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만 가득 -
☆ 2016년 다해 2월29일 월요일 [(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수도회] 발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영성생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열왕 5,1-15ㄷ
† 복음 루카 4,24ㄴ-30
◈ 오늘의 묵상
믿는다는 것은 과연 쉬운 일일까요, 아니면 어려운 일일까요?
쉽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쉽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것이
믿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구했던 것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겠지요. 엘리사는 그에게,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나아만의 부하들이 말하듯이 이것은 아주 쉽고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쉽게 그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에 더 크고 훌륭한 강이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요르단 강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믿음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연구를 해야 하고
고민을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명백함을 보고 나면 흔들림 없이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믿음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강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단순한 받아들임을 요구합니다. 신앙의 이치와 논거를
아무리 설명해 준다 해도, 최종적으로 마지막 한 걸음은 결국 개인의
결단입니다. 이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은, 자연 과학의 이론처럼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자렛 사람들에게도 그 결단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믿지 않을
합리적 근거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들에게 기적이 믿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요?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적을 보여 주시기를 청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마음의 부자가 되어야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15ㄷ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4ㄴ-30
많은 이들이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부자로
사는 방법을 두 가지 정도 찾을 수 있지요.
첫째는 더 많은 부를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욕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방법은 우리의 힘으로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대기업에서 근무하시다가 퇴임을 하신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대기업을 다니셨기 때문에 바쁘기는 해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부자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퇴임 후, 시장 구석의 선술집에서 빈대떡이나 순대 등의
저렴한 안주와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잔으로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동네 어르신들에게 안주와 막걸리 대접을 하면 얼마 되지 않는
액수로도 자신이 큰 부자가 된 것 같다고 하십니다.
부자가 되는 것, 생각해보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하긴 미국의 폴
사이먼스라는 경제 학자는 행복이란 소비(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라고
합니다. 행복이 커지기 위해서는 소비가 커지거나 욕망이 작아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소비를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욕망을 줄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행복을 가득 누리는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부자보다는 마음의
부자가 되는데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고향을 찾아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고을 밖 벼랑 끝까지 내몰려
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유다인들이 구원의 길에서 배제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옳게 살지 못하면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들은 무조건 자기들이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찬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떠나가십니다.
우리 역시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기는 무조건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남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특히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하는 모습 등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게 벼랑 끝으로 내몰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만이 누리려는 욕망만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안에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이런
모습들을 제치고 그 자리를 가로질러 떠나실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권력 속에서 찾고, 어떤 사람은 학문에서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유흥에서 찾는다. 정말로 행복 가까기에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이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블레즈 파스칼).
어제 저녁에 강의를 했던 수지동천 성바오로성당.
기도는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톨스토이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깊은 광산에 파묻힌 사람, 빙하에 갇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 바다
한가운데 홀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 독방에 갇혀 고독 속에 쇠약해진
사람, 집에서 죽어가는 사람,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가 없다면 이런 남은 생을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힘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도하기
보다는 포기하는 길을 선택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솔직히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보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되뇔
때가 많습니다. 즉, 그냥 생각나는 대로만 기도합니다. 아니면 기도서에
있는 글을 읽음으로 그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정말로 내게 필요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정리되지도 않고
구체화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한 아이가 떼를 쓰면서 울고 있습니다. 엄마는 “왜 우니? 뭐가 문제인데?”
라고 묻습니다. 그때 아이가 “몰라요.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엄마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신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이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엄마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 지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게
필요한 것이 정확하게 알고 있고 이를 기도한다면 주님께서는 100%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기도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분명합니다.
눈이 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15ㄷ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4ㄴ-30
복음화 학교 공동체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하면서 늘 마음에
새기는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당신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이 겸손하면, 내 마음이
아름다우면 작은 돌과 들판의 꽃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거칠고, 내 마음이 이기적이면 나자렛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갈릴래아 호수에서도,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도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여행의 피로가 함께 할 것이고, 함께 하는 이들의 허물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성지에서 느끼는 감동도 컸지만, 함께 하는 분들의 기도와 회개 그리고
그분들의 찬미와 감사가 제게는 더 큰 감동이었습니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여
마음을 열고 세상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릇을 바로
놓으면 빗물이 그릇에 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만하여 마음이
닫히면, 그릇을 거꾸로 놓은 것 같아서 어떤 빗물도 그릇에 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아름다운 시상을 떠올립니다. 작곡가는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보석을 이 세상에
숨겨 두셨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보석입니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보석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성공하는 비결, 돈을 많이 버는 방법,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
직장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몇 가지로 간추려지는 것을 봅니다. 어릴
때, 교실의 급훈에 쓰여 있던 말들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입니다. ‘인내,
성실, 양보’와 같은 말입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이고,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 있는 뫼입니다. 인생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은 몰라서가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길이 있지만 가지 않았고, 진리를 외면하였고,
생명을 주는 분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신앙의 길도 멀고
험난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걷다보면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느끼며, 세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2월이 닫히고 3월이 열리는 날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나 지금이나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예나 지금이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가까운데 있어서 늦게 오기 일쑤지요.
