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의 청년작가 류순호씨의 쓴 글을 매우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중국의 조선족입니다. 역사도 중국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류순호작가분과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 몇글자 적으려고 합니다.
먼저 중국의 한족(漢族)을 보는 관점이 저와 다름니다. 漢나라는 유방이 세웟습니다 유방은 동이족(거란)이라 합니다. 夏나라 역시 동이족이 세운 나라 입니다. 황제 역시 동이족입니다 황제의 고향은 지금의 요녕성 입니다. 華夏文明은 동이족의 문명입니다.漢이란 중국사전을 찾아보면 위대하다. 큰남자. 은하수의 뜻이 있습니다 즉 지금 말로는 하늘(천)이란 뜻인것 같습니다.고대에 한은 天이고 하늘은 한울 즉 한우리라는 뜻인것 같은데 지금은 하늘을 天이라고 합니다.동이족들은 하늘(天神)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이름을 한이라 한것 같습니다. 북방민족족이 세운 나라중에 한이 드러간 나라이름이 매우 많습니다. 중국고대의 夏나라의 하 漢나라의 한 한국고대국가의 마한 변한 진한 (여기서는 마씨천하 변씨천하 진씨천하 라고도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 몽고의 汗국 여기서는 칸이라 읽지요 중앙아시아의 나라 스탄국 大和日本의 和 대한민국의 한 모두 같은 뜻으로 볼수 있지 않을까요? 한자의 중국글자 역시 동북지방에서 발원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북방민족 동이족 문자인것입니다. 동이족이란 東夷族에서 夷자는 大자와弓자의 합성자입니다. 大弓은 중국발음으로 daguog이라 읽습니다 단군과 비슷하지요 그러니 동쪽에 사는 단국족이란 뜻으로 해석 하여야지 오랑케니 활잘쏘는 민족이니 하는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저는 봅니다. 한자는 중국글자이고 한글은 한국의 글자라는 생각은 잘못된것 같습니다. 지금의 중국문명역시 올라가면은 그발원은 같은 조상인것입니다. 고대 하나라 부터 황제 .선비 흉노 거란 여진 몽골 중국을 정복한 민족의 발원지가 모두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한 단군의 자손들인것입니다.그러니 중국문명도 계속 발전하기를 기원하여야 합니다.
우의 글은 저나름대로 자료들은 찾아보고 쓴것이지만 너무 부족한것을 인정하면서 여러분들의 고귀한 의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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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청년작가 류순호의 작품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관심하시고 사색하시기 바랍니다.(바보의 보탬: 기실 당조의 리세민도 선비족이라는 설이 있다.다시 말하면 진정한 한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보는 문장의 본뜻에 아무런 의견도 발표하지 않는다. ---> 은산의 보탬: 청조의 누루하치도 동이(여진)족이다. 천지는 순환무궁하여 각 민족, 국가마다 흥망성쇠가 있다고 본다.)
한족인의 정통론은 무너져야 한다! ―時代의 抗辯
어렸을 때에 서예(書藝)를 배우면서, 나는 스승에게 송조체(卽,宋體)는 누가 만들어냈는가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좀 붓글을 써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겠지만, 우리나라(중국)의 서예는 진전(秦篆), 한예(漢隸), 당해(唐楷)라는 말이 있다. 즉 진나라때는 갑골문에서 변화되여온 전서체(篆書체), 한나라때는 예서체(隸書體), 그리고 당나라에 들어와서는 해서체(楷書體)가 성행하였다는 얘기인데, 그 무렵의 나라 임금도 좋고, 또 나라에서 지방에 내리는 조서들도 다 그런 체의 글씨로 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유독 송나라 때만은 무슨 체의 글씨가 국서였는가는 기록이 없다.
