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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국 대외 정책의 3대 핵심 축 중 하나인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는 문화, 타국과의 공유 가치, 국가 이미지를 비롯한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증진하는 것을 중점 목표로 삼는다(MOFA, n.d). 한국은 1990년대 초부터 세계에 한국 문화를 홍보하는 문화외교 전략을 수립해 이를 국가 위상 제고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Barden, 2019; Kang, 2015). 한국의 문화외교는 문화, 정보, 인적 교류 등의 외교 활동에서 한국의 문화 자원을 활용해 소프트파워를 증진하려는 노력의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 정부가 민간 문화 산업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추진한 노력의 결과, 현재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파워는 세계 각지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한류 열풍(Korean Wave)이다. 서울대학교 이근 교수는 소프트파워 자원의 일종인 한류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식 기준과 행동 양식, 소비 행태, 패션, 음식 등을 각지로 퍼뜨리는 데 일조함과 동시에 세계 청중의 관심을 한국으로 모으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평가했다(Lee, 2009; p.135).
한국-라틴아메리카 관계
라틴아메리카는 1950년대부터 이미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 왔지만, 양 지역 간 교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다수의 양자 회담 및 국빈 방문 행사를 가졌고, 칠레(2004년 발효), 페루(2011년 발효), 콜롬비아(2016년 발효), 중미 5개국(2021년 전체 발효, 대상국: 파나마,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경제적 연계 강화에도 힘썼다.
아울러 한국은 이명박 및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국제사회 중견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대외 관계를 다변화하는 데 힘썼으며, 이러한 전략하에서 한국-라틴아메리카 관계 개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한국 인지도 강화 정책을 함께 실시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대통령 방문 행사, 지역별 기구와의 협력 사업 및 지역 간 포럼, 각국 주재 대사관과 문화원 활동을 바탕으로 라틴아메리카 대중에게 한국을 홍보하는 사업을 전개했다(Faure, 2017).
지금까지 한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문화외교를 주제로 삼은 소수의 학계 연구 중 대표적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스카가(Uscaga, 2017)는 한국 음악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상황을 기회로 삼아 멕시코 대학 기관에서 한국의 문화, 사회, 정치에 대한 이해 증진 사업을 새로이 추진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문화외교 전략을 분석했다. 또한 헤르난데스(Hernández, 2018)는 멕시코에서 이루어지는 한글 교육 및 홍보 사업을 한국 소프트파워의 발현 사례로 보았고, 페드라사(Pedraza, 2014)는 2011~2013년 이명박 정부가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홍보하고 한국산 상품의 수요를 늘리기 위해 콜롬비아에서 추진한 한국 교육·문화 상품 수요 증진 사업을 한국의 문화외교 전략 측면에서 분석했다. 이들 연구는 한국 정부가 국익 보장과 한국식 가치 확산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떠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한편 한국은 본고의 분석 대상인 칠레와 1962년에 수교하고 1974년에는 현지 주재 대사관을 개설했다. 특히 양국 모두가 민주적 가치 증진, 인권 존중, 시장 개방성 증대라는 기조를 내세우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한-칠레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긴밀해졌고, 1998년부터 추진되어 2004년에 발효된 한-칠레 FTA는 한국이 맺은 최초의 FTA이기도 하다. 또한 2021년에 와서는 정의용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과 안드레스 알라만드(Andrés Allamand) 당시 칠레 외무장관이 디지털 경제, 인프라, 기후변화, 녹색 수소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이처럼 양국 정부는 지금까지 한-칠레 관계 증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한국이 칠레에서 어떤 형태의 문화외교 사업을 전개하는지, 그리고 한류라는 소프트파워가 칠레 대중의 한국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한류와 한국의 소프트파워
오늘날 한류가 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학계에서 지금까지 수행된 연구에서는 한국 상품이 개별 국가의 문화를 초월하는 가치를 함축한다는 점, 그리고 여러 한국 기관이 역내 문화외교 확대에 노력한 점을 한류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거둔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한류가 단순히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의 문화적 입지를 개선하는 데 활용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자체적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독자적 현상으로 발전한 상태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류가 오늘과도 같이 세계 전역에서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며 중동, 러시아, 남미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 데에는 정부 이외에 민간부문의 역할도 컸다(Kim, 2011).
또한, 현재 한류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점차 더욱 큰 성공을 거두며 입지를 다져가는 것은 사실이나, 지역적 특성상 일부 도전요소는 여전히 한류가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첫째,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소비는 미국과 유럽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이 중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로 엄청난 양의 자국 문화 상품을 수출하는 국가이고, 유럽은 과거 식민지 역사로 현지 원주민 문화와 유럽 문화가 동화됨에 따라 라틴아메리카와 많은 문화 및 가치를 공유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비록 한국의 문화 상품이 현지에서 점차 인기를 높여 가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국 및 유럽 상품에 비해서는 상대적 수요가 여전히 적은 편이다.
둘째, 한국에게 있어 라틴아메리카는 언어적 유사성, 지리적 접근성, 문화적 친밀성 면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아울러 라틴아메리카에 소재한 33개국은 일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민족, 문화, 언어적 측면에서는 상이한 점도 많아서(Han, 2017; Min et al., 2019), 한류 상품이 각국에서 구가하는 인기도 개별 국가의 맥락 및 현황에 따라 상당한 격차를 나타낸다(Feigenbaum, 2001).
한류 열풍이 아시아권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전반적 인식을 바꾸어 문화 상품 수요의 근본적 증대나 장기적 관심 확보라는 궁극적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다만, 한류의 성공이 동방과 서방 간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 데 기여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점에서 필자는 한국 문화 상품 소비가 한국에 대한 칠레인의 인식과 선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2022년 1~3월 칠레인 20명을 대상으로 정성적 조사의 일환으로 준구조화 인터뷰(semi-structured interview)를 수행했으며, 조사 대상자로는 칠레 본국 거주민 10명, 그리고 한국에서 최소 6개월 이상 거주 중인 칠레인 10명을 선정했다.
