸업한 해니까 1961년이지요. 대학원을 가면서 시집을 내고, 대학원 한 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입대해 3년을 보냈지요.
장석주 : 첫 시집을 내고도 시인이 됐다는 기분이 안 들던가요?
황동규 : 주위 사람들은 다 좋아했어요. 물론 저도 기뻤지만 내가 시인이다라는 의식은 그때도 없었어요. 그 시절만 해도 시가 넓은 의미에서 대중적인 게 아니었어요. 시집 초판을 500부 찍던 때니까요.
장석주 : 대개 자비 출판이었죠 ?
황동규 : 자비출판이었죠. 아버지의 친구이신 원응서 선생이 하시는 중앙문화사란 출판사에서 냈는데, 출판비용을 좀 싸게 해줬어요. 500부를 찍어서 내가 100여부를 받아 지인들께 기증하고, 책방에서 2~300부는 팔렸을 거예요. 그 나머지는 원 선생님이 어떻게 처분했는지 모르죠. 나중에 보니까 이화여대 도서관에서고 샀더군요. 지금은 그 시집이 희귀본이 되어서 몇 십만 원 나가요.(웃음)
장석주 : 초판본을 가지고 계시나요?
황동규 : 서가에 몇 권 남아 있었는데, 집에 온 사람들이 그걸 말없이 들고 갔어요.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갖고 뭐라고 따질 수도 없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뭐 그렇게 관용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나중에 시인 김영태가 갖는 있던 걸 빌렸어요. 복사를 하고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김영태 시인이 전화를 해서 그 시집 돌려주지 않으면 나하고 절교하겠다고 하더군요. 뭐 그걸 가지고 친구 사이에 절교를 하나 은근히 부아가 돋았어요. 그래서 그 시집을 돌려주지 않았어요. 아마 그게 서가에 있을 거예요.
* 이 저녁 견딜 만하신가 ?4)
장석주 : 「태안 두웅 습지」에도 “평생 얽히고 긁힌 연(緣)과 상처의 엉긴 밧줄과 헝겊 조각들이 / 휑하니 꿰뚫려 뵈기도 하던가?”라는 구절이 나오고, 선생님의 최근 시들에 부쩍 삶을 전체적으로 직관하는 구절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꽃의 고요』(2006년)에서는 황혼과 어둠이 뒤섞이는 시간대가 시적 배경으로 많이 나오던데요. 이것이 혹시 빛의 세계 너머의 삶에 대한 직관으로 봐도 좋을까요 ?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손 털기 전」) 같은 구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에 대해 말하던데요.
황동규 : 아마 늦가을과 겨울도 많이 나올 거예요.
장석주 : 황혼과 저녁 어스름이 뒤섞이는 시간대, 늦가을에서 겨울로 교차하는 계절적인 배경에서 평온함 속에서 겪게 될 죽음의 심리적 실재를 읽는 것은 제 비약일까요 ?
황동규 : 나도 모르게 나온 것들이죠.
장석주 :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온 것들이겠죠? 예를 들면 「당진 장고항 앞바다」라는 시에서 “그 언젠가 몸의 살 그 누구에게 눈부신 아픔으로 내주고 / 뼈마디들도 내주고”와 같은 구절, 또 시집 『풍장』(1996년)에서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 바람과 놀게 해다오.”(「풍장 1」)같은 구절을 보면 지난 십여년 전부터 선생님의 시에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가 들어오는 건 아닌가, 싶은데요.
황동규 :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죽는다는 게 황홀하기도 해요. 아마 옛날부터 단련을 해서 그런 모양이예요. 『풍장』도 죽음에의 단련이지요. 또 내가 종교 자체 속에서도 우리 보다는 더 큰 존재와 만나는 거를 좋아했거든요. 종교에서 기복신앙을 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돼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삶을 두려워하는 거죠. 정말로 티내는 게 아니라 진짜 왜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아등바등 대는가 잘 이해가 안돼요. 요즘처럼 경제가 나빠서 그렇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서 아등바등하고 몸을 아끼고 그런 게 흔쾌하게 납득이 잘 안돼요. 요즘엔 죽음이 황홀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장석주 : 왜 죽음이 황홀할까요 ? 죽음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난파 같은 것 아닌가요 ?
황동규 : 두려움이 없으니까 황홀한 게 아닐까요. 글쎄,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다 크고 다 끝나서 그런지, 죽는다는 게 그렇게 두렵다거나 섭섭하다는 생각은 없어요.
장석주 : 종교에서도 꽤 놓은 경지라고 말하는 해탈에 이를 때 비로소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선생님은 시의 구도자로서 그런 경지에 올라선 게 아닐까요?
황동규 : 나는 해탈 같은 건 상대 안 해요.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분명 아니지요. 모든 게 시한테 배운 것 같아요. 시에서 자꾸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도 황홀할 수 있다, 이렇게 자꾸 대화하다보니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던 것 같아요. 단 한 가지, 내 두려움은 치매에 걸리는 거예요.
장석주 : 치매란 모든 기억에서 단절된 상태, 생명의 시원으로의 회귀, 완벽한 경지의 자유니까, 치매는 오히려 무지몽매함의 황홀경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황동규 : 일방적인 경우는 안 좋죠.
장석주 : 치매는 제 인격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치명적이겠죠. 그러나 뒤집어보면 치매란 나와 남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사람 이전의 사람, 생명의 원초적 물성의 경지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황동규 : 동물성이란 말이죠. 책임이라는 요소가 많이 들어가요. 동물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과 새끼들을 본능으로 보살피죠. 때로는 개과 동물 같은 건, 전체를 위해서 희생을 한다든가, 그런 동물만의 의식이라는 요소가 다 있어요. 치매에는 그런 게 없어요. 생물이라면 인간이든 미생물이든 소통하잖아요. 치매에는 그게 없죠.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생물체가 되버리잖아요 ? 인간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인데, 치매에 걸리면 더는 그런 상호작용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죠. 그 상호작용이 끊긴 상태에서는 황홀이건 비황홀이건 의미가 없어요. 남한테 피해만 주고 고통만 주는 거 아니겠어요?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물성만 남는 거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치매 외에는 두려움에 구속될 가능성은 없어요.
