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
중세의 기독교나 수도원에 소속된 학교에서 가르치던 철학으로, 카톨릭 교리(신학의 근거)를 이론적으로(논리적으로) 입증하려는 철학사상이다.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신학이 바탕이다. 기독교 신학 연구 방법을 철학의 연구 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과학적 방법이 아닌 신앙 이론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에서는 그리스 철학을 신학이론에 가져왔다.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학문 연구는 오래 동안 중단되었다가 9세기 경(카롤링그 왕조)이 되어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독교는 오래 동안 그리스 철학을 이교시하여 멀리 하였다. 이슬람 세계와 접촉하면서, 이슬람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신학을 체계화하였음에 놀랐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 철학은 아우구스투스의 교부 철학이 중심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과 영혼의 문제만을 다루었고, 자연학은 없었다. 기독교가 신과 영혼만이 아니고, 우주 속의 만물을 포괄하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신학으로는 불충분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인간을 영혼과 정신을 가진 존재로, 영혼과 정신을 신과 연결시켰다. 신의 은총이 인간의 영혼(정신)과 연결되어서 직접 영향을 준다.
아우구스투스 신학에는 자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도 신의 창조물임으로 신학에서 다루어야 했다.
중세에는 여러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철학을 연구하였다. 스콜라 철학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자는 철학의 목표인 진리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의 내용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성경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스콜라 철학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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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보편론 논쟁이 유명하다. 신과 영혼을 확장하여 자연까지를 포괄하려는 논쟁이었다. 스콜라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가지고 공부해보자.
마당의 개를 가르키면서 ‘저것은 개다’ 라고 했다.
‘개’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개에게 사용할 수 있으므로, 중(種)이나 류(類)를 나태내는 보편어 이다. 위의 문장에서 개는 마당에 있는 ‘개’이다. 개 중에서도 마당에 있는 특별한 개를 가르키다. 이때의 ‘개’라는 말은 마당에 있는 특수한 한 마리의 개를 가르킨다. 마당의 개는 보편자로서의 개가 아니고, 현실에서 존재하는 실재론적인 존재이다. 실재자(개별자)로서 개다.
이때 종으로, 류로서의 ‘개’는 한 마리 개가 아닌 전체를 나타냄으로 ‘보편자’라고 한다. 보편자인 개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라고 할 때 존재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개의 속성을 가진 동물을 나타내는 관념어 일 뿐이다.
그러나 마당에 있는 한 마리의 ‘개’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개’이다.
(種이나 類는 우리가 종류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보편자로서의 ‘개’와 개별자로서의 ‘개’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여기서 헷갈리는 명칭이 나온다. 조심조심 또 조심하면서 읽읍시다.
마당에 있는 한 마리의 개는 실재하고 있는 개가 분명하지만, 개의 속성을 모두 가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개별자(마당의 개)가 개을 실재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보편자라고 하는 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의 속성을 잘 보존하고 있으므로 실재론적인 개다. 따라서 ‘실재론’이 된다.
(*실재론)
보편자라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뜻이 됨으로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다. 신앙에서 신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 즉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개별자에게는 그 개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개라는 전체 종의 속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유명론 이라고 하였다.
(*유명론)
신학 이론을 확장하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알기 위해서 믿는가(신앙을 가지고 신의 논리로 자연을 해석한다.), 아니면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개별자를 통하여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을 실재론과 유명론이라고 말한다. 이 논쟁을 보편론 논쟁이라 한다.
다시 설명하면, 실재론은 모든 사물은 신의 정신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개별의 사물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사물의 범주를 묶어서 보편이라고 할 수 있는 속성이 있다.
유명론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공동의 속성이 아니고 사물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과는 맞지 않다.
교황청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실재론을 선호하다가. 유명론을 선호하다가, 하면서 왔다리 갔다리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나폴리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리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 되었다. 파리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파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길지 않는 생애에 8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그 중에 신학대전이 제일 중요하고, 유명하다.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발전시킨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수용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였다. 즉 그는
철학은 이성으로, 자연의 질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자연적인 질서를 모색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질서(신학)와 자연적인 질서(철학)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결과이고, 끝이다. 자연의 질서도 신의 근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제 1의 존재이다.)
신의 초월적 질서가 자연 질서의 근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이성적으로-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설명한다.
(세세한 내용은 관심이 있으신 분이 각자가 공부하십시오. 뭔 소리인지 알 듯도 하면서, 안개속 같아서 저는 공부하는 것 포기했습니다.)
신학 이론을 확장하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알기 위해서 믿는가(신앙을 가지는가), 아니면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을 실재론과 유명론이라고 말한다. 실재론은 존재가 있음(이 세상에 온갖 만물이 있다는 것)을 전재하고, 존재하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다. 유명론은 그 반대로, 존재는 명목상의 개념일 뿐이고,(소라는 존재는 그냥 소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고) 그 존재(소)를 이성으로 알고(논리적으로 파악하고) 종합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실재론은 모든 사물은 신의 정신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즉 존재란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 속에서만 존재한다. 개별의 사물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사물의 범주를 묶어서 보편이라고 할 수 있는 속성이 있다. 유명론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공동의 속성이 아니고 사물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과는 맞지 않다.
보편론은, 모든 것에는 보편적인 성질이 있다. 이것이 실재로 존재하는가.(실재론)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관념으로만 존재한다.(유명론) 플라톤에 의하면(이데아론)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이데아는 사물에 앞서며, 사물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이데아나 진선미 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안에 존해함으로 사물이 있어야 보편성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보편자란개체에서 추상적으로 얻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이다. 교황청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실재론을 선호하다가. 유명론을 선호하다가, 하면서 왔다리 갔다리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나폴리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리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 되었다. 파리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파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길지 않는 생애에 8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그 중에 신학대전이 제일 중요하고, 유명하다.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발전시킨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수용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였다. 즉 그는
철학은 이성으로, 자연의 질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자연적인 질서를 모색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질서(신학)와 자연적인 질서(철학)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결과이고, 끝이다. 자연의 질서도 신의 근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제 1의 존재이다.)
신의 초월적 질서가 자연 질서의 근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이성적으로-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설명한다.
(세세한 내용은 관심이 있으신 분이 각자가 공부하십시오. 뭔 소리인지 알 듯도 하면서, 안개속 같아서 저는 공부하는 것 포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