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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10월 초에 다수 언론이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조금 앞섰다고 예측했고, 선거 직전에는 한국 언론을 포함한 미국의 진보 성향 언론들과 여론조사 기관들은 후보들 간 경쟁이 초박빙이라고 보도했다. 정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만이 트럼프의 신승을 예견했고, 결국 트럼프는 50개 주 중에서 30여 개 주에서 승리하고, 50퍼센트 이상의 유권자에게 표를 얻어 가볍게 해리스를 물리쳤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 때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국회의사당을 침범한 난동자들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와 성적인 면에서 윤리적 일탈을 했다는 사법상 문제들, 혹은 그의 천박한 인격을 보여준 막말들이나 고령, 그리고 해리스 부통령과의 토론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점 등이 투표장에 나아가는 국민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이번 선거가 미국 정치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1. 기울어진 운동장
이번 선거판은 절대적으로 트럼프에게 유리했다. 그 이유는 첫째, 미국 경제가 국민들 보기에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 집권 기간에 물가는 계속 올랐고 경기도 계속 좋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에 대응하느라 너무 많은 돈을 푼 일이 물가 상승 원인이기도 했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물가 상승의 원인보다는 높은 물가가 주는 압박을 바이든 정부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에 와서 물가 상승률이 조금 낮아졌다고 하지만 소비자들 피부에 닿지는 않았고,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경기에 더 엄혹한 불경기를 예고하는 소식도 불안을 자아냈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 흐름상 선진국들의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구조에 들어섰기 때문이지만, 미국 국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의 책임을 현 정부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선 레이스 시작 전부터 바이든-해리스 정권은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경제의 구조적 어려움은 실상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를 불문하고 현직 대통령 재선을 힘들게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가 2020년 바이든에게 불리했듯이, 이번에는 바이든 정부의 해리스 부통령이 다시 트럼프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해리스가 선택한 선거 전략은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해리스는 자기가 바이든처럼 고령이 아니라는 사실 외에는 차이를 별로 어필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바이든의 러닝메이트(Running Mate)로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 재선을 노렸던, 중앙 무대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바이든이 지명해서 경선도 없이 대통령 후보가 된 해리스로는 선명한 정책으로 승부하기가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리스가 유권자 47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감안한다면, 졌지만 잘 싸웠다고 보아야 한다.
2. 민주주의의 위기
미국 경제가 구조적 어려움에 처하자 미국민들이 다른 나라 사정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경제가 극도로 황폐화되었을 때 독일 국민이 히틀러의 나치를 지지했고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제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고 극복책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유색인종 나라인 중국의 도전이 눈에 보이자 미국인들은 자국 중심주의를 지지하고, 특히 백인들은 인종주의적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트럼프의 “미국 제일주의”가 미국을, 특히 백인들을 사로잡은 이유이다.
중국 상품이 미국 기업을 죽이고 실업자들을 양산하게 한다는 주장이 미시간·펜실베이니아·위스콘신주 등 러스트 벨트(Rust Belt) 근로자들을 트럼프 지지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민자들이 미국인들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주장이 저소득 근로자들 마음을 흔들어 반이민 정서를 자극했으며, 유럽이나 한국 등을 방위하는 데 너무 돈을 많이 쓴다는 주장이 높은 세금에 시달리는 중산층들 지지를 획득하게 만들었다.
실상 트럼프를 나치에 비유한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 말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단지 다원주의적 요소가 풍부한 미국에서는 히틀러식 전체주의적 나치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트럼프식으로 변형된 극우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200년 이상 이어온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협력과 타협, 대화와 관용의 규범 등 대의 민주주의를 받치고 있는 국민적 합의가 먼저 트럼프 아류의 정치가에게 무너지고, 그런 정치가들을 국민들이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민주주의가 쇠락하는 현실을 웅변한다.
이런 위기를 감지한 버락 오바마 등은 은퇴한 정치 지도자들의 전례를 깨고 트럼프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그들은 경쟁력이 약한 고령의 바이든 대통령을 후보에서 사퇴하게 하고 해리스 지지 선거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소리가 정치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줄 아는 이들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던 것이다.
3. 민주당 지지 기반 와해
트럼프는 정치권에서 성장한 정통 보수파도 아니고 자유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정통 공화당원도 아니지만, 범보수 세력 지지를 모두 흡수했다. 그래서 바이블 벨트라 불리는 남부의 지지와 아이다호·유타·몬태나주 등 전통적 보수 세력의 지지도 잃지 않았다. 게다가 오하이오·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주 등 공업지대와 텍사스·아리조나·플로리다주 등 이민자가 많은 지역도 트럼프 표밭이 되었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미국 제일주의, 반이민주의, 해외 불간섭주의 등 극우적 정책 지지자들이 공화당을 장악했고, 이러한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공화당은 의회의 상원도 장악하게 되어 행정부·상원·하원이 공화당 지배 아래 놓이고 연방대심원도 보수주의 대법관들이 다수를 점하게 되니 미국은 당분간 트럼프식 극우주의가 이끄는 나라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주장했던 반인종주의나 인도주의와는 상관없는 정당이 되었다. 미국은 이민자, 유색인종을 희생양으로 삼는 극우 정당과 극우파 정치인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
반면에 민주당의 해리스는 흑인,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의 지지를 과거 오바마만큼 받지 못했다. 이들 소수 인종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워하는 집단이라, 바이든 행정부의 일원이었던 해리스를 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아가 미국의 높은 실업률, 고물가, 수입 공산품 범람, 새 이민자들 유입 등이 이들의 고통과 공포를 증가시켰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 가장 고통받는 자들은 하층계급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극우파 정치인 지지를 낳았다고 보아야 한다.