장석주 :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니까 슈마허(E. F. Schumacher)의 말이 생각나네요. 슈마허는 존재계를 네 단계로 나눴더라고요.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인데, 슈마허가 세상을 떠난 해에 출판된 책이니까 말년에 쓴 책이겠지요. 슈마허는 불교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이론을 창안하고 펼친 조금은 독특한 경제학자지요. 사람과 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인데요. 이 사람에 따르면 사람은 ‘나’라고 말하는 주체이자, 능동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모든 환경과 우연을 넘어서서 다른 존재들을 객체로 지배할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이지요. 치매 환자란 인격적 신을 마음에 품은 주체로서 인간이 갖는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린 존재겠지요. 그래서 광물이나 식물같이 환경과 우연의 지배력에 제 삶을 맡길 수밖에 없는 존재겠지요. 슈마허에 따르면 존재계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네 단계로 나뉩니다. 광물계는 물질 M이라는 상태고, 식물계는 광물계의 M에서 X가 더해진 상태죠. X는 불가사의한 힘, 에테르 같은 원형의 생명력이지요. 식물들은 광물에게는 없는 그런 걸 갖고 있지요. 동물계는 식물에게 없는 것들, 이를테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사냥하고, Y라고 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동물계는 M+X+Y의 상태죠. 그러나 동물은 사람에 비해 환경과 우연에 대한 지배력이 현저히 약하지요.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Z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인식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이걸 안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은 M+X+Y+Z의 상태죠. 치매 환자는 사람은 사람이되 환경과 우연을 제 뜻에 따라 지배하고 조정하지 못하는 동물의 수동성 단계로 떨어진 그런 존재겠지요. 치매란 자신이 처한 안과 밖에 대한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내면공간이 사라진 상태겠지요.
황동규 : 얘기가 재미있는데요? 미생물은 어떻게 분류하나요?
장석주 : 미생물은 동물이겠지요. 동물 중에서도 진화가 진행되지 않은 초기 형태의 동물계에 속하지 않을까요 ? 식물보다는 능동적 움직임을 갖고 있으니까요.
황동규 : 미생물에도 식물적인 미생물이 있고 동물적인 미생물이 있지요. 그리고 식물도 때로는 얼마나 영특합니까 ? 좋은 음악을 틀어주면 거기에 반응한다고 하지 않나요 ?
장석주 : 네. 그런 결과도 있지요.
황동규 : 동물이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데, 치매는 의식을 가지지 못한 존재죠. 동물화 하는 건 아니죠. 넓은 의미엔 식물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난 그거보다도 ‘자기의 길’을 그친 상황이라고 봐요. 그게 두려워요. 남한테 완전히 짐이 되고. 고통이 되는 것, 그건 참 인간으로서 못할 일이죠.
장석주 : 개인적으로 수전 손택의 책을 좋아해서 그 사람의 책을 계속 읽어왔는데요, 얼마 전에 그 아들이 수전 손택이 죽기 직전의 몇 달을 기록한 책이 나왔더라고요. 데이비드 리프가 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책인데요. 수전 손택이 얼마나 명민하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분입니까? 1975년도가 유방암에 걸렸다가 그걸 극복하고 나서 이십 몇 년을 더 살았어요. 노년에는 골수이형성증후군 판정을 받는데 이게 혈액암같은 건가봐요. 수전 손택은 자기한테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끝까지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인 부정을 하더군요. 자기가 왜 죽느냐, ‘꺼져 가는 빛에 대한 분노’를 막 드러내죠. 그러니까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마지막 과정이 처절했던 거죠. 그걸 아들이 객관적으로 썼더라고요. 수전 손택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납득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은 거죠.
황동규 : 좀 극단적인 예네요. 나는 거의 반대편이에요.
장석주 : 그러니까요. 놀라워요 !
황동규 : 나는 조금 더 살기 위해서 일부러 노력은 안 할 생각이에요. 내 친구들 몇 명도 오래 살려고 산에도 가고 약도 먹고 그랬어요. 소설가 홍성원 씨도 아주 나쁜 징후의 위암 걸려서 3년을 더 살았어요. 서울대 영문과에 함께 있던 김영무 교수는 폐암이었는데, 이 분도 몇 년 더 생명을 연장했어요. 아마 나처럼 방치한다면 3년을 못 살겠죠 ? 또 못 살면 어때요? 그 사람들은 의사가 하라는 거, 다 안했어요. 의사가 하라는 거 10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안하고 다른 데에 매달렸거든요. 요새는 좋은 게 있답디다. 수술을 할 때 중요한 감각을 자른답니다. 그러면 별로 고통이 없대요. 고통이 너무 크니까 자기를 망가뜨리고 그러는 건데 가능하다면 안 망가뜨리고 죽는 게 좋겠지요.
장석주 :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자기를 깨뜨리는 게 제일 비참한 상황이겠죠.
황동규 : 아, 죽기 전에 먼저 존엄성이 깨지잖아요.
장석주 : 자기의 인격, 품위와 같은 인간의 모든 존엄한 것들을 버리면서까지 수명을 인위적으로 더 연장한다는 것은 뜻이 없다고 봐요.
황동규 : 그렇죠. 1년을 더 살아서 뭘 하겠어요.
장석주 : 그런 최소주의에 빠진 삶이라는 건 그야말로 남루 그 자체겠지요.
황동규 : 그 남루는 이따금 그 속에 왕자도 숨어있거든요.(웃음)
장석주 : 네,(동시 웃음) 치매는 왕자가 숨어있지 않은 남루인가요 ! 촌철살인이네요.(웃음) 선생님의 그 죽음에 대한 태도는 스콧 니어링의 태도하고 많이 닮아있네요.
황동규 : 그래요?
장석주 :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자연수명으로 백 살을 산 뒤에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죽음을 선택하게 해 달라고 했지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어떤 의료적인 행위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스스로 곡기를 끊었어요. 그렇게 인간적 존엄을 지키면서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은 거죠. 이제 내가 갈 때다, 하고 죽었죠.
황동규 : 그건 선사(禪師)들도 다 그렇게 죽었어요. 어떤 사람은 신발 신다가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고리를 붙잡고 죽고, 어떤 사람은 정좌자세로 죽잖아요.
장석주 : 선사들은 죽을 시각을 미리 말하고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키잖아요.
황동규 : 그럼요. 그 사람들은 추한 죽음은 하나도 없어요. 추한 죽음은 후학들이 삭제한 것도 있겠지만요.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죽음을 한 것을 보면, 혹시 삭제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랬다고 봐야하겠지요. 내가 선사들 어록을 다 좋아하는데, 선사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존재들이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선(禪)과 시가 닮아 있잖아요 ? 그렇다고 내가 선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요. 사실 선은 이해할 필요가 없죠.
장석주 : 선은 의미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것, 의미의 구속에서 스스로를 풀어서 방임하는 것, 오히려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능동적 태만, 그런 게 아닐까요?
황동규 : 몇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삶의 비밀이 따로 없다는 게 바로 삶의 비밀이라는 거죠. 선사들이 “말해라, 말해 !” 그러면서 말 안한다고 몽둥이로 두드려 패죠. 또 고양이를 죽이고 짚신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요. “말해라, 말해 !”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이 세상에 비밀이 있다면 단 하난데, 그건 비밀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는 말을 하든가, 아니면 내가 부처라는 것을 말로 하지 말고 직접 보이라는 거지요.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하라는 얘기죠.
* 너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느냐5)
장석주 : 어리석은 질문인데요, ‘자기’라는 건 뭘까요 ?
황동규 :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데요.(웃음) 자기에 대한 생각을 과거에 해봤지만 뭔가 결론이 나지 않던데요. 있는 듯 하지만 파보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걸 거예요. 사람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먹는 존재면서 이따금은 그걸 넘어서서 다른 생명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직 정의를 못 내리겠어요.
