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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家系와 생애生涯
제1편에 그 만사 등이 실린 금원은 이름이 상표相杓, 자字는 이경理卿이고 그 호가 금원琴園이다. 고종 20년, 1883년에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당시는 은풍현殷豊縣에 속했던 곳의 맛질에서 향년 43세로 수를 하지 못한 중암仲菴 권교연權敎淵의 1남으로 태어나 1926년 정월 5일에 같은 곳에서 부친보다 1년을 더한 44세로 졸했다. 성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그 시조 고려 개국훈開國勳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33세손인데 권씨 성종姓宗에서 복야공파僕射公派 판서공계判書公系에 속하며 판서공 권인權靭의 5대손 야옹野翁 권의權檥가 성균관생 진사進士로서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는데 종전의 세거지 안동安東의 북후면 도계촌道溪村에서 은풍의 저곡渚谷 맛질로, 그 처가를 연고로 이거해 와 후손이 세거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고, 권상표에게 13대조가 된다. 이 야옹의 어머니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조선 중종中宗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종자매從姊妹이고 야옹은 또 우찬성友贊成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벌權橃과, 식년문과式年文科와 조광조趙光祖의 현량과賢良科에 양과급제한 제촌霽村 권장權檣의 맏형이다. 야옹의 손자 옥봉玉峰 권위權暐가 그 아들을 시켜 서인西人의 거벽巨擘이 되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서 그 조부 야옹의 비문을 받았고, 야옹의 증손 사해당四亥堂 권상정權尙正은 청음 김상헌은 물론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 같은 서인의 거물과 친교하면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아우 군수 이우李瑀의 사위가 되었다. 그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어릴 때 할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정원의 가지나무를 그리니 그림에서 가지가 열리므로 이를 손녀 부인에게 주었고 뒤에 노론老論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적전嫡傳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거기에 찬서贊敍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야옹의 자손은 본의든 아니든 서인측으로 분류되었다. 그보다 앞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한번 저곡을 지나는 길에 통자通刺한 일이 있는데 이 때 맛질에서 환대치 않은 일로 그 문인門人들에게 노여움을 사 맛질의 권씨는 동인東人 천하인 안동 일대에서 행세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금원의 8대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섬계剡溪 권수원權壽元에 이르러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문인이자 사위로서 다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들어가고, 5대조 용암龍岩 권성봉權聖鳳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며 조부 정암正菴 권경하權經夏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이 집안이 동남인東南人 색목色目으로 전환하는 데 자타간 이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퇴계의 후손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안과는 제대로 혼계婚契를 트지 못하는 처지였다.
또 예천은 대처인 안동부安東府에 인접해 있지만 고을도 다르고 그 유림도 사회를 달리하고 있었다. 금원은 구한말의 변환기에 태어나 초학부터 가학家學으로 익히고, 이를테면 동네의 훈장글을 배우며 독학함에 그쳤지 누구에게 집지사사執贄師事를 할 여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관에 탁월한 문재文才가 드러나 향당에만 머물지 않고 안동으로 나아가 그 유림 사교계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안동 유림에서는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의논이 끝간 데 없이 번져 있어 그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병호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제향하는 병산서원屛山書院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제향하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의 머릿자를 따 서애와 학봉 양현을 지칭함이고, 이 양현의 문묘文廟 배향 문제를 위요하여 야기된 의논이었다. 처음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퇴계의 수제자로서 문묘에 추배追配할 인물로 서애와 학봉을 거명하고는 그 중에 한 사람을 안동 유림에서 추천하면 이를 성사시켜 주겠다고 약조한 데서 일은 발단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에 학봉이냐, 서애냐를 놓고 양쏙 후손 문중에서 한 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제삼자는 어느편도 들 수가 없으니 그저 난감할 때, 양현의 스승 퇴계의 문중 종손이 들어 이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편으로 결말짓고자 하니, 유림이 들고 일어나 이는 유림 전체의 의견을 물어 결정할 일이라는 명분으로 저지시키며 급기야 강작하여 서두르는 퇴계의 종손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의논의 자리에 예천의 권씨문중인으로서 유가에 명망이 있던 금원의 조부 정암 권경하와 정암의 재종형으로서 정암보다 20여년상의 유림 원로 소헌素軒 권인하權人夏가 재석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도산陶山의 퇴계 집안 진성이씨와 맛질의 안동권씨 야옹 자손이 어떤 자리에서 조우하면 다시 조면阻面하고 돌아앉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맛질의 권씨로서는 안동의 유림사회가 발을 들이기에 살얼음판과 같은 처지인데 10대의 수재 금원이 거침없이 나타나 각종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을 휩쓸며 그 두각을 빛냈다. 그리고 언변과 논리가 또한 정연하였던 듯 어떤 모임이나 의논의 자리에서 늘 좌중을 압도하였다.
