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산과하늘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인도여행 ⑧ : 델리의 또 다른 문화재들, 바하이사원, 라지가트, 인도문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1,186 18.05.17 04: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셋째 날 : 델리의 또 다른 문화재들, 인도문, 바하이 사원, 라지가트

 

특징 : 관광지로써 델리는 크게 올드 델리(Old Delhi)‘뉴델리(New Delhi)‘로 나뉜다. 17-19세기경 인도의 옛 수도였던 올드 델리지역은 붉은 요새 복합건물, 꾸뜹미나르, 국립 간디 박물관과 라즈 가트 등 전통을 간직한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뉴델리는 식민지 시절 영국에 의해 개발된 현대적 도시이다. 뉴델리의 중심을 이루는 곳은 서부의 중앙 관청지구로, 대통령 관저를 둘러싸고 여러 관공서와 국회의사당이 늘어서 있다. 이는 델리에는 새롭거나 오래된 볼거리들이 수없이 많다는 얘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3개나 보유하고 있다.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둘러보게 되는 꾸뜹 미나르(Qutb Minar and its Monuments, 1993년 지정)’외에도, 타지마할(Taj Mahal)이 벤치마킹했다는 후마윤 무덤(Humayun's Tomb, 1993년 지정)‘붉은 요새 복합 건물(Red Fort Complex, 2007년 지정)‘이 있다. 이중 후마윤의 무덤은 하지 베감(Haji begam)’ 왕비가 그녀의 남편인 무굴제국의 3대 황제 후마윤(Humayun)’을 위해 만든 무덤이고, ‘붉은 요새5대 황제인 샤 자한(Shah Jahan)‘이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이전(移轉)하면서 새로 쌓은 성채이다. 이밖에도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 등이 사원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하지만 이 대부분은 이번 패키지여행의 답사코스에서 빠져있다. 아쉽지만 여행상품을 고를 때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 내 잘못이 더 크니 어쩌겠는가. 이곳 인도가 한번쯤 더 와봐야만 하는 곳이라는데 위안을 삼아본다. 바라나시와 라즈기르. 쿠시나가르 등 북부지역에 위치한 불교유적지들을 하나도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꼭 이곳 델리에 있는 세계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싶다.

  

델리에서의 두 번째 방문지는 바하이 사원(Bahai Temple)‘이다. 비하이교는 인류의 평화통일과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주창하는 이슬람계의 신종교로 이란에서 기원했다. 사원은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순수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곳을 표방하고 있는데, 사원내부에서는 침묵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사원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꽃모양을 한 독특한 외관을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연꽃사원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참고로 바하이 사원은 세계적으로 7개가 있는데 어느 사원이든지 9개의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9’라는 의미가 하나로 된 숫자 중 가장 큰 수()임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단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인도 국민은 80%가 힌두교를 믿지만 타 종교의 문화적 영향력은 곳곳에 뚜렷이 남아있다. 특히 델리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와 불교는 물론 신흥종교까지 혼재된 종교 문화의 단면을 압축해서 보여 준다. 1844년 인도에 들어온 신흥종교 바하이교의 사원도 그중 하나다. 여기서 주의할 게 하나 있다. '바하이교'라고도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바하이 신앙이라는 점이다. 영어로도 'Bahai Faith'이지 'Bahaism'이 아니다.



잠시 후, 하얀 연꽃의 형상을 한 델리의 바하이 사원이 나타난다.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두 개를 이어 놓은 듯한 형태인데, 생소한 신흥종교에 대한 호기심에다 아름다운 외관에 대한 흥미까지 더해져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진 이 사원은 이란 출신의 캐나다 건축가 파리보즈 사바(Fariborz Sahba)‘의 설계로 1980년부터 1986년에 걸쳐 완공되었는데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고 절제된 현대미를 갖고 있다. 34m 높이의 사원은 대리석으로 된 27개의 꽃잎이 9면으로 이뤄진 연꽃의 모양을 띠고 있고 9면의 기단이 물 위에 세워져 있어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연꽃 사원(Lotus Temple)으로도 불린다.