그래 스승에게 물어보았던것인데, 10년 후(1990년∼1991년) 내가 연변일보사 인쇄공장에서 최명철(崔明哲)과 리홍국(李弘國) 두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자새기는 기술(刻字)을 배우고 있을 때 그 기록을 찾아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글쎄, 필승(畢昇)이 인쇄술을 발명한 뒤로, 우리가 수백여년동안을 써오고 있는 송조체(宋體)를 만들어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진회(秦會)라고 하지 않겠는가! 진회라면 인차 련상되는 인물이 바로 남송의 항금명장 악비(岳飛)다. 그리고 그의 잔 등에 새겨진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네글자도 어린 아이들의 그림책에서까지도 널리 소개되였던 터다. 그 악비를 살해한 원흉 진회를 두고, 그것이 비록 지난 력사 속의 인물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
한족인들의 고집
어렸을 때에 가장 일찍 읽은 력사책이라면, 나는 선참으로 수호전(水滸傳)부터 외우지 않을수가 없다. 나뿐만 아니라 나 또래의 적지않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아직 학교의 (력사)교과서에서 료나라(大遼)며, 거란(契丹)이며, 아골타(阿骨打)며에 대하여 배우기 이전에 먼저 <수호전>을 재미로 읽으면서 처음 그것들과 접촉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읽을 때의 나이라야 고작 열너덧살밖에 아닌된 때라서 그냥 재미에만 빠져 읽어내려 갔을 뿐이였다. 첫 페지에 <…이 책은 반면교재로 읽어야 한다>는 모택동의 말씀도 다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그냥 재미로만 읽을 때는 전혀 알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들과 관련된 영화도 많이 나왔고, 또 관련 책들은 더욱 부지기수다. 특히 김용(金鏞)의 <독수리사냥 영웅전기(射雕英雄傳)>를 보고난 뒤에야 비로소 무렆을 때렸다는 사람들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멸망의 비운에 빠져있었던 송나라(南宋)와 금나라(金國), 그리고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었던 원나라(元朝)에 대해서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알아내는데에 그 <독수리사냥…>만큼 좋은 영화나 책도 더는 없는터다. 우리 중국사람(한족인)들은 중원에까지 밀고 내려왔던 금나라의 군사들을 가리켜서 <금나라의 개(金狗)>라고 매도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금나라와 싸우자고 주장해왔던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의 죽음을 두고 우리는 안타까워 눈물을 흘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었다.
1984년이면 나의 나이가 21살 때인데도, 우연 항주(杭州)에 갔다가 서하령(西霞嶺)의 기슭에 모셔놓은 엄청나게 큰 악비의 무덤과 함께 주철(鑄鐵)로 부어 만들어놓은 진회(秦會)의 조각상을 대하였던 일이 생각난다.
무렆을 꾾고 앉은 진회의 몸에는 온통 가래침이 날아들어서 불성모양이였다. 무릇 항주에 다녀가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진회에게 대고 한두번쯤은 침을 뱉어야 한다는 그 시절의 도리였다. 나는 지금도 그 조각상이 그대로 꿇고 앉아 유람객들의 가래와 침에 얻어맞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후회가 되는 일이다. 모르는 유람객들이야 나라에서 그렇게 만들어놓고 시키는대로 했을뿐이랍시고, 소위 력사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나 자신도 역시 그 유람객들 속의 한 사람이였었다는 자체가 어딘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시절로 말하면 우리는 아직 한국과의 거래도 전혀 없었던 터였고, 또 이웃 조선에 한해서도 잘 모르고 지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라도 조국은 중국이며, 우리 조선족도 중화대가족의 한 일원이라는 절대적인 의식의 지배하에서 살아왔던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와같은 의식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별로 크지도 않은 자그마한 회하기슭에 정착해서 여러 부락들이 모여 일어났던 한족인(卽華夏族)에 의해 갑작스럽게 동화되여버린 동이족(東夷族)가운데 우리 알타리계의 조선사람들도 들어있었음에야! 그런데도 이 중국의 영원한 주재자는 꼭 한족인이여야만 한다는 의식은 일찍 지난 세기의 초엽, 만족들에 의해 4백여년 통치되였던 (한족인의)중국을 다시 빼앗고자 국민혁명을 성사시켜낸 손중산(孫中山)시절부터 더욱 투철해지기 시작한것이였다. 문천상(文天祥)의 시 <정기의 노래(正氣歌)>에서도 그렇고, 또 악비의 <만강홍(滿江紅)>에서도 우리 동이족을 가리켜서 호로(胡虜), 또는 외적이라 일컬으며, 그들의 머리를 자르고, 그들의 피로써 제사를 지내겠다고 웨친다.
