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포함한 생화학무기 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일본제국 소속 육군 부대. 하얼빈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 본부(関東軍検疫給水部本部)"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2. 설립[편집]
'방역급수부'란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한다는 뜻이다. 즉, 부대 이름대로라면 예방의학의 연구 및 식수의 병참을 연구하는 부대여야 했다. 그러나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명칭은 위장 명칭으로 전락했고 비인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 생물학무기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러한 생체 실험의 대상을 '마루타[2]'라고 불렀다. 희생자 중에서는 전쟁 포로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조선인, 몽골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소련군, 미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미국 또한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 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731 부대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른 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3] 이는 미군과의 사법 거래에 의한 것이다. 미국이 자료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 탓에 죽어나간 사람들만 피눈물을 흘리게 됐고, 이는 미국이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위안부 문제와 달리 731 부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다.
일제 공무원, 군속, 군인의 계급은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731부대에는 군인들 외에도 의사, 간호사 등 군속들이 복무하고 있었다. 고등관, 판임관, 고원 등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무원들 계급이고, 기사라든가 기사의 보조인 기수 등은 국가가 공인하는 기술자들의 자격 명칭이었다. 보통 전문학교나 고등실업학교 출신 수준의 기술자를 기수, 거기서 경력을 더 쌓으면 기사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기수가 기사자격증, 기사가 기술사 자격증 정도로 보면 된다. 고등문관시험 합격자가 고등관, 보통문관시험 합격자가 판임관이었으며 고원의 경우는 필요에 따라 뽑는 계약직 기능직 공무원들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5, 7, 9급 출신에 각각 대응된다. 이렇게 딱히 731부대만의 특별한 호칭은 아니고,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 취급을 해 줬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당시 일본의 직제에 하사관은 판임관 4~1등(4등이 낮고 1등이 높다)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소위는 고등관인 주임관 8등이었다. 용인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옛날 기능직 공무원 같은 건데 필요에 따라 뽑는 노무자들 정도였고, 고원은 구태여 말하자면 무기계약직 사무보조 공무원 같은 건데 이 시대에는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들이 수습기간에 고원 신분으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빽으로 관청에 들어가서 고원으로 일하다가 5년 전후로 판임관 정식 발령이 나거나 말거나 했다. 그리고 판임관 대우라는 것도 있었는데 판임관보다는 아래로 취급받았는데 이를테면 형무소 말단 간수나 경찰 중 순사나 순사부장이 판임관 대우였다. 한편 '기수'라는 직책을 살펴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온 이상이 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데서 알 수 있듯 기초적 전문기술이 있는 기술자를 일컫는 말로 관청 기수라면 경부나 경부보와 비슷한 판임관에 해당했으며 '기사'가 되면 주임관의 직급을 받았다.
731 부대를 다룬 미디어들 중 소설 마루타나 영화 흑태양 시리즈 같이 악마의 포식[4]을 참조했다는 작품들을 보면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가 아주 개판으로 설명되어 있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서 이시이 나가데가 요시다에게 부대 계급을 설명해주면서 '마루타 특설감옥 간수들을 죄다 이시이 시로의 고향에서 대려왔는데 판임관 대우를 해 준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게 정현웅이 어디서 저 '판임관 대우'라는 말을 보고 저 이야기를 한 거라면 아마도 진짜 일제시절에 있던 공무원 계급인 '판임관 대우'였을 확률이 크다.[5] 또 진청민의 '일본군 세균전' 같은 학술서도 뭘 참고했는지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에는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731부대의 진상은 1981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에 연재된 논픽션 '악마의 포식'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악마의 포식"은 당시 "적기"의 기자였던 "시모사토 마사키"가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731부대와 일본군의 생체실험 등을 추적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가 연재한 논픽션이다. 총 2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적기"의 일간지판에 1981년에 연재되었고, 제2부는 적기의 일요일판에 1982년에 연재되고 코우분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글에 실린 731부대에 대한 내용은 다시 공산당 소속 의원이 국회에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악마의 포식' 연재 이전부터 731부대의 존재나, 그 부대에서 있었던 만행의 대략적인 개요는 알려져 있었던 듯 한데, 1969년에 발행되어 다큐멘터리 라디오 극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한림출판사의 5권짜리 태평양전쟁 책에서도 731부대의 존재와 이시이 시로의 이름, 그리고 그 부대에서 했던 제반 실험 등등이 자세하지는 않으나마 어느정도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이 존재했었던 것이 그 증거다.