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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 맹세!
맹세 비슷한 용어가 있습니다.
공약입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해 백성들 앞에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혹시나?’ 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나!’하고 실망합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촛대, 금속판, 금화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간에 오고 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키지도 못할 실없는 약속들을 참 많이 남발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습관처럼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조만간 전화 한번 할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맹세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 빈말, 거짓 맹세,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도 말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기도할 때도 깊은 침묵 기도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던가 봅니다.
뿐만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심지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머리를 두고까지 맹세하곤 했나 봅니다.
허언(虛言)을 남발하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정확한 한 가지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을 할때는 복잡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잔머리를 굴리지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솔직해지라고 하십니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마음속에 있는 언어, 그대로를 표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 사랑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내용이라든지,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 상할 것이라면, 얼마나 또 망설여지는지요?
정직하고 진솔한 언어 사용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상을 향한 기도와 정중한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언어 사용이지만, 상대방의 성장과 선익을 간절히 위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어려운 직언(直言), 고언(苦言), 충언(忠言)도 가능하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요즘 애인이 변심했다고 하여 애인을 찾아가 보복을 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애인의 집을 차로 들이박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불과합니다.
정말 엽기적인 사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여 치과의사가 변심한 옛 남자친구가 치통을 호소하자 치아 32개를 몽땅 뽑아 보복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야하는데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나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을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이 잠깐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현찰,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억 단위를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잘 믿고 베푸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굳게 믿었는데 배신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합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못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의미는 그 맹세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맹세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꺾으십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맹세를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맹세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말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우리 힘이나 말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는 미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매일 읽고,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저는 당신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에는 성모님께서 많은 일을 한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우리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33-37: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이며,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학과 1학년 때, 라틴어를 배웁니다. 솔직히 너무 어려웠고, 사어(어느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죽은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가 했습니다. 더군다나 매주 쪽지 시험을 보니 라틴어에 대한 압박은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를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라틴어를 1년 동안 배운다고 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없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사전을 펴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이다. 공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부는 배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어떤 강의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혀 얻을 수 없었어도, 배우는 법만 익힐 수 있으면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주님의 교육 방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어떻게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배우는 법을, 즉 세상에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과 달리 우리는 늘 새로운 것만을 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고, 자기가 잘못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없애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특별한 것만을,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율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또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우리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뛰어넘어,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상 안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을 무조건 달라는 식의 잘못된 모습이 아닌, 또한 주님께 헛된 맹세를 하면서 조건만을 계속 외치는 위선적인 모습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하는 일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어떤 변화를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제인 구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마태 5,33)
진리 안에 머물러
밤낮으로
진리를 머금고 사는
순수한 이들에게는
굳이
맹세가 필요치 않다네.
맹세는
거짓으로 물든 이들에게
굳어진
잘못된 습관이며
침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이들이 드러내는
교만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정직과 진실 등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되지 않거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호감이 가지 않습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들에게
인간미가 느껴집니다.
그 진정성 안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솔직함이
겸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악한 영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식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영적 식별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복음말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 예약기능이 있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