내부관람은 생략하기로 했다. 빠듯한 일정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는 가이드의 결정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어간다고 해봤자 둥그런 천장 아래 어떠한 형상도 없고 그저 기도할 수 있는 긴 의자가 전부라는 귀띔까지 해준다. 억울해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게 바하이교의 특징이란다. 아쉬운 마음을 털어버렸으니 이젠 바하이교에 대해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바하이교는 1864바하 울라(Baha Ullah)‘라는 이슬람교 지도자가 신의 계시자(啓示者)를 자처하면서 창시한 중동계 신흥종교다. 바하이교도들의 최대 과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인데 종교통일, 세계평화, 인류교육, 남녀평등, 세계 공통어 제정 등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바하이국제공동체BIC는 유엔의 각종 국제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 현안문제의 실무적 협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사원의 앞에는 정보센터(Information Center)가 자리하고 있다. 인도의 대다수 옛 건축물들이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사암(砂巖)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붉은 색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외부를 흙으로 덮어놓아 흡사 어느 묘역(墓域)에 들어온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저런 정도의 정보센터를 지어놓은 걸 보면 사원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세계에서 일일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며, 매년 25십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라고 하니 어련하겠는가. 모든 종교와 민족의 화합, 모든 차별의 배제, 나아가 세계연방 수립과 세계 공용어 도입까지 주장함은 물론 여성과 어린이까지 존중한다니 꼭 믿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 만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라면 바하이교는 ‘We are the world’를 외치는 종교라 여겨도 될 것 같다. 그런 정신에 걸맞게 사원 내부에서는 어떤 신에게 기도하든 관계없다. 다만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어떠한 소리도 내서는 안 되고 사진촬영도 안 되는 규율을 따라야 한다.




바하이사원을 빠져나오는데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크교(Sikhism)‘ 신도(信徒) 중의 한 명이 공양(供養)이라도 베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도 경제의 20% 정도를 책임지고 있는 시크교 신도들은 기부(寄附)하는 걸 공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시크교는 힌두교의 신애(信愛, 바크티)사상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이 융합되어 탄생한 종교로 신도수가 세계적으로 23백만 명에 이르는 세계 5대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시크교 신자들의 특징은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에 쓴 터번이다. 머리카락은 죽을 때까지 자르지 않는단다. 우리의 조선시대와 같은 모양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体发肤受之父母)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효경(孝經)’에 실린 공자 말씀으로 그의 제자인 증자에게 한 말이다. 이왕에 나온 김에 그가 말한 효의 마지막도 옮겨볼까 한다.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즉 세상에 나아가 올바른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어버이를 섬김이 처음이고, 군주를 섬김이 중간이며, 입신하는 것이 마지막이다이라는 것이다.



다음 방문지는 라지가트(Raj Ghat, 힌디어: ??? ???)’이다. 간디를 화장했던 라고 보면 된다. 간디에 관한 자료·유품·사진·도서를 전시하고 있는 간디 기념박물관을 포함하여 2개의 박물관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라지가트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네루(Nehru :인도의 초대총리로 민족운동지도자)’ 집안 3(네루, 산자이 간디, 인드라 간디)의 화장터인 샨티바나(Shanti Vana)’2대 수상인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Lal Bahadur Shastri]’의 화장터인 비자이가트(Vijay Ghat)’가 있다.



