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관련 사적지 탐색
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왔다. 천주교 전례와 유교 의식 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789년에 소위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알려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사가 시작됐다.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최초의 참수 순교자들이면서도 이들에 대한 관련 사적지들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순교한 지 200년이 지났고,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때로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동안 교회사 연구자들의 자료들을 토대로 가능한 한 그 사적지들의 실체들을 간략히 정리하였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라 이견이 있기도 하다.
아래는 한국 교회 최초의 참수(斬首)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관련 사적지들이다.
◆ 윤지충 · 권상연의 탄생지와 거주지
윤지충의 탄생지는 옛 양량소의 장고치(현 도산리의 장고터), 즉 달레 주교가 기록하고 있는 진산의 장구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서 태어난 윤지충은 훗날부친 윤경(尹憬)을 따라 외조부 권기징(權沂徵)이 살던 진산 막현리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윤지충의 거주지는 권상연의 생장지 이웃인 옛 진산군 북면 막현리(현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로, 지금의 하막현리와 매방골 일대라고 추정된다.
권상연의 집안은 공주군에서 살다가 진산 막현리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장고봉으로부터 서쪽, 즉 현재의 막현리 새뜸과 하막현리 쪽이었다고 한다. 윤지충의 부친 윤경이 권기징의 딸(권상연의 고모)과 결혼하여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 사촌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막현리 지역은 치명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리적 삶을 영위한 곳이요, 그 순교사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윤지충 · 권상연의 압송로
탄생지 · 거주지에 비해 윤지충 · 권상연의 순교 행로인 압송로는 달래의 기록에 비교적 정확히 밝혀져 있다. 달레의 기록에 나타나는 이 내용은, 다블뤼 주교가 수집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고 다시 프랑스어로 옮긴 후 1858년에 파리로 보낸 <윤지충 일기>(尹持忠日記)에 근거하고 있다. 이 일기는 신유박해(1801년) 때 관청에서 압수한 서적 가운데도 들어있는 것을 볼 때 윤지충 순교 후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그 원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윤지충 · 권상연은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아에 자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전에 그들은 조상 제사를 폐지한 이유로 진산 군수가 체포령을 내리자 각각 광주와 한수로 피신했었다. 그러나 윤지충의 삼촌이 대신 체포되자 이 소식을 듣고 곧 자수하게 된 것이다. 그 날 즉시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 앞에 끌려 나가 신문을 받은 윤지충 · 권상연은 10월 29일 새벽에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는데, <윤지충 일기>에서는 그 압송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 전문을 달레의 기록에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윤지충과 권상연)는 진산 관아에서 둘 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니 군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전주 감영으로 떠나 보내라는 명령에 따라 사령(使令)과 포졸 한 명과 옥리 한 명을 동반하여 관아를 나왔다. 그러나 관아를 나왔을 때 밤이 깊어 면임(面任) 집에서 자고 29일 새벽에 길을 떠났다. 신거런(즉 신거랭이) 주막에서 조반을 먹고, 개바위[狗岩]에서 두 번째 쉬며 말을 먹였다. 해가 질 무렵 안덕에 있는 고관들의 여인숙[安德院] 근처를 지나 조그만 산 등성이를 넘자 그들을 데리러 온 감영 나졸들을 만나 남문(즉 풍남문)밖에 있는 감영(진영의 오기인 듯)으로 끌고 갔고, 밤이 이슥하였으므로 중군아문(즉 중진영)으로 끌고 갔다.'
이 압송로를 다시 현재의 지명과 관련 지어 살펴보면, '진산읍-배티재[梨峙]-배바위[舟岩]-삼거리-활골-용계원-신거랭이-고산면-어우리-개바우-안덕원-하평(下平)-동문(完東門樓)-중진영(전동)'의 행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진산에서 신거랭이까지는 약 22km, 신거랭이에서 개바우까지는 약 26km, 개바우에서 중진영까지는 약 8km가 된다. 그러므로 늦가을 하루(약 17시간) 동안 약 54km를 걸은 것이다.
○ 진산 관아
진산 관아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에 있었으며, 본래의 관아는 남동향 방향으로 있었고, 그 앞에 객사가 있었으며, 옥이 또 그 앞에 있었는데, 현재는 개인집으로 사용되는 형방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배티재는 진산에서 대둔산 쪽으로 2km 쯤에 있는데, 옛 도로는 현 도로의 아래쪽으로 그 입구에서 갈라진다.