트럼프는 범공화당 보수 세력에 중산층의 일부, 빈곤층 일부의 지지까지 흡수했는데, 해리스의 민주당은 기존의 민주당 텃밭마저 잃어버렸다. 민주당은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빈곤층, 노조, 농민, 실업자, 소수민족, 소수 종교 집단, 남부 백인 등을 묶어 만들었던 뉴딜 연맹(New Del Coalition)이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진보주의 민주당이 지지하는 데 반기를 든 남부 백인들이 이탈해 해체되는 경험을 했었다. 이제는 흑인 일부, 농민들, 히스패닉 일부, 산업 근로자의 상당수, 실업자 일부가 지지를 철회하면서 민주당은 쇠락하게 되었다.
4. 유권자들의 위선
2016년 선거에서 펜실베이니아·위스콘신·플로리다주 유권자들 대다수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다고 여론조사에서는 대답했는데, 실상 선거에서는 트럼프를 지지하면서 ‘샤이 트럼프’(Shy Trump) 지지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트럼프의 반민주적 언행과 비윤리적 행동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일이 창피하지만, 그의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 정책이 자기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상당히 많다는 뜻이다.
이 ‘샤이 트럼프’ 인구가 올해 선거에서는 8년 전보다 줄어들었다. 미국인들이 반민주, 비윤리적 정치인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워진 것이다. 물론 아직도 민주주의와 어긋난 행보를 보이는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일을 창피하게 여기는 유권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것이 여론조사와 실제 투표 행태와의 괴리를 보여주는 온당한 해석일 것이다. 트럼프는 4년 후 정치 현장에서 사라지겠지만, 트럼프 류의 정치인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미국의 민주주의 가치 옹호, 도덕주의 전통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면 정치적 이기주의와 민주주의적 명분 사이의 갈등이 정치적 위선을 통해 분출되리라고 예상된다. 국민들 대다수가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미국 국민들의 노골적인 반민주 인사에 대한 지지 혹은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정치 행태야말로 민주국가로서 미국의 리더십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다.
선거 막판, 낙태에 대한 여성들의 선택권이 큰 쟁점으로 부각돼 백인 여성들 표가 민주당의 해리스에게 쏠릴 것이라는 기대 섞인 보도가 있었지만, 큰 변수는 되지 못했다. 미국 국민 대부분은 낙태권 문제를 결정하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논의보다 당장 먹고사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선거를 통해 표현했다. 이제 미국인은 이상을 향한 가치를 지키거나 추구하는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미국이 건국 이래 계속된 미국식 낙관주의와 발전주의가 이제 종언을 고할 때가 되었고, 이것은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패권 정치가 수명을 거의 다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5.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우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휴전을 주선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환영할 것이고 미국 지원이 없이는 우크라이나도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없다. 왜 남의 전쟁에 끼어서 미국이 세계적 손실을 보아야 하느냐는 장사꾼의 계산이 있지만, 이것은 미국의 세계 패권 포기를 의미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국은 살상 무기를 제공하는 등 반인륜적이고 어리석은 정책을 채택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상승을 요구할 것이다. 이미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와 합의를 보았으나, 트럼프는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대폭 올린 방위비와 주한미군 철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나올 것이다. 이때 한국은 당당하게 주한미군 철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사실 주한미군 철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밀고 가기에는 벅찬 과제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의회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민주당은 물론 국방성, 국무성, CIA 등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반대에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주둔 규모나 역할 변경을 시도할 가능성은 크다. 이 지점에서도 한국은 주눅 들기보다는, 이참에 자주국방 태세를 더 견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차피 한국은 미국이 동북아에서의 군사 패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당한 시간에 대북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협상을 외교 정책의 쇼케이스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2019년 하노이 협상 실패 이후 고조된 북미 간 긴장이 해소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이 남북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미국도 북한도 대한민국이 중재자로 끼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대미국 사용을 통제하고, 핵 개발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이 북한의 경제 제재를 풀어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미국은 미 본토의 안전을 보장받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의 핵 위협 속에 있게 된다.
또한 미국은 윤석열 정부가 자랑하는 한미일 3각 방어 체제도 소홀히 여길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동북아 방어에 드는 비용을 일본과 한국에 떠넘기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자체 무장을 가속할 것이고, 대한민국은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트럼프 집권 때 오랫동안 꿈꾼 전시작전권 환수를 일차적 목표로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 정부를 설득할 가능성이 민주당 정부 때보다 클 것이다. 트럼프 집권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주국방 확립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라는 압박이 강하게 나올 것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조차도 트럼프는 무시할 가능성 있다. 그는 이미 전 세계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해 10퍼센트 일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심지어 한국에 미국 농산물과 무기 등을 더 많이 수입하라고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수입하는 한국 자동차에 고관세를 부과할 것이다.
트럼프는 인플레이션 감소 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 폐지까지 거론하고 있다. IRA에는 미국 내 생산된 배터리 등 품목에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이것이 폐지되면, 미국에 배터리 생산 공장을 설립한 한국 업체 다수도 실익이 감소할 것이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 압박으로 한국 반도체의 중국 수출도 급격하게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한국 경제 상당 부분을 지탱하는 자동차와 반도체 수출에 큰 지장이 초래될 것이다.
한국전쟁 후 한국의 경제가 실상 미국이 베푸는 혜택에 힘입어 성장했다고 한다면, 이제 미국은 한국이 의존해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경쟁해야 하는 나라이다. 미국의 경제정책은 한국 경제성장을 방해하고 저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방어적으로 경제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할 것이며, 정치적 이유로 미국의 경제적 요구에 일방적으로 복속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명확한 점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들 거라는 사실이다. 그때를 대비해 대한민국은 탈-미국 시대(De-American Era)를 예상하고 외교정책, 경제정책, 대북정책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