그러한 금원은 안동의 진성이씨로부터도 탄복을 이끌어내고, 본인이 초취 함양박씨咸陽朴氏를 상배한 후 진성이씨 이중교李中敎의 딸을 재취하였으며, 장남 남당을 진성이씨의 원집성촌 도산의 원촌遠村으로 장가들여 퇴계 문중과의 원만한 혼계를 부활시킨 인물로 회자되었다는 게 후인들의 이야기이다. 금원은 또 그 문호를 일으키려는 데 상당한 의지와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금원은 15세 때인 1897년 엄동에 그 부친을 여의는데 이때 부친보다 3년상인 모친 청주정씨淸州鄭氏는 46세였다. 후손에게 ‘넓은들할머니’로 불린 청주정씨는 생활력이 있고 이재에 밝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원은 1년상의 함양박씨 면진冕鎭의 딸을 초취하는데 22세 때인 1904년에 그 몸에서 맏아들 남당을 얻는다. 그리고 남당은 그 선대의 500년 세거지 용문면 제곡리 저곡渚谷, 맛질이 아닌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金堂實에서 태어난다. 금원이 아직 아들을 얻기 전의 약관에 편모를 모시고 맛질로부터 10여리 상간인 금당실로 이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사해간 집이 그 처가 함양박씨인이 살고 있던 대가로서, 그 터가 숙종 ・ 영조 시대 밀암密庵 이재李栽 ・ 구사九思 김낙행金樂行 등과 나란히 영남 문단을 석권했던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1713~1782, 은일 영릉참봉 ・ 동몽교관, 금곡서원金谷書院 배향)의 생가여서 이를 남보다 갑절을 친 값으로 매입했다는 것이다. 장차 남야 같은 자손을 얻어 문호를 대창大昌케 하려는 염원에서였으리라.
상금곡리 금당실은 용문의 면소面所가 소재하는 곳이다. 지금 청곡당淸谷堂으로 불리는 이 집을 사 들어간 금원은 그 사랑채라 할 본채만 두고 뒤에 안채를 새로 짓고 본채와 안채 사이 동편에 곳간을 짓는 등 부속 건물을 더해 살았다. 이 청곡당집은 현재 도로 함양박씨인이 주인으로 살고 있는데, 예천군의 향토문화재로서 최근 5억원의 관비로 보수보전 처리를 해 놓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재 표지판에 적힌 내용을 보면, 소재지는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425번지, 본채의 건축 연도는 1873년경, 정확히 1873년 계유癸酉 8월 27일 묘시卯時 입주立柱 9월 초3일 신시申時 상량上樑으로 되어 있다. 구조는 일자형一字形 안채와 사랑채가 다 남향이고 사랑채 오른쪽 옆으로 협문夾門을 두어 안채로 출입하며 협문 담장으로 내외당을 구분한다. 안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 천정에 정교한 관자를 조립했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고 그 안채 좌측에 와가 구조의 별도 곳간이 있다.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정면이 3간, 측면 1간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중앙 1간이 당마루이고 양쪽이 온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본채, 즉 사랑채는 금원이 나기 10년 앞서 입주상량한 것이고 그 뒤의 안채는 금원이 이사하여 더해 지은 것이되 천정의 정교한 관자 등을 갖추었을만큼 재물과 정성을 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원은 그 선고에 이어 수한壽限이 부족한 장년 44세로 1926년 음력 정월 5일에 돌연 별세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23세의 아들 남당이 단지수혈斷指輸血을 하며 성효誠孝를 다 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병명이 무엇이었던지는 당시의 의학으로서 밝혀진 바 없으나 이 집안에 유전성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위암胃癌이 필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원의 조세가 일대의 유림을 놀라고 애석케 하였음을 그 상사에 들어온 만사로 짐작할 수 있으나 유문遺文은 전하는 것이 없다.
