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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를 조심하라! /문학이 가야할 길
정임표추천 0조회 49 20.03.02 22:13댓글 0
사이비를 조심하라
-문학이 가야 할 길
진짜 같은 가짜를 두고 사이비라고 합니다. 사전에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으로 정의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이 사이비에 대해서 수시로 경계의 말씀을 하셨는데 “회칠한 무덤” “양의 탈을 쓴 늑대” "거짓 목자"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사이비라는 말을 가짜 종교인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씁니다. 사악한 영(악령)에게 영혼이 팔려간 인간들이 예수의 복음을 팔아서 제 욕심을 채우곤 하는데, 의외로 예수의 가르침은 모호함이 없고 간단명료합니다.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 이 담기지 아니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그가 아무리 이적과 방언과 예언을 행하고 두루 선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고 삼척동자도 알 수 있게 아주 쉽게 정리해 버립니다.
고대 인간들의 혼돈했던 정신세계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개명되고 진보된 것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철저히 분리된 데 그 공이 있습니다. 인류정신사는 고대의 다신적이며 신화적인 정신세계(헬레니즘)에서, 유일신 사상인 헤브라이즘(신 절대주의, 신본주의 사상)으로 귀결하였다가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르네상스(인본주의 사상)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진보되어 왔고, 그 영향으로 과학과 철학이 융성하게 되었고 종교와 정치가 철저히 분리되는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로 상징되던 암흑 속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광명의 시대로 획기적인 진보를 이룩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내일에 대한 자기 존재의 불안"이라는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어서 이 불안이 어떤 계기를 만나 사이비 인간들의 선동에 의해서 증폭될 때는 개명세계가 되었다고 할 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이 거대한 어둠 속으로 떠밀려가게 되어 다시금 암흑 속에 갇히기도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서 "우는 사자 같이 우리 영혼을 추수해 가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한 말의 핵심은 "깨어서 기도하라!" 입니다.
믿음은 맹신적이고 맹목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데도 종교인들은 무조건 “아멘!”하며 믿으라고 만 가르칩니다. 이성이 들어오면 종교가 되지 않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런데 내가 읽은 성서의 4대 복음서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속이지 말고 속지 말라!"는 외침으로 요약되는 이성적인 가르침만으로 가득하였으니, 나는 "믿음"과 "아멘"이라는 두 단어 앞에서 무조건적으로 설교자의 요구를 따르지 못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암흑에서 광명으로 이끌어 내는 가르침이 담긴 글임에도 복음팔이를 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이 인간의 영적인 세계를 조직의 힘으로 지배하고 우리의 영혼에 두터운 차양막을 치고 암흑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점 같은 것을 보지 않는다. 재미로라도 로또 복권 같은 요행을 바라는 것을 돈을 주고 사지 않는다.)
나무 밑의 도토리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며 달아나던 다람쥐 뒤를 이어 모든 산짐승들이 달아나기 시작하니 마침내 사자가 나와서 그게 도토리임을 밝혀서 숲을 진정시켰다는 이숍우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정서인 불안심리를 성찰한 이숍이라는 한 천재가 불안과 믿음에 대해서 아주 이해하기 쉽게 문학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당연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을 버리라는 의미)"고 가르쳤습니다. 믿음은 생명으로 살아 내면서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사자와 같은 그런 굳은 심지, 곧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희망을 굳게 가지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 합니다. 천방지축으로 덜컹덜컹 믿는게 믿음이 아니고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스피노자의 정신 같은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는 성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말인데 최후의 심판 뒤에 오는 신국(神國)을 말합니다. 이는 상징입니다. 불국토니 미륵정토니 십승지지니 하는 말과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는 자나 휴거를 강조하는 자는 인간의 불안심리를 부추겨서 자기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100% 사이비들이니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은유와 상징을 모르면 그리스 신화나 고대 경전은 한마디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물론 문학은 더 모르는 것이고~. (제가 문학을 이해하고 나서 청년 때 읽은 경전들이 이해가 되었고 수 많은 의문들이 풀렸습니다. 정말로 새하늘과 새 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이비 정치인들이나 사이비 종교 교주들은 상징조작 (실체와는 다른 환영으로 교묘하게 이미지를 조작하여 거짓 이미지로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 을 통해 사람을 끌어모으는 짓을 귀신처럼 잘합니다. 언론도 시청률이나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서 써먹기도 하고 기업은 마케팅 기법으로도 써 먹습니다. 참 문학, 참 종교, 참 지도자는 늘 이점을 냉정한 눈으로 감찰하고 사이비 바이러스(=사악한 인간정신 작용)가 자기복제를 통해서 중생의 영혼을 지배하고 창궐하려는 기도를 분쇄해야 합니다.
