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 봉축표어로 살펴본 불교 교리
연기 사성제 팔정도 등 진리 이해 체득
법에 의지 계행청정 수행으로 열반 성취
마음 강조한 禪도 본래 구족한 인간이니
자성청정한 그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해
올해 봉축 표어는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이 취임 후 처음 맞는 부처님오신날에 제시한 봉축 표어는
선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을 때 개인도 사회도
평화와 행복이 찾아온다는 평소 스님의 가르침이 들어있다.
짧고 간단한 문구이지만 담긴 뜻은 간단치 않다.
우선 마음이 무엇인가부터 정리해야 한다.
불교는 마음을 가장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씩 다르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에 대한 인식 작용’으로 바라본다.
또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무상(無常)으로 본다.
눈(眼, 根)으로 책상이라는 대상(相)을 바라보고 인식(識)이 생기는 것이 마음이다.
초기불교에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며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부파 대승불교로 넘어가면서 식(識) 개념이 점차 정교하게 발달하면서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작용하여 만들어 낸 식(識)에
의식을 더한 ‘육식(六識)을 마음이라 하고 무의식인 아뢰야식을 더한다.
개념은 복잡해지지만 대상에 대한 인식작용의 결과이며
생멸(生滅)하는 무상성을 특성으로 하는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우리가 마음(心)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불교 전체를 압도하고 절대화되는 것은 중국의 선(禪)에 이르러서다.
가장 많이 인용하는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
어느 사찰을 가던 주련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구게(四句偈)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고 하거든 응당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
<육조단경>에 등장하는 ‘마음의 바탕에 산란 없음이 자성의 선정이요,
마음의 바탕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지혜라’ 등
선에서 마음은 부처이며 부처를 넘어 세상을 만드는 주인이며
창조자가 될 정도로 절대화 된다.
선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든, 마음에서 출발하여 마음으로 귀결한다.
그러면 선에서는 왜 마음을 이토록 절대시 하는 가?
석가모니 부처님도 마음을 닦는 수행법
선정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절대화하지는 않았다.
부처님은 선정법 수행을 통해 당시 최고의 경지라는
무소유상(無所有想)을 초월하여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렀지만 이를 버렸다.
선정 상태에 있을 때는 일체의 고에서 해탈된 경지를 맛볼 수 있지만
선정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괴로움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유다.
선에서 강조하는 고행(苦行)도 죽음 직전 까지 이르도록 실행했지만
고행을 통해 해탈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부처님이 택한 ‘제3의 길’은 극단적 고행과 쾌락을 버리는 중도(中道)였다.
훗날 한 제자는 부처님께서 “악기가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팽팽하게 당겨서도,
느슨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비유로 중도수행법을 설명했다고 전한다.
봉축 표어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은 청정한 계행으로 선정에 들고
본래 구족한 부처로서 살면 본인도 행복하고 세상의 평화도 저절로 온다는
불교 핵심 가르침과 실천행을 현대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진은 부처님 성도지 인도 부다가야에서 기도 하는 불자들.
부처님은 선정을 중시 여겼지만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다.
마음 보다 실천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파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제자를 받아들일 때 “어서 오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졌다.
고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청정한 행을 닦으라”는 이 말씀 안에
제자가 해야할 일, 걸어가야 할 방향이 다 들어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은 연기(緣起),
고의 근원과 이를 없애는 원리에 관한 사성제(四聖諦),
고의 근원을 없애는 실천수행법 팔정도(八正道)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법(法)은 인식과 이해의 영역이지 어
떤 특별한 경지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듯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의 원인은 탐욕에 있으며
탐욕은 연기 등 진리를 모르는 무지에 기인한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들은 ‘중생’들은 단박에 깨쳐 아라한이 되었다.
반면, 부처님 성도 후 가장 먼저 법을 전해 들었던 브라만인 우파카는
진리에 귀를 막아 첫 제자가될 영광을 놓쳤다.
따라서 고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진리를 바로 익혀 실천하는데 있지,
부처님이 걸었던 길을 다시 반복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다.
이는 차 내비게이션에 비교할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목적지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창조자다.
운전자인 우리는 부처님께서 힘들게 만든 ‘불교’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면 된다.