○ 용계원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으며, 조선시대 일반 여행자 숙소인 원(院)이 있던 곳으로 <여지도서> 고산현조에 따르면 '고산현의 동쪽 4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동쪽으로 10리가 채못되어 '삼거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배바위[舟岩]가 있고, 남쪽으로 가면 고당(姑堂)에 닿는다.
○ 신거랭이
전북 완주군 운주면 가천리에 있으며, 일명 요동(堯洞) 또는 싱그렁이, 신거런, 상그렁이 등으로 불린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원님과 관리들이 묵던 객사가 있었다하여 원터라 불리는 곳이 동네 어귀의 고목 북쪽에 있고, 고산 현감이 이들을 위해 '짚신을 삼아다 객사 앞에 걸어 놓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거랭이'(신을 걸어 놓는 곳)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용계원에서 서남쪽으로 용계재를 넘어 10리 거리에 있다.
○ 개바우
전북 완주군 용진면 용흥리에 있다. 고산 읍내에서 전주 쪽으로 약 30리 지점이며, 개바우가 용진면 소재지로는 초라하지만, 옛날에는 가장 천한 사람들만 사는 마을로 객주집이 몇 집 있었다고 한다.
○ 안덕원
전주시 우아동 동사무소 부근이다. 현재 우신 아파트가 세워진 작은 언덕에 있었다. <신중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전주부조에 보면 '안덕원은 전주부의 동쪽 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볼 때 일찍부터 이곳에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중진영
압송로의 마지막 장소인 중진영은 <윤지충 일기>에서 '남문 밖의 중군아문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본래는 남원에 있던 것을 숙종 34년(1708)에 전주로 옮긴 것이다. 이른바 전라도의 5진영[討捕營]이란, 전주의 중진영과 순천부의 전진영, 운봉현의 좌진영, 나주목의 우진영, 여산현의 후진영을 말한다. 중진영의 위치는 현재 전주천변에서 시내쪽으로 10m 정도에 있는 '교동 2가의 건강원(현재는 여관)과 성심여고 운동장 끝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전주 감영과 옥 터
윤지충과 권상연은 중진영에서 29일 밤을 지낸 뒤 1791년 10월 30일 아침 감영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순교일인 11월 13일(양력 12월 8일)까지 감영과 감옥을 오가면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전주 감영은 지금의 구 전북 도청 자리(현 남부종합병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감영 옥은 지금의 전북대 의과대학 치대병원 자리(좌옥)와 경찰서 자리(우옥)에 있었다. 바로 이곳이 윤지충과 권상연이 심문과 형벌을 받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었다.
전주 감영 가운데서도 감사의 청사인 선화당(도청 자리)에서 그들이 주로 신문을 받았다고 생각되는데, 현재 그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동북쪽에 있었다고 하는 현존의 객사(즉 豊沛之門) 위치를 통해 그 자리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 치명터인 풍남문과 전동 성당
감영에서 14일간 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윤지충과 권상연은 11월 8일자로 된 임금의 사형 명령이 내려온 다음 13일 신시(申時 : 오후 3시-5시 사이)에 풍남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그 치명 터인 풍남문 밖이 현재의 전동 성당 자리로 순교의 역사적 기념터이다. 그리고 5일간 효수경중(梟首警衆)한 곳이 풍남문이다.
◆ 윤지충 · 권상연의 무덤
윤지충 · 권상연이 치명한 이후 9일 만에(즉 1971년 11월 22일) 친척과 친구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다고 한다. 일단 그들의 무덤이 같은 곳이었다고 추정할 때, 윤리강상죄로 참형된 그들의 시신은 후손들이 있던 권상연 집안의 묘역보다는 후손들의 반대가 없을 윤지충 집안의 묘역이 더 적당했을 것이다. 즉 하막현리 일대에서 매방골에 이르는 지역에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다고 생각된다(차기진 박사).
▒ 윤지충 일기(尹持忠日記)
윤지충의 옥중 수기(獄中手記). 1791년 진산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교한 윤지충이 자신의 천주교 봉행과 체포 후의 신문 과정, 옥중 생활 등을 기록한 한문(漢文) 수기로 윤지충의 순교 후 교우들에 의해 번역 필사되어 널리 읽혔다. 이 수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관변 측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의 교우들로부터 압수한 서적 목록 가운데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라는 서명(書名)으로 들어있으나 현재까지 한문본, 한글본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고, 다만 달레(Dallet) 주교가 저술한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 e, Paris 1784년)》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 순교자
◆ 복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