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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그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보다는 죽음을!”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사비오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을 눈여겨봤을 것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
1855년 6월 24일 돈보스코가 마흔살 되던 해 영명축일 때의 입니다.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성극이나 성가, 합창이나 시 낭송 등, 정성껏 축제를 준비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지극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내게 주세요. 뭐가 됐든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수많은 종이 쪽지들을 들고 당신 사무실로 돌아온 돈보스코는 하나 하나 쪽지를 열어봤습니다. 어떤 아이는 작은 성모상을 신청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운동화를 적었습니다. 짓꿋은 한 아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콜릿 100킬로 그램’
수많은 쪽지들 가운데 유난히 돈보스코의 눈길을 끄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가 쓴 것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크게 감동받은 돈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비오! 성인이 되는 비결을 네게 선물하고 싶구나. 자,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게 지내는 것이다. 둘째, 네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 공부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셋째,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거라. 설령 네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항상 네 친구들을 도우렴.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천사표였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가 선물로 주신 세가지 성화의 비결을 마음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일 충실히,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그 결과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성인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15세였던 1857년 3월 9일 병사(病死)한 그는,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이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장미, 바이올렛, 백합, 용담꽃, 밀이삭이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다발을 신부님의 아들들에게 보여주세요. 장미는 사랑을, 바이올렛은 겸손을, 용담꽃은 회개를, 백합은 순결을, 밀이삭은 성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돈보스코, 그럼 안녕히!”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세례를 통해 성화의 길로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도 ‘죄 보다는 죽음을!’이란 굳은 각오를 세우면 좋겠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도 성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심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우리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
복음: 마태오 5,27-3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순결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구약은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천할 수도 없고, 실천하더라도 위선적으로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런던입니다. 바질 홀워드(Basil Hallward)는 나이 든 화가입니다. 그는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의 인상적인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도리안은 젊고 아름답고 돈도 많습니다. 그것을 오래 남겨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림을 본 헨리 워튼 경은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냉소적인 귀족입니다. 그는 도리안에게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즐기라고 충고합니다. 도리안은 헨리의 말을 듣고 앞으로 잃어갈 자기 아름다움을 미리 아까워합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질투합니다. 초상화는 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와 자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초상화는 늙어가는데 도리안은 초상화처럼 그대로 젊음을 유지합니다. 도리안은 자기 아름다움을 통해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 와중에 그를 좋아했던 여인이 자살합니다. 그래도 도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다만 런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도리안은 자기의 비밀을 알고 초상화를 지닌 화가 바질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바질을 살해합니다. 초상화까지 없애기 위해 칼을 댔더니 초상화가 원래 그대로 젊어지고 도리안은 그 초상화의 나이 든 추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가 찌른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도리안은 외모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추해지는 그림은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는 육체에 반대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외모에 치중하면 마음이 죽고 마음에 치중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성령의 관심사”로 번역하기보다는 “영의 관심사”로 번역했어야 옳습니다. 영이나 성령이나 다 마음에 관계됩니다. 마음 안에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믿음을 넣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믿음이 어떻게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의 정결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욕망하던 여인이 나의 누이동생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혹은 ‘엽기적인 그녀’에게서처럼 성전환자라면? 아마 올라오던 욕망이 바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영화 ‘더 몽크’(2011)는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의 1796년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도미니크 몰(Dominik Moll)이 감독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주인공 암브로시오는 어렸을 때 수도원에 버려져 처음부터 수도원에서 자라며 성인으로 추앙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결국엔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범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여동생임이 밝혀집니다. 그러자 그는 곧 회개하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택합니다.
욕망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데 두 발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라고 하십니다. 그 정체성만 가지면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성적인 욕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정결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33-37: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이며,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전 세계 수억 명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은 무엇일까요? 단연 일등은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2021년 통계를 보면 3시간이 넘습니다. 1년 중에서 한 달 이상인 45일을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긴장이 풀어진다고 합니다. 화면에 집중할수록 사고 활동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어진다고 해서 내적 안정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생각도 들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텔레비전 생각과 이미지를 내 안에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채널을 계속 돌립니다. 무의식적이 되고 수동적이며 내적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스마트폰과 동영상 서비스인 OTT(Over The Top)의 이용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재미와 흥미를 주지만, 역시 내적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주는 내적 성장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고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남들처럼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굳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처럼 살아야 할까요?
참 행복을 찾아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남들처럼이 아닌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시작은 행동에서일까요? 아니면 마음에서일까요? 당연히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죄를 품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저지르는 잘못된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면서 오른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라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이 주는 가짜 위로와 평화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에게 주님께서는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오늘의 명언: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랄프 왈도 에머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열왕19,12)
고난의 세찬 바람이 지나가고
탄식으로 무너지는
마음의 지진과
무작정 타오르는
열정의 불이 지나가고 나면
비로소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네.
그 때에는 우리도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고
주님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엘리야는 불타는 열정의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도
모세와 함께 등장하는 구약의 예언자입니다.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 속에서
유일신 개혁을 위해
선봉에 섰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하는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엘리야를 통해
주님께서는 강력한 기적 현상이 아니라,
항상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그 다가오심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오늘 더운 햇살을 이기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하루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말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