남당南塘 권영호權寧鎬는 이러한 금원 권상표와 부인 함양박씨咸陽朴氏 ・ 진성이씨眞城李氏 ・ 청주정씨淸州鄭氏 사이 2남 중 장남으로 1904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던 해에 예천의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425번지 청곡당 대가에서 출생하였다. 금당실은 일대에서 저곡渚谷의 맛질과 함께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뜻모를 일컬음이 회자되는 곳이다. 아마 이 두 곳을 합치면 서울의 절반이 부럽지 않을 만하다는 소리라는 게 사람들의 해설이다. 맛질은 한자로 저곡渚谷 또는 미도味道라고도 하는 큰 마을로 안동권씨 야옹野翁 권의權檥(1475~1558)와 그 차남 거창현감居昌縣監 권심언權審言(1502~1574) 후손의 500년 세거지이다. 예천이 외지인에 대해 배타폐쇄적이어서 일본 상인과 중화요리집이 범접 못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예천 고장 특질의 본거지라 할 데가 이 맛질과 그곳에서 10여리 상간에 있는 금당실金堂實이었다. 권영호는 자가 주약周若이고 호가 남당南塘인데 처음 호는 춘당春塘이었던 것으로 그 선친의 만사輓詞에서 밝혀지고 있다. 장년에 향당의 성예를 안고 조세早世한 그 부친의 문한文翰을 이었다. 그 자 주약周若은 주공周公과 같으라는 뜻이며 12세 아래의 유일한 아우 권영익權寧翼의 자는 순舜과 같으라는 순약舜若이다. 이 아우를 남당은 무척 아끼고 감싼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등지로 주유하기도 하다가 6・25동란시 좌익으로서 끝내 월북행불이 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아우 영익은 남당의 계모 진성이씨 소생이다. 남당은 부친만 조실한 것이 아니라 세 어머니도 모두 일찍 여의었다. 초취 생모 박씨는 남당이 11세 때 33세로 돌아가고 재취 계모 이씨는 14세 때 아우 영익 생후 1개월에 유종乳腫으로 21세에, 3취 정씨모는 16세 때 졸했다. 그래서 그 아우 영익은 출생 직후 생모를 여의었고, 형제를 슬하에 거두던 조모 정씨, 즉 넓은들할머니도 3취 정씨모와 같은 해 1919년 12월에 68세로 별세하는데, 조모가 초이렛날 돌아가고 사흘 뒤 초열흘에 정씨모가 돌아가는 연상을 당했다. 이때 조모 정씨가 16세의 남당에게 어린 동생을 잘 돌봐 기를 것을 탁고託顧하여 남당이 이 명을 어기지 않고 사고 많은 아우를 돌보기에 평생을 부심하였다고 한다.
남당의 조부 중암仲菴은 이 장손이 태어나기 7년 전에 43세로 별세했으므로 대개 가학家學으로 세전하던 이 집안에서 남당이 조부 시하 초학을 할 수는 없었다. 초령髫齡은 부친에게서 익히고 그 시절 금당실에서 초간한 맛질 집성촌에 글이 많았기 때문에 타처를 멀리 내다보지 않고도 능히 독서를 했을 것으로 본다. 또 부친을 여읜 것이 23세이므로 그때까지 부전자전할 것은 다 몸받았을 것으로 볼 것이다. 그 시기 이미 개화開化가 향곡에도 진행되고 일제가 나라를 합병하여 신학문 교육을 보편화하고자 하던 상황이고, 일제가 나라를 병탄하기 전에도 이 땅에는 개화와 신학문에의 기운이 확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타보수적인 예천 지역의 긍식矜式이 되던 유림가儒林家 자제로서 남당이 일찍 학교에 다닐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학漢學이 매우 숙성夙成하였고 어떤 경로로든 신학도 익혀 소시에 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당은 당시의 문벌가가 특히 더하던 조혼早婚의 풍습에 따라 13세이던 1916년 겨울에 두 살 위인 15세의 진성이씨眞城李氏 병호柄鎬의 딸 원숙源淑에게 장가든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이듬해 정월 보름날에 계모 진성이씨가 돌아가 기년朞年의 상청喪廳을 차리고 복상을 하는 몸이 되어 신행新行은 못하게 되고, 이미 관례冠禮를 올렸기 때문에 성인成人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계모의 복상을 마치고 16세 전후쯤에 남당은 대구大邱로 유학하여 지금의 대륜大倫중고등학교인 초기의 교남학교喬南學校에 들어가 신학을 하게 된다. 이 교남학교에서 동배 사이에 두각이 특출했던 듯 남당은 이 학교를 수료하던 1926년 무렵 23세 나이에 대구 지역의 모 신문사로부터 주필主筆로 오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런데 이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와 복상을 하느라 이 자리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26,7세가 되었을 때 용문의 상금곡에는 면사무소가 개소되었다. 그리고 20대 청년 남당은 그곳의 초창기 면장이 되었다. 이미 면내에서 신구의 학식이나 명망으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남당이 태어나 자란 집 청곡당 바로 앞에 오른쪽으로 용문면소가 있고 또 50미터쯤 더 오른쪽으로 용문초등학교가 있다. 