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누군가가 짧은 소리를 냈다.
순간 발밑에서 무엇인가 꿈틀하는 것을 보았다.
왼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동물을 발로 눌렸다.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산책로를 따라서 걷을 때였다. 강뚝 윗 채전밭에서 내려와 강뚝으로 도망치려는 긴 물건이 나한테 들켰다. 순간에 작은 뱀이라도 아가리를 짜악 크게 벌렸다. 물으려고. 이미 늦었다. 그렇게 몸부림쳐도 나는 운동화를 힘껏 눌러서 비벼돌렸다. 거듭 비볐다.
내장이 터지고 허리토막이 으깨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다가오는 행인들이 놀라지 않도록 뱀을 강뚝 속으로 차버렸다.
'당신이기에 뱀을 잡았군요.'라고 아내가 징그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랬다. 나였기에 뱀을 겁없이 밟아죽였다. 비록 새끼뱀이지만 올 겨울을 지나면 내년에는 큰 배암이 될 터. 뚝방길을 따라 배다리 세미원(식물원) 방향으로 나가다가 길을 잽싸게 건너는 뱀을 발견했던 나.
저승사자인 내 눈에 띄었기에 황천길로 떠났다. 아마도 저승에 가서 일찍감치 좋은 자리를 선점차지 할 게다.
배암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어야 한다. 수십 년 전 쌍둥이었던 동생을 물어서 하루도 채 안 되어 죽게끔 했던 한 종속이었다. 이제는 쌍둥이가 아닌 나한테는 뱀이란 모든 종속들은 무조건 죽여야 할 사악한 해충이었다.
오늘은 부득히 집을 비워야 했다. 잠실아파트 단지 내 전기를 점검한다면서 6시간 정도는 전기공급이 안 된다고 연일 안내방송했다. 전기불 안 들어오는 방이란 우둑컴컴할 테고. 또 늦가을도 자꾸만 저물어 가기에 한번쯤 나들이 다녀오고 싶었던 차였다.
나와 아내는 남한산성으로 가 벌봉을 등산하려고 마음먹었는데도 막내아들은 양평 두물머리를 고집했다. 회사에서 오늘 쉰다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다는 말에 자식을 이기지 못하고는 양수리 방면으로 결정했다.
잠실대교 입구 뒷편쪽의 샛길을 통해서 남쪽 강변도로를 타고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내려다보고는 차는 계속 직진했다. 거북이 앞머리 형태를 지닌 지형을 상징하여 지은 이름, 구산성지(龜山聖址)가 있는 미사리를 지났고 팔당대교를 탄 뒤로 강북 쪽으로 나갔다. 양수대교를 건느니 곧 두물머리.
비빕국수로 간단히 점심 끼니를 해결한 뒤에 강변으로 걸어 나갔다. 목요일 한낮인데도 강변에 나온 행인들이 많았다. 모두 여유로운 사람들.
양평군 양수리. 합수머리, 두머리, 이수두(二水頭), 양수두(兩水頭), 두물머리 등으로 부르는데 우리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물머리가 제일 낫다.
배다리가 이색적이다. 한 줄로 수로 폭이 좁은 한강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강을 건느는 하나의 방편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양주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는 이를 수원 화산으로 옮겼다. 1789년 현륭원으로 능원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했는데 다산이 크게 공을 세웠단다. 배다리는 수십 척의 작은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재를 덮어서 긴 다리를 설치하는 구조다. 나는 잠깐 착각했다. 종로에 있는 왕실에서 수원 화성으로 어가로 능행하려면 용산구 노들섬을 건너야 하는데도 왜 양평의 배다리를 건넌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것으로 착각했다. 순전히 거짓 이벤트였다. 세미원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강상을 가로 지른 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정약용과 연계하여 연상해서는 안 될 착각이었다. 정조대왕의 행능 배다리는 한강 노들섬일 게다. 현재의 노량진인 노량나루터여야 할 게다.
물과 꽃의 정원이라는 세미원 들어가는 배다리 입구의 매표소2.
성인 4,000원. 65세, 청소년 등은 2,000원. 양평군민은 무료.
시간이 없어서 배다리를 건너서 세미원으로 가 연꽃구경하는 기회는 포기하고는 귀로에 올랐다. 배다리 입구에서 세미원으로 들어가는 입장료를 파는지 모르겠다.
