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孝宗)
북벌을 국시로 내세운 군주
출생 – 사망 : 1619 ~ 1659
조선시대 효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그가 치국의 효시로 내세운 북벌(北伐)의 실체는 과연 있었는가. 재위 10년간 ‘숭명배청(崇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讎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에 신명을 바친 왕 효종. 그는 북벌의 완성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반청(反淸)을 외친 재야의 사림도 등용했지만, 복수를 위한 ‘10년의 꿈’은 무너졌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한지 5일 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이다. 효종은 인조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에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로 인조반정 후 봉작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되었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효종의 나이는 5세였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장난치거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행실이 무척 달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모습은 부친인 인조와 비슷하다. 또한 효심이 극진하여 채소나 과일같이 흔한 음식도 먼저 부친에게 올린 뒤에야 먹곤 했다. 인조는 효종을 두고 항상 인성이 훌륭하고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여 주위의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고 전한다. 1625년(인조 3)에 일곱 살 위인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효종이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청나라 인질 생활과 귀국
18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효종은 인조의 명령으로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1월 30일 효종은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황제에 대한 경례법)’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다. 2월 5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청나라에 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 사이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돈독해졌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
효종은 1642년(인조 19)에 심양 관저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을 낳았다. 현종은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다. 효종은 26세인 1644년(인조 22)에 청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청나라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으로 들어갔다. 효종의 완전한 귀국은 1645년 5월 14일이다. 효종보다 앞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4월 26일에 급서(急逝)하자 20여일 만에 살얼음판 같은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정통성의 약점을 안은 왕위 계승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종통(宗統: 맏아들의 혈통) 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주도로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에 올랐다. 이 무렵 효종은 자신을 왕세자로 명한 성명을 거두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왕세손으로 할 것을 울면서 간청하였다.
“작은 모기가 산을 짊어진다 할 때 참으로 산을 짊어짐을 기다리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매우 어려운 때에 막중한 후사의 자리를 일개 불초한 신에게 부탁하시니, 이것이 어찌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만큼만 어려울 뿐이겠습니까?”
[인조실록] 인조23년 윤6월
1645년 9월 27일, 효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소현세자의 부인과 그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강빈의 억울한 죽음은 항상 효종을 괴롭혔다. 강빈의 죽음에 대해 효종의 입장이 어떠했는지는 김홍욱(金弘郁)의 장살 사건이 잘 말해준다. 당시 황해감사였던 김홍욱이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강빈의 억울함이 밝혀지면 왕위는 조카에게 되돌아갈지도 모를 형국이었다. 상소를 읽은 효종은 “나도 모르는 사이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고백했다. 효종은 곧장 김홍욱의 체포 명령을 내렸고, 김홍욱은 국문을 당하다가 맞아 죽었다.
북벌의 추진과 송시열
강빈의 신원을 주장하던 김홍욱이 맞아 죽자 민심은 요동쳤다. 효종은 김홍욱 사건을 무마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북벌이다. 그는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년에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효종은 1659년 3월 11일 송시열과 독대하여 북벌의 대한 자신의 전략을 자세하게 피력했다.
“저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경(송시열)이 지난번 주자의 말씀을 들어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오. 지금의 한(汗- 청 군주)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에 깊이 빠져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대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청을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오.”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 중에서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결의에 찬 효종의 북벌 정책에 맞장구는 커녕 격물(格物)과 치지(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했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이자 종속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질 뿐이었다.
효종은 과연 왕권강화만을 위해 북벌을 이용한 인물이었을까. 효종의 북벌정책이 불안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한 왕권 강화책이었음은 분명하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반청적(反清的) 사림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반청적 사림세력 역시 재기를 위해서는 효종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효종과 반청적 사림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북벌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질 시절 청나라 전쟁터를 누빈 효종에게 북벌은 어쩌면 청에 대한 실질적인 불안감이었는지 모른다. 청나라는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 오랑캐였지만, 과연 멸망한 청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곳은 요동이었다. 중국을 차지한 청이 멸망하여 요동지역으로 돌아온다면 조선은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은 계속적으로 청의 동향을 살펴야 했고, 국경에 대한 불안감은 숙종대까지 이어졌다.
