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을 부정하고 싶어서일까. 언제부턴가 사진 찍히는 게 싫어졌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더는 즐겁지 않다. 여행 가서 주로 풍경 사진만 담아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카톡에 올라오는 동창생의 모임 사진을 보면 영락없이 할아버지 모습이다. 다름 아닌 내 친구들이다. 나도 저토록 늙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리라.
갈수록 장모님 등이 휘는 모습이다. 장모님 재킷을 사드리기 위해 L 아울렛에 갔다. 앞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모녀를 보니 장모님 등이 구부러져 키가 작아 보인다. 골다공증으로 뼈에 힘이 없어 허리가 휘고 있다. 오래전 콜라를 많이 드시는 것을 보아왔다. 그때 말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게다가 십여 년 전에 다락방에 올라가다 떨어진 게 주요 원인이다. 삶의 무게를 짊어진 말년의 인생 모습을 보는듯하여 가슴이 아린다. 증손자의 사진과 동영상을 핸드폰에 저장하여 놓고, 보고 즐거워하며 잠시나마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으신다.
잘 자라고 있는 손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 눈, 코, 귀, 입이 언제는 아빠를 닮았다가, 다른 때는 엄마를 닮아 보이기도 한다. 영상 통화에서 미소 짓는 얼굴의 표정과 윙크를 날리는 눈을 좋아한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댄스”라고 하면 춤을 추며 재롱을 떤다. “사랑해요”란 말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서 하트를 만들어 보내는 반응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통화가 끝날 때 “안녕”하면, 손을 흔들며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다. 돌아앉아서 오랫동안 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커서 공부는 잘하려나 하고 섣부른 기대가 앞선다.
내 인생의 프로필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프로필은 측면에서 본 얼굴의 모습이다. 손자처럼 앞모습을 보이던 나의 어린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다. 나의 청춘도 지나갔고,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보낸 세월이 나의 프로필이다. 지나간 프로필을 변경할 수도 없고, 앞으로 새롭게 더 추가할 것도 별로 없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줄 뒷모습만 남았다. 나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고 싶다.
뒷모습은 진실하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사진 에세이집 <뒷모습>의 첫 장에 작가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얼굴에 표정을 지으며 여러 가지 몸동작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앞의 모습이다. 사람의 앞모습은 꾸밀 수 있고, 얼굴은 표정으로 인하여 변한다.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있어 내면의 진정한 생각을 읽지 못할 때도 있다. 앞모습은 참모습이 아닐 수 있지만, 뒷모습은 거짓 없이 정직하다.
부임 초기 뒷모습만 보여준 ‘칠판 맨’이었다. 당시 H 여대에 부임하여 첫 강의의 순간이 안개가 피어오르듯이 떠오른다. 백 개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웠다. 인생의 황금기인 그들 앞에 바로 내가 서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너무나 맑았으며 피부는 생생하였다. 그 젊음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웠던 이유가 다름 아닌 나의 젊음의 증표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별명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지만, 그때 학생들에게 나의 뒷모습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궁금하다. 퇴직할 때쯤에는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변해있었다.
모멘토 모리(Momento Mori)의 의미를 새길 때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인간사에 무한한 것은 없다.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좀 더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남겨질 뒷모습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남을 위하여 살 필요는 없지만,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고 싶다. 퇴직할 때는 여러 가지의 감정이 교차하였다. 그중에서 학생들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해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지나간 25년의 세월 속 누적된 내 삶의 단면이 학생들에겐 어떤 기억이 되었을까. 나에게 던져준 ‘열정과 유머’란 단어로 머리 뒤통수가 간지럽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내가 남긴 뒷모습이야말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나의 참모습이 아닐까.
야누스와 같이 두 얼굴을 가진 이중적 인간은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남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다르다. 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의 다른 면을 보았을 수도 있다. 원하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야누스의 두 얼굴이 되기에 십상이다.
올해의 마지막인 12월이 다가오고 있다. 한 달이 지나면 새해가 된다. 영어에서 1월(January)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나간 해를 뒤돌아보고 새해를 바라보는 야누스의 시간이다. 나의 참모습을 생각해보고, 새해에는 두 얼굴이 닮아지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다.
나의 참모습은 내 삶의 향기 같은 것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좋은 향기가 날수도 나쁜 냄새를 내뿜을 수 있다. 사람의 품격이 그 사람의 향기이다.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빚어내는 자태가 아닐까. 나이가 들어 세월의 흔적은 깊어지더라도 삶의 향기는 더욱더 짙어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말한다. “이름이란 게 무슨 소용인가?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도 똑같이 향기로운 게 아닌가?” 나의 말과 글, 품격이 나의 향기로 남는 참다운 뒷모습이리라.
뒷모습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에어로빅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뒷모습이 아름답고 젊음이 솟아난다.
건강한 등이 아름답다. 등이 아름다워야 뒷모습이 아름답다. 건강한 등뿐만 아니라 내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뒷모습도 함께 아름다워야 하겠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디 한번 늙어 보자.
(전용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