상기 인터뷰를 통해 필자가 답해보고자 한 핵심 질문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한국 문화 상품 소비가 아시아 및 한국에 대한 지식 증대에 도움을 주는가? 둘째, 한류 문화 상품 소비가 대학 교육, 여행, 해외 체류 대상지로서 한국이 지니는 매력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셋째, 한국에 실제로 거주한 경험이 한국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 아래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칠레인이 인식하는 아시아와 한국
칠레에서는 아시아 출신 개개인의 국적과 문화를 구별하지 않은 채 이들 모두를 ‘중국인’으로 뭉뚱그려 지칭하는 경향이 발견된다(Min, 2021). 이와 같은 현상에 일조하는 요인으로는 칠레인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문화 상품이 아시아 각국의 문화와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아시아 국가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다는 점(Min, 2020, Chan & Montt Strabucchi, 2021), 그리고 칠레의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아시아권 문화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키하다(Quijada, 2022)의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권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칠레인들은 기존의 단순한 인식을 전환해 아시아 지역 각국의 문화 및 사상적 차이를 보다 잘 인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칠레인들의 한류 상품 소비는 호기심이라는 동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J팝 등 일본 문화 상품을 소비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한국 대중문화를 새로 배우는 데에도 비교적 열린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된다. 이 측면에서 일본 문화 상품은 서방이 아닌 아시아적 문화에 대한 칠레 사회의 초기 장벽이나 편견을 깨뜨리는 데 일조함으로써 한류가 비교적 수월하게 확산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이 수출하는 상품이 서방 문화와는 사뭇 다르면서도 완전히 이질적이지는 않은 성격을 띤다는 점도 칠레 대중이 한국 상품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한국이나 아시아 문화에 관심을 지닌 모두가 한국 여행이나 장기 체류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필자의 인터뷰에서도 본국 거주 칠레인 응답자 일부는 이미 한국 여행 경험이 있고 추후 재방문 의사도 표명했지만, 나머지는 아직 구체적인 한국 방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인터뷰에 참여한 한국 체류 칠레인들은 이미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통해 한국에서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타국 이주라는 과정에 수반되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했고, 이들 중 다수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어를 미리 공부하거나 한국 기관이 후원하는 각종 행사에 참여했다. 또한, 이들은 장학금 제공, 단기 체류 후원, 한국에 대한 관심 증진을 위해 현지 학생에 많은 기회와 유인을 제공하는 세종학당이 자신의 한국 이주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이들에게 있어 세종학당은 단순한 어학 교육 기관을 넘어 유사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이자 한국 문화를 보다 심도 있게 탐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장소로 인식된다.
칠레인 응답자들이 한국 이주를 결정한 배경
한국 체류 칠레인 응답자들은 개인적 사유 이외에 대학 교육이나 한국어 공부를 주요 이주 동기로 제시한다. 또한 이들 중 다수가 실제로 한국 이주를 결정한 데에는 한국 기관이 제공하는 장학금이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실제로 응답자 중 대부분이 외부 지원을 받아 한국에 왔고, 이주 경비를 자비로만 충당한 사례는 많지 않다. 특히 응답자 중 일부가 만약 세종학당이나 정부초청장학제도(GKS, Global Korea Scholarship)가 제공하는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는 점에서 이들 기관의 활동은 칠레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고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한국 대중문화는 비록 한국 방문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었지만, 한국에 대한 흥미를 높임으로써 방문 의사를 만들어내는 간접적 요인으로 기능했다. 인터뷰 응답자 대부분은 한류 상품을 소비하기 이전까지 별다른 한국 관련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한류를 통해 한국을 배우면서 한국을 가보고 싶은 나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이에 더해 한국 대학 교육이 세계적으로 지닌 평판도 많은 칠레인 학생들이 경력 성장을 위해 한국 유학을 고려하는 동기로 기능했다.
칠레인 응답자들이 말하는 한국에 대한 환상과 현실
이번 인터뷰에 참여한 칠레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식 문화에 전반적 흥미를 보였고, 현재 거주지와는 무관하게 한국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 매력을 느낀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실제로 한국에 거주 중인 응답자와 칠레 본토에 있는 응답자가 공통적으로 지목한 한국의 특장점으로는 높은 치안 수준, 타인에 대한 예의, 자국 전통과 문화에 보이는 사랑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칠레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색적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K-드라마를 비롯한 문화 상품을 바탕으로 형성된 한국에 대한 환상은 실제로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어느 정도의 변화를 피할 수 없다. 한국에 거주 중인 칠레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치안과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답변했으나, 한국식 예의에 대해서는 이전과 상당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한국 생활을 통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예의 개념이 칠레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이전까지 한국 문화의 장점으로 여겼던 한국식 예의범절에 기존보다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반면 한국에서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칠레인들은 한국과 칠레의 예의 관념을 동일시하면서 한국식 예의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경향을 나타낸다.
결론 및 평가
본고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한류는 칠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 여타 아시아권과 한국을 구별하는 능력을 기름과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 언어에 대한 학습 의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더해 한류는 한국 문화를 타국에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성과도 내고 있으며, 앞으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장기적으로 강화하는 역할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체류 경험을 지닌 칠레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에서는 세종학당을 비롯한 한국 기관이 칠레에서 한국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나 다양한 한국 경험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핵심 주체라는 답변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이들 기관이 참여하는 한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공공외교는 지금까지 칠레에서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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