이 용문교의 초기 졸업생이 남당의 12세 연하 아우 권영익이라 하니 남당의 학령기에는 이곳에 학교가 생기지 않았고, 만약 소학교에 다니려면 거기서 20리쯤 떨어진 예천읍내로 통학을 했어야 할 것이다. 남당이 당시의 소학교를 다녔는지 안다녔는지는 확인해 줄만큼 아는 이가 없다. 일제는 지방 말단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자 식민지배에서 일종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배려로 시골의 면장과 군수 등은 조선인에게 할양하고 경찰지서장이나 학교장은 반드시 일인으로 하였다. 바로 면소 뒤 대가에서 살던 남당이 대처 대구에 나가 신학문을 겸하고 돌아와서는 부친의 복상을 마치자 새로 개소하는 용문면의 초기 면장으로 앉힌 것이다. 이 시기 남당이 이른바 ‘하이카라’ 머리에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지금껏 전하고 있는데 이 한 장 사진이 그 평생에 남긴 유일한 모습으로 남은 것이고 이후로는 60평생에 일체 사진을 찍은 것이 없다 한다.
어쨌든 초창기 도회지 신문사의 주필 또는 소불하少不下 논설기자 정도로라도 언론계에 진출해 입신해 장차 해방이 되고 격동을 맞는 대전환기의 시국에서 어떤 인물이 될지 몰랐을 남당은 부친상을 당하여 세가世家를 이으며 향곡에 주저앉아 면장 자리에 붙박혀서는 헤어나지 못하고 붙박히는 바 되었다. 이후 42세에 해방을 맞는 남당은 이 면장직에 15년여 재임했다. 1925년생인 장녀 권수희權壽姬가 1941년 9월에 17세로 출가할 때까지도 남당은 용문면장직에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1930년생인 그 차녀 권하정權荷貞은 소학교에 다닐 때, 1940년 미나미지로南次郞의 총독부령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요되어 학생 모두가 개성명을 하는데 자기만 남게 되었다. 일인 교사가 너는 면장의 딸로서 솔선수범이 될 처지에 왜 개성명을 않느냐고 꾸짖어, 하교해 와서는 울며 아버지를 졸랐다. 이 철부지 딸을 보고는 남당이 허허 웃으며 ‘저년 때문에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남당은 임기로 창씨를 ‘삼달三達’로 하는데 이는 안동권씨의 시조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이 고려 태조로부터 성을 받은 사성유래賜姓由來에 ‘병기달권炳幾達權’이 있어 여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여질에게 족보명族譜名 외에 호적명, 즉 창씨명을 지어 주어 맏아들 재탁在倬은 융도隆道, 그 다음 아들과 조카들도 승도勝道 ・ 웅도雄道 ・ 덕도悳道 등으로 하였는데 이 또한 사성유래의 병기달권이 ‘기미에 밝아 권도에 통달’한다는 ‘권도權道’에서 ‘도道’를 항렬자 삼아 삼달과 융합시키려는 성리학적 묘의妙意를 발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남당의 자여질은 해방 후에도 오늘까지 이 창씨명을 대개 버리지 않고 그대로 통명通名으로 쓰고 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까지도, 30대 후반에 있던 남당은 오래도록 용문면장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 조선인으로서 시골의 면장직에 있다면 조선 시대 작은 고을의 성주城主에 지잖는 대접도 받았다. 그런데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그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수탈이 심해지자 식량 등의 ‘공출供出’로 남당은 상급 군청 관계자와 그 할당량을 가지고 자주 다툼을 빚었다. 그러다가 근로보국대勤勞保國隊 등의 징용徵用과 정신대挺身隊로 처자處子까지 공출하려 하기에 앞서 군수와 크게 다투고는 면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로부터 남당은 평거平居에, 상투를 다시 틀지는 않았으나 선복鮮服에 갓을 쓴 차림으로 지냈고 특별히 원행을 할 때는 양복을 하기도 하였다. 또 향당에서 남당은 이미 개화된 ‘신사紳士’로서 수구적인 유림 출입이 그다지 빈번하지는 않았던 듯하나 원근에서 문학과 시문으로 그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 문전에는 술병이나 사 들고 찾아와 축제문祝祭文이나 만사輓詞를 대작해 달라는 사람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호주가好酒家이던 남당은 이런 글이나 대작해 주면서 술로써 실의를 달래는 것이 일과와 같이 되었다. 집밖으로 나와 전야를 거닐거나 소관으로 작로作路하여 어디를 갈 때도 남당은 혼자서 시문을 읊조리거나 경서를 암송하였는데 주흥酒興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면서 누가 원근에서 글을 한다고 성화聲華를 퍼뜨리는 소리를 누가 묻혀 가지고 와 물으면 ‘그 사람 입내 좀 피우지’ 하고 웃는 게 고작이었다 한다.
