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성지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의 교회사적 의의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으며,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문 즉, 시구문(屍軀門)이기도 하였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 중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시장이 서로 이어지며 번성해 종루가상(鐘樓街上), 이현(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상업적 농업·수공업이 성행하였다. 아울러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어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서소문 밖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워 부대시참(不待時斬, 법으로 정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斬刑)을 집행하는 일)의 집행에 편리하였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도 인접하여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다. 또한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참형지(斬刑地)가 되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오경(五經) 중 하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칼 아래 참혹하게 스러져갔다. 즉,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할 존재임을 증거한 순교자의 터가 된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주자학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유교의 경전을 해석하여 새로운 학설을 추구했던 학파)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1925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또 지난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그 이후 열린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最多)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이렇듯 숭고한 삶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의미 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에 합당한 모습을 갖출 수 없었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이 지역은 철도 시설 용지로 수용되어 고립되기 시작했다. 1927년 철로 안에는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참형터의 흔적이 사라졌다. 1966년에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서소문 밖은 통과지대가 되었으며 서소문 밖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1973년에는 지하에 공영주차장과 쓰레기 재활용 집하장 등의 시설과 함께 서소문 근린공원이 조성되었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차도로 인해 접근이 어려웠고 염천교가 가로질러 이 땅은 마치 도심 속의 닫혀진 섬과 같았다.
1958년, 당시 경향잡지사를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가 경향잡지를 통해 순교자 기념관을 짓자고 주장하였으나 좌절된 이후 사그라들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은 한국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사업 중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되살아났다. 1984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과 103위 성인 시성을 기념하여 서소문 근린공원 내 현양탑이 자리한 땅을 매입하고, 이 땅의 장소성과 역사성, 그리고 교회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22일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임송자 리타 作)을 건립한 후, 서울시에 기부 채납 하면서 서소문성지 조성사업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순교자 현양탑이 약현성당 내 기도동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1999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에 새로운 현양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2011년 자치구인 중구청이 이곳을 청소차 차고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보다 의미 있는 장소로의 전환을 위해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자치구인 중구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8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상은 역사공원으로 지하는 성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여, 2019년 6월 1일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9월 14일 교황청에서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포함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아시아 최초 국제 공식 순례지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