[6] 그리고 당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731부대 이야기를 알게 되는 계기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방영때 저 부대가 나오면서부터인데, 여명의 눈동자 원작 소설은 70년대 후반에 연재되었다. 악마의 포식이 연재되기 전부터도 저 부대의 정체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부대 중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곳이 있다더라'라는 이야기가 '일본 군부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초초초초 특급 비밀'이라는 것 자체가 약간은 과장된 사실로 볼 수 있다. 관동군이나 대본영에서 731 부대의 실험을 참관하며 생화학전을 논의하던 장교들 숫자도 적지 않으며, 애시당초 일본군 내에서는 731부대 말고도 관동군 제 100 부대니 등등 본토나 조선 만주 중국 등 점령지 전체에 생사람을 잡아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가 여럿 있었다. 하는 일의 성격상 알면서도 쉬쉬하는 구석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731부대가 국화문장이 없는 유일한 부대일 정도로 천황도 모르는 부대라느니[7], 이시이 시로나 아주 극소수의 고위층 빼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유지된 유일한 부대라느니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하는 부대도 많았고, 그 부대들끼리 나름 인력교환도 있었으며[8] 그 부대들끼리의 업무를 자기들끼리 알아서 한 게 아니라 관동군이나 더 상위 부대 등의 명령과 조정을 받아서 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4월 13일과 같은 해 8월 4일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사족으로 당시 책에 실렸던 사진 35장 중 20장은 실제 사진이 아니었다고 한다. 1982년 9월 16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서 관련 기사가 나왔었다. 개정판에서는 수정됐다고 한다. 한국에서 '마루따' 내지는 '악마의 포식'이라고 나온 판은 전부 초판본이다. 그런 이유로 731을 방문한 독일 장교 내지는 731이 생기기도 전에 나온 병원 사진이나 중국 병원에서 찍은 검시 사진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하니 주의할 것.
1998년KBS 일요스페셜에서 "731부대는 살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시청자들의 큰 충격을 줬다.1편2편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한국전쟁에서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득을 얻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9]는 내용 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10]
미국의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해준 731부대 다큐멘터리 장면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이시이 시로는 독일의 나치 의사 요제프 멩겔레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악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아우슈비츠와 비견될만한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노약자 및 임산부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를 요망한다.
이들이 가행한 잔혹한 행위는 아무 검색 사이트나 들어가서 731부대라고만 처도 관련 사진이 쏟아져 나온다. 흑백이라 잔혹함이 덜해보이긴 하나 어쨌든 매우 혐오스러운 광경이므로 보기 전에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에 출판된 저서 중에는 재중동포인 진청민이 쓴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이라는 책을 참고해봐도 좋다.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따》도 추천. 일본인이 직접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가면서 작성한 책이다.
물의를 일으키거나 탈주를 시도한 수용자는 24시간 이내에 실험을 종료시킨다. 이 때문에 수용자가 폭동을 일으킬 경우 아예 학살을 하기도 했다.
731부대의 모든 구성원(부대지휘관 포함)은 731부대에 몸담고 있는 도중에 사망하면 그 시체는 생체실험 비교자료를 얻기 위해 부검된다.
어떠한 경우라 해도 수용자는 석방시킬 수 없다. 실험이 종료된 이후의 수용자는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무조건 소각 처리한다.
만약 적과의 교전에서 패배 또는 기타 다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731부대를 해체해야 할 경우에는 모든 수용자를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정리란 수용자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국 "정리"가 실현되었다. 7동의 마루타들은 청산가스로 살해하고 8동의 마루타들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남성 마루타들은 2명씩 짝을 이뤄서 서로 로프 고리 속에 목을 넣고 로프 중간에 곤봉을 끼워서 두 명이 합해 돌리는 식으로 자살을 시켰다. 여성 마루타들은 목을 매게 했는데 문의 손잡이에 로프를 매단 바람에 신체를 오그리고 발을 오그리는 식으로 죽어야 했다.
수용자의 탈주를 도와준 731부대원은 직위 해제는 물론이고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사형 또는 이에 준한 형벌을 받는다.
처음 전입한 신병은 수용자 중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수용자를 때려 죽여야 한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읽기 전에, 거부감이 드는 잔혹한 내용이 많으므로 주의할 것. 또한 혹시 호기심이 생겼어도 해당 사진은 절대 찾아보지 않는 것을 권한다.