해방과 6・25동란의 와중에서 남당은 타처로 피란도 하고 그 가세도 현격히 기울었다. 1952년 4월, 전선은 고착된 채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며 수많은 전사자가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고지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가운데 후방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지방의원과 단체장 선거가 있었다. 이때 49세의 남당은 자기 집에 선거본소를 차리고 용문면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는 나름으로 세상에 다시 진출해볼 요량에서였다. 그리고 남당은 과거 오랫 동안 용문면의 초기 면장으로 있으면서 면민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각박하게 변하고 영악스러우며 인심이 사나워져 있었다. 선거는 크고작고 간에 관권에 고무신과 막걸리가 좌우하고 세상은 이미 산림처사山林處士나 다름없이 된 남당 같은 ‘군자’가 나가 표를 얻을만큼 어리숙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되지 않을 일이라 말려 남당은 중도에 면장 출마를 철회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마음속에 웅혼한 경술과 문장을 온축 蘊蓄하고 있던 장년의 남당으로 하여금 더 이상 향곡의 필부匹夫 처지에서 벗어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어서 그를 더욱 좌절케 했다. 그 마음을 달래고 세사를 잊게 하는 것은 오직 술일 뿐이었다.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3년에 걸친 세계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이 끝나고 점차 국가기관의 형태가 자리잡히자 정부 산하에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기관이 생겼다. 이 국사편찬위원회에는 구두점이나 띄어쓰기가 없는 옛 한문 전적에 표점標點을 찍고 초서나 행초行草로 쓴 옛 필사본筆寫本 전적을 해서解書할 전문인력이 필요한데 한문 원전에 표점을 찍고 해초解草를 하자면 한문의 대가 중에서도 대가라야 되었다. 남당은 어떤 경로로 여기에 불려가 난필의 한문을 해독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대구의 교남학교에 다닐 때 지인이었던 사람이 서울의 관계나 학계로 진출하여 향곡에 묻힌 남당의 실력을 알고 천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시에 그가 언론계로 진출했더라면 이즈음 사계의 중진이 되었을 터이니 이는 천양의 차이가 될 바였다. 어쨌든 남당은 이렇게 하여 초기의 국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가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이는 당시 어렵던 그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50이 넘은 몸으로 객지 서울에 올라와 친척집의 기식寄食도 장기가 되어서는 어려우므로 하숙을 하지 않았겠나 생각되며 여기에서 얻은 수입으로 이따금 귀성하여 춘궁기에 가족의 식량과 생계비를 조달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에 남당이 주로 한 일이 해초와 정서精書였던 듯하데, 난초亂草를 해독하여 원고지에 철필로 옮겨 쓰는 일을 하였고 이를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잘하고 많이 하여 그 성과급도 다른 이보다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해가 안되어 남당은 건강이 악화돼 이 일을 못하고 낙향하게 된다. 이 일자리가 당시로서는 구학을 한 사람에게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남당은 후임삼아 같은 맛질 집안의 족제 권양섭權亮燮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나오는데 권양섭은 뒤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교서위원校書委員이 된다. 남당이 이같이 병환이 든 것은 장년 이후 일찍 실의하여 술을 혹호酷好한 때문이라고들 하고 있다. 남당에게 온 병환은 당시로서 불치라 할 폐결핵이었다. 고향 금당실에 와 집에서 요양하며 당시의 치료약 아시아짓 ・ 나이드라짓 따위를 복용하다가 더러는 장남 권재탁權在倬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대구로 가 병원에서 튜버큘린 주사 등을 맞기도 하였으나 의보제도가 없던 때로서 입원 치료 등은 생각지 못하고 가계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서 투병하였다. 그리고 4・19의거가 터지고 이어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이듬해 1962년 음력 5월 25일에 59세로 금당실 자택에서 별세했다.
