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마리 새가 되어 짝지어 춘풍타고 훨훨 날아 오르다
어디
1편(첫날)
아산외암마을-신정호-온양전통시장-아산 성웅 이순신 밤축제장-온관호텔내 영괴대 관람
2편(둘쨋날)아산 맹씨행단-오봉암-현충사-음봉면 삼거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소
1편(여행첫날)
오백년 전통이 살아 있는 외암민속마을과 신정호수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천과 관광지가 있었지만, 아주 오래전
온천욕을 즐기곤 현충사만 둘러 본 기억외엔 별로 아는데가 그땐 없었다.
갑자기 온천욕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인터넷 검색으로 번화한 관광지로
탈바꿈한 온양을 알게 되어 가볍게 다녀오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지하철까지 운행되어 관광객이 늘면서
온양온천마을도 마치 축제장처럼 흥청대었고 관광명소도 많이 개발 되어 있었다.
오랫만에 자동차를 이용한 부부행복 1박여행을 떠났다.
주말인 토요일이라 고속도로에서 차들의 정체가 약간 있었지만 그래도 잘 달렸다.
두시간 이상 소요로 아산 외암마을에 도착하니 관광버스들이 주차장에 가득했다.
아산외암마을 종합안내도
외암마을은
500년 전통이 살아 있는 마을로 예안 이씨의 집성촌이다.
5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전통 부락으로 현재 80여 호가 살고 있다.
중요 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된 외암리 민속마을은 양반가의 고택과 초가집,
돌담이 어우러져 얼핏 한국민속촌을 연상시키지만 사람이 실제 기거하는 마을이며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영암댁, 종손댁 등 택호가 정해져 있다.
외암이라는 마을 이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李柬)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고 불렀으며
한자만 외암(外巖)으로 바꾼 것. 또 하나는 인근 시흥역의 말을 거둬 먹이던
곳이라 하여 오양골로 불리다가 변하여 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이 살던 영암군수댁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재 고택이라고도 불린다.
참판댁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인데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고 쓴 사호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또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이 살던 송화댁,
성균관 교수를 지낸 이용구가 살았던 교수댁,
홍경래 난을 진압한 이용현이 살았던 병사댁,
이중렬과 그의 아들 이용후 부자가 참봉 벼슬을 지내서 이름 붙은 참봉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외암 이간의 묘소와 신도비를 비롯해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긴 반석과 석각도 볼 수 있다.
마을 뒷산인 설화산은
풍수지리상 불(火) 기운이 많아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와
여러 집을 통과하게 만듦으로써 불의 기운을 누르는 역할을 하게 했으며
이 물을 생활용수로도 이용하고 정원을 꾸미는 연못을 만들기도 하는 지혜가 돋보인다.
마을 대대로 터를 지키고 있는 물레방아도 재미난 볼거리다.
나뭇가지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 돌담 안 의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돌담을 끼고 마을을 돌다가 대문 열린 집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들어가보자.
관광객이 함부로 들어가 구경할 수 없는 집이지만 주인의 양해를 얻어 둘러볼 수도 있다.
*네이버지식백과에서
외암마을을 둘러보면
건너는 다리가 두개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이 큰 다리를 이용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긴 반석앞에서
다리 아래 연자방아 앞의 반석(盤石)에는 이용찬(李用瓚)이 썼다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 옆으로는 기미년에 이백선(李伯善)이 썼다는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의 선비들의
생활을 엿보게 하는 곳으로 마을 초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마을을 지키는 해학적인 표정의 장승들 옆에서 포즈를..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한옥의 美 아산 건재고택 牙山 建齋古宅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196)
문이 꼭 닫혀 개방이 안되었다.
중요민속자료 제233호인 이 집을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 건 이 집을 지은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영암군수(靈岩郡守)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이간(李柬, 1677∼1727)이 태어났다.
설화산(雪華山)을 배산으로
산세의 지형에 따라 남서향으로 자리한 건재고택.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북쪽 담장 아래로 흘러들어와
우물가 물과 합류해서, 사랑 담장 아래로 흘러 신선이 노닐 듯
아름다운 정원 연못에 다다른다. 연못에 다다른 계곡의 맑은 물은
정자에 앉은 주인에게 자신을 마음껏 보여준 후, 앙증맞은 인공 폭포를 지나
사랑 바깥마당 담장 아래를 지나 은행나무 평상으로 흘러간다.
이 마을 상류 주택들은 이처럼 물을 유입해 연못을 조성하고 화재에 대비했다.