‘법은 잘 설해졌다’는 내비게이션을 잘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즉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청정한 행을 닦으라’, 열심히 안전하게 운전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단순 간단한 열반에 이르는 길이 복잡해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결함은 부처님의 부재(不在)다.
제자 아난다도 이 문제를 가장 걱정해서 한 번도 열반에 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가
병에 들자 급히 부처님 부재시 상황을 여쭙는다.
부처님은 후계자를 점지 하거나 당신을 따르라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등불이 되고 의지처’가 되며, ‘진리의 법을 등불로 의지처로 삼아라’하신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당신의 참 제자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처럼 오직 진리를 강조했다.
‘진리의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보는 것이며,
부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법이 연기며 사성제 팔정도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인도를 벗어나 간다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거쳐
중국에 들어간 뒤에도 형태만 변화할 뿐 핵심은 바뀌지 않는다.
마음을 강조하는 선불교가 겉으로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교리 발달과정이나 선에 스며든 사상 뼈대를 살피면
연기 사성제 팔정도의 기본 원리 진리가 훼손되거나 왜곡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은 그 이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교리의 집대성이자 농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는 선의 기본 핵심이며 반야경전의 일체개공(一切皆空),
<금강경>의 무상(無相),무주(無住), <유마경>의 ‘번뇌 즉 보리’,
대승의 실천사상, <법화경>의 제법실상, <화엄경>의 ‘해인삼매’,
<열반경>의 불성사상이 선종에 그대로 녹아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선종의 핵심인 ‘교외별전’‘불립문자’ 등
언어 문자를 망상으로 여기는 선종 특유의 가르침은 ‘
나는 최정각을 이룬 그 날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49년간) 일자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능가경>에서 따왔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거쳐 <대승기신론>에 이르면
우리 본래 마음은 불생불멸 평등한 진여(眞如)이지만
이를 깨닫지 못해 생멸의 변화를 겪는다는, ‘진여연기설’로 발전한다.
이는 선종의 뼈대며 코어(core)다.
물과 파도의 관계, 물은 본래 그대로이지만 바람 부는대로 파도가 인다는,
선사들이 가장 강조하는 객진번뇌(客塵煩惱)도 대승에서 나왔다.
이처럼 선은 오랜 불교 교리 발달의 한 과정이자 결정물이며
종국에는 ‘마음’ 한 가지로 귀결한다.
물론 마음 역시 선의 독창적 개념은 아니다.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도 마음은 숱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를 명제화해서 핵심 개념으로 제기하고 퍼뜨린 주체는 분명 선이다.
그 중에서도 혜능의 문손(門孫)이자 선으로 교단을 조직해
오늘날 한국 조계종 탄생을 가능케한 백장회해의 스승 마조의 영향이 크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혜능이 마음 설계자라면
‘평상심이 도’라는 마조는 선의 대중화 생활화 주역이다.
선은 그 비밀성과 추상성 때문에 대중과 고립되고
자칫 공허한 놀음으로 소비될 수 있는 단점을
경전을 몰라도, 불자가 아니어도 특별한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필부필녀 누구나 실행가능한 선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이 언어 논리상으로 보면
엄청난 비약과 과도한 설정으로 보이지만
많은 대중들이 고개 끄덕이고 수긍하는 이유는 마조의 덕인지 모른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 가면 눈이 오는 자연의 이치 처럼,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평상의 삶이 곧 진리다.
진리는 그래서 누구나 수긍하고 걸림이 없는 자연스런 상태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흥얼거림이
진리라는 것이 ‘평상심시도’다.
마조는 이를 실현하는데 굳이 수행이 필요치 않다고 했다.
조사는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 시키지 말라.
오염이란 생사의 차별심이나 조작하여 취향하라는 작위성을 말한다.
우리들의 평상심이 바로 도다”라고 했다.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본래 구족되어 있는 마음을 말한다.
누구나 본래 자성청정한 그 마음, 본래면목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잘 설해져있다.
청정한 행을 닦으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올해 봉축표어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은
부처님께서 설하시고 역대 조사들이 거듭 강조하던
‘부처가 되려 하지 말고 부처로 살아라’는 할(割)이며,
그렇게 살지 못하고 번뇌에 끄달려 고통받는 우리들 어깨를 내리치는 방(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