목천木泉 권재탁權在倬은 이러한 남당 권영호와 진성眞城 이원숙李源淑 사이 5남2녀 중 장남으로 음력 1927년 12월 16일, 양력으로는 1928년 1월 8일에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청곡헌집에서 태어났다. 그 위로 2년 손위 누이 수희壽姬가 있고 밑으로 3년 아래 누이 하정荷貞, 다음으로 재항在恒 ・ 재선在宣 ・ 재운在運 ・ 재정在定 등 네 아우가 있다. 그 자는 한여漢汝, 호가 목천이고 초명은 석수錫壽였다. 석수는 하늘에서 수명壽命을 부여받는다는 뜻이니, 그 조부가 1년 전에 44세로 별세한 처지에서 이 4대종손에게 부친이 첫째로 바란 것이 수명이었던 듯하다. 그 부친 남당은 13세에 장가들어 15세에 신행으로 17세의 아내를 맞아들이고도 7년 뒤인 22세에야 첫딸을 얻는다. 그 첫딸 이름이 수희壽姬로서 수명을 비는 뜻을 담았다. 아마도 영아 사망률이 높던 이 시기에 수희에 앞서 얻었던 아이를 잃고는 부심하여 뒤에 태어난 딸아들에게 이같은 이름을 지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창씨적명創氏籍名은 삼달융도三達隆道이다.
말을 배울 나이부터 부친에게서 초학을 익혔는데 매우 총명하여 특히 귀애貴愛를 받았다. 그 부친 남당은 자여질에게 한학을 가르침에 억지로 시킴이 없고 누구든 데려다 하루이틀 읽혀 보고는 책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내보내고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한다. 목천은 일찍 성구成句를 하여 한시를 지었고 언젠가는 남당이 그 기법을 보고 아비보다 낫다고 기뻐한 일도 있다 한다. 이러한 목천은 9세 때인 1935년 봄에 집앞의 용문공립심상소학교龍門公立尋常小學校에 입학하여 15세 때인 1941년 3월 25일 우등상과 개근상 등을 받고 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소년에 서울로 유학하여 바로 경기공립중학교京畿公立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중학 시절에는 공부 외에 무도武道를 수련하여 정려증精勵證도 받았는데 몸이 썩 다부지고 건장하였다. 그리고 해방되던 해인 1945년 봄 3월 21일에 19세 일본명 삼달융도로서 경기중학 5년을 졸업하였다. 이 경기중학 졸업장은 28년 지난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 제42회 졸업장을 권재탁 본명으로 다시 받는다.
