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학교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지냈을까? 우선 11년 동안 줄잡아 200일이 넘는 토요일을 다르게 보냈을 것이다. 일찍 와 문을 따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고 5시면 문을 닫고 갑자기 조용해진 시간을 맞아 하루를 다 보낸 듯 노곤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봉사자들을 찾아 설득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소식지에 매번 재미있는학교 소식을 전하려고 글 쓸 일도 없었겠다. 이사회에 보고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고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찜찜하고 애매한 기분으로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이리 저리 궁리를 할 필요도 없었겠다. 재미있는학교가 없었다면 아잘사를 만들 생각도 안 했을 것이고 여름과 겨울마다 캠프지를 찾아 이리 저리 검색하고 전화하고 예약할 일도 없었을 것이며 11년간 줄잡아 15회 이상 30일-50일 가량의 캠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미있는학교가 없었다면 두 번에 걸쳐 진행했던 서울시 지원 사업도 과거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질 테고 세 사람의 교장을 거칠 일도 없었겠고 문지기들과 간간이 갈등했던 사실마저도 모두 싹 증발할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을 나는 달리 보냈을 것이다. 다른 걸 생각하고 다른 걸 고민하고 다른 것에 투자했을 것이다. 쉴 수도 있고 영화를 보러 갔을 수도 있고 돈을 더 벌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 했을 수도 있고 공부를 했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재미있는학교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전에는 모르던 가치를 더 많이 부여하기도 했고 더 많이 알고 보게 되기도 했다.
처음 재미있는학교를 시작할 때 여덟 살이었던 아이가 현재 고등학교 삼학년이고, 초등학교 사학년이었던 아이들은 군대를 갔거나 대학을 다닌다. 고등학생 시절에 재미있는학교를 나왔던 졸업생 가운데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도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을 거쳐 청년이 되기까지 어떤 굴곡을 그리며 아이들이 커가는지를 나는 보아왔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매일 같이 살고 있지 않아도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제법 알고 있는 어른이 되었다. 재미있는학교를 함께 이끌어왔던 학부모들은 대개 수요모임에 나왔고 아이를 키워가며 닥치는 고민을 토로해서 문선생님과 모람들과 함께 자기가 놓치고 있던 자기 시선, 아이를 바라보는 자기시선을 발견하고 돌아보고 아이 키우는 자기 마음을 바꾸어 갔다. 물론 꾸준히 모임에 나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기도 하고 얼마나 모람들을 믿고 협력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랐다. 구체적으로 면담을 하거나 확인 조사를 거친 바는 없지만 경험적으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꾸준히 나오는 아이, 나왔다 안 나오는 아이, 나왔다 안 나왔다 다시 나오는 아이, 엄마가 모임에 나오면서 나오는 아이, 엄마가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서 나오는 아이, 제각각의 조건에 따라 아이들은 다른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엄마가 재미있는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동기, 엄마가 재미있는학교에 두는 가치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조건을 강요하는 것처럼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아온 사실을 말할 뿐이다. 아이들은 그에 따라 다르게 자랐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보자면 재미있는학교는 사적 영역이 아니다. 사적 영역을 벗어나 경험하는 공적 영역이다. 어떤 엄마, 혹은 상당수 엄마는 대한민국 교육 상황 속에서 조금 다른 교육 서비스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나오기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다 금세 그만두기도 하고 더러는 재미있는학교에 나오는 동기를 바꾸어 가기도 한다. 사적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 가족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고 가족의 욕구나 자기 개인의 욕구에만 갇혀 있지 않고 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가족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른 방향을 추구하며 경험해 보기 때문이다. 부모가 갖는 문화적인 울타리 사회적인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의미이고 부모가 갖는 태도와 가치의 울타리 역시 벗어나 다른 태도와 가치를 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아이들의 경험은 앞서 말한 여러 조건에 따라 아이가 받는 영향은 저마다 다르다. 개인의 성취를 중시하고 경쟁이 심각한 한국교육 풍토에서 아이들이 다른 걸 추구하는 공적 영역 속에서 친구관계를 맺고 어른들을 만난다는 점은 아이들 성장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에 아이가 하루 재미있는학교를 경험하고 나서 말하는 평가 속에는 이런 점들이 잘 드러나지 않거나 아이들 수준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어른들이 간과하기 쉬운 면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 표현을 주의 깊게 듣고 잘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에게 아이를 보는 안목과 잣대가 필요한데 순조롭고 건강한 발달을 방해 받으면 자라온 우리들은 아이들보다 먼저 발달과정을 거친 사람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보다 어딘가에 고착되거나 갖추지 못한 채로 아이를 보기 때문에 그런 안목과 잣대를 갖기가 어려워 아이의 평가를 적절하게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더더욱 서로 아이를 보는 다른 시선을 경험하는 일이 우리에겐 굉장히 유익한 일이 된다. 각자가 자기 자신을 또는 서로를 저마다 다르게 느끼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서로를 최악의 수준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안목을 뛰어 넘는 기회이다.