한족인이외의 그네들의 력사는 력사가 아니다. 즉 남송을 멸망시켰던 금나라도 좋고, 더욱 되돌아가서는 한(西漢)나라 시절부터 흉노를 몰아내였던 위청(韋淸)이며, 곽거병( 去病)네의 이야기들을 교과서에 넣을 때도, 그네들 모두가 한족인들과 꼭 같은 중국의 선비족이며, 중국의 달단인들이며, 중국의 만주족들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 조선족들도 당당하게 한몫 끼인다고 해야할것이다. 마치도 우리 중국은 5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대가정이라는 이 이름의 전매권(專賣權)이 집정을 시작한지 아직 한세기가 아니 되는 오늘의 정부에 있는것으로 착각하는 자체에 대하여 지성인들은 한번 경각성을 높여봐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라의 군주(君主)문제에 들어가서도 꼭 남자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도리는 이미 당조때에 무측천(武測天)에 의해 깨여진바고 보니, 오늘날에도 그의 치적을 높이 칭송한다. 녀자라도 황제가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그 역시 정도라는 소린데, 유독 한족인 아닌 다른 민족만이 나라를 통치해서는 안된다는 외고집이다. 나는 바로 그것을 꿇어앉은 진회의 조각상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다시금 느껴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진회에게 침을 뱉었던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악비를 살해하고 남송을 멸망의 길로 몰아갔던 진회를 변호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문제는 부패무능했던 남송이라는 그 나라 자체에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그같은 나라라면 어찌 한족인아닌 다른 민족이 나라를 통치했던 원세조(元世祖)의 시대나, 또는 청(淸)의 강희(康熙)년대에다가 비겨보기나 할것인가! 그 시대로 보면 악비는 정충보국(精忠報國)의 표본이라고 할수 있겠으나, 적어도 오늘 나의 눈에 비친 악비는 구을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춰세워보겠다고 달려드는 한 버마재비(螳螂)에나 불과하다고 해야할가? 대신 우리는 이 시대에 공헌하고 있는 진회의 글자 <송조체>를 외면할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공정한 비판에 맡긴다는 뜻으로 후세사가(後世史家)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그 사가들이 평가를 내린다는것도 그 자신들이 처한 립장에 따라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 시대의 진리는 다음 시대에서는 진리가 아닐수도 있지만 우리 중국은 줄곧 한족인들에 의해서만 통치되여 왔기 때문에, 자연 한족인의 정통론이 깊이 뿌리박히게 된것이며 따라서 악비와 진회에게 내려진 사가들의 평판도 수수천년을 그냥 그렇게만 이어서 내려왔고, 또 내려가가게 될 조짐이다. 그러나 나는…나만이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평판을 다시 내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진회에게다가 가래와 침을 뱉는 일은 없도록, 우선 내 신변의 중국사람(한족인)들에게라도 먼저 일깨워주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력사를 보는 눈
그렇더라도! 진회가 간신이 아닐수 없고, 악비가 영웅이 아닐수 없는것은 우리 중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순(舜)은 착한 임금이 아닐수 없고, 걸(桀)왕은 폭군이 아닐수 없다는 도리와 같은것이다. 바꿔놓고 우리(조선족)식으로 말하자면, 충신들을 무수히 죽였던 조선조의 연산군(燕山君)은 폭군이 아닐수 없고, 우리 조선글자를 만들어낸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성군이 아닐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 중국(한족인)의 경우를 놓고 보면, 오늘날 부르짖고 있는 대중화(大中華)라는 사상과는 너무나도 저촉이 되는 그네들의 모순투성이 력사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결코 중화라는 함의(含意)는 한족인들 혼자서 이뤄지는것이 아님을 잘 알고있는 그네들 자신이면서도 말이다.