예수도 복음서에서 "너희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 바가 있습니다. 실재로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서 7일 동안 무교병(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빵)을 먹습니다. 누룩은 등비급수적으로 종균이 배양되어서 삽시간에 밀가루 반죽을 술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 인간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키는 거짓 종균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영역에 굴레를 씌우는 모든 사이비적인 것들로 부터 해방이 되어서 자유롭게 해탈되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인간 정신세계의 변화(=거듭남)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육적으로는 유대민족이 애굽의 노예신분에서 이스라엘의 자유인으로 해방된 사건이지만)
알베르토 카뮈는 인간의 정신세계는 본디부터 부조리하다(부조리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성찰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페스트>와 <이방인>을 썼습니다. 신국이 있다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키는 괴상한 바이러스가 몽땅 다 퇴치 된 이후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마겟돈은 물리학이 말하는 핵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어둠의 바이러스를 몰아내려는 우리 인간의 이성이 벌이는 최후의 전투이자 빛나는 싸움입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부조리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찬란한 빛이 비치는 신국(神國)이 열린다는 뜻입니다.(이는 필자의 문학적 생각이다. 신학적 해석이 아님으로 논쟁은 사양한다)
이참에 생각난 바를 한 가지 더 적습니다. 어떤 사이비 이념이 태동되어 그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 그 이념을 더욱 더 정제해서 원리주의화 시키는 세력과 그것으로 자기 잇속(=뱃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조직도 유기체처럼 자기의 존재를 이어가기 위한 필연으로 두 세력은 결탁(야합)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신격화작업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자유성을 말살하는 원리에 죽고 원리에 사는 우상 숭배(이념화)작업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쉽게 배교(=배신)할 수 있을 것 같아도 한번 굴레에 갇히면 벗어 나질 못합니다. 이미 조직에 갇혀버리고 조직에 기가 눌려있으니 개인 혼자서는 어쩌지 못한다는 좌절과 공포와 영적 고립이 몰고오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비행기를 탄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집단 자살한 오대양 사건이나 백백교 사건처럼, 교주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끽 소리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게 되는 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나나 당신이나 우리 인간의 정신 세계는 이렇게 취약합니다. 철저한 신분제로 무장된 조선 5백년을 지배한 성리학 사상도(백성 중 40%가 평민, 50%가 노비였고 그들은 오로지 10%의 양반을 위해 존재했으며 자유가 없었으니 인권이란 말도 없었다. 이름도 성도 없었고 개똥이, 바우, 억쇠, 간난이로 불렸다.),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일성 주체사상도 그렇게 해서 태동된 것인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과 도구로 보는 모든 정치이념과 종교는 사이비(=우상. 가짜)입니다. (필자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자기 말에 세력을 얻고자 떠드는 것인데 동조자가 늘어나면 우쭐해져서 사이비가 될 위험이 매우 크다. 너희 앞에 나팔을 부는 자를 조심하라)
서구는 오랜 정신사적 혼란기를 거쳐서 실존주의(=존재가 곧 본질) 사상이 사회를 이끌고 있지만 아직 우리 한반도는 죽은 이념을 위해서 하나 뿐인 귀한 목숨을 걸고 오늘도 수 많은 영혼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세상의 모든 이념과 종교의 시험장이 되고 있는 것은 "도 아니면 모"로 가는 우리 민족의 기질 탓입니다. 500년 동안 성리학적 이념(=세계관)의 지배 하에서 철저하게 억압 받은 한 민족의 정신적인 트라우마(=무의식에 저장된 상처)가 낳은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우리의 의식 세계를 모든 허망한 것을 추구하던 폐습에서 철저한 실존주의로 바꿔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스크 한 장, 치료 병실 한 칸이 그 어떤 이념이나 종교보다도 절실함을 안다는 것 그 자체가 실존주의 사상을 적극 흡수하고 있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마스크 장사가 떼돈 벌기 위해서 매점매석한다는 뉴스에 문득 쌀이 아닌 양반들만이 쓰는 망건의 재료인 말총을 사 모아 떼돈을 벌었다는 허생이 생각납니다. 