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희망으로, 정체에서 도약으로, 혼란에서 완성으로
몸의 성장은 멈춰도 정신은 계속 성장한다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생물학적 성장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평생 동안 발달한다고 본 최초의 이론가다. 그에 따르면 정체성은 고정되거나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라 “사회적 실제 안에서 영원히 수정될, 자기에 대한 현실 감각”이다. 에릭슨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심리적 발달을 이끌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경험을 조직하며 끊임없이 발전한다.
인간은 평생 동안 성장한다-에릭슨의 인간 발달 이론
에릭슨은 애초에 인간의 생애를 유아기에서 노년기까지 여덟 단계로 구분했는데, 이 책에서는 초고령 노년기에 경험하는 정체성 위기를 포함해 발달의 아홉 단계를 제시한다. 개인은 발달 단계마다 사회적 위기를 겪는데, 각 단계에서 겪는 갈등을 잘 통합해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한다. 이전 단계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다음 단계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앞에서 실패했더라도 다음 단계의 과업을 수행해 나가면서 이전의 갈등을 극복해 현재의 단계와 다시 통합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단계인 ‘유아기’의 위기는 ‘기본적 신뢰 대 기본적 불신’으로, 아기는 모성적 인물과 유대감을 쌓으며 긍정적인 자기감을 발달시키고 삶에 대한 희망을 얻는다.
‘유년기 초기’에는 ‘자율성 대 수치심과 의심’의 위기를 겪는데, 항문 사용과 관련해 자기 통제를 배우며 의지라는 덕목을 갖춘다.
‘놀이기’에는 ‘주도성과 죄책감’의 위기를 겪는다. 아이는 목적의식을 발휘해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 수 있지만 넘어서는 안 될 금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억제하기도 한다.
네 번째 단계인 ‘학령기’의 위기는 ‘근면성 대 열등감’이다. 이 시기에는 집중력과 끈기를 발휘해 역량을 갖추지만 실패하면 열등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청소년기’에는 ‘정체성 대 정체성 혼란’의 위기를 겪는데, 사회의 요구가 커지고 신체적 성숙이 완성되는 이 시기에 심리적 유예 기간을 보내며 다양한 맥락에서 자신을 탐색해본다.
‘친밀 대 고립’의 위기를 겪는 ‘청년기’의 개인은 점차 자기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이 품은 가치를 함께 실현해 나갈 동반자를 찾는다.
‘성인기’에는 ‘생산력 대 침체’의 위기를 겪는다. 가정과 자녀를 돌보고, 다음 세대에 중요한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이 단계에 부여된 과업이다.
여덟 번째 단계인 ‘노년기’의 위기는 ‘자아 완성 대 절망’이다. 개인들은 신체적, 정신적 퇴보로 인해 삶에 회의를 느끼지만 지혜라는 덕목을 발휘해 자기 삶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혐오를 극복한다면 진정한 자아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아홉 번째 단계인 ‘초고령기’에 노인들은 앞선 여덟 단계의 위기를 모두 겪지만,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지혜와 완성의 덕목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다양한 타자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죽음을 삶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노년 초월(Gerotranscendence)로 나아간다.
자신을 완성하고, 지혜를 전달하고, 세대를 연결하는 자유롭고 유쾌하고 품위 있는 노년에 대하여
초고령 노인들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가치 있는 것들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침체감, 자율성과 통제력을 잃어 간다는 상실감, 신체적으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무력감,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인한 우울감을 동시에 느낀다. 내 삶을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인지 의문이 들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전부인지 혼란스럽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수명은 길어졌지만 그만큼 길어진 은퇴 후 노년의 삶에 대한 고찰은 턱없이 부족하다.
에릭슨은 노년기의 정체성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서 살아남은 것이 나다(I am what survives of me, 살아서 여기까지 온 내가 바로 나다).” 노년기의 삶의 태도를 압축하는 이 말에는 비통함이나 후회 없이 자기 자신과 삶을 수용하고, 인생의 불가역성을 인정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노년기의 핵심 덕목인 ‘지혜’는 삶이 아직은 가치 있음을 믿는 동시에 젊음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고 내 몸의 한계를 인정하며 가치 있는 것들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노년기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기와 깨어 있음이다. 우리는 적응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기지와 지혜를 모두 동원해서 정신적, 신체적 능력 저하를 가볍고 유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젊은 날의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충분히 누렸다. 이제는 기지와 진정한 이해로 젊은 날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자. 청각과 시각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제는 계속해서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21쪽
발달의 아홉 번째 단계 - 초고령 노년기의 정체성 위기와 발달 과업
아홉 번째 단계에 있는 초고령 노인은 신체 능력과 인지 능력이 퇴보하며 자율성과 통제력을 상실해 감에 따라 이제까지 겪어 온 발달 단계를 전부 새롭게 경험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가치관이 전반적으로 흔들리게 되며, 부정적 요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위기에 직면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각 단계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위기가 ‘기본적 신뢰 대 기본적 불신’, ‘주도성 대 죄책감’, ‘자아 완성 대 절망’ 등으로 제시되었지만 아홉 번째 단계에 있는 개인은 ‘기본적 불신 대 기본적 신뢰’, ‘죄책감 대 주도성’, ‘절망 대 자아 완성’처럼 부정적인 상황을 더 강하게 경험한다. 그러나 아홉 번째 단계에서 이전 여덟 단계의 사회적 위기를 순조롭게 극복한 개인은 완성과 지혜라는 덕목을 갖추고 ‘노년 초월’로 나아간다.