경기중학을 마치고 나서 목천은 바로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 동안 부친이 면장직에서 물러난 이래 가세가 여의치 않고 여러 아우의 교육 문제도 첩첩이 겹치고 있었다. 거기에 해방의 격동과 뒤이은 혼란이 중첩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젊은 지식층의 주류에 따라 사상적으로 좌익에 기울고 있었다. 한편 그 부친은 해방 직후 좌우익의 창궐과 대립에 자여질이 말려드는 것을 우려하며 특히 좌익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좌익이 판을 치는 서울의 대학 진학에 탐탁치 않아 하였다. 1946년 봄에 목천은 부친의 뜻에 따라 대학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폭하고 그 심경을 한시로 읊었다. 그러다 이해 가을 9월 학기에 고려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는 북한산 백운대白雲臺에 올라가 시를 읊는다. 이때에 목천이 고려대에 입학등록을 했는지 못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누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그 부친이, 좌익을 하지 않는다는 확증이 없이는 학비를 안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예천 맛질문중의 안동권씨도 식자청년의 거개가 좌익사상에 경도되어 부로父老를 부심케 했다. 특히 그 부친 남당은 하나뿐인 아우 영익이 좌익에 몰두하여 이윽고는 월북행불의 우환을 맞던 판국이라 그 장자까지 이에 물드는 것을 막고자 크게 용심중이었던 것이다. 결국 목천은 고려대에 합격만 해 놓고 입학 등록을 못했던지 또는 입학을 했다가 곧 무슨 사건으로 자퇴 상태가 되어 한동안 방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다음달 10월에 청송군 진보면 신한의 재령이씨載寧李氏 철호喆浩의 딸 증귀曾貴에게 장가를 든다. 다시 한 달 뒤인 늦가을 11월에 동해안 영해寧海의 관어대觀魚臺에 가 바다를 바라보며 읊은 두 수의 시가 있고 그 시의 부제에 ‘십일사건직후十一事件直後’라 밝힌 것을 보면 이 십일사건이 10월 1일에 일어난 좌익 사건이고 본인이 거기에 연루되어 피신중이었을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1947년 5월에는 ‘도일渡日’이라는 제목의 5언률을 지어 그 부제에 ‘매사가 부적의不適意하여 앙앙불락怏怏不樂이다가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몇 자 뜻을 보인다’고 적고 있다. 물론 밀항을 결심했겠는데 이때 21세의 목천이 이를 실행에 옮겼는지는 아는 이가 없다. 실행을 해 보았더라도 ‘현해탄玄海灘’을 건너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듯하다. 그 이태 뒤 1949년 11월 그는 ‘작별’이라는 7언절구 두 수를 짓고 부제로 ‘하리고등공민학교下里高等公民學校 재직중 경영난으로 폐교가 불가피한 형세’라 쓰고 있다. 하리는 예천군 하리면을 말하고 용문면과 인접해 있고 옛적에 용문과 함께 은풍고을에 속해 있었으며 권씨의 세거지 맛질의 종산 함포산이 하리면 부초리에 있을만큼 가까운 곳이다. 여기에 목천은 사상이야 좌우익 간에 뜻있는 향우들과 함께 고등공민학교를 시작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계몽을 겸해 중등교육을 폈던 것이다.
1950년 6월 그는 25세로 고향 예천에서 6・25동란을 맞았다. 그가 살던 금당실은 도회나 읍내가 아니지만 소백산맥 죽령을 넘어 풍기를 거쳐 예천 평야지역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군사작전사으로는 요해처에 해당하였다. 이런 관계로 북쪽 인민군의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이리저리 피란길을 잡아 가족이 흩어졌는데 목천은 적치하를 벗어나며 포항 지역까지 남하했다가 9월 1일 거리에서 징집되어 육군 보병으로 입대하였다. 형식적인 단기 훈련을 단기 훈련을 받고 군번 6801991로 제3사단에 배속된 목천은 이듬해 2월 18일 고향 예천지구에서 있은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이등중사(병장)가 되고 이해 9월 19일에는 전투중 요고부腰尻部에 관통상을 당해 후송된다. 이때 탄환이 혁대의 과구銙鉤를 뚫고 하복부를 관통하여 꽁무니쪽으로 나갔으나 장기 사이 지방체를 비집고 나가 무사하였고 이 과구, 즉 바클이 탄도를 굴절시켜 목숨을 살렸다고 하여 이를 평생 버리지 않았다. 치료후 질주에 약간의 장애가 있어 육본 일반명령과 국방장관명으로 상이기장을 받았으나 의병제대는 되지 않고 다시 보병 제5사단으로 현역 배속되어 1등중사가 되었다. 5사단에 와서는 고급부관실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며 또한 육군고급부관학교 속기반에 들어가 그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였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으로 휴전이 성립된 이후 그곳에 군사정전위원회가 존속되고 있던 1954년 봄, 그는 군내에서 양성된 우수 속기병으로 뽑혀 회담장에 나가 한국군측 속기반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육군본부의 명령은 차출이 먼저이고, 특급비밀을 취급하는 인가를 위한 신원조회가 그에 뒤따랐던지, 그는 회담장에 차출되어 나가 있던 중 실시된 신원조회에서 입대 전의 좌익활동 경력이 나타나 부적격자로 속기병 임무가 해제되었다. 