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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그림자
황 순 원
두 어린이가 종을 치고 있었다. 사실은 종지기로 있는 한쪽 어린이의 아버지가 잡은 종줄 끄트머리를 두 어린이가 쥐고 어른이 하는 대로 건성 팔과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으나 마치 자기 자신들의 종을 치고 있는 양 신들을 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독특한 장단이 있었다. 줄을 잡아당겼을 때의 뗑 하는 소리와 늦췄을 때의 강 하는 소리 사이의 간격, 그리고 다음 뗑 소리와의 약간 긴 간격, 이러한 정해진 간격이 되풀이되면서 내는 가락에 어울려 일종 특이한 여운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초라한 종각이었다. 곧고 긴 낙엽송 두 개를 마주 세우고 맨 끝에 가름대를 걸치고서 종을 매달아놓은 것이었다. 꼭대기에 깔때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녹슨 함석 고깔지붕이 얹혀 있었다. 종을 칠 때는 종각 전체가 흔들거렸다.
동네애들이 장난을 못하게끔 종줄을 어른의 발돋움한 키만큼 높이 기둥에 매어두곤 했다. 그래도 장난꾸러기들이 기어올라가 풀어내 어가지고 종을 치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종소리의 장단으로써 누가 장난질을 한다는 걸 알고 속지 않았다. 언젠가는 종지기인 한쪽 어린이의 아비지가 집을 비워 목사가 종을 쳤는데도 또 애녀석들의 장난인 줄 알고 교인들이 좀처럼 제시간에 모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두 어린이가 종을 쳐서야 겨우 그 대신을 한 적도 있었다.
내 어릴 적 동무 성일이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그의 기억을 되살리자 사십 여 년이란 세월의 흐름을 주름잡으면서 가슴에 홀연 울려온 것이 바로 이 종소리의 여운이었다. 그러나 이 종소리의 여운을 중도에 막는 게 있었다.
어느 수요일인가 일요일 저녁, 그날도 무슨 일로인지 성일이 아버지 대신 두 어린이가 종을 치게 되었다. 그런데 줄을 잡아당겨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쳐다보니 종불알이 기름대에 붙잡아 매어져 있는 것이었다. 누구의 장난이 분명했다. 둘이는 가까스로 사다리를 가져다 기대어놓고 성일이가 풀러 올라갔다. 다 올라간 성일이가 웬일인지 크게 손짓을 하며 나더러도 올라오라고 했다.
종각에서 얼마간의 공지를 사이에 두고 장로네집 돌담이 둘러져 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 성일이가 가리키는 장로네 담 너머로 눈을 주었다. 저녁그늘이 내리고 있는 후원 활짝 꽃을 피운 살구나무 밑에서 두 마리의 개가 뒤를 맞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개는 장로네 발바리인데 다른 한 개는 처음 보는 개였다. 덩치가 발바리보다 몇 배가 큰 이 개가 앞으로 걸어가니까 발바리는 뒷다리를 땅에 붙이지도 못하고 끌려가는 것이었다. 둘이는 킬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발바리는 여간 영악스런 개가 아니었다. 늘 보아 서로 아는 터인데도 둘이가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쫓아나오며 야무지게 짖어대곤 했다. 돌을 집어 때리는 시늉을 하면 저만
치 바르르 달아났다가도 돌아서면 또 쫓아오며 짖 어대는 것이었다. 이 발바리가 뒷다리를 땅에 붙이지도 못한 채 맥을 못 추고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둘이는 그냥 웃어댔다. 그 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별안간 밑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왔는지 장로가 노기 찬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엉겁결에 나는 기둥을 안고 미끄러져 내려왔으나 성 일이만은 장로가 사다리를 치우는 바람에 그대로 공중걸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낙엽송가시가 손과 팔에 박혀 며칠 따끔거리고 아픈 것이 그만이었지만, 성일이는 떨어진 것이 빌미가 되어 종내 꼽추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우리집은 광주로 이사를 했다. 아흡 살 때 일이었다.
내게는 이른바 고향이란 게 없어, 여섯 살까지는 아무 기억에도 없는 어느 곳에서, 아홉 살까지는 성일이가 있는 마을에서, 그리고 광주, 용인, 파주 등지를 거쳐 정착한 곳이 서울이었다.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성일이의 부고장도 이름 위에 종지기란 말이 씌어져 있지 않았던들 그가 누구라는 걸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사십 여 년 동안 서로 만나기는커녕 서신왕래 한 번 없었으니. 그런데 성일이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을까.