의문스러운 효종의 죽음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효종은 1659년 5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침에 침을 맞은 효종이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에 승하하였다고 하니 침을 맞자마자 운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궐 뜰에 있던 송시열과 정태화가 비보를 듣고 뛰어들어 갔지만, 효종의 싸늘한 주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효종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해 4월 2일에 그는 작은 가마를 타고 비원에 행차하여, 생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를 읊었다.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롭고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 時有鶯聲喚主人
[연려실기술] 권30, <효묘대점>
그런 다음 효종은 신하들에게 “9월 늦가을 단풍이 들면 그때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슬픈 기색으로 “후에 만날 것을 어찌 약속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겼다. 딱 한달 뒤인 5월 4일 효종은 승하하였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그런데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 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참형은 면하고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 사림의 지지를 상실하여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의 공통점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신권은 항상 승전가를 불렀다.
효종
청을 무찔러 조선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노라!
요약 : 조선으로 돌아와 갑자기 죽은 형을 대신해 왕이 되었어요.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준비했지만 실천하지는 못하고 죽었지요.
출생-사망 : 1619년 ~ 1659년
재위 기간 : 1649년 ~ 1659년
목차
1. 효종의 키워드
2.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봉림 대군
3. 형인 소현 세자와 생각이 달랐던 효종
4. 청을 무찌르자는 북벌 정책을 추진하다
5. 북벌을 추진하지 못한 효종
6. 청의 러시아 정벌에 도움을 주다
7. 벨테브레이를 비롯한 서양인이 조선에 들어오다
1. 효종의 키워드
시대 ▶ 1619년~1659년
재위 기간 ▶ 1649년~1659년
국정 운영 스타일 ▶ 오로지 청 정복을 위해서!
가장 가기 싫은 장소는? ▶ 청, 삼전도
연관 검색어 ▶ 북벌론, 청, 봉림 대군, 척화파
역사적 중요도 ▶ ★★★☆☆
시험 출제 빈도 ▶ 보통
2.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봉림 대군
원래 봉림 대군은 왕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형인 소현 세자가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또 아들도 세 명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소현 세자가 갑자기 죽자 아버지 인조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어요.
소현 세자의 아들을 왕위를 이을 세손으로 삼지 않고 갑자기 둘째 아들인 봉림 대군을 세자로 삼아버린 거예요.
봉림 대군은 왕위도 물려받아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되었어요.
3. 형인 소현 세자와 생각이 달랐던 효종
소현 세자는 청에서 생활하면서 조선도 짧은 시간에 강대국을 이룬 청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또한 서양인 신부들과도 교류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서양의 과학 기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효종은 형과는 달리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어요. 병자호란 때 청에게 당한 굴욕을 씻고, 조선을 도운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4. 청을 무찌르자는 북벌 정책을 추진하다
소현 세자가 죽은 뒤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어요. 왕이 된 후 효종은 인조의 정책을 물려받아 청을 공격하기 위한 북벌 정책을 실시했지요.
북벌 정책이란 청에게 복수를 하자는 것을 말해요.
효종은 뜻이 맞는 신하들과 함께 북벌을 위해 성을 정비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사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어요.
5. 북벌을 추진하지 못한 효종
효종은 북벌에 찬성하는 신하들과 함께 북벌 운동을 열심히 추진했지만 결국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효종 즉위 이후 꾸준히 준비해 온 북벌을 멈추어야 했거든요. 사실 조선이 아무리 군사력을 키워도 청을 무너뜨리기엔 무리가 있었어요.
6. 청의 러시아 정벌에 도움을 주다
나선은 러시아를 말해요. 당시 러시아는 청의 국경 지역인 헤이룽 강 근처에서 불법적으로 모피나 가죽을 빼앗아가서 청은 골치를 앓고 있었지요.
하지만 청은 총을 이용해 전투를 하는 러시아 군대에게 번번이 패배만 하는 실정이었어요. 결국 청은 조선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지요.
청의 요구로 청과 러시아 군과의 싸움에 조선은 지원병을 보내게 됩니다.
북벌을 위해 잘 훈련되었던 조선의 조총병은 나선 정벌에서 크게 활약하여 러시아 군대를 무찔렀어요.
7. 벨테브레이를 비롯한 서양인이 조선에 들어오다
효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조선에는 다른 시기에 비해 서양인이 많이 들어왔어요.
네덜란드인이었던 벨테브레이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파도에 떠밀려 제주도에 오게 되었지요.
이후 벨테브레이는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았어요.
또 벨테브레이는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었는데, 이런 기술은 조선의 군사 기술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하멜도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지요.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을 서양에 알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