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신명 30,1-5)는 회개의 원형을 보여주면서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렸기에 주님의 진노가 내렸고, 그 결과는 바빌론 유배였습니다(29,21-28).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과 자비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고 달아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1절, 2절, 3절, 5절)고 호소하십니다. 돌아오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과 그분의 자비를 믿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희망과 자비)과 저주(경고)를 내놓고 선택하라시면서 이스라엘이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실 번영과 풍요가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회개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줍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유배지로 가셨다가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유배지에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듣고 실천한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의 마음에 주님으로 돌아오실 때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마태 18,19ㄴ-22)은 용서와 자비의 실천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마태오 복음사가의 공동체가 실천했던 원칙을 반영한 듯이 형제를 화해시키는 세 단계(일대일, 한 사람 혹은 둘 이상의 증인들, 교회)의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형제가 지은 죄를 마치 자기가 지은 죄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먼저 뉘우치면서 죄인을 공동체로 다시 불러들이라는 것입니다(18,15-17).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별력과 교정을 할 근거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 안에서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라고 하십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늘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잘못을 교정해주는 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만이 오직 우리의 심판자이시며, 우리 모두 심판을 받을 존재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의 인간적 한계를 짓고 싶어 하는 베드로 사도가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인간적으로만 보면 얼마나 힘들었기에 저렇게 질문하는가 하면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듯한 예수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카인의 후손인 라멕에 대한 잔인한 표현으로서 카인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는 말씀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악순환되는 복수와 폭력의 사슬에 반하여 무한한 용서의 형제애를 발휘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부부가 일생을 살면서 일흔일곱 번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이 용서하고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매정한 종의 비유”(18,23-35)를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 빚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금액을 받아내려고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매정한 종은 결국 동료들의 고발로 임금에게 다시 끌려가 고문 형리에 넘겨지고 빚진 것을 다 갚게 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6,14-15)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바란다면, 다른 이들을 자비롭게 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정의를 강요한다면 똑같은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에페 4,29-5,2)는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주는 새 생활의 규범입니다.
에페소 공동체에서 겪었던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무엇보다도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 말하고, 듣는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에서 살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말과 행동이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잊지 말라.”(4,26)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민족 화해와 일치의 날 복음 독서들은 한결같이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고 용서하라고 합니다. 전쟁의 아픔이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민족끼리 용서하고 화해하고 일치할 방법을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비록 북한의 통치자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만 골라서 할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동족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졌듯이, 우리도 우리 민족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했기에, 서로 사리사욕에 빠져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했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진 것임을 우리는 다 압니다.
화해와 일치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깊이 고민해야 하겠지만 북한의 형제들과 동족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자비롭고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진 자의 여유를, 가진 자의 풍요로움을 용서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승자가 없는 권력다툼이며, 양쪽 모두 무자비한 파괴와 피 흘림만 남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제공격이 능사가 아니고, 같은 민족끼리 공생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장하게 하고”(1코린 8,1)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 국민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면서 불안하게 사는 아픔을 또다시 겪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헛된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틀렸다는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북한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을 볼 때마다 북한에 대한 미움만 커지고, 어떻게 북한이 뒤집어졌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그런 우리의 바람은 북한에 사는 동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이 커다란 아픔을 더 많이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만이라도 일치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찾기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우리 민족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그만큼 남들에게도 자비를 보이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엄격한 정의를 보이실 것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화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물론 한 가족임에도 화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오늘 미사의 말씀들, 특히 두 번째 독서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기 위한 잣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