사적 영역 안에만 머무르는 삶과 공적 영역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이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아이가 살면서 공공의 목표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를 갖고, 같이 사는 일이 어떤 것이고 ,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익혀 간다는 뜻이다. 사적 영역 속에서 다른 걸 경험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이미 사적 영역 안에서 부모의 가치와 주류 사회의 가치에 노출되어 있던 아이들이 다른 것을 추구하는 공적 영역에서 그저 재미만을 느끼지는 않는다. 갈등하고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건 어른들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이들보다도 공적 영역을 나중에 경험한 사람들이라 더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내적 갈등에 빠지기도 하고 우리끼리 갈등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갈등할 때도 있고 토라져셔 오랫동안 말하지 않는 일이 더러 생기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 모든 걸 본다.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본다. 이때 어른들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갈등을 두고 어디까지 경험했는지에 따라 아이들이 받는 영향은 다르다. 모두 친밀한 관계를 맺는 영역 안에서 어른들이 싸우면 아이들은 불편하고 불안해 하다 불신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싸우더라도 화해하고 서로 전보다 서로를 더 이해하는 모습, 그래도 헤어지지 않고 우정을 나누는 동료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경험한 아이들은 사람 사이에 갈등이 많더라도 풀어갈 수 있고 그것이 서로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른이 갈등하는 것도 해결될 것이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갖는 아이가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친구들과 갈등을 그렇게 풀어가기도 한다. 여러 아이들을 통해 나는 그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갈등할 때 나는 아이들에게 종종 말해주곤 한다. 나는 어떤 기분이고 왜 싸웠는지. 그게 어떻게 풀려가고 서로 어떻게 서로를 달리 느끼는지, 그때 너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부모가 갈등하는 것만 보던 아이들은 이것 역시 다른 경험인데, 부모의 관계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다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갈등과 이해의 과정을 되풀이해서 본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간에 차이가 없지가 않다. 최근에 한 아이가 던진 말이 상당히 의미 있게 들렸는데, '오래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아이의 경험은 여러 가지를 포함한 말이기도 하지만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을 아이가 주체로서나 관찰자로서 오랫동안 경험하는 일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재미있는학교를 바라볼 때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것을 아이가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의미부여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재미있는학교를 경험한다. 비록 자기 언어로 그것을 지금 당장 의미부여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어느날, 친구들과 다른 자신을 발견하며 아, 이런 태도가 거기서 비롯됐구나, 의미 부여를 하게 된다.
스물 두 살의 조카가 증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아이는 내 앞에서 내게 욕을 한 적도 있는 아이고 사회문제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던 아이였다. 그 아이의 증언은 이렇다. '내가 페미니스트나 전태일 같은 단어를 참 빨리 알았구나 싶었어요, 친구들과 다른 걸 보니 그래요, 선거를 앞두고 궁금해서 이것저것을 찾아 봤는데 친구들은 별로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고요. 재미있는학교와 알트루사 영향이구나 싶었어요' 단어와 개념을 남보다 먼저 알았다는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가 집안에서 다루지 않던 영역을 접했다는 표현이다. 그 영향으로 스무살이 넘어 자신이 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전문대학을 다니는데 비교적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일 년을 휴학하고 마트에서 알바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마트에서 보는 풍경을 해석하는 내용이 자기중심적으로만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는 자기는 자기 삶에 만족한다고 한다. 허세가 있는 건지 자존심인지 진짜 그런지, 그건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겠지만, 아이와 얘길 하다보면 흙수저 금수저니 하는 원망을 갖고 미래를 암울하고 막막하게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이후 아이가 살아가는 데 재미있는학교와 알트루사가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종단연구하듯 확인해 보게 되겠지만 아이와 내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은 그 영향이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혈육이 아니었던 우리가 아이들과 맺는 관계, 그 깊이는, 아이들이 세상과 사람을 보는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그램 만족도가 높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애쓰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가치는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아이들이 만족할 수 있고 우리 역시 의미 있게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문제를 바라보고 소통하고 풀어가는지를 아이 각자가 같이 경험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데 있다. 그래서 재미있는학교에서 추구하는 재미란, 순간적인 쾌락과도 다르고 소비자가 새로운 상품을 구매해서 느끼는 만족스러움과도 다르다. 자신이 몰두하고 같이 협력하는 데서 오가는 소통과 혼돈과 갈등을 자기대로 참여하고 경험하고 느끼는 가운데 전에 몰랐던 성장과 배움이 주는 재미다.