한옥이 화재에 약한 것을 알고 대비책으로 물을 항상 가까이 있게 함으로서
화재예방까지 염두에 둔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이와같이 이댁은 세월의 정체된 아름다움을 인간의 삶과 자연의 이치가
한데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단아함을 보여준다.
*네이버지식백과에서 일부
이 초가집은 담장 밖의 하인집이다.
건재고택의 담이다. 안 풍경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마을의 빨래터를 재현해 놓은 곳
이 마을은 집집미다 두께가 두터운 돌담이 특징이다.
이돌은 모두 외암마늘 땅속에서 나온 돌이라 한다.
송화댁
송화댁 문이 닫혀 있어 담을 통해 안을 바라 본다.
외암이간사당으로
외암 이간 사당 巍巖 李柬 祠堂
이간(李柬,1677~1727)선생의 자(字)는 공거(公擧),
호(號)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
본관(本貫)은 예안(禮安)으로 입향조(入鄕組) 사종(嗣宗)의 6세손이다.
선생은 숙종조(肅宗祖,1716)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 咨議),
영조 즉위 1년 동안에는 회덕현감, 경연과(經筵官)을 잠시 지냈다.
정조때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순조때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불천위(不遷位)에 제수(除授)되었다.
증호는 문정공(文正公)으로 외암서원(巍巖書院)에 신주가 모셔졌다.
선생은 율곡(栗谷)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遂菴)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중 으뜸이었다.
선생의 독창적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融和的)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 철학사상이다.
그의 인물성동론(人物性洞論)이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낙론계(洛論系)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인물성동론(人物性洞論)은 후속되는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辨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열소통론 등 혁파 놀리의 기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충남 아신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5, 외암민속마을에서)
저 앞엔 친구들끼리
내 앞엔 젊은 예쁜 연인이,
그 뒤를 따라 황혼의 부부인 우리가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초가집 마당에 흐르는 운치있는 도랑물이 보이듯하다.
마당을 지나 마을길로 흐르는 그 도랑물이 그 풍경을 말해 준다.
외암마을의 덩치 큰 사슴
그 마을엔 우람한 사슴들도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사슴앞에서 디카를 들이 댄 나에게
선한 눈맞춤으로 인사를 건네는 사슴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사슴앞을 떠나자 떠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슴의 눈동자의 슬픈 모습을 뒤돌아 보게 되었다.
정말 내가 떠남을 슬퍼했을까?
저 사슴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랴마는 꼭 그런 듯 느껴졌다.
아마도 더 보고 싶지만 다음일정으로
사슴을 두고 떠나는 내마음이 더 슬펐는지도 몰라.
참판댁으로
아산 외암리 참판댁으로 든다.
이 집은 한말 규장각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이정열에게
고종황제께서 하사하신 집으로 '참판댁'이라 불린다.
조선말기에 이조참판을 지낸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그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궁에도 인사를 가고 고종과도 가까이
지낸 분으로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각별히 귀여워했다고 한다.
마당에 들어서니 오래된 두그루의 벽오동이 눈에 먼저 띈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이다.
고종황제가 퇴호(退湖) 이정열(李貞烈1868~1950)선생에게 퇴호란 호를
내리고 영왕(英王)이 9살 때에 쓴 ‘退湖居士퇴호거사’라 쓴 친필 편액이다.
기왓장을 마주 엎은 이것은 불을 때면 연기가 방바닥을 거쳐
마당으로 나와 여름날 밤 모기나 해충을 쫓을 수 있도록 만든 굴뚝이란다.
여름엔 더워 불을 적게 때므로 본 굴뚝처럼 연기가 많이 나지 않는단다.
마당에 안개처럼 곱게 퍼지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옛날
한여름밤의 운치가 안마당에서 살아나 듯 한다.
외지에 나가 사는 장손이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왔다고 한다.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어 참 잘 들었다.
잘 생긴 탈렌트 못지 않은 멋진 세련된 외모였다.
위 돌의 우측 둥그런 홈은
이곳에 물을 담아 참판댁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시설된
말하자면 세숫대야용도이다. 이때 조그만 구멍을 막고 사용하다가
다 씻으면 막아 놓은 구멍을 열어 물이 빠지게 하였다 한다.
연엽주
연엽주는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쯤에 지금 살고 있는 종손의 5대조께서
술 빚는 기술을 개발하여 만든 전통 민속주로 그 당시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한 임금이 잡곡밥을 올리고 상에 술이나
유과, 떡들을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다는 일화도 남긴 술이다.
사실은 이 '연엽주'는 그 당시 비서격이었던 지금의 집주인의 5대조부가
임금의 건강을 생각해 몸에 좋고 음료에 가까운 술을 빚어 수라상에
올렸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연엽주'란 민속주이다.