세미원이 배다리를 독차지 했지? 돈을 내야만 배다리를 건넌다고? 이거 부정비리가 숨어 있는 특혜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중에 재방문해서 확인해야겠다. 세미원이 양평군에서 운영하는 공영기관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또 북한강역이 양평군의 공유재산인지 의문스럽다. 시 소유지가 아니라면 수도권 시민에게 배다리를 걸을 수 있도록 어떤 배려를 해야 되지 않을까? 양평군이 출자했다고 하나 전액출자했는지 아니면 일부 출자했는지 석연치 않다. 하나의 관광자원으로써 무료로 개설하면 좋겠다. 한강 그 자체는 국가소유의 것이지 지자체의 소유가 아닐 터.
또 그렇다. 한강을 건너 사도세자의 묘소로 능원하였던 정조 왕의 효(孝)와 남양주시의 다산 정약용의 실용사상의 지혜를 기리는 배다리를 감안하면 65세 노인한테는 무료로 했으면 싶다. 효라는 것이 실질적인 것이지 입으로만 떠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걷어내던지 무료로 개방하던지 어떤 선택이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도 아니면 배다리를 건넌 직후인 세한정 앞에서나 매표소2를 운영했으면 싶다.
군 보호수 16호인 느티나무.
수령 400년, 직경 8.4m, 높이 26m.
무척이나 크고 우람했으나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듯이 나무 밑둥챙이가 삵아서 그 틈새가 났으며, 빗물과 해충을 막으려고 시멘트로 쳐발라서 더 이상의 손궤가 없도록 수목치료를 했다. 400년의 장구한 세월을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내력을 무척이나 많이 지켜보았을 터다. 아쉽다. 삵아서 무너져내리는 느티나무가 더 오래 버티어서 역사의 현장을 지키기 바랬다. 하나의 거수(巨樹)이기에 신령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물 깊이 낮은 수변 가생이에는 연이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연잎을 이용한 연잎밥과 연잎가루를 판다는 상점도 많이 눈에 띄었다.
잔 물결이 찰랑거리면서 물 적시는 둔턱에는 수생식물인 갈대와 억새 군락지가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갈대와 억새, 연의
뿌리는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이들 갈대꽃과 억새꽃은 많이 졌다. 추레한 모습으로도 한때 장관을 이뤄었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더듬을 수 있었다.
귀가하면서 남양주시 조안면 마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생가에 들렀다.
생가 터가 무척이나 더 넓어졌다. 주변지역도 관광단지화 되어서 상품화되고 있었다. 1800년대의 정약용 양반네가 이렇게 거창하게 권세부리고 살았나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여러 박물관,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했다던 거중기의 축소모형 등을 위시한 실학사상의 물건들과 구식대포 등이 도로변에 진열되었다. 거중기 모형이 완전히 난림이다. 거중기가 사각형의 거대한 돌을 들어올리는 형상인데 이 돌이 진짜 돌이 아니다. 아마도 베니다 판목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도록 겉이 찟어지고 속이 너덜거렸다. 실학박물관에 갔으나 팜프렛 자료만 얻었을 뿐 실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없기에.
생가 뒷편 야트막한 산에 있는 묘소에도 들렀다. 묘소의 여러 시설물이 좀 그랬다. 여러 차례 개보수한 흔적들이 역역했다. 빗돌이며 상석, 제초석들의 재질이 제각각이며, 원래의 모습이 아닌, 자꾸만 변형시킨 것이 눈에 띄었다. 갓석을 인 빗돌 뒷면의 글씨를 대충 읽었다. 국한문으로 각자되어 있어서 한문 실력이 조금만 있으면 너끈히 읽을 수 있었다. 또 빗돌은 오석(검은 돌)로 손으로 갈았기에 더욱 서민적이었다. 기계로 절단하고 기계로 돌 표면을 반들거리게 간 것이 아니고, 징으로 돌을 쪼아서 판석을 만들고, 손으로 돌 가는 광석을 눌러서 표면을 거칠게 간 흔적이 여실했다. 큰 무덤(봉분)인데도 잔디로만 식재되었을 뿐이고, 그 흔한 둘레석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점도 극히 소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약용(1762~1836년). 정말로 실학파의 거두였을까? 정말로 백성을 위한 양반이었을까? 천주학을 믿는다는 죄로 형 약종은 참살당했고, 형 약전은 전남흑산도에 유배 가고 본인 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당해서 가문이 한때에는 풍지박살났다. 그런데도 1818년 그의 나이 57세 해제되어 향리에 돌아와 가세가 회복되었다. 그의 행적이 진정으로 위민애민이었나 하고 물으면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야겠다.
그도 본질은 양반이었다. 노비제도를 인정한 반상이었다. 양반신분과 계급제도의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즉, 그는 수령, 감사 등의 관료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것을 비난했으나 신분, 계급, 평민과 노비에 대한 귀족의 지배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분제도의 변화에 강하게 반발했던 양반에 불과한데도 마치 온통 애민사상가(愛民思想家)인 양 떠받드는 게 좀 그랬다. 사노비의 존치를 계속 지지하였다는 사실을 슬쩍 감춘 점이 아쉽다.