그래서 우리와 아이들이 재미있는학교에 와서 규칙에 대해 이해가 바뀌고 규칙을 자기들대로 토론해서 만들고 지키기 위해 애쓰고 적용해 보기도 하고 바꿔가기도 하는 일 역시 재미있는학교에서 경험하는 재미의 한 영역이다. 어른 중심의 문화에서 수동적인 처지에 오랫동안 내 몰렸던 아이들이 규칙에 대해 반감을 갖고 규칙을 좋아하기보다 구속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꾸준히 오래 참여했던 아이들은 그것을 달리 생각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가 재미있는학교에 오게 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영향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결국 규칙 문제 때문에 등을 돌리고 떠난 아이도 있는데 뒤늦게 나마 엄마가 그 아이의 문제를 보고 바로잡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역시 규칙에 대해 이해가 달랐고 그것을 수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아이의 문제를 조기에 발견해서 순조롭게 도와주기는 어려웠다. 규칙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경향이 있는데 자발적인 과정을 겪지 못한 어른들이 역시 아이들에게 아이들의 행위 동기에 무관심한 채 일방적으로 규칙을 강요하는 경우가 그것이고 규칙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 아이가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걸 방치하거나 조장 강화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혼란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하지만 수요모임이나 심리학교실, 그리고 재미있는학교에서 나와 아이들을 겪고 고민하는 가운데 다른 태도가 새로 익혀졌다. 내가 자주 말하듯 알트루사에서 다시 컸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이다.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의미에서이다.
알트루사가 학령기 아이들의 학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재미있는학교의 방침은 성취지향의 가치관에서 보자면 상당히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위해서만 살겠다는 의지를 벗어날 수 있고 아이들대로 자기 관심을 살려 나가고 아이들마다의 특징을 알아준다는 것이 제도권 학교 안에서는 그다지 인정 받는 데 도움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기동기를 가지고 저마다 공부를 즐겁게 익혀가기를 바라지만 현행 학교제도 아래서, 주류 가치 속에서 아이들이 이해 받지 못하고 갈등할 때 우리는 아이 편이 되어 아이가 자기 정체성이 훼손당하지 않고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돌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공부도 일류대를 위해서 자기영혼을 죽여가면서 기를 쓰고 달라붙게 하지 않고 공부하면서 자기 질문을 죽이지 않고 친구관계를 외면하지 않고 아이대로의 속도를 존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저마다 실력대로 잘 가기를 바라지만 아이 삶을 대학에서 결정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아이가 자기를 어떻게 느끼고 다른 사람과 무엇을 교감하고 어떻게 협력하는가가 이후 삶을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느 부모들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재미있는학교에 나와 문지기를 오랫동안 감당하기는 간단하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내 나이가 되니 주변에 경제적인 이유로 바빠지는 경우도 많이 본다. 이 점을 앞으로 재미있는학교에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새롭게 과제가 주어졌다. 재미있는학교 형식이야 얼마든지 새로운 상황과 환경에 따라 바꾸어갈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도, 바꾸는 형식 아래서도 지켜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학교는 내가 다시 자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동료들과 협력하면서 그들은 아주 다채롭게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요모임에서 토로하는 고민이기도 했고 심리학교실에서 분석하게 되는 과제가 되기도 했고 끙끙대며 풀어냈던 내 한계이자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내가 다시 발달단계를 살아내도록 나를 밀어부쳤다. 그리고 알트루사는 그것을 감당해 주었고 포기하지 않는 나를 잡고 끌어주었다. 그래서 재미있는학교에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같이 자란 사실에 대해 자부심이 큰 편이다. 돈을 주고 경험 많고 매끄럽게 진행하는 전문가를 초빙해서 재미있는학교를 꾸려갔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그렇게 했다면 재미있는학교의 온 과제가 우리 과제로 내 과제로 여겨질 수 있었을까?