2013년 2월7일 "한국인의 밥상" 전통맛집 연엽주 방영사진이 걸려 있었다.
낯익은 탈렌트 최불암님의 모습도 사진에서 볼 수 있었다.
참판댁을 둘러보고 솟을대문으로 나온다.
솟을대문은
기와집 대문의 한 형식으로, 양쪽으로 문간채를 두고 대문 있는 곳을 한껏
높임으로써 그 집의 권위를 나타낸다.
즉 솟을대문의 높이로 그 집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다.
솟을대문이 높은 이유는 실리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양반들이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대문으로 들어설 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진입하려면 대문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연자방아
외암마을의 물길 따라 우리도 돌아 나오면서 관람을 마친다.
주차장으로 오니 철쭉꽃이 우리를 반기며
우리에게 방긋댄다.
온양온천쪽으로 이동하다가 신정호수공원 이정표를 만나
신정호수에 닿는다.
신정호국민관광단지[ 神井湖國民觀光團地 ]
충청남도 아산시 방축동에 있는 국민관광단지이다.
신정호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만들어진 담수면적 92ha의 인공호수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해서 온양온천과 함께 관광객이 많이 찾아들자
1971년 국민관광지가 되었다가 1984년 국민관광단지로 바뀌었다.
수정궁·수상각 등의 휴식처와 낚시터가 있고 호수에서
모터보트·오리배 등을 탈 수 있다. 8.45m 높이의 이순신동상이 서 있으며
잔디광장·야영장·조류사·체육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어
청소년 심신단련장이나 단체 야외모임장으로 널리 이용된다.
주변에 현충사·온양민속박물관·외암리민속마을·온양온천·도고온천 등
관광지가 많다. *네이버백과에서
신정호 산책길에서 만난 명자꽃이다.
신정호 수상스키장을 뒤로 하고 온양온천으로 향한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예정에 없던 모르던 코스였는데
온양온천으로 오다 도로이정표를 보고 잠시 들린 곳이어서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하룻밤 둥지를 찾아 온양온천에 닿게 되었다.
어둠속에 찾아 든 온양온천 마을은 사람들과 자동차로 대 혼잡을 이루었다.
성웅 이충무공 탄생 468돌을 맞아
제52회 아산성웅 이순신축제가 온양온천역 광장에서 펼치는 밤이었다.
모르고 갔다가 운좋게도 맞닥드리게 되어 축제장에서 즐기게 되었다.
온양전통시장 밤풍경부터
도로에 설치된 행사부스를 지나 축제장인 온양온천역전으로 향한다.
그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축제장에서 우리도 온양과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깊어가는 밤을 보내면서
첫날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온양관광호텔내 뜰에 자리한 문화재를 둘러보기로 한다.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역사가 1,300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온수군(溫水郡)이라 불리었다 한다.
현재 온양관광호텔이 소재한 자리는 조선시대부터 온천행궁(溫泉行宮) 또는
온궁(溫宮)이라 하여 여러왕들이 온천휴양과 집무를 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온궁(溫宮)'온천행궁(溫泉行宮)'을 약칭(略稱)하는 말이다.
조선 왕조 최초의 온궁(溫宮) 건물은 태조 5년(1396)3월 4일에 이어
어명(御命)으로 콩 30석을 하사하여 승려(僧侶)들로 하여금
지금의 온양온천(溫陽溫泉)에 '원(院)집'을 짓도록 하고,
동년 3월 16일에 태조대왕이 온천에 오시어 보름 동안 휴양하시다가,
4월 1일 온천을 출발하시어 4월 7일에 환궁(還宮)하셨는데,
이 때의 건물은 착공 10여일 만에 완성한 작은 규모의 임시 행궁(行宮)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대왕때부터 온천궁궐을 짓고 온천휴양과
집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세종대왕께서는 안질과 다리병을
치료하시고 온양군으로 승격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조대왕 온행이후로 온양별시라는 과거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 후 현종, 숙종, 영조, 사도세자 등
여러 임금과 왕실가족들이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사례가 많아 다수의 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흥선대원군도 이곳에 욕실을 설비하였던 일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忠淸道) 청주목(淸州牧) 온수현(溫水縣) 서쪽 7리의 언한동(言閑洞)에
온천(溫泉)이 있는데, 가옥(家屋) 25간(間)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세종대왕 당시의 온궁(溫宮)건물의 규모(規模)이니, 현재(現在)
충남(忠南) 아산시(牙山市) 온천1동(溫泉一洞) 242-10번지에 위치한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해당된다.
영괴대(靈槐臺)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영괴대(靈槐臺)' 비각(碑閣)이다.
