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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묵상글 ( 12월 20일. - 사랑의 거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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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거처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께서 당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즉시 남자는 알지 못해도 하느님은 아는 분이시다는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안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만 알고 하느님을 모르는 여자가 있긴 하지만
남자를 몰라야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잘 알 수는 있을 거라고.
물론 이것도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이와 같이
혼인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혼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잘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사랑이 없이 잘 알 수 없고,
하느님은 더욱더 사랑 없이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이 갈리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모 무염시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미리 축성하신 것 말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사랑의 거처가 됩시다.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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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비교해 보면, ‘주님의 탄생예고’는 성전 안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오늘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탄성(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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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믿어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즈카르야는 분향 제단에서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이미 인생의 경험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라는 마음이 거기 있었습니다.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을 듣게 되었는데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은총을 주시고, 은총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믿음은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믿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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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째 뉴욕에서 살면서 ‘의, 식, 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옷은 주로 ‘사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른 옷들도 입었지만 사제에게는 사제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교우들에게 이런 질문도 받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데 올 때도 사제복을 입으세요?”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도, 아침에 산보할 때도, 모임의 자리에 갈 때도 즐겨 입는 옷은 사제복입니다. 사제복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뉴욕에서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고, 제게 강복을 청했습니다. 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공항에서 입국할 때였습니다. 입국 심사관이 신자였습니다.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환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입니다. 사제복을 알아본 교우들 중에는 미리 계산을 해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제복을 즐겨 입는 것은 도움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그냥 사제복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곳은 신문사입니다.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저의 숙소입니다. 다락방이라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제게는 비싼 뉴욕에서 편한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가구를 움직이거나, 재배치하는 편이 아닙니다. 작년에 브루클린 교우들이 2층의 숙소에 있는 가구들을 말끔하게 재배치 해 주었습니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가 바뀌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집이 되었습니다. 우중충했던 샤워커튼을 치우고 새로 샤워커튼을 달았습니다. 샤워 실이 호텔 급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예수님의 탄생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자리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줄을 서서 예수님의 탄생 자리에 경배하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비좁은 곳이지만 한국의 순례자들은 경배를 마친 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145 - 27 33ave flushing NY 11354'는 언제나 저를 포근하게 맞이해주는 제 삶의 구유입니다.
입는 것과 머무는 곳은 큰 어려움이 없지만 먹는 것은 매일의 숙제입니다.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준비해서 먹기도 했고, 죽을 데워서 먹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아침에 주로 떡을 먹습니다. 혼자 먹다보니 간편하고, 쉬운 먹거리를 찾게 됩니다. 사목정보 11, 12월호에 먹는 것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의 식사 후 기도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단순한 위령의 기도가 아님을 깨닫는다. 세상을 떠난 모든 만물은 나의 몸을 통한 거룩한 성찬이 되었다는 의미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묵상 할 수 있기를, 그 죽은 만물의 몫과 은혜만큼 더 열심히 살 수 있기를 전구한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는 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식고는 반포(反哺)의 이치요, 은혜를 갚는 도리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드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히 연료를 주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생명에게로 전해지는 은혜를 입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성사입니다. 이제 곧 주님의 탄생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입니다. ‘의, 식, 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손을 내밀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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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캬~ 멋있는 말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멋진 말이 천사가 눈앞에 있는 순간에 떠올랐을까요? 이 말 한마디로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말고 사람이 한 말 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오늘 성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유가 사실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미혼의 여인이 아이를 가지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하물며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혼전임신은 곧 죽음 혹은 그와 비견될 고통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쉽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죽음을 선택합니다. 성모님이 선택한 죽음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성모님이 선택한 죽음을 풀어서 말하면 ‘내가 죽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성모님은 이렇게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니까 자신 안에 생명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거 참 묘하지요. 죽음을 받아들이니까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니까요.
주님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생명을 하늘나라에서 꽃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이고 성모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태교에 좋은 음악
1. 클래식
2. 자연의 소리
3. 많은 사람이 웃는 웃음소리
저는 처음 위의 세 가지를 들고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세 번째에서는 감동도 조금 느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 웃음이라 할지라도
아기에게는 인성의 씨앗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 안에는 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웃음도 들어있고,
따스한 눈빛도 들어있고
위로와 격려의 마음도 들어있습니다.