장석주 : 그렇죠. 고독하고 더럽고 야만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면서도 때로는 숭고하고 고결하고 순간에서도 영원을 보는 존재가 사람이니까요. 선생님께는 시가 자기에 대한 탐색의 도구이기도 한가요?
황동규 : 탐색이라기보다는 시하고 대화를 하면서 자기를 바라보게 되죠. 그렇지만 딱히 자기를 뭐라고 명문화해서 말하기는 힘들어요.
* 잠깐이 몇 섬광인가 !7)
장석주 : 최근에 시 발표가 부쩍 활발한 듯 싶어요. 아까 말한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것 말고도 『작가세계』와 『현대문학』에도 연이어 신작을 발표하셨죠.
황동규 : 근래에 많이 했어요.
장석주 : 그 시들을 보면서 놀란 것은 선생님의 시들이 젊다는 것이지요. 어떤 젊은 시인의 시보다도 발랄하고 감각이 살아있어요. 젊은 시절부터 노경이라고 할 수 있는 요즘의 시들까지 선생님의 시에는 날 것의 생동감이 한결같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 젊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황동규 : (웃음) 그건 알 수 없죠.
장석주 : 나이 얘기를 하면서 이 대담을 시작했지만 어느덧 이르신 칠순의 나이가 시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거든요. 심지어 노경이나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에 들어올 때조차도 나이든 자로서가 아니라 굉장히 젊은 감각과 사유로 그것을 포획한다는 거죠. 그 젊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
황동규 : 다른 건 모르겠고, 삶의 현상들을 가능한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계에 부딪쳐 가는 거죠. 이를테면 10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 있어요. 요즘 그 책을 열독하고 있는 중이죠. 가드너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서양미술사』라는 책이에요. 한 보름만에 1000페이지를 절반이나 읽었어요.
장석주 : 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 ! 그게 의식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인가요 ?
황동규 : 그렇죠. 이제는 늙었으니까 그만 두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 대신 이따금 다리가 아픈 것뿐이죠.(웃음)
장석주 : 육체의 노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황동규 : 이숭원 선생이 대학원 학생들한테 사랑의 시 세 편을 골라서, 시 쓴 사람의 나이를 젊은 순서로 배열하라고 했대요. 그때 내가 60대였는데, 「쨍한 사랑의 노래」를 주고, 50대와 40대 시인이 쓴 걸 줘 보니까, 내게 제일 앞에 오고 젊은 사람들 시가 뒤에 있더래요. 「쨍한 사랑의 노래」도 적극적으로 사랑에 접근한 거니까요. 젊다기보다는 생생한 거죠. 나는 젊다 늙다, 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감각과 의지와 모든 게 생생한 거죠.
장석주 : 그건 대개 젊은 자들의 특성이잖아요?
황동규 : 30대인 황병승 시인의 시 같은 건 상당히 나이든 사람 시 같습디다. 나이하고는 상관없어요. 일반적으로 관계있을지도 모르지만 개개인의 시를 얘기할 때는 아마 황병승이 나보다 더 나이 든 감각으로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요. 어떻게 보면 최근의 문태준 시인의 시도 나보다 젊은 사람의 시가 아니예요.
장석주 : 아, 『그늘의 발달』요 ? 문태준 시인은 처음부터 능청스러운 노회함 같은 게 있었지요.
황동규 : 문태준이 앞에 낸 시집 『가재미』는 상당히 발랄한 시죠. 그런데 안주하려 들면 이미 그건 젊은 시가 아니지요. 앞에서 이룬 것을 되풀이한다면 그건 시집의 완성도라든가, 시집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젊거나 발랄한 게 아니지요. 늘 새롭게 부딪쳐가는 내 시가 더 젊고 발랄하다고 해야겠지요. 김선우 씨가 조선일보에 사랑의 애송시를 연재할 때 ‘내 시가 젊은 시인들을 아직 긴장시킨다’고 썼는데, 그 비슷한 얘기들이죠. 나는 물론 젊은 시인들을 긴장시키려고 쓰지는 않아요.(웃음) 김선우 같은 젊은 시인들을 긴장시킨다니까, 장 선생한테 질문 받았을 때 그 얘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알면 후배 시인들에게 얘기하면 좋겠는데요. 단, 적극적으로 생각하라, 중간 포기하지 마라, 피곤하고 힘들다고 자기가 꿈꾸는 것을 쉽게 접지 마라, 고 젊은 사람들한테 얘기하죠. 나한테도 얘기하죠. 주로 내가 시한테, 아니 시가 나한테 얘기하는 거죠. 시가 제대로 되려면 중간에 접어서는 안 되죠. 중간에서 접으려고 하면 시가 나한테 ‘정신 차려 !’ 얘기를 해요.
* 사방이 꽃과 버들 그리고 꿈결 같은 봄인데7)
장석주 : 선생님 전집을 일별해 보니까 연애시들이 참 많습니다.
황동규 : 사랑을 노래하는 건 예로부터 서정시의 근본이에요. 서정시의 영역에서 연애시는 불교에서 ‘아함경’과 비슷한 겁니다. 그걸 빼 놓으면 안 되죠. 연애시를 쓸 때의 감정이 나를 젊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어요.
장석주 : 연애시가 선생님께 젊음이라는 피를 수혈해주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짜 늙는다는 것은 연애 감정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이겠지요. 젊은 자들은 끊임없이 생동하며 변화를 아우르고 세계를 바꾸려고 하잖아요. 진짜 늙어버리면 그 모든 걸 귀찮게 여기겠지요. 그저 주어진 조건에 안주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황동규 : 장 선생 말대로 아주 옳은 말 중의 하나겠지요. 말하자면 늙으면 연애 감정을 못 느끼게 되죠. 그 연애감정이 꼭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닐 거예요. 사람을 넘어선 형이상삭적인 존재일 수도 있고, 우연히 보게 된 아름다운 꽃일 수도 있고요,
장석주 : 선생님이 쓰신 연애시 중에서 특별히 아끼시는 시는 어떤 시인가요?
황동규 : 「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쨍한 사랑 노래」같은 시를 좋아하죠. 내겐 음으로 양으로 연애시가 많지요. 아마 사분의 일이나 오분의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말을 하니까 보니 조금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의 뿌리」도 있지요. 「사랑의 뿌리」는 예외적으로 사랑을 빼앗긴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가는 시거든요. 「즐거운 편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연애시예요. 나보다 연상인 여자를 짝사랑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쓴 시예요. 그때 나한테 영향을 준 게, 미당이나 만해 같은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시인들과 다른 연애시를 쓰고 싶었어요. 6 ․ 25 직후에 실존주의가 유행할 때니까, 나도 실존주의의 틀 속에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원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일종의 선택이고 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의 바탕 위에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는 한 구절이 나왔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시를 좋아하는 건 특별히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모르고 쓴 그 실존적인 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이 시를 읽고 당황하는 이유도 그거일 거예요. 맨 날 ‘가시리’ 같은 연애시만 읽다가 이게 딱 나오니까 수능 시험에 나오면 못쓰겠다고 하나 봐요.