묘역(墓域)으로 들어가는 길은 널찍하니 정비가 잘 되어있다. 마치 공원(公園)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긴 라지가트는 아름다운 공원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 많은 델리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단다. 또한 인도국민들이 국부(國父)로 모실 정도이니 이 정도는 꾸며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또 다른 문()이 나타난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라지가트(Raj Ghat)’가 나온다. ‘라지가트는 간디의 무덤이다. 일반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화장한 뼈를 강물에 띄워 보내지만, 간디는 인물이 가지는 역사성 때문에 이처럼 기념물을 만들어 기려지고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라지가트를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대()를 한 바퀴 돌면서 내부를 엿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는 게 싫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위에서도 잘 바라보인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사각형의 벽 안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한 가운데 간디의 묘지(墓地)가 있다. 묘지라고 하지만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오석(烏石)으로 네모난 상석(床石)을 만들고 그 뒤에 꺼지지 않는 불을 켜 놓았다. 상석 앞에는 향로석을 만들어 놓았다. 이들 돌 위에는 메리골드 꽃이 바쳐져 있다. 사람들은 이 묘지 주위를 돌면서 간디에게 존경을 표한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지어준 이름이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나라 포르반다르(Porbandar)의 총리였던 카람찬드 간디와 그의 네 번째 부인 푸틀리바이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고 남아프리카 원주민의 자유 획득을 위하여 활동했다. 1914년에 인도로 돌아와 무저항·불복종·비폭력·비협력주의를 원칙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920~22, 1930~34, 1940~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1946~47,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나고, 478월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자 간디는 양쪽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여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으로 폭동이 가라앉고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불과 며칠 뒤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948130일 힌두교 근본주의자 고드세(Nathuram Godse)’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암살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단다. 종교의 차이로 인해 인도가 두 나라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통일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삶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 인도 수상이자 간디의 오랜 동료였던 네루(Jawaharlal Nehru)’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가 아버지(Bapu)라 부르며 따랐던 국부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표현의 애도문을 발표했다. 인도국민이 받아들이는 간디의 위치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표현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는 아직까지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석 전면에는 그가 죽으며 마지막으로 한 말 '헤 람(? ??: 오 하느님)'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하느님께 인도의 미래를 부탁했다. 그러나 인도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졌고, 파키스탄에서 또 다시 방글라데시가 갈라져 나갔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통일조국은 당분간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통일조국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 반대파의 총탄에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우리 김구 선생과 비슷해 보인다.



간디가 암살당한 요일인 매주 금요일에는 이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날만 추모객들이 찾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내내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숫자가 워낙 많아 이곳에 분향된 꽃은 결코 시드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인도의 마지막 일정은 인디아게이트이다. 가는 길에 차창을 통해서나마 인도의 행정수도인 뉴델리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뉴델리의 중심이랄 수 있는 라즈파트(Raj Path)의 중앙 관청지구를 두 바퀴나 돌아주는 선심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뉴델리1931년 델리의 남쪽 교외에 새롭게 건설된 계획도시로 중세의 도시인 올드 델리와 대비된다. 뉴델리의 중심을 이루는 곳은 서부의 중앙 관청지구로, 대통령 관저를 둘러싸고 여러 관공서와 국회의사당이 늘어서 있다. 관청지구 동쪽으로는 전승기념문인 인디아 게이트가, 북쪽으로는 쇼핑과 레크리에이션의 중심지인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가 자리한다.



아래는 광장(廣場) 주변의 관청들을 한꺼번에 담은 사진이다. 어둠 때문에 사진이 별로여서 다른 분의 사진을 잠시 빌려왔다. 현재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는 라쉬트라파티 바반(Rashtrapati Bhavan)’은 영국 식민지시절 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라쉬트라파티(Rashtrapati)’는 대통령을 뜻하는 힌두어이다. 여기에 집(house)이라는 뜻의 바반(Bhavan)’을 합쳐 대통령궁이 된다. 이후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대통령궁으로 바뀌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가원수의 관저란다. 건축양식은 동서양이 혼재돼 있어 멀리서 보면 전형적인 영국 고전 건축 양식을 띠고 있지만, 가까이 갈수록 무굴 양식의 건축물과 흡사해진다.



