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 영화 속을 걷다
사랑을 얻고 나서 마지막에 웃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
존재의 외로움에 대한 무표정
삶의 버거움은 견딜 수 있으나 존재의 외로움은 참을 수 없다. 삶에 대한 중압감은 대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해 타의적이지만,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외로움은 어디까지나 자의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물질적인 결핍은 노력과 상황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사랑은 감정적이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사랑은 외로움을 전염시키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배고픔은 견딜 수 있어도 외로움은 불가항력이다. 전자는 육체적인 문제이고 후자는 정신적인 문제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 둘의 조화이다.
핀란드의 국민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82min.)라는 작품은 가난한 두 남녀의 미로와 같은 사랑 찾기에 대한 짧은 여정의 영화이다. 이 작품은 북구 핀란드의 기후처럼 을씨년스럽고, 사랑을 찾는 두 남녀뿐만 아니라 그들의 배경을 이루는 사람들조차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좀체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는 분명 감정이 스며있는데, 그 감정의 이미지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종일관 무표정이다. 배우들의 움직임 역시 다양하고 입체적인 바리에이션이 없고, 시선 역시 한쪽 방향에만 눈길을 주고 있을 뿐 제스처를 거의 하지 않는독특한 연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스크린 속 배우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관객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대화 내용은 분명 웃음을 유발하는 내용인데도 관객들은 섣불리 웃지 못하고 무표정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블랙 유머라고 하기에도 어색하다. 블랙 유머는 우울한 내용을 익살스러운 요소와 결합한 희극을 지칭하는데, 이 영화에는 우울함은 있되 익살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와 연기 형식 때문인지 관객 역시 극 중 배우들에게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는데, 안사와 홀라파가 영화관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관객 중 한 남자가 동료에게 “이 영화 말이야...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나 고다르의 영화보다 훨씬 재밌잖아.”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세계 영화의 거장 감독들에게 한 방 먹이는 촌철살인은 수준급의 블랙 유머에 가깝다.
이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전작들 역시 뒤틀린 블랙 유머에 무표정한 분위기와 무심한 연기 형식으로 일관한다. 거기다 스크린 밖의 관객과 스크린 속 배우들이 감정이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서로가 다 어색하다. 어떻게 보면 감정이입을 촉진하는 사실주의 영화가 아니라, 서로의 감정적 연대가 단절돼있는 일종의 서사극 적 영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쩌면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 방식으로 여겨진다. 관객이 극 중 허구적인 판타지의 서사에 몰입하지 말고, 스크린 속 배우들의 삶과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게 하려는 소외효과일 수 있다.
이 작품은 2023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고, 2024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국제장편영화 부문의 핀란드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이전 영화들인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96), <성냥공장 소녀>(2001) 등 일련의 작품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명 비판이라는 날선 현실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비롯한 최근에 선보인 작품들은 예리한 현실 비판과 풍자가 뒤로 밀려난 채 현실 인식이 많이 둔화되어 있다. 그만큼 감독의 연륜이 깊어지고 현실의 조건들이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사랑 찾기의 엇갈림이 서사의 뼈대
헬싱키의 가난한 두 연인 안사(알마 포위스티 분)와 홀라파(주시 바타넨 분)는 비정규직 직원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두 사람 모두 혼잣몸이라 입에 풀칠은 하고 있지만,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외로움에 찌들어 있다.
안사는 마트 계산원으로 퇴근하면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며 라디오를 듣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이다. 라디오 뉴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뿐이고, 뉴스는 러시아의 일방적 공격과 늘 당하기만 하는 우크라이나의 열세가 중심이다. 뉴스는 반전과 평화를 염원하는 감독의 날 선 비판이며 염원으로서의 현실 인식이다. 이 영화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인 배경은 뉴스 매체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은 노래로 은유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홀라파 역시 단조롭기는 안사와 마찬가지다. 주물공장에서 퇴근하면 동료와 함께 펍 레스토랑이나 술집을 찾아 술 마시며 노래 듣는 것이 전부다. 밴드의 노래는 훌로파의 메마른 감정과 외로움을, 그의 동료나 가라오케의 손님이 부르는 노래는 동시대의 정치 사회적인 함의를 은유한다. 음악과 노래를 듣는 청중 역시 어느 한쪽을 향한 시선 고정과 무표정, 그리고 어김없이 획일적 몸놀림으로 일관된다.