이를 보면 그의 좌익 경력이 경찰관서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 속기병 파견근무에서 해제된 목천은 원대 보병 5사단으로 복귀되지 않고 오히려 사병으로서 최고의 보직처라 할 국방부에 배속되어 아주 편안한 군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회담장 속기병으로서의 신원부적격자이긴 하나 탁월한 행정사무 능력에 탐을 낸 현장의 국방부 관계장교가 그를 국방부 본부 근무병으로 차출해 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군복무가 여건이 좋다고 해도 사병으로선 사회생활의 자유만 같지 못하다. 이때는 사병의 복무연한이 없어 사실상 무기한이고, 만기 제대라는 것이 없고 다만 의병依病이나 의가사依家事 제대만이 있었다. 1954년 5월 1일 28세의 목천은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보병 1등중사(하사)로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의 의가사전역증서를 받고 3년 8개월의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1년 정도가 지난 1955년 6월 30일 군에서 따낸 속기사자격이 주효하여 대구시청 총무과에 지방주사地方主事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대구시청의 지방주사 10호봉號俸이 되고 34세가 되는 4년 후 1960년 6월 지방주사 2호봉이 되었을 때 경북도청으로 발탁되어, 도지사에 의해 지방기사地方技士 겸 지방주사가 되어 내무국 서무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대구시청에 취직한 것은 기능직 속기사로서였지만 실제로 능했던 것은 시장의 식사式辭와 연설문 작성이었다. 말하자면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구시장의 연설문 스크립터가 된 것이고 옛적 임금 시대로 치면 그 지제교知製敎와 같은 일을 한 것이며, 대구시에 있는 이 지제교를 도지사가 불러 올려간 셈이었다. 1961년 5・16정변이 일어난 후 군인 지사들이 내려오면서는 특히 과시력이 강한 군인지사들에게 있어 식사와 연설문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렇게 도지사에게 필수요원으로 인지되고 이쓴 가운데 1962년에 도공무원교육원 교육을 받고 나와 행정주사가 되고 1964년 10월에는 지방행저사무관으로 승진하여 도청 총무국의 서무과장과 인사계장 등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전 경기중학을 나온 수재로서 당시 사회적 진출이 그 정도인 것은 상대적으로 크게 뒤진 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일단 예천 향곡에서 대처 대구로 진출해 전접함을 계기로, 이 무렵 이농현상離農現狀이 한창이던 고향으로부터 따라나와 기식하는 가족과 친척은 그 사는 집에 용신할 공간을 메웠다. 그 주부는 이 많은 식구의 조반석죽朝飯夕鬻을 어찌할 마련이 없어 큰 솥에 한 줌 미곡을 넣고 희멀건 죽을 끓여 한 사발씩 떠놓는 것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집의 살림 형편이 이러함에도 말단이나마 요직에 있던 목천은 얼마 안되는 월급 외에 한 푼의 부수입이란 것을 가져다 줄 줄 몰랐다. 다만 밥이 되는 일과 무관한 시장 ・ 도지사 ・ 내무장관 등의 표창장만 무슨 때마다 받아왔다.
한번은 양택식梁鐸植 지사가 좋은 치적으로 영전하여 서울시장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양지사가 그를 서울로 데려가고자 하여, 딸린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기 어려워 고민하던 중, 그는 당시 서울에서 경덕상사京德商事라는 수출기업을 크게 일으키고 있던 사촌아우 권재창權在昌에게 깊이 상의했다. 이 소리에 권재창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서울시는 경북도와 달라 복마전이다. 경제개발과 함께 한창 팽창중인 서울은 목하 도둑놈 천지이다. 그 탁류에 맑은 물 한 방울이 들어가 보았자 턱도 없을 뿐더러 어느 귀신에게 휘둘려 결국 형님같은 사람에게 큰일이 난다며 말렸다. 목천은 이 말에 상경진출의 뜻을 접고 경북도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 후일 그 종제 재창은 이를 후회하였다. 그때 그대로 서울로 오게 했더라면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 망정 우선은 울결이 풀려 위암 따위가 발병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1969년 4월 15일 목천은 위암이 발병하여 대구의 동산기독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고 2주 만에 퇴원한다. 그러나 미구에 이 불치병은 재발하고 재수술을 받는 등 상상키 어려운 고통의 투병을 계속하다가 이태 뒤 1971년 6월 18일 45세로 별세하여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의 송동松洞이라는 곳의 선산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