다시 일어나는 후금(後金)
그런데 이 땅에 아직 공화제 이뤄지기 이전까지는 사가들이 <중화 만방>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러니까 두말할것도 없이 자기들 한족인에 의한 정통론은 자연 다른 민족과의 싸움에서 피도 흘리고 얻어냈던 항쟁의 승리로부터 장시간에 거쳐 이뤄진것이겠지만, 기연에 중화라고 이름을 달고나서부터는 반드시 그 의미는 변화되여야는 것이다. 녀진인들도 좋고, 달단인들도 좋고, 모두가 중국의 녀진인들이며, 중국의 달단인들이 되는것이다.
1636년, 흥경(興京)에 도읍을 정하고 일어나기 시작한 어제날 금나라의 계승이였던 누르하치의 후금국도 당당한 중화의 후금국이지, 어디 중화라는 판도밖의 일본이나, 또는 파사(波斯)같은 전연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외적의 침략은 절대로 아니였다. 부패무능해질대로 무능해진 한족인들의 명나라를 쳐부시고 새로운 중화세상을 열기 위한 우리 동이족의 녀진족장 누르하치(奴爾哈赤)에 의해 세상은 뒤바뀌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끼여든 우리 조선조의 십분 애매한 태도만큼 더 격분스럽지 않은 일도 없다.
개구리 올챙이적 일을 잊다
후금국의 녀진인들에 비해 먼저 수렵생활을 종결짓고 나라를 세운 조선인들은 녀진인들을 가리켜서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 또는 오랑캐라고도 불렀다. 조선조의 력사상 오랑캐는 남쪽의 일본에 대고 하는 말인데, 하루 이틀이 멀다하게 남해기슭에 기여들어 로략질을 일삼던 일본인들 못지않게 북부의 변경에서도 만주 야인들의 소란이 잦았었다. 그러나 어느날 마침내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에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으로 있었던 누르하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겠다는 의사를 선조왕에게 전달한바 있다는 사료의 기재가 있다.
그런데 조선의 조정은 그같은 호의에 대하여서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버리고 말았다는것이다. 그네들의 눈에 비낀 만주의 야인(녀진인)들이나 남해의 오랑캐(일본인)들이나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 그네들은 오로지 한족인들만 숭상하고있었다. 그것이 누르하치는 물론이고, 훗날 그를 이은 청태종 홍타시에게 있어서도 도무지 리해가 되지않는 일이였다.
-조선놈들은 정말 고약하다. 어찌 개구리 올챙이적의 일을 잊는단말인가! 이것은 청의 태종황제가 왕자 아민 등에게 군사를 주어보내며 하는 말이다. 녀진인들은 그네들의 시조 동몽 거테무르의 시절부터 조선조의 리성계와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같은 동이족이라는 연고로 볼 때도 서로 반목하고 녀진인들을 오랑캐라고 기시할 하등의 리유도 없는 일이였다. 그 이전까지도 그네들의 사이는 서로 형제로서의 맹약을 맺고 지냈던 사이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다. 곧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치르게 되며, 어제의 형제사이는 군신사이로 강요되여 조선은 공물을 바쳐야 했던것은 썩 후의 일이다.
류하장군(柳下將軍)
그 무렵―
명나라도 남송과 같이 멸망의 비운을 맞고 있을 때에 중국의 력사에서는 제2의 악비라고도 불릴만큼의 충절을 나타낸 원숭환(袁崇環)이라는 명장의 이야기가 나도는데, 그를 구하려고 파견받아 갔던 조선의 응원군은 도원수 강홍립의 인솔하에 누르하치에게 투항해버리고 만다. 유독 좌영장으로 따라갔던 김응서(金應瑞)만은 포수 1천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같은 자기의 동이족 군대를 저그만치 5천여명이나 쓰러뜨렸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아, 김응서야말로 큰 죄인이다!