성일이가 살고 있었던 동네는 수원과 인친 중간쯤 국도에 면해 있는 마을이었다. 아흡 살짜리 어릴 적의 기억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십 여 년 동안의 변화는 마냥 딴 고장이란 느낌밖에 주지 않았다. 전에는 없었던 전등도 가설 돼 있었다. 마을 한길가에는 잡화상, 옹기전, 약방, 이발관 따위가 들어서 있었다. 하나의 작은 읍이라는 펀이 좋을 성싶었다. 이처럼 변해진 것은 변두리에 군대가 주둔해 있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른쪽 한길 앞쪽에 있는 국민학교도 전에는 널빤지로 돼 있던 것이 시멘트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운동장 옆길로 들어섰다. 어제 온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흙빛도 뭇사람들의 발에 밟혀 본래의 붉은 빛깔과는 달라져 있었다.
국민학교 뒤쪽 좀 언덕진 곳에 서 있는 네모번듯한 돌집 교회당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이미 별 기이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것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란 법은 없었다. 예전엔 ㄱ자로 지은 낡은 기와집 이었다. 한편은 여자, 한편은 남자, 따로따로 교인들이 갈라 앉게 돼 있었다. 설교할 때 목사는 어느 한편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설교대가, 꺾 인 벽 모서리를 향해 놓여
있었으니까.
물론 종각도 옛날과는 달리 교회당 한옆에 달아 지어져 있었다. 뾰족한 종각 지붕 꼭대기에 피뢰침을 단 십자가가 맑은 겨울 하늘에 선명한 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별 감회가 이는 것도 아니었다. 향수나 추억을 더듬으러 온 길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기억에 남은 것들이 떠오르는 대로 내맡겨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교회당 안쪽에 목사 사택이 있었다. 이것도 옛날엔 초가집이었던 것이 기와집으로 변해 있었다. 참 옛날 그 목사는 고기잡이를 잘했었지. 교인들 심방은 않고 틈만 있으면 그물을 들고 저 앞 개울로 가곤 했지. 그래서 어른들이 고기잡이 목사라고들 불렀었지.
현재의 목사는 그때의 목사보다 아주 젊어 서른 전후로 보였다. 그는 내가 누구라는 걸 알자 벌써 장례를 치른 지가 여러 날 된다고 했다. 고인이 운명하기 전에 내게만은 알려달라고 하면서 꼭 종지기 아무개라고 해야 할 거라고 하더라는 말도 했다.
내가 찾아온 것은 물론 장례식과는 관계가 없었다. 부고의 수신 주소가 학교로 돼 있고 그 학교가 방학 중이어서 이래저래 내 손에 부고가 들어오기를 이미 한 열흘 뒤였던 것이다.
고인의 가족이 어디 사느냐고 젊은 목사에게 물었다. 이날 찾아온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사십여 년이란 세월 속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릴적 동무, 그것도 불과 이삼 년밖에 같이 놀지 못한 동무가 내 현재 직장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평생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나로 하여금 고인의 유가족이나마 찾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던 것이다. 젊은 목사의 대답은 그러나 나의 바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후의 꼽추의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눈앞에 그릴 수 없었으나 가족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심한 불구자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었다는 방을 젊은 목사가 가리켰다. 대문에 붙은 조그마한 방이었다. 한 사내가 지녔던 사십여 년 동안의 외로움이 한꺼번에 내 가슴을 와 메웠다. 아픔이 뒤따랐다. 그것은 한 사내의 불행이나 외로움에 대해 내가 도맡아 책임을 질 수는 없다 해도 너무나 무관심한 한낱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한 가닥 회오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이런 뉘우침 이 무슨 소용
있으랴. 이제 고인의 무덤 이나 찾아가보고 돌아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젊은 목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인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종이 뭉치 하나를 들고 나왔다. 부피가 꽤 두툼했다. 젊은 목사의 말이, 생전에 고인이 즐겨 그리던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고인이 어렸을 적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던 기억은 없었다. 하여튼 고인은 가족도 없이 혼자 이 그림과 벗하고 살았던 것인가.
그림은 목탄지에 연필로 그린 것들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는 동안 나는 단순한 선들 속에 어떤 공통된 ,요소가 들어 있음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그림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얽힌 나무뿌리에서도 구부러진 곡선마다 불티가 튀고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는 교인들의 수많은 입들도 불을 뿜고 있었다. 헐벗은 산에 박힌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도 불길은 일고 있었다.
그림을 넘기던 나는 한 그림에 이르러 지금까지보다 빨리 넘겨버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 본 뒤에 젊은 목사더러 기념으로 한 장 가져가겠노라고 하고는 좀 전에 빨리 넘긴 그림을 찾아 뚤뜰 말아 외투 주머니에 넣고서 그곳을 나왔다.