1)'다산 정약용을 근대 개화사상가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단지 상식적 입장에서 실리주의적인 소신을 가졌던 유학자 정도로 밖에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삼가 인용한다.
2)'양반과 천민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완고하게 전근대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귀족적 사대부의 권위를 절대시하였고 노예법의 철폐는 커녕 개정 노예법의 원상복귀를 주장하기까지 하였다.'라는 글도 발견했다.
1801년 그의 나이 40살에 유배되어, 1818년 57세의 나이까지 전남 강진에서 죄수생활을 했으며, 1818년 해제된 이후에는 향리에 돌아왔으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돈을 벌지 않고도 어떻게 호구지책할 수 있었는가? 누가 대신 돈을 벌어주어야 한다. 그게 사노비 아니었을까? 몇 명이나 있었어?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유배당하기 이전의 관직도 그다지 높지 않았고, 당시의 관직녹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보면? 하물며 죄수로서 유배된 이후의 가솔은 무엇으로 호구지책했으며...
이런 의문이 대두되는데도...
생가 앞 강변의 드넓은 생태공터는 새로 조성되었다. 지역관광테마로서 성공하여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일대가 새롭게 조성되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부귀권세(富貴權勢)의 세습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양반네 시절에도 잘 살았더니만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잘 사는구먼. 이곳에서 영업하는 명분과 상권를 얻어서 생업하겠지만 평민 자손은 감히 이런 곳에, 어떻게 접근이나 하겠어? 하는 자괴심도 일었다.
이조 근세사에서 실학파가 과연 얼마나 사회변혁에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겹쳤다.
'개천에서는 용이 나는 것이 아니고 지렁이만 나온다'는 말이 자꾸만 귀에서 들린다. 요즘 무척이나 회자되고 있다. 양반가문과 상민가문은 후대에도 차이가 난다.
1800년대 이후 현실적용에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실학사상과 극도로 혼란했던 사회 붕괴현상에 대해서 아내와 막내아들한테 잠깐 들려주었다.
나는 역사지식이 없는데도 아는 체하면서 당시의 양반사회 붕괴조짐과 극심한 가렴주구에 대한 현상도 잠깐 설명했다. 절대왕권, 양반들의 삼정문란, 이후 대원군의 섭정과 구한말의 왕조 붕괴, 일제침략과 친일파의 대두 등을 잠깐이나마 들려주었다.
1800년대 이후의 근대사가 그렇게 애민애족의 사관이었던가? 아름답고 멋지게 꾸민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이 감춰질까?
'양반네만 살았나 보지요? 이 집에는 하인들과 천민들은 없었을까요?'
정약용 생가를 잠깐 둘러보는 관광객에 물었다.
그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하는 거여? 하는 표정으로 뜨악하게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내가 미친 놈이지. 그 노인들한테 물어 본 것이 잘못이지. 구경거리 있다니까 관광버스 타고 와서는 후이 둘러보는 것이면 족했던 늙은 것들이지.
나라도 국사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자꾸 일어났다. 진실은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에...
오늘 잠깐 둘러본 양평 양수리(두물머리)와 남양주시 조안면 정약용 생가 방문은 나한테는 또하나의 역사공부 시초가 되었다. 생가터는 맞을 것 같지만 고택고가는 보수가 아닌 개축라는 인상이 짙었다. 근자에 새로 조립축조한 듯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초급관리이면 국록(녹봉)이 보잘 것 없을 터이고, 또 탐관오리가 아닌 애민사상가였을 터인데 어떻게 물재가 생겨서 고대광실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전혀 아닐 게. 현재의 고택이 과연 정다산이 살았던 당시의 집이었을까?
나로서는 의문투성이다. 경세유표 미완이라는데도 마치 경세유표 책자에 든 실학사상이 실천된 것인 양 인터넷에서 떠돈다. 정말로 확인해 봤어? 하는 의문이 일렁인다. 실학이 그렇게 채택된 시대가 전혀 아닌데...
목민심서, 경제유표, 흠흠신서, 아방강역고, 여유당 등 182책 503권이라는 책을 저술했단다. 그거 혼자 다 저술한 거여? 하는 의문이 또 든다.