뉴델리를 상징하는 라즈파트(Raj Path)는 우리말로 왕의 길이란 뜻이다. 무려 200,000에 이르는 인도 행정의 중심지로 대통령 관저인 라쉬트라파티 바반(Rashtrapati Bhavan)’으로부터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까지 곧게 뻗은 대로 위에 국회 의사당 등의 정부 건물이 밀집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로쯤이 되는데, 워낙 넓다보니 수많은 방문객이 드나드는데도 붐비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 공화국 창건일인 126일만은 다르단다. 각종 퍼레이드와 낙타 기병, 코끼리 기병 등의 군대 사열식이 벌어져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관저의 좌우로 웅장한 담황색 건물의 인도정부 행정관청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방사선 방식으로 사방팔방 곧게 뻗은 도로 주변은 잘 가꾸어진 잔디밭들이 이어지고, 하얀색으로 칠해진 방갈로식의 건물들은 정부 관리들이 사용하는 관사라고 한다. 참고로 원형 건물이 인상적인 국회의사당 길을 따라 방사선의 안쪽을 향해 들어가면 제일 안쪽에서 원형의 상가인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를 만날 수 있다. 뉴델리의 중심지로 꽃나무와 분수로 꾸며진 풍부한 녹지와 함께 고급호텔, 항공사, 은행 등 고급 업무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는 사설 무장경비가 지키는 저택이 즐비하단다.



인도문(印度門, India Gate)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버렸다. 인도문은 문() 모양의 전쟁기념물(War Memorial)이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영국령 인도제국의 군인 약 85천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파리의 개선문을 바탕으로 에드윈 루티언스(Sir Edwin Lutyens)’에 의해 설계되었다. 높이 42m의 아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독립시켜준다는 영국의 말만 믿고 참전했다가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위령탑(慰靈塔)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영국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된 셈이다.



모양은 프랑스의 개선문이나 우리의 독립문 비슷하나 규모가 크고 잔디로 꾸민 광장은 엄청나게 넓다. 광장은 엄청난 인파들로 붐비고 있다. 델리 시민들의 소풍과 휴식장소로 사랑받고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날이 어두워져선지 탑은 은은한 조명이 비춰지고 있다. 매일 오후 7시부터 930분 까지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란다.







아치(arch) 아래 중앙에는 '불멸의 불(Amar Jawan Jyoti)'이 점화되어 있다. 1972, 인도독립 25주년을 기념하며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소총(小銃) 위에 올려져있는 철모가 눈길을 끈다. 착검하여 거꾸로 세운 뒤, 그 위에다 철모를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전쟁영화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전사자가 생겼을 때 산자들은 죽은 자를 묻고 그가 쓰던 장비를 저렇게 해놓은 다음 그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인디아게이트의 뒤편으로는 뉴델리를 상징하는 라즈파트(Raj Path), 왕의 길이 곧으면서도 널따랗게 뻗어나간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탄두리치킨(tandoori chicken) 정식이다. 이번 여행에서 첫 외식(外食)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번 일정은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하루 세끼를 모두 호텔에서 해결했었기 때문이다. 음식 때문에 고생을 자주 하게 되는 인도의 현지사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지음식을 먹다가 자칫 배탈이라도 난다면 낭패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탄두리 치킨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전해지는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각종 향신료와 발효유에 재운 닭고기를 쇠꼬챙이에 꽂아 향기롭게 굽는 요리로, 전통 방식으로 구울 때 쓰는 원통형 점토 화덕 탄두르에서 탄두리 치킨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nann)‘이나 차파티(Chapati)‘에 싸서 주 요리로 먹는 것이 전통적이며, 버터 치킨과 같이 크림으로 만든 커리(curry)‘에 들어가는 재료로도 많이 쓰인다.



가이드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다니다 보니 식당 이름도 기억해놓지 못했지만 암베르 성(Amber Fort)‘에서 만났던 거울의 궁전(Sheesh Mahla)‘을 떠올리게 만드는 실내장식이 돋보이는 식당이었다. 고풍스런 식당의 가구들도 눈길을 끌었다. 델리 최고의 맛집이라는 가이드의 자랑이 허풍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시원한 맥주를 반주로 삼아 먹었던 식사도 가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향신료를 적게 넣었던지 인도 음식인 줄도 모르게 할 정도로 우리 입에 딱 맞았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