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처럼
이혜경
오후의 햇살이 부쩍 얇아졌다. 맵싸한 바람 탓인지 공원 안에는 눈에 띄게 여백이 늘었다. 희끗한 머리색의 노인 몇 명이 구부정하게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뿐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찬 기운을 털어내려고 팔을 흔들어가며 빠르게 걷는다. 발끝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비둘기 몇 마리가 앞을 막는다. 공원에서 지내며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비둘기는 눈이 마주쳐도 놀라지 않는다. 도망은 고사하고 과자 부스러기라도 기대하는지 뒤를 졸졸 따라온다. 털 끝 하나라도 몸에 닿을 새라 힘껏 팔을 휘저어 멀찌감치 거리를 확보한다.
한 때는 평화의 상징으로 대접 받았던 비둘기가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먹이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발휘한 덕에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아진 비둘기는 도시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도 비둘기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비 호감 존재다.
새 집으로 이사한 이튿날부터 괴상한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베란다 난간에 비둘기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비둘기 울음이 그렇게 음흉하고 기분 나쁘게 들리는 소리인지 처음 알았다. 방충망을 툭툭 쳐도 꼼짝도 않던 녀석들은 창문을 세게 열었다 닫은 후에야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갔다.
불청객의 방문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 울창한 정원 쪽으로 베란다 창이 나 있어 그런지 수시로 비둘기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뗄 줄 몰랐다. 날이 새자마자 베란다 난간을 차지하고 앉아 울어대는가 하면 날개를 펼칠 때마다 먼지를 풀풀 날렸다. 아무데나 갈겨 놓은 배설물의 악취까지 더해져 푹푹 찌는 날씨에도 베란다 창을 닫고 지내야 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비둘기를 볼 때는 특별히 유감이 없었지만 나에게 작은 불편이라도 끼치게 되자 도브 비누도 싫어질 만큼 진절머리가 났다.
넓은 공원을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점퍼 안이 후끈하게 데워졌다. 광장 벤치에는 아까 보았던 노인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둘기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옆을 맴돌며 사이좋게 햇볕을 쬔다. 어쩐지 둘의 사이가 정겨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염색약의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노인의 잿빛 머리칼과 회색빛 비둘기 털이 유난히 닮아 보이는 것은 둘의 비슷한 처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날씨에도 굳이 노인들이 공원에 나온 것은 단순히 바깥 공기가 그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점점 자기 자리를 잃어가는 마당에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트인 공간이 필요했으리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서로 위안을 건네며 하루하루 지루한 시간을 버티어 간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예전보다 노인 인구 비중이 늘었다. 늘어나는 노인 숫자에 비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 세대별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지만 노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는데 노후 수명은 길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많다. 젊음을 다 바쳐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아낌없이 월급을 쏟아 붓느라 정작 자신을 위한 준비는 하지 못했던 우리 부모 세대들은 마땅히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다. 노인을 공경하던 사회 분위기는 옛말이 되었고 돈이 없으면 자기 자식들에게조차 환영을 받지 못한다.
늙은 부모를 공경하며 정성껏 모셨던 부모 세대들과 달리 요즘 세대들은 부양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 핵가족 문화에 젖어서 오로지 자기 아내, 자식만 잘 챙기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 세대보다 훨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눈높이가 높아져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남들 하듯이 비슷하게 따라가려면 수시로 지갑을 열어야 해 웬만큼 벌어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
다행히 나는 양가의 부모님을 부양하는 부담에서는 자유로운 편이다. 용돈을 드리고는 있지만 생활비를 책임지는 입장이 아니라 부담감이 크지 않다. 만약 부모님의 가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입장이었다면 지금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초부터 일정한 몫을 떼서 노후 저축에 가입한 이유도 경제적인 부담이 생기면 자식과 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열심히 먹이를 찾아 먹고 부지런히 새끼를 쳤을 뿐인데 감당 못하게 수가 늘었다고 비둘기는 해조 취급을 받는다. 부모 세대들 또한 그저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돌아온 것은 냉랭한 시선뿐이다. 한 평생을 바쳐 자식들을 길러내고 사회의 톱니바퀴로 열심히 일했지만 감사 인사는커녕 점점 찬밥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니 지금의 젊은 세대도 언젠가는 노인들이 겪는 서러움을 똑같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문득 흘러간 노래 한 소절이 스쳐간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더 이상 비둘기가 정다운 새로 여겨지지 않는 지금, 따뜻한 봄이 오면 저 노인들의 집에 장미꽃이 한 번 더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경쾌한 유행가 가사가 오늘따라 가시가 되어 가슴 한 구석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