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와 구유>(Swaddling Cloth & Manger)
아기 예수 탄생 장면에 강보(襁褓)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강보로 쌌고, 천사도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있다고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아기가 구유에 누워있다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강보에 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천사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 두 가지 표적이 충족되어야 그가 ‘구주’라고 일러 주었다(눅 2:12).

세계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대인 강보, 1934년, 이스라엘
유대인의 강보는 사실 단순한 포데기가 아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 레위 아기의 강보는 길이가 285cm나 되며, 그 끝에 107cm 끈이 추가로 달려 있어서 전체 길이는 392cm이다. 이렇게 긴 강보로 갓난 아기를 감싸면 아기는 마치 온 몸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된다. 15세기에 그려진 ‘성전에 드려지는 아기 예수’라는 그림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아기의 오물 흔적이 선명한 강보에는 히브리어로 ‘Yekoteel Hendel Halevy가 1934년 한 좋은 날에 태어나다. 하나님이 토라(성인식)를 위하여, 결혼을 위하여,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하여 그를 기르실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밑에는 강보를 준비한 가족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이 강보에는 인생의 주요 기념일인 아기 생일이 적혀 있지 않다. 아기는 정확하게 어느 날 태어날 지 알 수 없고, 강보는 출생 전에 미리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비 엄마는 태교를 하면서 강보에 아기 이름이나 축복문을 수놓았다고 한다. 박물관 소장 강보는 이러한 전승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는 강보에 무어라고 수를 놓았을까? 위에서 말한 전승대로라면 그는 천사 가브리엘이 알려 준 ‘예수’라는 이름을 수놓았을 것이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를 먼저 찾아내고, 그 다음에 강보를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강보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가 바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구유가 청빈과 겸손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예수’라는 이름을 수놓은 강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강보는 구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7일 동안 강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는 2주일(호크마 주석) 또는 40일(레 12:2) 동안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잘 보관하다가 성인식 때 토라 묶는 끈(gartl)을 만들거나 결혼식 때 후파(천막)에 매달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현대 유대인들은 더 이상 전통 강보를 사용하지 않으며, 보수적으로 살아가는 예루살렘 메아쉐아림의 한 할례식에서도 일회용 기저귀 외에 강보는 보이지 않았다.(www.segibak.or.kr‘할례식 참관기’ 참조)
헬라어 ‘스파르가노오’는 ‘강보로 싸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하탈’은 붕대와 관련이 있는 단어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기를 강보로 돌돌 말아 추위와 사고뿐 아니라 세균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아기를 돌돌 감싼 본래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사탄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탄은 원을 뚫지 못한다’는 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러한 관습은 할례식 전날 밤 가족들이 아기 주변에 빙 둘러 앉아 밤샘을 하는 것, 결혼식에서 신부가 신랑 주위를 일곱 바퀴 도는 것, ‘호라’ 민속춤을 출 때 원을 그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유대인들은 왜?」1-13, 2-25참조).
강보는 환영의 뜻도 가지고 있다. 에스겔서 16장 4절은 환영받지 못한 예루살렘을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고”라고 표현하였다. 아가페 성경사전도 강보를 “합법적으로 낳아 받아들여진 (그러므로 보호를 받아야 할) 유아를 단단히 감싸는 가느다랗고 긴 옷조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