이 비(碑)는 조선정조(正祖) 19년 (1795)에 세운 것인데,
전면의 '영괴대(靈槐臺)는 영조(英祖) 36년(1760)7월에 온양온천에 행차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활을 쏘던 활터(射臺)인데,
당시의 온양군수 윤염(尹琰)이 홰나무 세 그루를 심은 곳이다.
그후 35년이 지난 정조(正祖) 19년(1795)에 충청감사 이형원(李亨元)이
온양군수 변위진(卞緯鎭)에게 자금을 주어, 홰나무 둘레에 축대(築臺)를
만들고 영괴대(靈槐臺)라 명명하여 조정(朝廷)에 보고하였다.
뒤주 속에 갇혀서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은 아버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추모(追慕)의 정(情)이 하늘에 닿아 있던 정조대왕이 영괴대(靈槐臺)축조의
장계(將啓)를 받아보고 감격하여 친히 '어제 영괴대명(御製 靈槐臺銘)'을 짓고
윤염(尹琰)의 아들 윤행임(尹行恁)으로 하여금 글씨를 써서 비(碑)의 후면에
새기도록 하였다.
신정비神井碑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충청남도 제229호 문화재자료이다.
이 역시도 비각 안에 있는데 아주 작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충청도 지역의 정치와 민심을 살핀후
속리산 복천사를 거쳐 돌아 가던 중에 온양에 머물렀는데
, 온천옆에 있는 냉천을 발견하여 이를 '신정(神井)'이라 칭한 것을
기념하기 위헤 세운 비이다.
비의 전면에 새겨진 '영괴대(靈槐臺)'는 정조의 어필(御筆)이고,
비의 후면 내용은 규장각 검교였던 윤염의 아들 윤행임(尹行恁)이 썼다.
온천리석불(溫泉里石佛)
1927년 신창면에 파손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는 84cm이며 둥근 얼굴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다.
두 손은 무언가를 들어 마주 쥐고 가슴 위까지 올리고 있어
스님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인 불상의 형태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두도 원래의 것인지 의심스러우며, 현재 불신과 떨어져 있던것을
접합해 놓았다.
불상근처에는 두기의 자그마한 동자석이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 그루의 느티나무도 어둠속에 묻히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참고로 "아산 온양온천마을"
2008년 12월 15일 수도권전철 천안~아산 구간이 개통됐다.
아산에는 아산역, 배방역, 온양온천역, 신창(순천향대)역 등 4곳의 전철역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중 가장 인기가 많은 역은 하루 5천 명의 방문객을
모으는 온양온천역이다. 옛 온천궁의 명성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추억을
되새기며 하나둘 모여들기 때문이다. 이제 온양온천이 자리한 온양동은
구도심의 이미지를 벗고 새 옷을 입고 있다. 마을 곳곳에 벽화가 들어서면서
온양온천지구는 디자인도시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옛 신혼여행지, 왕이 즐긴 온양온천궁
“여기가 옛날에 신혼여행 왔던 데야. 그래서 추억이 남달라. 시간 나면
이렇게 친구들하고 와서 뜨거운 물에 몸 풀고 가지.” 서울에서 지하철로
2시간 남짓. 온양온천역에 내린 어르신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60ㆍ70년대만 해도 온양온천은 신혼여행 단골코스였다. 수학여행이며 각종
단체여행에도 온양온천은 자주 등장하는 인기메뉴였다. 하지만 국내에
다양한 관광지구가 생겨나고 1989년 해외여행 전면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온양온천은 점차 사람들의 기호에서 멀어져갔다.
온양온천지구는 아산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있다. 온천시설로 등록된 곳만 38곳,
온천수를 퍼 올리는 온천공만 25개에 달한다. 온양온천역에서 내려 마을을
걷다 보면 곳곳에 온천장이 눈에 띈다. 이렇게 도시 한가운데 온천이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온양온천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온정(溫井),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 조선시대 이후에는
온양(溫陽)이라 불리며 1,3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특히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눈병을 치료하고자 온양에 들렀고 이후 세조, 현종, 숙종 등 여러 임금이 온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이곳에 머물렀다.
온양온천지구에는 30곳이 넘는 온천장이 있다.
옛 온궁터에는 온양관광호텔이 들어섰고, 신천탕, 신정관 등은 일반 대중탕이지만
오랜 역사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온양온천역 공원에서 열리는 ‘온양온천 풍물5일장’은 끝자리 4, 9일마다 선다.
-네이버지식에서
아산여정 2편에선 둘쨋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긴 이야기 두고두고 쉬엄쉬엄 보세요. 감사합니다.
사진편집및제작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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