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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황 순 원
3·1운동에 관한 이야기, 그 중에서 어느 것은 이미 내가 아버지에게서 여러 차례 들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에 관한 것을 무엇 하나 써볼까 하니 다시 한번 새로이 듣고 싶어졌다. 나는 아버지를 찾기로 했다. 삼청동까지 가는 길에서도 자연 나는 아버지한테서 들은 그때 이야기를 이것저것 생각해 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스물일곱 살 때 일이었다. 어느 첫 겨울날 아버지는 안세환 씨와 함께 당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강 이승훈 선생을 찾았다. 사실은 그때 남강 선생은 동지들과 비밀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거짓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이런 남강 선생이 안씨보고 이번 일에 몸을 바칠 수 있는 청년 몇 사람을 구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청년으로 남강 선생에게 소개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숭덕학교 고등과 선생이었다. 남강 선생으로부터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은 그날(3·1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평양 부내와 인산식에 모인 사람에게(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식이 있기로 되어 있었다) 도른 후 만세를 부르게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우선 고등과 학생 중에서 뜻있는 학생을 골라냈다. 이 학생들에게, 너는 시내 어디서 어디까지, 너는 또 어디서 어디까지, 이렇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도르도록 계획을 세웠다. 경관에게 붙들리는 때에는 주저 말고 학교 선생 황 아무개가 하라고 해서 했다고 말하라고 하고는 그날 식 시작을 알리는 장닷재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도르기 시작하기로 했다. 이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했다. 식에 모인 사람들에게 도르는 것도 학생을 모인 사람 매 줄에다 한 사람씩 서 있게 했다가 일제히 도르게 하여 감쪽같이 끝냈다.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뒤이어 모두들 가슴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복한 경관도 와 있었지만 감히 당장 손을 대지 못했다.
모였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몇 갈래로 나뉘어 시가로 들어갔다. 시가
지도 이미 온통 만세바다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음날 잡힘의 몸이
되었다. 나는 중학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때 내가 중학생
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3·1 당시의 학생들이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이거리 저거리를 용감히 달렸을 모습
을 눈앞에 그리면서 꽤는 감동했었다.
여기의 두 분, 남강 선생과 안세환 씨를 나는 생전에 친히 뵈었다. 내 중학 사년 때인가 세상을 떠난 남강 선생. 운명하시면서 당신의 유골로 표본을 만들어 당신의 설립교인 오산중학 표본실에 두어 달라는 유언이었으나, 당시의 왜정은 그런 것조차 허락지를 않아, 우리 젊은 학도들의 가슴을 사뭇 끓게 한 남강 선생. 이분을 나는 내가 중학 일학년 한 학기를 오산중학에서 공부한 일이 있어 친히 뵈었다. 그때 이미 선생은 현직 교장으로는 안 계셨는데도 하루 걸러끔은 꼭꼭 학교에 오셨다. 언제나 한복을 입으신 자그마한 키, 새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 수염은 구레나룻을 한 치 가량 남기고 짜른 수염이었다. 참 예쁘다고 할 정도의 신수시었다. 그때 나는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걸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남강 선생은 참 말씀도 재미나게 잘 하셨다. 가끔 조회시간을 이용해 장차 오산에다 전문대학까지 세우고 남녀공학을 하겠다는 말을 해, 우리들의 가슴을 뛰게 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상냥하시던 선생이 일단 노하시면 아주 대단하셨다. 한번은 학년 대항 대운동회 때 기록계 선생의 실수로 사실은 사학년이 우승할 것이 오학년의 우승으로 돼버린 일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스트라이크 잘 하기로 유명한 학교였지만, 이런 일을 가지고도 벌써 스트라이크를 한다고 떠들어 댔다. 선생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판이었다. 남강 선생이 나타나셨다. 선생은 학생들을 모아 놓고 대뜸, 이 자식들아, 스트라이크를 할 테건 큰 스트라이크를 해라, 이건 무슨 스트라이크냐, 이 변변치 못한 녀석들아! 선생의 꾸지람은 무엇 선생이 생도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그 손자나 아들들보고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기에 학생들도 이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선생의 말씀은 또한 거역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한 분 안세환 씨는 내 중학 일이학년 시절에 우리집에 드문히 오시던 것이 기억에 있다. 하기는 그전부터 우리집에 오시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 벌써 안씨는 반 정신이상자시었다. 온갖 고문을 겪은 끝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붉은 밤색 외투를 입고 다니셨다. 지금 내게는 씨의 얼굴 모습보다도 이 붉은 밤색 외투가 더 기억에 선명하다. 하기는 정신이상이 된 분이라 해도 그 모습이 조금도 흉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는 것도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지만. 외투는 물론 낡아 있었다. 씨는 이것을 입고 우리집에 오시면 주인을 찾지도 않고 들어서곤 했다. 씨는 마늘장아찌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이 안씨만 오시면 으레 상 위에 마늘장아찌 놓으시기를 잊지 않으셨다. 씨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씨가 보일 적마다, 댁에서는 다 안녕하시냐고 물으셨는데 그러면 그저, 그렇다는 대답을 할 뿐, 씨 자신이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 본 적은 없었던 성싶다. 씨의 집은 순안이었다. 정신이 좀 분명해진 때에는 집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정신이 이상해지면 집을 나오시는 것이었는데, 집을 나오시면 으레 또 우리집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집에 오셔서 아무 말 없이 앉았다 드리는 상을 받으시고는 들어오실 때처럼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시는 것이었다. 이 안씨가 언제 세상올 떠나셨는지는 내 기억에 없다. 이제 아버지를 뵈오면 이 안세환 씨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한 것을 여쭤 보리라.