* 세상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릴 때8)
장석주 : 시가 선생님한테 준 게 많을까요? 빼앗아 간 게 많을까요?
황동규 : 저울에 놓고 달아보면 평형을 이루지 않을까요? 예전에 조선일보하고 얘기한 게 있어요. 『꽃의 고요』에 나올 거예요. 「비문(飛蚊)」이라는 시 얘긴데요. 눈앞에 물체가 날아다니는 환각을 비문증이라고 해요. 한때 이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눈을 꽉 감았다 뜨기도 하고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는데 물체가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현상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게 다 녹는데, 가을이 되면 황혼도 녹고, 큰 짐승의 내장처럼 모든 게 다 녹는데, 왜 모기는 안 녹느냐, 불평하던 시를 쓰다가 나도 모르게 날면 어때(!) “날건 말건 !” 이라는 시가 씌어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날건 말건” 이라고 자꾸 얘기했더니 이제는 의식할 때만 날아요. 보통 때는 안 느껴져요. 시가 나한테 가르쳐준 것이지요.
장석주 : 그것 말고 시가 준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황동규 : 찾아보면 많을 거예요. 첫째 번 이 시도 그래요.「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이 시를 보게 되면 외롭고 쓸쓸하잖아요. 밤에 화성시의 궁평항엘 왜 갔겠어요? 그때 내가 상당히 괴로워서 나갔거든요.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이게 나중에 들어간 거예요. 이걸 딴 걸로 바꾸려고 치환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산책에서 느끼지 못한 걸 시 쓰다가 배운 거죠.
장석주 : 삶을 견디게 하는 힘 같은 것 ?
황동규 : 그렇죠. 시가 나한테 가르쳐 준 거죠. 처음엔 돌아올 때까지 이 생각을 완전히 하지 못했어요. 궁평항을 다녀오고 한 사나흘 뒤에 시를 쓰다가 나왔어요. 시와 대화를 하다가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라는 구절이 튀어나왔어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하고 대화해서 같이 만들어 가는 거죠. 그게 내 후기 시의 특징이에요. 앞의 시들은 그렇지 않지만요. 심재휘 시인과 『시안』에서 대담한 적이 있는데, 그가 내가 전반기의 시와 후반기의 시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내가 시를 쓰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일 거예요.
장석주 : ‘초밤’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요?
황동규 : 초저녁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초밤이라는 것도 있겠죠.
장석주 : 밤의 첫! 이것도 조어겠지요? 선생님 시에 새롭게 직접 만드신 조어들이 몇 개 있는데, 제일 빛나는 것은 ‘홀로움’이라는 말인 것 같아요.
황동규 : 버클리에 반 년 있을 때 만든 말이죠.
장석주 : 외로움 하고 좀 다른 거지요?
황동규 : 외로움을 극복한 외로움이죠. 미국에 공부한답시고 버클리에 갔는데, 차가 없었어요. 셔틀버스라는 게 오후 5시면 딱 끊어져요. 밖에 나갔다가 숙소를 돌아올 때 4시 40분에 타지 않으면 끝이에요. 집에 걸어올 수가 없어요.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자면 거리도 거리지만 흑인들이 사는 거리를 거쳐야 해요. 백인이면 몰라도 황인종이 걷다가는 큰일 나요. 그때는 지금보다 한창 젊을 때 아닙니까 ? 아파트 23층에서 며칠 동안 혼자 있으면 정말 외롭다고요. 그때는 자주 술도 마실 때니까 서울에 있었다면 그렇게 혼자 외롭게 있을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국의 낯선 거처에서 혼자서 일주일이나 보름을 견뎠어요. 그러면 그 외로움에 이기든 지든 하는 수밖에 없어요. 시를 쓰면서 그 외로움에 미치거나 죽지 않고 이겨냈는데, 그때 쓴 시에서 이 ‘홀로움’이라는 말을 처음 썼어요.
장석주 : 외로움은 존재를 갉아먹고 소모시키는 감정이겠지요. ‘홀로움’은 외로움과는 다른 존재의 텅 빈 충만 상태, 외로움의 황홀경 같은 게 아닐까 혼자 짐작해봤는데요. 아, 외로움도 이렇게 즐거운 거구나 하는 공감을 느꼈어요.
황동규 : 외로움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익숙한 부분을 떼어버린 거죠. 시를 쓰다가 우연히 ‘홀로움’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혼자 있으면서도 이게 ‘홀로움’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기분이 나아요. 그 뒤론 견디지 못할 외로움의 상태는 거의 없어요. 이것도 시가 나한테 가르쳐 준 것이고, 시가 준 선물이겠지요.
장석주 : ‘홀로움’이라는 어휘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황동규 : 언젠가 그런 얘기를 누가 썼습디다. 국어문법에 맞게 쓰려면 ‘홀로로움’이 맞아요. 그런데 ‘홀로로움’ 하면 발음도 힘들고 좀 설명적이잖아요. 그래서 ‘홀로움’이라고 썼지요.
장석주 : ‘초밤’이나 ‘홀로움’ 같이 선생님이 새롭게 만들어 쓴 어휘가 또 있나요?
황동규 : 사람들이 주의를 안 해서 그렇지, 한 십여 개는 될 거예요. 이런 ‘무추억’ 같은 것도 그렇죠. (한참 시집 교정본을 넘기며)개똥도 약에 쓸려니까 없다고 얼른 안보이네요. ‘뼝대’라는 것도 내가 써서 널리 알려졌죠.
장석주 : 그 말은 원래 강원도 사람들이 쓰던 말이죠.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절벽을 ‘뼝대’라고 하죠.
황동규 : 에스키모인들은 눈이라는 단어가 한 20여개나 되요. 인간은 자기에게 가까운 것은 세분화해서 받아들이고, 그걸 지시하는 어휘도 자연스럽게 다양해지죠. 강원도 정선 근처 사람들은 하도 절벽을 보니까 구분했어요. 벼랑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고, ‘뼝대’는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거라고.
장석주 : ‘뼝대’라는 어휘를 선생님 시집에서 처음 알게 됐어요.
황동규 : 국어학자 이익섭 선생이 『표준국어사전』에 이 어휘를 등재했어요. 이 사전의 약점은 소설가들이 쓴 어휘만을 등재했다는 거죠. 외국사전은 다 시인의 시어를 등재하는데요. 우리나라 사전들은 의미를 더 천착을 하니까 시인의 언어는 배제하고 소설가의 것들을 우대했어요. 그런데 ‘뼝대’라는 말을 넣었어요. 그런데 누구누구 시에서 나온 것이다, 이건 빠뜨렸어요.