성당 옆에 사니까 신앙에 관심 없고 학교 가깝다고 공부 잘하나요?
자연과 함께 살면서 고마움 모르고 하늘을 늘 본다며 관심 없네요.
잘못이나 실수를 알려주면 화내는 것,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죠.
감사하고 고맙다는 마음 지닐 줄 모르고 자기 잘났다 자랑만 해요.
진리, 예수님, 하늘보다 자기가 잘난 줄만 아니 신앙전달 힘들어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발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영성생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루카 4,24ㄴ-30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루카 4,28)
발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는 영성생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합니다.”(4,22) 그러던 그들이
“엘리야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고,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환자 나아만이 깨끗해졌다”(4,26-27)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발끈합니다.
왜 그들은 잔뜩 화를 냈을까요? 분노란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결과 생기는 정서를 말합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화를 낸 까닭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와 욕구를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생각과 욕구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목수의 아들로 평범하게 자랐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때의 경험 속에 예수님을 가둬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구원을 말하고 더구나 자신들의 메시아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자신들만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독한
배타주의와 편견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해방이나 현세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폭력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편견과 배타주의는 자기폐쇄를 초래하고, 자신의 기대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 분노하며 그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분노는 그들이 상처받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상처치유와 도움을 하느님이 아닌
자신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그릇된 편견과 선입견, 배타주의적 사고, 욕구 충족이 되지 않을 때
분노하곤 합니다. 사실 분노는 우리 자신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힘인
동시에, 나의 내면과 영적질서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자신을 잘 돌보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영적 성숙에
이르려면 분노를 잘 다뤄야 합니다.
먼저 분노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늘 자신을 애정 깊게 살피고,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황을 하느님의 눈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다’, ‘해야만 한다’,
‘비합리적 사고’, ‘과잉일반화의 오류’ 등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맞춰가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들과 달리 분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성숙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분노를 잘 처리하려면 분노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분노 감정을 책임질 사람은 본인임을 인정하고,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고 관점을 바꿔 이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세속적 욕구나 가치 추구, 근심걱정으로 짜증내는 습관을 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편견과 선입견, 배타적 사고와 나만의 기대와 욕구를 앞세워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신을 돌보는
넉넉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2열왕 5,10)
2월의 마지막 날이군요. 한달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봄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3월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되듯이요. 새로운 마음으로 3월을 시작합시다.
저는 고백성사 보속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보통 줍니다.
엄청난 죄인(?)인데도 주모경 한번 바치라고 하고 미사 전이면
미사 때 누구를 기억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간혹 어떤 분들은 되묻습니다.
"보속은요?" "그게 보속이예요?"
보속을 적게 하면 죄가 사해지지 않고 엄중한 보속을 해야만
죄가 사해질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되고 희생도 많이 해야 하고
헌금이나 미사예물도 많이 내야
그에 상응하는 축복과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오늘 치유받은 나아만도 그러네요.
무슨 짓을 해도 그 어떤 용하다는 의사도 치료할 수 없었던 나병이기에
엄청난 수고를 해야만 기적같이 나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엘리사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자기를 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애개... 보잘 것 없는 요르단 강에서
일곱번 몸을 씻기만 하라네요.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자기나라에 더 크고 멋진 강이 있는데
거기서 씻고 말지...
치유와 죄사함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보속과 봉헌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고
자비의 하느님을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자비의 하느님을 고백함으로써
치유와 죄사함의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 27)
나자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오래된 신념을 깨뜨려 주시는
예수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신념의 테두리안에 우리의 믿음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신념마저 내려놓을 때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믿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믿음의 길이고 믿음의 길은 사람의 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또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인 그 어떤 길도 끝까지 갈 수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사람의 길은 겸손되이 주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길입니다.
이 사순시긴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믿음이 필요한 우리들의 여정입니다.
이기적이고 잘못된 우리의 믿음을 수정하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특정한 이들만 사랑하다는 식의 믿음은 분명 잘못된 믿음입니다.
특권의식이 아니라 선민의식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고 믿음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에서 벗어나 올바른 믿음을 자라게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2월29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 4,24ㄴ-30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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