최근 경험을 보면 그런 전문가를 초빙해 봤자 한계가 많다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어떤 한 분야의 전문성만으로 아이들이 자라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증명한다. 그들이 놓치는 그 지점에 우리의 전문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을까? 박사니 무슨 무슨 전문가니 타이틀을 붙이지 않는 문지기의 역할에 자부심이 있을까? 그 영향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까? 우리가 느끼는 한계를, 혹은 어떤 경우에는 실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기회로 여기며 같이 풀려고 머리 맞대려 하고 있을까? 나는 우리가 적어도 그것을 하려고 아잘사에 모여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첫댓글 감동이예요. 재미있는 학교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방금 출판 때문에 사람들을 만났는데 우리 말을 효과있게 전하는 것이 정말 필요해요.
다 써 놓고 보니, 어떻게 내가 이런 글을 썼지? 싶었어요. 잘 써서가 아니라 중요한 얘길 했다는 생각에서요. 베드로가 긴 연설을 끝내고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더니, 저야 부족하고 짧은 글을 쓴 것에 불과하지만 베드로 마음이 조금 공감이 갔어요. ㅎㅎㅎ 저도 우리 말을 효과있게 전하기를 정말 하고 싶어요.
전달되지 않았다 생각했던 이야기,
하려고 준비했던 여러 이야기들이 선생님 글을 읽고 담으로 미루어졌어요. 어쩌면 안해도 되게 될지도 모르겠구요..
아무튼 기회는 계속 있을테니까요.
많은부분이 설득 되어 몸에 힘주고 애쓸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재미있는 학교가 아이에게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다양한 환경과 기회가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감사해요.
설득이 됐다니 놀라워요 이런 추상적인 글에. 아마 안목이 있는 분이라 그럴 것 같습니다.^^
선생님 글을읽으며 한편의 소설을 읽는것 같았어요~ 저는 나중에 예지가 크면 꼭 해야지라고만 생각하고 뒤로 밀어두고 있었던것 같다는 생각도 했구요. 재미있는 학교가 더 궁금해지고 선생님의 생각을 알수있어서 또 재미있는학교를 통해 얻으셨던 부분을 간접 경험할 수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예지가 아직 학교 가지 않았어도 엄마는 아잘사 할 수 있고 재미있는 학교 문직이 할 수 있지요.
@문은희 그러니깐요.. 저도 예지가 커야만 할수있었다는 생각이 또 제 고집과 틀에박힌 생각이였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맞습니다. 아잘사와 재미있는학교 문지기는 학부모만 하는 모임이 아니니까요. 아이가 없어도, 아이가 학교 다니기 전에도 다 같이 협력해서 아이들을 돌보자는 거니까요.
춘천으로 이사가면서도 나중에 은유, 고유가 크면 토요일에 재미있는 학교 같이 오고싶다 생각했어요. 서울나들이 소풍 삼아 말이죠. 제가 일을 하니 상담모임이나 아잘사에 참여할 수 없어 가능할 지 잘 모르겠지만요. 재미있는 학교와 제제와 뽀르뚜가가 다 이어져 있는 일이겠지요. 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 주는 이웃이 있어 안전하다 느낍니다. 한문순 선생님을 응원해요~
서로 응원하며 사니 좋군요^^
읽고나니 나도 쓰고싶네요. 재미있는 학교초기에 운동장놀이라는 시간을 맡아 함께했던 시절부터 이제 학부모역할로 바뀐 지금. 아이들이 나와 다른 보살핌을 받고 함께사는 경험을 하도록 얼마나 많은 지지와 사랑, 그리고 믿음속에서 지켜지며 자랐는지 아이들보며 감격해요.
같이 증언해 보시오. 기다리겠음.^^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울컥하네~
고질적인 과제이기도 한데, 나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힘들다보니 늘 겪어야 하는 일인거같아. 아이들도, 선생님도, 프로그램도,그속에 어정쩡한 내 모습 등도 부족하다 여기고 못 마땅하고 못 마땅하니 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기 쉬웠던거 같아. 내가 못 봐주는거라는걸 부끄럽지도, 빠른 인정으로 덥는것도 아닌 관심으로 내 마음 먼저 들여다 보고 위로 해 줄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재미있는 학교를 초등 고학년때 그만둔 상민이도 생각 나고 주원이와 문순과 하는 수업에서의 내 태도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네.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인연들이야 !!!
그러게 아주 감사하고 고마워 윤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