장석주 : ‘생추위’, ‘무추억’, ‘초밤’, ‘홀로움’..... 눈 밝은 국어학자가 시인들이 만들어 쓴 이런 조어들을 모두 찾아 풀이해서 국어사전에 등재한다면, 우리 언어가 더 풍요로워질 텐데요.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9)
장석주 : 선생님의 시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 루카치 만나면 루카칠 /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 놀부 만나면 흥부를......”(「풍장 4」)이라는 임제선사의 화법을 빌어 쓴 시가 있는데요. 임제선사는 부처나 조사나 나한을 만나면 그것을 죽이라고 했는데요. 물론 이것은 진짜 죽임이 아니라 선가에서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뜻을 품고 있는 말이지요. 선생님 앞에 있는 부처, 죽이고 넘어가야 할 시의 선각은 어떤 분인가요. 그동안 선생님의 글들을 종합해보면 그 부처는 서정주와 김수영일 것이라고 짐작되는데요.
황동규 : 네, 대담에서 많이 얘기했지요. 미당 선생은 내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일 거예요. 내 미당문학상 수상소감에도 밝혔지만, 그분께 세배를 다니다가 중간에 몇 년 동안은 발길을 끊었어요. 독재 권력자에게 아부를 좀 하고, 문학잡지도 내고 운전수가 딸린 외제차도 타는 혜택을 좀 받았잖아요. 그게 좀 화가 났었어요. 미당 댁에 발길을 끊은 뒤 아버님 제자들은 아버님한테 세배를 오는데, 나도 선배한테 세배를 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좀 했어요. 같은 학교에 있는 선배로 피천득 선생이 계시고, 나를 문단에 추천하고 내가 감동받은 시를 쓴 선배시인은 미당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다시 미당 선생에게 세배를 다녔어요. 미당은 뭐랄까, 자기보다 큰 힘을 만나면 적당히 구부리고 사는 구부림의 철학, 구부림의 윤리관을 가진 시인이지요. 미당의 후기시에 “세상을 살려면 좀 구부리고 살아라”(「곡」)고 노골적으로 노래한 구절도 있지요. 그런 윤리관의 바탕 위에서 일제 때는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을 찬양하고, 전두환 정권 때는 전두환을 찬양했겠지요. 달리 보면 미당은 사회의 보편적 윤리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다는 얘기가 되죠. 미당의 윤리는 사회 보편의 윤리가 아니라 샤머니즘적 윤리지요. 어쩌면 미당이 사회 보편으로 통용되는 윤리에 구속되었다면 황홀한 시가 안 나왔겠지요. 우리는 그런 점에서 윤리를 벗어나 시의 길을 걸어간 미당에게 윤리라는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죠.
장석주 : 미당은 몰윤리라는 가시면류관을 쓴 시인이겠군요. 친일 행적과 권력의 양지만을 쫓는 행적들은 바로 그 미당의 독특한 굽음의 실천윤리학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
황동규 : 예술가는 말이죠, 어떤 면에서는 몰윤리, 혹은 초윤리의 존재입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라모의 조카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라모의 조카는 디도르가 쓴 필사본을 카트리나 대제가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괴테가 번역을 했어요. 18세기의 윤리관으로 볼 때 라모의 조카는 아주 망나니에요. 헤겔은 거기서 현대 예술가의 초상을 읽어냈어요. 계몽주의 시대의 윤리로 보면 망나니겠지만, 예술가로서는 발랄하고 거침이 없죠. 헤겔 이후엔 사회의 보편으로 통용되는 윤리의 잣대로 예술가 비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죠. 헤겔 이전 하고 구분해야 해요. 미당의 샤마니즘적인 윤리관은 그의 삶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조금은 뻔뻔하면서도 유장하게 드러나요. 까딱 잘못하면 미당을 너무 핍박했다고 하기 쉬운데, 내가 윤리를 깔아뭉개고 시를 빚는 미당의 윤리관에 불만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만이야말로 내가 미당의 윤리관에 빚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겁니다.
장석주 : 미당에게서 시적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까 ? 헤롤드 블룸이 썼잖아요. 모든 뒤에 오는 자들은 앞에 간 자들의 ‘영향의 불안’ 속에서 자기 세계를 만든다고요.
황동규 : 있겠죠. 나는 영향은 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선각이 이룬 것들에 대한 배움이 없이 어떻게 사람이 커요? 내 시에 미당 영향도 있을 거고 김수영의 영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장석주 : 미당에서 받은 영향을 꼭 꼬집어서 얘기하면 어떤 게 있을 까요?
황동규 : 그건 다른 사람이 얘기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내가 찾아내기 쉬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을 거예요. 왜냐면 내가 빨아들인 미당의 시들은 이미 내 시의 피와 살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것을 일일이 적시한다는 것은 힘들지요.
장석주 : 선생님께서 평론가 이숭원과의 대담에서 “김수영 선생은 한국시에서 세계를 구조적으로 보는 방법을 실천한 최초의 시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겠지요 ?
황동규 : 아, 김수영 선생과는 만나서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랬지요. 그때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하도 당한 뒤라서 문학 얘기를 하게 되면 “그런 힘든 얘기 하지 마”하고 선배들이 말렸어요. 김구용 선생 하고도 문학 얘기를 나누었지만, 김수영 선생과 문학 얘기를 가장 많이 했어요. 미당에게서 시가 노래라는 걸 배웠다면 김수영에게서는 시적 자아를 일상으로 끌어내리는 방법, 그리고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법 같은 걸 배웠지요. 우리나라 시인들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발레리나, 혹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좋아할 때인데, 김수영은 스펜더라든가 오든 같은 시인을 좋아했어요. 엘리엇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김수영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던 발레리나 릴케도 상대적이로구나, 하는 점을 깨달았어요.
장석주 : 선생님 앞에 두 시의 부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두 분의 자장(磁場)을 몸으로 느끼고 그들과는 다른 내 길을 가야겠구나, 같은 시적 자의식이 생겼을 법한데요. 어떻습니까 ?
황동규 : 그럴 수도 있겠죠. 그 두 시인이 없다면 또 다른 자장을 찾아서 내 것으로 했겠지요. 예이츠나 랭보 같은 시인도 내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끌리면서도 그 세계 속에 녹아 들어가 버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지요. 모든 예술가가 그렇지 않겠어요? 앞선 예술가의 인력(引力)에 자연스럽게 끌리면서도 그 인력 속에서 자기를 해체 당하지 않으려고 버팅김은 뒤에 서게 된 자가 갖는 예술적 자존심이겠죠.
* 일찍 세상을 버린 친구여10)
장석주 :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평론가 김현 선생하고 친하게 지내셨죠?
황동규 : 김현과 나는 대학 동료고, 문학친구였지요. 거기에 술친구고 여행 친구였어요. 네 가지를 겸했죠. 한때는 같은 동네에 살았죠. 김현과는 친구이면서도 내가 그 친구한테 배운 것도 많았어요.
장석주 : 처음에 어떻게 만나셨어요?