기본적 불신 대 기본적 신뢰
기본적 신뢰는 모든 시련과 고난에 맞서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유아 시절, 양육자의 적절한 관심과 반응에서 비롯되는 기본적 신뢰는 세상이 내게 적절하게 반응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감각을 키워주며, 어려움에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바탕이 된다. 반면 아홉 번째 단계에 있는 개인은 빠르게 쇠약해지는 몸과 흐려지는 판단력 때문에 점차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게 된다. 실수가 잦아지고 간단한 일도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그러나 끈질긴 희망으로 자신을 믿고 삶을 긍정한다면 노년기에도 삶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게 된다. 시간은 건강과 강한 근력을 유지해 온 사람들에게도 타격을 가하고, 신체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진다. 반복되고 가속화되는 붕괴와, 일상적이거나 갑작스러운 모욕감 앞에서 희망은 쉽게 절망으로 바뀐다. …… 그렇지만 노인들은 저녁에 해가 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아침에 해가 뜨는 장면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 빛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어느 아침 밝은 빛과 새로운 경험이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168쪽
침체 대 생산력
에릭슨은 성인기를 ‘세대 간의 연결고리’로 설명했다. 성인기의 위기는 ‘생산력 대 침체’로 나타난다. 개인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발달시켜야 할 책임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전수할 책임을 진다. 배려라는 덕목을 갖추고, 일에 전념하고 가정을 꾸리고 양육을 하고 공동체에 참여하며 다음 세대에 긍정적인 가치들을 전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반대로 초고령기 노인은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돌볼 책임이 면제된다는 사실로 인해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인지 되물으며 침체감에 빠지기도 한다.
“80대나 90대가 되면 개인은 기력을 잃기 시작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돌연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능력도 줄어든다. 활동적인 개인들의 주요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생산력이 노인에게는 더는 기대되지 않는다. 이는 노인들에게 배려라는 과제를 면제해준다. 하지만 아무런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쓸모가 없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할 일이 주어지지 않을 때 침체감은 커진다.” -175쪽
절망 대 자아 완성
아홉 번째 단계에 있는 초고령 노인들은 일상생활을 꾸려 가는 데만도 주의력을 전부 쏟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덟 번째 단계인 노년기에서보다 한층 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여기서 에릭슨은 우리가 유아기에 쌓았던 기본적 신뢰와 희망을 일깨운다. 기본적 신뢰는 우리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며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한다고 그는 말한다. 부정적 요소가 삶을 강하게 압박하는 마지막 단계를 잘 극복해야 전 생애에 걸친 진정한 자기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생애 초기부터 기본적 신뢰라는 축복을 누린다. 기본적 신뢰가 없는 삶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그것을 품고 긴 인생을 버텨낸다. 영속적인 강점으로서 기본적 신뢰는 희망을 뒷받침해준다. 기본적 신뢰의 원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그리고 희망이 그 어떤 가혹한 도전을 받든 간에, 기본적 신뢰는 결코 우리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는다. …… 이후의 덕목과 지혜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존재의 강인함과 희망을 온전히 품고 있다면, 우리에겐 여전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177쪽
근원적 질문에 답하며 삶의 완성에 몰두하는 지혜의 시간
일반적으로 사회는 노인들에게 ‘내려놓기’를 권할 뿐 새로운 삶과 역할, 새로운 자기 추구를 권하지 않는다. 단순히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뿐 성숙에서 죽음에 이르는 정상적인 심리 발달을 고찰하는 이들은 없다. 에릭슨은 초고령 노인들에게 ‘노년 초월’의 태도를 제시한다. 노년 초월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기 내면에 더 집중하며, 이전 세대와 미래 세대와의 연결을 느끼는 상태이다. 초월한 개인은 나이 듦과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시간과 공간을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고찰한다. 자기 완성을 위해서는 늙어 가는 자기와 직면할 용기, 창의적인 활동과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많은 노인들에게는 꺾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에릭은 그것을 ‘변치 않는 핵심’,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실존적 정체성(essential identity)’이라고 불렀다. 이 정체성은 자기(self)를 초월하며 세대 간의 연결을 강조한다. …… 우리는 스스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살고 사랑하며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그동안의 삶은 풍요로웠다. 의심이 없는 아이처럼 이 사실을 더욱 굳건히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쾌활해져라.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껏 즐기고 웃어라!” -22쪽
노년기와 공동체 - 지혜를 전하고 받는 사회
개인의 생애 주기는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개인과 사회는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상호 관계를 맺는다. 에릭슨은 “문화적으로 지속 가능한 노년기의 이상적 모델이 결핍되어 있을 때 삶의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우리 문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178쪽)라고 말한다. 노인들이 소외되고 배제될수록 우리 사회는 주요한 양식, 관습, 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에 노인들을 통합하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 노인들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아닌 불명예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고, 젊은 세대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년기를 계획하고 상상해낼 모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에릭슨은 노인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서 지혜를 전수하기 위해 세대 간의 ‘접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었다. 신체적인 보호와 안락함 속에서 살게 해준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로 보내는 것이 왜 필수적인 일이 되었는가? 모든 인간은 저마다 희로애락 속에서 늙어 간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역할 모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의 종말 ― 우리 모두가 홀로 직면해야 하는 ― 을 준비하는 방법을 노인들에게서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