그런데 역시 내 소년 시절에 그중 흥미를 갖고 들어온 이야기는 아버지의 감옥생활이다.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은 것도 이 감옥생활의 토막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 아버지의 감옥생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내 소학 삼사학년 때까지 그 컴컴하고 좁은 광 속 시렁 위에 얹혔던 한 절반 뜨다 만 맥고모자다.
아버지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자 거기서 복역하는 일년반 동안을 같은 사건으로 들어온 박인관 목사(이분은 아직 기양이라는 곳에 살고 계신지?)와 이 맥고모자 뜨는 일을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맥고모를 떠서 출옥시까지에 오 원 액수의 돈을 벌었는데, 이 돈에서 이 원은 같은 날 출옥하는 어떤 사람에게 노자로 주고, 그리고 평양까지의 노비를 쓰고 집에 남겨 온 돈이 칠십 전이었다는 이야기. 담뱃곽 붙이는 패에서 풀을 아껴 쓰고 남겨서는 같이 나누어 먹던 이야기. 둘이서 배나 가리울까말까 한 요로 겨울을 나면서, 밤마다 추위에 잠이 깨어서는 당신보다도 동지의 배를 애써 가리어 주던 이야기. 옴들이 올라 굵다 못해 진을 짜내면 그 진이 그냥 얼곤 하는 감방에서 손이 자라지 않는 곳은 서로 번갈아 짜주던 이야기.
그때 같은 감방에 사상 관계로 들어온 사람으로 아버지와 박목사, 그리고 다른 두 청년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같은 3·1 관계로 남도 어느 시골에서 붙들려 들어온 청년이요, 다른 한 사람은 만주에 가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들어온 청년이었다. 남도에서 온 청년은 넷 가운데 그중 나이가 젊었는데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힌 농촌청년이었다. 이 청년만은 피부가 건강한 탓인지 혼자 옴도 옮지 않았고, 무슨 매에도 그중 잘 견디어 냈다는 이야기. 만주 청년은 곧잘 여순감옥에서 사형을 받아 돌아간 안중근 의사를 두고 지은 노래라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다른 셋이 배워 가지고 처음에는 입 속으로 부르다 나중에는 그만 격하여 어느새 모두 소리를 내어 부르곤 해, 간수에게 하나하나 불리어 나가 호된 매를 맞던 이야기. 그 노래를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외고 계시다 ― 공산명월 야심경에 슬피 우는 소쩍새, 목의 피가 마르도록 저 달빛이 지도록, 소쩍새야 말 물어 보자, 네가 고국산천 못 잊는 그의 혼이냐.
아버지는 신문을 들고 계시다가 들어오는 나를 보시고는, 요새 애들 잘 노느냐고 하시면서 신문을 놓고 안경을 벗으신다. 아랫목에 타월로 머리를 동이고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고개를 드신다.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냐고 하니 어머니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도리어, 애들 앓지 않고 잘 노느냐고, 우리 걱정이시다.
아버지가 혼자 말씀처럼, 어머니는 또 며칠째 바람증으로 머리가 흔들려 그런다고 하신다. 그러지 않아도 거의 해마다 겨울철만 잡히면 바람증으로 머리를 앓으시는 어머니시다. 이런 육십이 다 되신 어머니가 요새 이 삼청동 뒷산에서 손수 긁어 온 가랑잎과 삭정이로 지내시는 방 안에서 바람증이 도졌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번도 당신을 서울에까지 끌어다 놓고 이런 고생을 시킨다는 불평을 말씀한 적은 없으시다.