홀라파는 역시 직장 동료와 함께 들른 안사를 처음으로 만나 눈이 맞는다. 그들의 대화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이 직설적이고 단순 명료하다. 상대의 결점을 말해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관객들이 듣기엔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지만, 당사자인 그들은 아주 근엄하고 무심한 표정이다. 안사가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지만 홀라파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다가 그만 쪽지를 잃어버려 사랑의 성사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둘은 영화관 앞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각본을 집필한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서로의 몸을 탐하는 사랑보다는 외로움의 해소와 소통을 위한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을 얘기하고자 한다. 감독은 단순하고 평면적인 사랑의 과정에 ‘극적’이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극적이라는 영화적 장치는 장면이 전개됨에 따라 관객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극적’이라는 드라마의 장치를 즐겨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사의 저녁 초대에서 홀라파는 습관성 음주 행각으로 그녀에게 퇴짜 맞고 집을 뛰쳐나오고, 다시 화해하기 위해 비 오는 날 그녀의 집을 찾아가다가 열차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녀는 다시 입원해 있는 홀라파를 찾아가게 되는 등, 일련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을 긴장과 이완의 리듬으로 우여곡절 끝에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을 성사시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극적 장치인 셈이다.
어렵게 얻거나 손에 넣은 물건이 귀중하고 값지듯, 몇 번의 위기 끝에 이루어진 사랑은 쉽게 균열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렇게 사랑에 공을 들이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하게 남녀 간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선 은유적 상징의 서브 텍스트로 작용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이따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황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곧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인류애가 부족한 탓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사랑은 그러한 인류애를 촉진시키고자 하는 은유적 상징일 수도 있다.
마침내 마지막에 사랑이 웃다
안사와 홀라파를 비롯한 이 작품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 사람은 좀체 웃지를 않는다. 웃지 않는 것만 아니라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하나같이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만 할 뿐이지 다양한 연기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적인 디렉팅이기도 하겠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모든 영화에 일관하는 연기 형태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하나의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거부감으로서의 일종의 반작용이며, 그들이 호흡하고 있는 사회 정치의 경직성을 은유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사랑이 부재하는 동시대적 냉담에 대한 역설적인 제스처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아주 인상적이다. 침상에 누운 채 깨어날 줄 모르는 훌라파는 안사가 방문하자 기적처럼 깨어난다. 거기서 비로소 그녀는 최후로 한 번 웃는다. 홀로파가 깨어난 것은 그녀의 사랑의 온기 때문이며, 그녀가 비로소 웃는 것은 홀로파에게서 사랑의 진정성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한 번 웃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무표정이, 지금까지의 무미건조한 연기 형태가, 여태까지의 무덤덤한 감정이 일시에 사라져 버리는 기적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웃음을 참고 있던 관객도 비로소 마음 놓게 웃게 되는 행복감을 누린다.
엔딩 시퀀스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가볍게 발걸음하고 있는 안사의 포근한 뒷모습, 그녀가 유기견을 사랑으로 거두어들인 개의 발걸음도 경쾌하고, 목발을 짚고 그 뒤를 가볍게 따르는 홀라파의 뒷모습도 온기로 가득차 보인다. 지금까지 침울하고 어둡던 화면도 눈부시게 빛으로 휩싸인다. 이 영화는 비로소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사랑이 내뿜는 온기가 세상 구석구석을 보듬고, 사랑이 우리의 모든 삶을 정화하는 듯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랑의 부재로 세상이 얼어붙은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조차도 사랑으로 가득차 있으며, 세상에서 제일 으뜸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의 피가 끓어 오르고,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신열을 앓듯 흥분되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인류가 발명한 언어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낱말이 가장 으뜸이 아니겠는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벌판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메아리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초목들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꽃을 피울 듯한 기운을 느끼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핀란드의 세계적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작품은 따뜻하고 사랑스런 영화이다. 어느 사랑 영화 못지않게 따뜻하고, 어느 연애 영화 못지않은 따뜻하고 밝고 기운찬 영화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잃지만 않는다면 전쟁도 없고, 불신과 싸움도 없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역시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그러나 사랑 하나만 있다면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정토가 되고 낙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역대 감독 중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만큼 사랑의 신봉자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기에 반어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계간『문장』, 2024년 봄호, 통권 제68호)
첫댓글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