소설이지만 허생은 돈을 벌기 위해서 힘 약한 백성을 곤경에 몰아넣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애민 사상을 담은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악착같이 돈을 많이 벌어서 옛날의 양반처럼 “여봐라! 이리 오너라!” 하면서 대대손손 이 땅 위에 군림하고픈 욕구가 엄청 강한 우리 민족의 유전자를 바꾸는 길은 문학을 하는 작가님들이 윤흥길의 <완장> 같은 소설들을 많이 써내는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배워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부활이니라!"는 말씀은 내 가르침이 곧 길이요 생명을 생명 답게 하는 것이자 영원히 생명을 이어가는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경전을 허황되게 해석하는 자 그가 바로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본질(이념, 사상)에 선행한다."
"한 생명이 천하 보다 귀하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惟人)이 최귀(最貴)야라!"
이 말은 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020.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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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3. 9 대선 투표가 있다. 사이비만 골라 내어도 세상이 아주 살기가 편해진다. 우리 모두는 오류가 많은 생명이고 생명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명 외의 것을 참인 양 외치는 자는 전부 사깃꾼이다. 지난해 2023년 10월 16일 대구수필가협회는 시민과 함께하는 수필의 날 행사에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철학 강좌를 열었다. 니이체가 전하는 말의 핵심은 "위버 맨쉬(초인)"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초인이란 인간 정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위대한 승리자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가 바로 짜라투스트라이자 메시아란 의미도 된다. 문학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영역인지라 니이체도 문학을 동원하여 참을 설파 한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 심리를 기가막히게 표현한 시가 있어 이 참에 같이 소개 한다.
오감도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중략)/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중략)/(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천재 시인 이상의 「오감도」제1호의 내용이다.
세상은 혼돈하고 믿음은 보이지 않고 온통 무서움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겁에 질린 아해들은 어디든지 달아나야 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질식하여 죽을 것 같다. 첫째 아해도, 둘째 아해도, 셋째 아해도, 그리고 마침내는 무서워하는 아해까지도 분위기에 휩쓸려 도로를 질주한다. 달리는 길이 막다른 골목인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 열린 길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달린다.
불안에 싸여 제 가는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헤매고 있는 군상들의 모습이 이 천재 시인의 눈에는 새 조(鳥)자도 모르는 까마귀(烏) 떼 같아 보여 조감도를 오감도(烏瞰圖)라 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난 한 세기동안 이루어 놓은 공든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모든 국민들이 두려움의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등 그동안 힘들여 쌓아올린 공든 탑들이 무너지고 구조조정, 고용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빅딜 등 이름도 생소한 아해들이 도로를 질주하자, 영문도 모르는 아해들이 죄다 공포에 젖어 방향모르는 질주를 하고 있다. 바벨탑의 붕괴는 믿음의 붕괴다. 믿음의 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다. 지도자에 대한 믿음, 금융에 대한 믿음, 제품에 대한 믿음,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세우기 위한 조감도(鳥瞰圖), 우리에게는 지금 질주가 아니라 단 한 장의 조감도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9월4일)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부디 "자기 내면 세계의 어둠과 치열하게 투쟁해서 알에서 깨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고, 인간 공동체에는 늘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사이비가 권력의 뒤에 숨어서 공공선을 위장하여 존재하는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