이 잘난 아들이 서울이 그리워 이렇게 부모를 모셔다 놓고 꼼짝 못하는 꼴이란!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불평 대신에 언제나 이 잘난 자식보고 하시는 말씀은 사람이란 어려운 때에 더 옳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 말씀뿐이시다.
이 잘난 자식은 또 무슨 잘난 글을 써보겠다는 것인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선생이 남강 선생보다 더 지독한 고문을 당한 이유가 뭣이든가요, 정신이상이 되두룩?”
아버지는 곧,
“그건 주루 안세환 씨가 일본 정부에 의견 단술을 하러 대표루 갔든 관계다.”
하신 다.
“정신이상은 출옥한 뒤에 생겼습니까, 감옥에 계실 때 생겼습니까?”
“감옥에서 정신이상 때문에 가출옥을 했다.”
나는 아버지가 언젠가도 말씀한 3·1운동은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론도 자결론이지만 일본의 무단정책 밑에 신음하던 조선 사람의 원한이 더 컸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그러니 그 무단정책의 일익을 담당한 경찰이 이런 사상범에게 가혹한 고문으로써 대했을 것만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그 고문의 실례를 아버지가 직접 보시고 당하신 대로 세세히 다시 한번 들어 보리라 하는데, 아버지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신 듯,
“참 메칠 전에…….”
하시며 그 무엇을 보기라도 하실 것처럼 안경을 다시 끼시더니 허공 한곳에 눈을 주시며,
“메칠 전에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국동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 어겠어. 원래 난 길을 가믄서 디나가는 사람을 자세히 보디 않는 습관이라 어떤 사람인디두 잘 보디 않았디. 그른데 이 사람이 날 어기구 나서 부르기에 돌아다보니 털모자를 푹 눌러쓰구 허름한 두루마기를 닙은 시굴 사람이야. 웬 사람일까 하는데, 이 사람이 날더러 황성 쓰디 않느냐구 묻길래 그렇다구 했드니 자기는 김 아무갠데 모르겠느냐구 하드군. 봐두 모를 사람이야. 그래 생각나디 않는다구 했디. 그랬드니 기미년 만세 때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있던 김 아무개 모르겠느냐구 하디 않갔어. 그제야 생각이 나드군. 그때 우리 네 청년 가운데 데일 나이 젊든, 남도 어데서 들어왔다든 청년 그 사람이야. 그래 손을 붙들었드니 손바닥에 온통 못이 백힌 큰 손이 갈 데 없는 그 사람이디 뭐야. 그러구 보니까 털모자 속에 드러난 주름잽힌 시커먼 얼굴에 넷 모습이 완연하드군. ……마츰 길 옆에 조그마한 음식덤이 하나 있어서 그리루 들어가 이런데런 회포 니얘길 했디. 그르다가 무슨 말 끝엔가 그이가 이번 서울 올라온 건 신탁통티 문데 때문이란 거야. 시굴서는 어뜨케 종잡을 수가 없다구 하드군. 신탁통틸 찬성해야 할디 반대해야 할디 말이야. 그걸 분명히 알아 가지구 내레가서 자기 사는 고당에서 운동을 닐으키겠다는 거야. 결국 어느 모루든 왜놈식의 무단정티가 이 땅에 다시 활개를 테서는 안 된다는 거디. 그래 자꾸만 삼일운동 때 일이 생각나 못 겐디겠드라나. 그러니 또 자연 그때 감옥에서 같이 디내든 우리 넷의 일두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르구. 그날만 해두 삼일 당시의 우리들의 일이 새로워디대놔서 거리에서 날 어기자 나라는 결 곧 알 수 있었대. ……그이두 인젠 귀밑에 횐털이 퍼그나 뵈드라. 그른데 그 시커멓게 탄 주름잽힌 얼굴이 어뜨케나 환히 터다뵈든디, 그리구 말하는 거라든디 생각하는 게 어띠나 젊었든디, 나까지 막 다시 젊어디는 것 같드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나는 잠깐 내가 물을 말도 잊고, 반백이 다 되신 머리를 바라보며 아버지도 늙으실수록 아름다워지는 유의 남자임을 안 것 같았다.
(『황순원전집』,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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