다산 생시에 어떤 책이 인쇄되어 유포되었는지... 몇 명이나 읽었는지, 그게 사회혼란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혹시 1958년경 다산유족보존회 등의 활약상에 의해서 광채가 발휘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이렇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산당이 있다. 초가집이어야 하는데도 지붕은 기와다? 그럼 1950년에 복원한 초당은 가짜로 새로 축조했다. 옛 그림 속의 초가와 현재의 기와집은 전혀 엉터리다. 국가의 죄수가 기와집에서 산다? 순 거짓말 투성이다. 복원이란 진실되게 하는 것이지 이렇게 순 엉터리로 미화(美化)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문을 자꾸만 던지고 싶었다. 서해안 벽촌에 사는 나는 무엇일까? 왜 내 조상들은 서해안 갯바다 근처의 이름없는 산말랭이에서 터를 잡고는 꼬작거리듯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잔반 찌끄러기로 근대에서는 백성으로 근근하게 처신했던가를 따져보고 싶다.
오늘 나는 또하나의 강자가 되어서 배암새끼를 발로 밟아 으깨어 죽여야 했다.
뱀의 살생은 신의 뜻일까?
이씨조선 말 강자는 위처럼 하지 않았을까?
왕명을 거역하거나 양반에 반기를 든 자는 곧 죽음이라면서.
'부는 세습한다'는 명제를 어떻게 삵히나? 이 밤에는.
2.
한강의 길이가 좀 애매하다.
460~520km까지로 본다.
1994년 서울시 등의 자료는 497.5km. 이게 정설일까?
강원도 태백 매봉산 검룡소를 발원지로 하면 520km.
남북한 통털어 4번째 장강.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한강 순이다.
두물머리 교통편
중앙선 양수역 하차 700m
버스 청량리에서 167번 양수리 하차 500m
버스 강변역에서 2000-1번 양서문화체육공원 하차 100m.
2015.11.6.해비치
다산에 관하여 인터넷 검색할수록 의문은 자꾸만 커졌다.
왜 이렇게 크게 부각된 거여?
더 생각해야겠다.
1801년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되고 1818년 쯤에 해제된 이후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데도 어떻게 노비를 거느려?
무엇으로 가솔/식솔을 이끌었지? 의문투성이다.
관직도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수원성 축조 시에 이용했다던 거중기를 과연 다산이 발명해?
웃긴다. 이미 중국에서는 사용했는데...
첫댓글 꼼꼼히 다 읽었네, 최공이 밤 늦도록 눈 아프게 쓴 글이 아닌가?
몇 사람 읽어 주지 않는 카페에 올려지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 더 자료 수집하고 다듬는다면 좋은 글로 남을 것 같네.
두물머리 나들이 참 잘했오, 난 사진 찍는답시고 매년 여러차례 가는 곳인데, 연꽃 필 땐 세미원에 두어번 가고 다른 계절엔 두물경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강가에 주로 가지...
나도 세미원 입장료에 불만 있네, 아마도 관에서 하는 게 아니고 운영주체가 민간이 아닐까? 관에서 한다면 경로우대를 필히 할 거라 믿기 때문이지,
다산유적지 마현리에는 나도 지난주에 갔다왔네, 그러나 생가 근처에는 가지 않고 강변만 한바퀴 돌고 왔지.
참! 洗美苑의 이름 유래를 아시나? 그게 참 멋지거든
觀水洗心 觀花美心...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장자의 말에서 따왓다고 하네 ㅎ
다산에 대해 나는 정말 아는 게 없는 무식쟁일세, 공부해서 말해야겠네 ㅎ
@정희태 세심원.
참으로 유식한 것들이구먼. 먹물이 잔뜩 묻었구먼. 장자면 어떻고 소자면 어떻고. 다 2000년 전 쯤에 죽은 사람들이 말이 뭐 그리 대단하던가. 그들이 지금 현신한다면 등신일 거여. 컴, 핸드폰 이런 거 이해하겠어? 커피 한잔 먹어봤겠으며,... 과학문명세상에서 장자 등 고대 중국 현철이 온다면 등신, 머저리가 될 거여. 과학지식이 몇 년 사이마다 2배씩 증가하는 현대에 중국 사상가의 문장에서 인용했다... 그냥 우리말로 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 것도 아닌 남의 화원에 내가 투정하는 것 같구먼. 내 것이라면 나도 그런 이름인들 가리겠는가?
돈이나 주고 구경 한번 하면 그뿐일 것을...
@최윤환 ㅎㅎㅎ...세심원이 아니고 세미원이여
하여간에 뭐든지 삐딱하게 보시는구만 ㅎ
觀水洗心 觀花美心...이 좋은 글을 두고 왜 그리 심술이 나시오?
애인이라도 생겨야 그 삐딱이 사라질래나요? ㅎㅎ
하긴 남자가 아니라니..그 것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