황동규 :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군대에 입대하고 난 뒤, 김현이 서울대 불문과에 다닐 때죠. 김현은 문단의 안테나와 같은 존재예요. 문학은 물론이고 문단의 갖가지 스캔들까지 포함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김현은 술 마실 때 그런 얘기들을 들려주는데, 단 내가 발설 안하다는 조건을 달았지요. 지금쯤은 그 비밀들을 발설하고 싶은데, 그 조건을 해지해줄 당사자 죽고 나니까 완전히 비밀이 되어버렸어요. 유감이에요. 혹시 김현이 살아 돌아와 하루쯤 만나더라도 술 마시느라 바빠서 그거 해지시켜달라고 할 시간은 없을 거예요.
장석주 : 선생님이 기억하시는 김현 선생은 어떤 분이세요?
황동규 : 그 재능과 부지런함 때문에 내가 감탄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지요. 장 선생도 거기에 포함되는데, 김현은 책을 참 많이 읽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용 파악을 제대로 해요. 또 하나는 사람을 잘 사귀었어요. 사람들의 특징이라든가, 작품의 특징이라든가, 금방 금방 알지요. 책을 많이 읽어 박학다식한 사람이니까 그 옆에서 듣는 얘기들이 많으니까 책을 읽지 않아도 도움이 되는 게 많았어요. 시를 배웠다기 보다는 문학을 보는 거나 삶을 보는 거나 뭐 그런 걸 배웠겠지요.
장석주 : 1980년대 초반, 가끔 문학과지성사 사무실에 들르면 김병익 선생은 바둑 두고 있고, 김현 선생은 문학잡지를 읽고 있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요.
황동규 : 김현의 장점은 부지런 한 점이에요. 문학잡지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바로 전화해 가지고 ‘네 글 좀 보자.’ 하고, 사람을 만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키워 주던가, 밀어 주던가 했죠.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아깝게 빨리 죽었어요. 김현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술 마신 사람이 나에요. 죽으러 가는 병인데, 그냥 보낼 수 있어요, 반포의 ‘대감복집’에서 그가 정종 한 잔을 마시겠다고 우겼고, 나도 말리지 않았어요. 김현도 술꾼인데 정종 한잔 안 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었겠지요. 김현은 정종 한 잔을 조금씩 아껴 마시고 난 넉 잔 마셨어요. 그게 김현과의 마지막 대작이예요. 김현은 이튿날 병원에 들어간 뒤 반년 좀 넘어 타계했지요. 사람들이 김현과 마지막으로 술 마신 사람이 황동규라고 수군거렸어요. 맞다고 그랬죠. 그때 마신 정종 한 잔이 그의 생명을 15일 단축시켰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지요. 김현은 나보다 술도 잘 했어요. 그의 부인이 늘 취한 모습을 봤는데, 그 날은 취하지 않았으니까 아픈 사람에게 술 먹였다고 항의 하지는 않았어요.
장석주 : 김현 선생께서 불러주셔서 저도 반포치킨에서 몇 번 생맥주를 마신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시인세계』에 ‘문인들의 장소’란 글을 쓰면서 「반포치킨의 성자 김현」이라고 썼지요.
황동규 : 아, 반포치킨 ! 지금도 있어요.
장석주 : 그렇습니까 ? 반포치킨에서 들은 김현 선생의 해박하고 막힘없는 풍부한 문학담론도 황홀했지만, 마늘 잔뜩 입혀서 기름에 튀겨낸 닭을 안주삼아 생맥주를 마셨는데 그 맛도 기가 막혔지요.
황동규 : 반포치킨의 벽에는 내가 김현에게 헌정한 시를 어떤 독자가 동판 떠 가지고 붙여놓은 게 있어요. 그때 우리는 돈이 좀 있으면 ‘대감복집’ 같은 데로 가고 돈이 없을 때는 반포치킨으로 몰려갔죠. 김현이 죽은 뒤엔 아예 반포 쪽엘 안 갔어요.
* “위험하게 살아라 !”11)
장석주 : 선생님의 부친은 나라 안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 선생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피하시는 것 같아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나요 ?
황동규 : 이번에 『대산문화』(2008년) 겨울호에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한 40매 썼어요. 불편한 것보다도 내 동창 중 하나가 자기 아버지를 너무 들먹여놔서 그게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되도록 삼갔던 것이죠. 문학은 예술의 다른 장르와 달라서 아버지와 아들 둘 다 개성 있는 작가가 된 경우가 별로 없어요. 바하의 아들은 네 명이 전부다 그 당시 최고의 음악가였고,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면 아들도 대를 이은 좋은 화가들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나라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혹은 아버지와 딸이, 엄마와 딸이 음악가와 미술가로 함께 성공한 경우들이 적지 않지요. 문학은 드물어요. 왜냐? 문학은 체험을 써야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서 산 체험을 공유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뒤에 쓰게 될 아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기가 쉽지 않지요.
장석주 : 특히 소설이 그렇겠네요.
황동규 : 시도 마찬가지에요. 예외가 있다면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아버지 뒤마와 『춘희』를 쓴 아들 뒤마는 둘 다 소설가로 명성을 얻은 경우인데요. 이때도 아들 뒤마는 서자(庶子)였어요. 아들과 아버지가 한 집안에서 체험을 공유한 경우는 아니었지요.
장석주 : 선생님께서 아버지에게 진 문학의 빚은 전혀 없을까요 ?
황동규 : 내가 문학으로 살아남는다면 아버지에게 배운 것 때문이 아니라 배우지 않은 것 때문일 거예요. 사실 아버지보다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조부님이 아주 대단한 분이었지요.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사감 겸 한문 선생이었는데, 3․1운동 주모자 중의 하나였어요. 평양지역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1년 반을 감옥살이하고 나오신 분이예요. 조부는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망했다고 집에서 제사를 못 지내게 했어요. 자기 자신은 ‘나는 아버지한테 배운 거라 아들로서 나까지 지낸다. 그런데 내 아들은 지내지마라.’고 하시며 아버지 삼형제를 바깥에 세워놓고 제사를 혼자 지내셨어요. ‘담배도 서양 사람들은 아버지 아들 같이 핀다. 이런 거 구별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앞서지 못한 거다.’하고는 아들 삼형제 하고 맞담배를 폈지요. 조부는 장로셨는데요, 하도 조부가 세게 나오니까 다른 장로들도 꼼짝 못했지요. 그 할아버님 때문에 어머님이 달마다 독립유공자 연금을 받으셨어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셨으니까 누구보다도 일본어를 잘했을텐데 일본어로 된 글을 한 조각도 안 썼어요.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나는 태어나서부터 제사가 없었어요. 아니 없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혼자 지내고, 아버지 삼형제는 밖에서 담배 피고 있는 모습만 보았던 거지요.
장석주 : 대단하시네요.
황동규 : 아버지한테 뭘 안 배웠는가가 아들을 문학가로 만드는데 기본이죠. 체험을 독점한 사람을 당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 미당의 아들 서승해가 소설가로 대성하지 못한 것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장석주 : 신구문화사판 『한국현대문학전집』에서 서승해 선생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요. 좋은 소설이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서승해 선생은 지금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죠?