이미 주신 이 탁월한 능력을 매일매일 사용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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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신부 중에 새벽 미사에 늦게 들어가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신부도 인간이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못해서 늦게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늦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부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사를 하기 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평일 미사는 1시간 전에, 주일과 대축일 미사는 30분 전에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사를 주고 미사 준비를 합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는 저의 미사를 위한 준비이고, 저의 정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미사에 헐레벌떡 들어가는 신부들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그러면 안 된다면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주일 저녁 미사 때에 부랴부랴 제의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고해소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미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관 시계를 잘못 본 것입니다. 시계를 보고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계가 멈춰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다른 신부를 비판하던 저였지만, 저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처럼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저 역시 언제든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심판하지 않는데,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남을 비판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이런 행동들이 하나의 습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해서도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가서 엄청난 소식을 전해줍니다. 바로 예수님 잉태 소식이지요.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의 첫 마디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의 지금 처지입니다. 당시는 결혼 전에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투석형을 당해 죽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의 이런 선택은 잘못되었다면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활동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의 교만함으로 얼마나 많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모님과 같은 겸손함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활동에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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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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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동정 성모 마리아의 사랑의 성덕(聖德)
-침묵, 경청, 순종-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 오심을 애절히 청원하는 대림 2부 넷째날 12월20일, “오 다윗의 열쇠여”로 시작되는 “오! 후렴”입니다. 이런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대림시기입니다. 비단 대림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되도록 해야 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동정 성모 마리아입니다. 역시 희망과 꿈의 마리아 성모님의 태몽입니다. 참으로 순수했던 옛 어머니들은 태몽도 많았는데 요즘의 어머니들에게는 태몽도 사라진 듯 합니다. 얼마전 자매들 피정지도때 부른 성모님 은혜 노래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소녀들처럼 익숙한 노래인 듯 부르는 모습이 성모님처럼 참 아름다웠습니다.
매일 제가 배밭사이를 산책할 때 마다 성가처럼 부르는 성모님 은혜입니다. 어머니 은혜를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부르는 노래로 벌써 강론에 인용하기 수차례이지만 부를 때마다 새롭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떠났어도 영신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영원합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가톨릭 교회도 교리서에서 교회의 어머니이자 어머니인 교회로서 동정 마리아의 복된 신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며,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주신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 실제로 교회는 복음선포와 세례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에게서 난 자녀들을 불멸의 새생명으로 낳는다. 교회는 또한 신랑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다.”(교리서507항)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동정녀를 통해 탄생될 임마누엘 예수님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대림시기 오늘 복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과연 눈밝으신 하느님께서 선택한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평생 모시고 살면서 보고 배울점은 무엇인지 오늘 복음에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침묵입니다.
사랑의 침묵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침묵은 깨어 있음입니다. 침묵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이자 관상입니다. 침묵은 현대인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침묵을 잃어 날로 천박(淺薄)해지는, 즉 얕고 엷어져가는 영성입니다. 새삼 침묵의 선택, 침묵의 훈련, 침묵의 습관을 통한 영성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사막에서 하느님을 찾았던 옛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벽지에서 살았던 무명의 마리아, 얼마나 깊은 침묵과 관상의 사람이었는지 눈밝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천사를 통해 친히 찾아 나섭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침묵의 사람에게는 그 어디나 꽃자리, 나자렛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심지어 하느님도 탓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처럼 늘 깨어 침묵중에 준비되어 있으면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친히 방문하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내용입니다. 이 처방전을 받았을 때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기뻐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도 오늘 복음 강론때 마다 자주 인용하곤 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신자들 모두의 복된 신원입니다. 기쁨의 샘이신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놀랐지만 즉시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과연 관상의 대가,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입니다.침묵의 관상중에 이런 깨달음을 깊이 내면화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동정 마리아의 아름다운 침묵의 관상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그 감동의 기쁨을 거듭 표현하며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둘째,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의 표지가 경청입니다. 잘 듣는 경청은 대화나 기도시 우선적이자 기본적 필수요소입니다. 새삼 경청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에 참 중요한 경청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상담시도 조언이나 충고보다 잘 듣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하는 일이 절대적입니다.
침묵의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 동정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은 요셉에게 그랬듯이 마리아에게도 은밀한 비밀을, 당신 속내를 밝히십니다. 참으로 경청할 때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닌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두분간의 깊은 주고 받는 관상적 대화인 기도가 펼쳐집니다. 주님의 천사의 최종적 응답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셋째,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참 영성의 진위를 검증하는 잣대가 순종입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이 순종합니다. 이래서 순종이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순종으로 여물어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새삼 순종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참 중요한 영성훈련이 순종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그대로 예스(yes)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을 한결같이 이렇게 사셨습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에 하느님의 기쁨도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이보다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래서 순종 역시 하느님의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떠났어도 영혼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낳으시고 기르시며, 참사람이 되라 이르십니다. 참으로 평생 배워 훈련하여 습관해야 할 침묵, 경청, 순종의 사랑의 성덕입니다. 주님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한결같이 영적으로 낳으시고 기르시며, 참사람이 되라 이르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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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월 20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이시여 저를 송두리째>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맘껏 가지소서
세상이 저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밝히 사르소서
어둠이 저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고이 품으소서
탐욕이 저를
유혹하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힘껏 휘감으소서
두렴이 저를
얽어매지 못하게
성령이시여
저에게 내려오시어
저를
송두리째
끝까지 이끄소서
의심이 저를
가로막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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