이렇게 사가들은 반드시 다시 써야할것이다. 그런데 요즘도 한국의 사가들이 저술하고 있는 그 대목(조선왕조 5백년야사)을 읽으면 나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 김응서. 김응서를 부하로 데리고 갔던 도원수는 강홍립(姜弘立)이였고, 강홍립에게 <형편을 가봐면서 강한 편을 좇으라.>고 밀지를 내려주었던 사람이 임금 광해군(光海君)이였다. 사가들은 광해군을 가리켜, 부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역모로 몰아 죽였으며, 모후를 페출했던 패륜과 불의의 표본이라고 그를 꾸짖는다.
그러나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총명하신 임금이였구나! 고 재삼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 배짱도 세고, 한번 내치면 후회를 모르는 스타있는 임금이였다고 쾌재를 불렀다. 신하들은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도 그것을 광해군은 가로막아버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명나라의 신종황제는 죽은 김응서를 증봉(增封)한답시고 2만냥이나 되는 은자를 보내오게 되지만도 광해군은 또 그것마저도 중도에 모조리 가로채버렸다는 각박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만은… 아무튼 광해군이 임금으로 계셨을적에는 결코 삼전도의 치욕같은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던것이다.
중화(中華)의 흥기 !
지금 보면 녀진인들에 대하여, 중국인(한족인)들만 그냥 호로(외적침략자, 또는 야만인)라고 불렀던것이 아니다.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로 우리 조선사람들은 광해군의 한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냥 호란(胡亂)에 시달려왔던것인데도, 그리고 명나라가 아주 청태종에게 쫓기다못해 쇠미해져서 중국대륙의 한 일각(江南)에서 근근히 그 여맥을 지탱하기에 바쁠 때도 조선의 조정은 그냥 친명(親明)사상으로 끓고있었다.
그 결과로 커가는것은 오로지 굴욕의 슬픔밖에 다른 것은 없었던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조선에 있어서도 녀진인들의 청나라는 결코 즐거운 추억거리가 못되는것이다.
하물며 이(異)민족에게 자기의 중화를 빼앗겼다고 간주하는 중국인(한족인)들에게 있어서야 더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간 있었던 태평천국의 봉기도 좋고, 그에 이은 념군의 봉기도 좋고, 한결같은 웨침이 <외적을 내쫓고 중화를 되찾자(驅除 虜,回復中華)!>는 투쟁구호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치도 이 <중화>라는 대명사는 바로 자기들 한족인 혼자의 전매품(독차지)이라도 되기나한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라도 치겠으면 일단 쳐놓고 다시 살펴보자. 그네들 한족인의 중국을 세계만방에 자랑할수 있는 력사상의 왕조(朝代)란 실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하다면 당조(唐朝)는 어떠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혹간 있을것이다.
그렇다!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정치가 낳은 당조의 번영과 함께 능히 수만리밖의 송짠감보(卽,西藏君主)에 이르기까지도 포섭할수 있었던 당태종의 시대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이하랴! 요즘 밝혀지고 있는 현대 사학자들의 새로운 고증(考證) 또한 놀랍다. 우리가 자랑하는 당조의 시조 리연(李淵)도 결코 한족인만은 아니였다고 한다. 보다는 선비족(鮮卑族)의 혈통에 가깝다는 설이 나왔다.
다음 당조에 이어지는 인물은 칭기스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화제국(中華帝國)>이라도 만들어낼만큼의 엄청난 세력을 천하만방에 자랑할수 있었던 원나라의 시조 칭기스칸도 한족인은 아니였다. 그리고 한족인들까지도 공인하는 중국력사상의 가장 훌륭했던 황제로써, 역시 강희(康熙)와 건륭(乾隆), 옹정(擁正)황제를 손꼽는다. 이들 세 황제도 다 한족인은 아니였다. 이제 한족인의 정통론은 무너질 때가 되었다. 어차피 무너져야 하는것이며, 또 이미 무너졌거나, 또는 무너져가고 있는중인데도,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는 소수민족인데…>라는 말로써 자기를 격하시키고 있는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는 우리 민족의 이름자 앞에다가 무슨 월경(越境)이요, 천입(遷入)이요, 하는 따위의 슬픈 감투를 달아붙일 필요가 하등에 없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잃어버렸던 우리의 중화사상을 떳떳하게 다시 되찾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