황동규 : 미당 선생이 전두환 도움을 받은 뒤 미국 시골의 도서관 관장을 하던 아들의 직업을 버리게 하고 법 공부를 시켰어요. 그래서 국제변호사가 됐죠. 미당 선생은 소설가나 시골 도서관의 관장보다는 국제변호사를 더 높이 봤겠지요. 둘째 아들도 유럽의 외국인 학교에 보냈어요. 그런 것들이 내가 미당에 대해 마뜩찮게 생각하는 근거예요.
장석주 : 『대산문화』에 쓰신 글을 보니까, “추상명사를 피하라, 불가능할 때까지 추고하라, 지식 자랑을 하지 마라” 등등을 아버님께 배웠다고 했던데요. 아버지로부터 오는 문학적 압력들은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셨는지요?
황동규 : 그건 마음속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일반 사람들한테 싸운다고 할 수도 없죠. (웃음) 내가 아버님에게서 받은 것만큼은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장석주 : 문학적 싸움인 거지요.
황동규 : 그렇죠. 평론가 김병익은 그거 읽자마자 내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이 글처럼 집약해가지고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거는 처음이다, 조부님 하고 부친 사이에서 네가 잘 뚫고나왔구나, 그러더군요.
*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12)
장석주 : 「동서양 틈새에서 글쓰기」란 글에 보면 “나는 서양과 동양이 싸운 장소이다.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종교가 부딪치고 버린 장소인 것이다.”(『시가 태어나는 자리』, 문학동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요?
황동규 : 내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영향을 받았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휴거를 믿는 교회를 다녔어요. 대학 들어와서는 니체에 미쳤다가 그 다음에 심취한 것이 불교였어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 자체가 동서양이 만나는 장소지요. 어떻게 보면 나는 동서양이 찢어놓은 장소예요. 그러니까 한 존재로서 이백과 두보를 좋아하고 동시에 랭보나 예이츠나 엘리엇을 좋아하니까 동서양이 한 자리에서 만나고 싸운 그런 장소가 아니겠어요?
장석주 : 그런 것이 바탕이 되어서 『꽃의 고요』에서 예수와 붓다의 대화시가 나온 걸까요 ? 이를테면 “‘그대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른가 ?’ /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 예수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 ‘나의 답은 이렇네. /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 / 비로나자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 노랑나비 하나가 몇 번 앉으려다 앉으려다 말고 날아갔다."(「꽃의 고요」)와 같은 시는 한 공간에 붓다와 예수를 불러내서 대화를 나누게 하거든요.
황동규 : 그렇겠죠. 그 생각은 깊이 안 해봤는데, 장 선생의 말이 맞을 거예요. 내 안에서 서로 간에 스미고 밀어내는 동양과 서양이 그대로 그런 시적 프레임으로 나왔을 거예요.
장석주 : 아마 개항 이후 쏟아져 들어온 서양의 근대 이념과 문물을 몸으로 겪은 많은 한국인들이 그런 것을 보편 체험으로 공유하고 있겠지요 ?
황동규 : 나처럼 거의 광신에 가까운 기독교에 빠져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고, 기독교의 물이 거의 안 들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특히 내가 만난 경상도 사람들은 기독교가 거의 없어요. 안동 지방 같은 데 기독교가 자리 잡은 건 한참 뒤의 일이니까. 그쪽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동서가 한 몸에서 찢긴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장석주 : 기독교는 본래 한반도 서북 지방을 지리적 전파 경로로 삼았지요. 저 정주나 평양이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지요.
황동규 : 기독교가 중국을 경유해서 평안도나 함경도 쪽으로 들어왔으니까 그쪽 사람들이 먼저 기독교와 접할 수 있었겠지요. 그 지역은 한반도의 중심에서 먼 변방이지요. 그 사람들은 벼슬을 할 수가 없었어요. 지방의 권력자들이 토지나 재산을 뺏어가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어요. 일가친척중에 벼슬아치가 없으면 늘 탄압을 받고 살았지요.
장석주 : 변방에는 권력의 체계나 힘이 덜 미치니까 관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가 더 심했겠지요. 그런 탓에 그쪽 지방의 사람들이 더욱 기독교가 자리잡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의 토양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황동규 : 우리 편하고 상대편하고 싸울 때조차 이쪽도 저쪽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 서북 지방의 사람들의 마음자리가 그렇지요. 평안도나 함경도의 사람들에게 삶은 그저 인고(忍苦)해야 할 그 무엇이었겠죠.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권력에 반항하는 기질도 강하지요. 어쨌든 기독교는 한반도의 서북 지방을 근거로 삶을 꾸려온 제 선조들의 유산으로 제 세대까지 내림을 한 것이었지요.
* 두 번 죽으면 어떠리13)
장석주 : 시는 대개 언제 쓰세요? 시를 쓰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나요 ?
황동규 : 딱히 시간대를 정해놓고 쓰지는 않아요. 산문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쓰는데, 시는 컴퓨터 앞에서도 쓰고 방에서도 쓰고 밤에 자다 깨서도 써요. 백담사가 있는 만해마을에 갔는데 어떤 시인이 보름을 머무는 동안에 30여 편의 시를 쓴다고 들었어요. 고민을 한꺼번에 해서 쓴다니까 부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렇게 못해요. 나는 하나하나 사물과 부딪치면서 그 섬광을 붙잡아 쓰게 되니까 한꺼번에 시를 쓰지는 못해요. 장 선생은 어때요?
장석주 : 저는 시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착상들이 막 떠오를 때 메모를 해 놓고 한참 뒤에 그걸 들여다보고 시를 완성합니다. 시를 많이 고치는 편이에요. 스무 번도 넘게 고칠 때도 있어요.
황동규 : (웃음) 나보다 더하구만. 나도 아마 평균 7~8번은 고치는 편이에요.
장석주 : 들여다보고 고치고, 들여다보고 고치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드니까요. 그렇게 고치다보면 어떤 때도 전혀 엉뚱한 시가 되어 버리죠. 결국 어떤 건 버리기도 하고요.
황동규 : 나는 그렇게 많이 고친 적은 거의 없어요. 어떤 건 한 번에 완성되기도 해요. 아마 「즐거운 편지」도 한 번에 됐을 거예요. 그때는 감각이 살아있을 때니까. 연애 감정하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딱 맞아서 결합하니까 한 번에 딱 떨어졌어요. 그게 꼭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많이 고쳤느냐 적게 고쳤느냐가 좋은 시의 기준도 아니고요.
* 누가 이제 우리의 얼굴에서 / 삶의 틀을 볼 수 있으리오14)
장석주 : 젊은 시인들의 시집도 눈여겨 꼼꼼하게 읽으시죠?
황동규 : 집에 오는 건 두 세편은 읽어요. 시집이 너무 많이 쌓이다보니까 대개는 처분하게 돼요. 그걸 다 어디다 쌓아 둬요. 아, 장 선생 시집은 집에 다 있을 거예요. 당장 무슨 시집을 봐야 할 때 조금 힘들어요. 시집이 학교, 집, 거실에 흩어져 있으니까. 그럴 때는 그냥 도서관에 가거나 없으면 다시 사기도 하고요.