옛날 장로가 살던 집도 벽돌담이 둘린 아담한 문화주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담을 돌아 집 앞을 지나며 문패를 보았다. 김 성 쓰는 사람의 집이었다. 주인이 갈린 모양이었다. 옛날 장로의 성은 김가가 아니었다.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면서도 묘한 것이어서 그 장로의 성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으나 김가는 아니었다고 단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장로의 성이 무엇이었건 그리고 그의 자손이 이 집에 살건 말건 그게 어쨌단 말인가.
공동묘지는 한길을 건너 교회당과는 거의 맞은편 쪽 등성이에 있었다. 흰 눈에 덮인 무덤들이 작고 큰 고저를 이루며 작지 않은 등성이에 가득 널려 있었다. 어느 것이 새로 된 성분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좀 전의 젊은 목사에게 위지를 물어가지고 올 걸 잘못했다 싶었다. 그런데 숫눈을 밟으며 묘지로 들어서 둘러보는 눈에 마침 저쪽 한끝에 새로 나무로 만든 십자가 푯말이 하나 들어왔다.
고인의 무덤이었다. 정작 무덤 앞에 섰지만 그 속에 들어 있을 고인의 실체는 아무것도 잡혀지지가 않았다. 그저 되살릴 수 있는 것은 고통으로 뒤덮였던 한 어린이의 핼쑥한 모습이었다. 가슴에 어떤 분노가 서렸다. 그것은 외투 주머니에 꽂혀 있는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머리를 들기 시작한 분노 같았다. 여기 수많은 무덤 가운데에는 그 성도 모르는 장로의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의 실체도 사십 여 년이란 세월 저편에 가려져 잡을 길이 없었다.
단지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고함 소리와 함께 종각 위를 쳐다보던 노기 에 찬 중년 사내의 얼굴이었다.
등성이를 내려와 알아보니 , 삼십 분만큼씩 다니는 버스가 다음 차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있어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한가운데 난롯가에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있을 뿐, 다방 안은 한산했다. 밝은 창가로 가 앉았다.
가져온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찻잔을 밀어놓고 외투 주머니에서 그림을 꺼내어 폈다. 거기에는 두 마리의˙ 개가 뒤를 맞붙이고 있는 그림 이 그려져 있었다. 덩지가 큰 개에게 조그마한 발바리가 뒷발을 허공에 들린 채 끌려가는 형상이었다. 다른 그림에서처럼 여기에도 불꽃이 있었다. 이 동물들의 형태로 인해 폐인이 돼버린 울분을 참고 견디다 못해 밖으로 연소시킨 것만 같았다.
새로이 내 가슴속에는 아무 허물도 없는 어린아이의 일생을 망쳐벼린 한 중년 사내의 어이없는 징계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이 같은 분노쯤은 고인의 그토록 외롭고 어두웠던 생애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인은 그러고서도 부친의 대를 이어 종지기 노릇을 했던 것 인가.
레지가 엽차를 가져왔다.
“저, 여기서두 교회당 종소리가 똑똑히 들리나?”
나는 레지에게 교회당 종소리가 예전과는 달라졌으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이 토요일 아녜요?”
오늘이 일요일로 착각하고 묻는 줄로 레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공연한 걸 물었다 싶었다.
사람들은 곧 새 종지기의 종소리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무방한 것이다. 그저 옛날 그 종소리는 나 혼자 간직하면 족한 것이다.
그러는 내 가슴속에 불현듯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두 어린이가 종을 치고 있었다. 이제는 종지기인 성일 아버지는 거기 없고, 단지 두 어린이만이 같이 종줄을 잡고 있었다. 줄을 잡아당겼을 때의 뗑 소리와 줄을 늦출 때의 강 소리 사이의 간격, 그리고 다음 뗑 소리와의 약간 긴 간격, 이러한 뗑과 강 소리가 되풀이되면서 내는 가락에 어울려 일종 특이한 여운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여운의 파문이 자꾸만 내 가슴을 채워왔다.
이때 나는 보았던 것이다. 앞에 펴놓은 그림이 이상한 변화를 일으킨 것을. 아니 변화라기보다는 이 그림을 그린 고인의 본뜻을 비로소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게 옳았다. 그림의 붓놀림이 어쩌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불꽃처럼 보였던 선 하나하나가 실상은 어쩔 수 없는 즐거움에서 우러나온 율동이었던 것이다. 킬킬킬 티 없는 웃음이 연필 자국마다 스며 있다가 되살아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십 여 년 전 웃음을 나눠가질 수 있었다.
(1965년 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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