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되면 아버지는 조롱박 씨앗을 심으신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위에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그 따뜻한 온실 속에 고추 모종을 심고 자투리 공간에는 언제나 아버지는 종이컵에 흙을 담고 조롱박 씨앗을 한 두 개씩 밀어 넣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하셨다.
봄이 되면 집 담장 아래를 둘러 가며 퇴비와 물을 주어 조롱박 모종을 심으시고 다시 그 위에 온기를 더하기 위하여 비닐을 덮어 두었다.
그러면 4 ~ 5월이 되어서 제법 큰 박 모종이 자라게 되고, 아버지는 잊지 않고 겨울날 해 두었던 대나무를 그 옆에 꽂아 두어 그것을 붙잡고 박넝쿨이 되어 온 집안 가득 하얀 박꽃을 피워 보시는 걸 유일한 여름날의 낙으로 삼으셨다.
어느 해인가 나도 집에서 조롱박 모종을 갖고 와서 화분에 심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정성들여 키워 보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영 잘 자라주지 못하더니 꽃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죽고 말았다.
박넝쿨이 자라면 노끈으로 묶어 주고 또 주렁주렁 조롱박도 달리면 그 옆에 작은 오두막도 만들어 두어야지 하고 내심 동심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며 기분이 들떠 있었지만 나의 앞서가는 성격 탓이었을까? 나는 끝내 아버지처럼 빙그레 웃음 같은 박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롱박꽃은 어쩌면 아버지처럼 수줍음을 많이 타서인지 낮에는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고 밤이 되어서야 활짝 피는 습성이 있다.
아버지도 성격이 소심하셔서 누구 앞에서든 쉽게 말문을 열지 않으시고 조용 하시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박꽃을 좋아하셨고 집 전체를 보름달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박꽃을 보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곤 하셨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아마도 박처럼 환한 얼굴을 그려보며 어머님을 생각하셨기 때문일까?
그러신 아버지가 몇 년째 간경화를 앓으시며 몸져 눕기를 여러 번 하신 후 올해 다시 그 조롱박 씨앗을 심으셨으니 그 따뜻하고 심성 좋으신 아버지가 새로운 힘과 용기를 내심이 틀림없어 보였다.
가을이 되면 아버지는 또 예전처럼 박을 거두어들여 겨울날 기나긴 밤을 표주박 만들기에 전념하실 것이다.
조롱박을 광주리 가득 담아 사랑방에 모아두고 날마다 조금씩 꺼내어 군불을 지피시며 소죽 솥에 넣어 푸욱 삶는 일을 하시겠지.
그 소죽 솥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박 냄새와 소죽 냄새가 나는 그 어떤 향기로운 냄새보다도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다 삶은 조롱박은 숟가락으로 얇은 껍질을 벗기고 난 후 새벽마다 일어나 그 박을 가운데에 실로 묶어 색연필로 표시를 하고 작은 칼과 망치를 들고 석공이 돌을 조각하며 섬세하게 내리치듯이 아버지도 조심스럽게 탁 - 탁 - 탁 - 박을 타셨다.
때로는 올망졸망한 호리병 모양으로 반듯하게 생긴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영 못난 것도 있지만 아버지는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그 모양 나름대로 특성을 잘 살려 반으로 자르기도 하시고, 또 더러는 조금만 자르기도 하면서 각 모양의 생김생김을 이리저리 돌려 보시며 만드셨다.
아들 셋 자식을 키우며 어느 아들 하나 귀하지 않은 자식이 없이 정성을 다했듯이
아마도 아버지도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다 귀하게 여김은 그 심성이 고우시고 따뜻하시기 때문이리라.
실톱으로 쉽게 박을 탈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작은 칼로 조심스럽게 박을 타셨는데 아마도 당신 자신만의 기술이 있는 듯해 보였다.
겨울날 새벽마다 들리는 그 작은 박타는 울림의 소리가 청아한 목탁소리 마냥 마을의 온 정적을 깨우곤 했다.
아버지는 뛰어난 예술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표주박 만드는 박공예인도 아니지만 그 표주박
만드는데 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과 정성을 다하셨다.
갈라진 표주박은 그 속에 씨앗을 빼서 내년에 다시 심을 것으로 분류를 하고 표주박은 구들 목에 잘 말렸다가 노랗게 색이 베이면 예쁘고 올망졸망한 조롱박에 니스로 칠을 하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색실로 손잡이 부근에 장식을 하면 완성품이 되었는데, 다 만드신 표주박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시골 5일 장날 가셔서 단골 대폿집에도 주고 또 먼 친지들이나 친구분들을 만나면 하나씩 선물로 주곤 하셨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냥 손수 만드신 물건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드리는 그 기쁨만으로도 충분한 아버지의 베풂의 삶을 나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지 싶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들 하지만 조금씩 나누어 드렸던 아버지의 따뜻한 씀씀이가 어쩌면 풍요한 돈보다도 마음이 가난하기에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마음을 비웠기에 부처님의 가슴을 지니게 되었다는 어느 글귀를 아버지는 먼저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아버지가 만드신 표주박은 아마도 아직 그 장터 대폿집에서 인심 좋은 시골 할아버지에게 술을 퍼주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것은 어느 산골 옹달샘에서 젊은이들에게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걸려있는 것도 있으리라.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지면 큰 인심 쓰신 덕분에 얻어 마신 막걸리 기운에 못 이겨 잊었던 노랫가락 한 소절씩 부르며 마을 어귀로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조금은 까칠한 수염으로 내 얼굴에 입맞춤을 하시고는
"너도 크면 박꽃처럼 하얗고 맑게 살아야 한다”
“예, 아버지.”
술기운에 하신 그 말씀이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조금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 그 좋아 하시던 약주도 마음대로 못 드시고 남산만큼 불러오는 복수 찬 배를 움켜쥐고 병원으로 다녀야하는 나날들을 보면서 나의 마음이 자꾸만 저려옴은 왜일까?
박꽃처럼 순박하시고 마음 따뜻한 아버지의 생애가 여름날 박꽃처럼 시들어 가지는 않을까?
마음이 아프다.
조롱박이 작은 대나무를 붙들고 넝쿨이 되어 올라가 지붕 가득 박꽃들을 피웠듯이 아버지도 이제 아들의 손을 잡고 희망의 꽃을 피우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그리고 겨울날 사랑채에도 박타는 소리가 언제까지고 온 동네 맑고 맑게 울려 퍼질 수만 있다면 ......
오늘 이 봄날에 간절한 바람 하나 박꽃처럼 아름다운 꽃등불을 피워본다.
첫댓글 마음은 소리내지 않아도 안다지요....아버지의 마음을 알수있는 맑은 그릇이 된 아드님의 이 글을 보신다면 오냐...하시며 흐뭇해 하실거 같애요^^ 저두 기도 할게요...아들의 손을 잡고 희망의 꽃을 피우실 수 있도록...오래도록...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