장석주 : 저는 시골에 사니까 공간이 넉넉한 편이죠. 안성에 있는 집이 두 채로 분리되어 있어요. 한 채가 25평쯤 되는데 하나는 살림집이고 다른 하나는 서고로 쓰지요. 책이 2만여 권이 넘으니까 찾아야 할 책을 못 찾기도 해요. 원고를 써야 할 때 그 책이 서가 어딘가에 뻔히 있는 줄 알지만 책을 다시 사기도 해요.
황동규 : 자주 보는 책이 아니면 못 찾겠구먼.
장석주 : 주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하는데 해마다 지출하는 책값도 만만치 않아요.
황동규 : 장 선생이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겠지요. 아무래도 나이가 젊으니까. 나도 열심히 찾아 읽으려고 하지요. 이번에 천 쪽이 되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두 달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달 정도면 끝날 것 같아요. 옛날 같으면 보름이면 읽었겠지요. 책을 오래 붙들고 있는데, 읽는 속도가 많이 줄었어요. 왜냐 ? 사전을 자꾸 찾아야 하잖아요. 그만큼 기억력이 쇠퇴했어요.
장석주 : 기억력은 쇠퇴하고 느낌과 생각, 그리고 상상력은 더 풍성진다 쓰셨는데요. 기억력의 쇠퇴가 어느 정도인가요?
황동규 : 전반적으로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지요. 노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겠지요. 나날이 줄어드는 기억력 때문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잊히기 전에 써놓느라 잠에서 깨어 몇 줄 끼적이고 잠들 때도 있지요. 나이들면서 시력도 떨어져요, 1년 전부터는 책 읽는 안경을 쓰게 됐어요. 운전하는 안경, 밖에 나갈 때 쓰는 안경, 책 읽는 안경이 따로 있어요. 이렇게 얘기할 때는 안경이 필요없어요. 제일 편하죠.
* 노래 끊기면 / 잦아들뿐15)
장석주 : 요즘도 음악을 많이 들으시죠 ? 산문집 『삶의 향기 몇 점』에 음악듣기에 관련된 글들이 몇 편 들어 있던데요.
황동규 : 하루에 한 번은 듣죠. 우리나라 음악은 평민이 듣는 거칠고 힘든 음악하고, 귀족들이 듣는 섬세하고 세련된 음악하고, 종교의 엄숙하고 장중한 음악이 하나로 합치지 못했어요. 서양음악은 17세기 말에 종교음악하고 귀족음악하고 평민음악하고 하나로 합쳤어요. 서양음악은 스케일도 크고 때때로 자기보다 더 큰 존재하고 만나게 해요. 그래서 서양 고전음악을 좋아하고 주로 들어요. 판소리처럼 귀족 음악하고 평민 음악이 합친 게 괜찮아요. 꽹과리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파요. 사물놀이는 판을 사서 듣다가 도저히 10분이나 15분 이상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딘가에 그런 얘길 썼더니, 조창환 시인이 그런 거 쓰면 욕먹어요, 그러더군요. 그러면 조 선생은 사물놀이 좋아하지, 하고 물으니까, 자기도 20분 이상은 못 듣는다고 하더군요. 공연장에서 10분이나 20분쯤 앉아 있다가 나온대요. 외국 사람은 신기하니까 한번쯤 듣는 것이겠지요. 종묘제례악은 너무 장중해서 오래 듣고 있으면 조금 졸립지 않아요 ? 시조창도 아주 작은 걸 갖고 10분 이상을 끌잖아요. 그것도 귀족음악인데, 아, 그것도 못 듣겠어요. 판소리나 가야금 산조 같은 건 들을 만 해요.
장석주 : 제가 국방방송에서 「행복한 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든요. 밤 10시에서 12시까지 나가는 생방송인데요. 저도 방송을 하면서 처음으로 국악을 집중적으로 듣게 되었어요. 자주 들으니까 차츰 귀가 열리는 느낌을 받아요.
황동규 : 아이고, 국악을 졸립다고 했으니 내가 아주 원수겠구만.(웃음)
장석주 : 왜 그 얘기를 했는가면요, 제 프로그램에 「음악이 흐르는 책」이라는 코너가 있어요. 재즈평론가 황덕호씨 하고 책을 한 권 골라 거기 연관된 음악을 듣고 얘기를 나누거든요. 오늘 밤에는 크리스토퍼 라쉬의 『나르시시즘과 문화』라는 책 얘기를 했는데요. 1960년대 미국 상황이 지금 우리나라와 똑같다는 거지요. 미국이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흉악스러워지고, 소비문화로 몰리고, 정치는 텔레비전의 쇼처럼 이미지 정치로 가고, 우리하고 상황이 비슷한 거죠. 사람들이 종교에서 멀어져서 세속화하는 것도 그렇구요.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 시대 재즈를 듣습니다. 선생님의 산문집 『삶의 향기 몇 점』을 읽으며 이 책도 그 코너에서 한번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황동규 : 난 하여튼 판소리랑 가야금 산조를 좋아해요. 우리나라 음악은 전통적으로 연주가의 음악이지, 작곡가의 음악은 아니거든요. 연주자를 잘 만나야 해요. 어떨 때는 ‘땅’ 하고 때릴 때 마음을 확 휘어잡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없는 연주는 재미가 없지요. 우리나라 음악 레파토리가 많지 않잖아요.
* 이 환한 살아있음 !16)
장석주 : 현대문학사에 나온다는 새 시집 『겨울밤 0시 5분』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황동규 : 정끝별 씨가 해설 원고를 언제 끝내느냐에 따라 달렸죠. 내 교정은 끝났으니까요. 정끝별 씨에게 언제까지 쓰겠다는 생각도 말고, 길이도 생각하지 말고 쓰라고 했어요. 쓰다가 더 천착할 게 있으면 처음 계획보다 늦어질 수도 있겠지요. 다만 봄은 넘기지 말라고 했어요. 안 돼서 늦으면 할 수 없고요. 빨리 낼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장석주 : 올 해 시집 나오는 거 말고 다른 계획은 없으세요?
황동규 : 난, 요새 계획이 없이 살아요. 몇 년 전부터 가능한 계획 없이 살자, 시가 되면 시집 내고, 산문이 되면 산문집 내자, 이렇게 살아요.
장석주 :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
황동규 : 친구한데 배반당했을 때, 젊은 시절 여자한테 채였을 때지요. 지금은 모르지만 그 당시엔 상당히 고통스럽고 술도 많이 먹었지요.
장석주 : 선생님의 시들은 빠짐없이 마침표가 찍혀 있더군요. 왜 그렇습니까 ?
황동규 : 내가 영문학을 했잖아요. 불분명한 것보다는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습관 때문일 거예요.
장석주 : 선생님, 오늘 대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진솔한 대담을 통해 선생님의 시가 숨기고 있는 비밀의 한 자락을 살짝 엿본 느낌입니다. 주말 오후에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긴 시간 동안 우문에 현명한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