단편적으로 알려진 731부대 실험 내용은 소련군의 만주 공습 때 남겨져서 부대시설 소각을 맡은 부대원들이 소련군에 잡히고, 하바롭스크 재판을 받으면서 알려진 정보다. 물론 이들은 실제 실험의 핵심 내용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11]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아있는 실험체에 탄저균, 천연두균 등의 바이러스균을 주사하여 결과를 지켜보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심지어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하였다. 그리고 포로의 대량 처분에 독극물을 쓰면 돈이 들기에 어떻게 빠르게 대량학살을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사람을 저진공에 집어넣어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2]
이들은 어떨 때는 피험자에게 마취를 하지도 않고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동물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고, 그걸 거의 다 시도했다.
총기 관통력 테스트를 한다고 산 사람한테 총을 쏘았다. 30명을 3개의 조로 나눠서 일렬로 세워놓고 실험을 했다. 팬티만 입힌 조, 평상복 조, 겹겹이 방한복을 입힌 조로서 팬티만 입힌 조는 전원 사망, 평상복은 6명 사망, 방한복은 2명 사망했다.[13]
저온에서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고 멀쩡한 임산부를 강제동원해 몸의 일부만 얼리는 실험을 했다.
사람을 통째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는 행위도 했다는데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인간의 70%가 물이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실험에 대해서는 다른 말도 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건조시키는 것인 건조실험을 한 결과라는 말도 있다.
영하 50도에서 몇분이 지나면 죽는가 관찰하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 독가스 실험은 직접 카메라로 찍었는데 독가스를 터트리고 몇 분 후에 죽는가를 실험했고, 마루타들의 몸에 전기코드를 연결한 다음 독가스를 터트려 몸의 변화 관찰, 페스트균을 터트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관찰했다.[14]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15]
그런데 이것들은 731부대 자체가 흑역사가 돼버리는 바람에 정보 취득 출처를 숨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시이 시로 항목에서 보듯이 역정보와 정보 오염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서 페스트균이 벼룩의 체내에 기생함으로써 벼룩의 보호막 안에서 균도 보호되고 계속 번식을 하는 이상적인 사이클을 발견했으나 이건 오늘날 방역상의 발견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뒤에 서술되어있듯이 이때 취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떵떵거리고 산 경우가 많다. 마냥 의미없는 실험만 했다면 이런 인종들과 사법거래를 하고 승진까지 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위 실험 중에서는 이후 상황이 재현된 것들이 여럿 있는데[16] 그 예가 원심분리기 실험과 진공 실험이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과가 관찰되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도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사실 스너프에 준하는 몇몇 포르노 매체의 것이 검증 없이 곧바로 대입된 탓이 있다. 다른 곳에서 한 실험이 731부대에 의한 것으로 오해를 사는 것도 수없이 있다. 어떤 의미로는 731부대를 이용해서 일본 전역에 걸친 전쟁범죄 행위에 물타기를 한 것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생체실험을 하고 세균이나 기타 살상 가능한 무언가를 연구하고 뿌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한 부대는 이 부대 말고도 여럿이 있다. 참고로 일단 관련 증언은 있다.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성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18]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접종되어 그 효과를 연구했다. 물론 예방접종이라고 위장하였다.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를 강간하여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질병 전파 벼룩을 대량으로 얻기 위하여 수용자에게 벼룩을 감염시키고 세균전의 유용성을 연구하였다.
일부 수용자에게는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만두에 집어넣고 급식시켰다. 당시 수용자에게 지급되는 음식이 만두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페스트,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세균을 증식하는 과정에서 731부대에서도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731부대의 판임관[22]과 고등관[23]들은 실험이 이미 끝났지만 살아있는, 그러나 실험으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이때 판임관들 사이에서 도박이 행해졌는데 명중되는 부위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수용자의 신체 부위에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그 간부가 도박에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했다.
731부대의 군인들은 때때로 아직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731부대에서는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수용자 중에 가장 병약하거나 가장 반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육모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으로 인식한 일본군 병사가 수용자를 탈출시켜주는 것과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공범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조직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다.
731 부대에 의해 실험당한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단 1명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실험 자체가 생존할 확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진짜로 죽을 때까지 실험하는 일도 흔했다. 상기한 내규에 따라 생존자도 모두 처리되었다. 독립운동가들도 실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 실험을 주도한 자들도 이게 만행이라는 것은 알았는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진격한 소련군에게 발각나기 전에 만주 작전을 개시해서 남아있는 실험 대상자와 관련 시설을 주도면밀하게 모두 제거한 후, 실험 결과를 적은 문서 따위만 휴대한 채 성공적으로 일본으로 도주했다. 게다가 실험을 저지른 작자들의 전우회도 있다. 전우회의 이름은 각각 '정혼회', '파공회', '방우회'라고..
일본 의학계는 731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731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731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었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24]
731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절반가량인 25명이나 사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소련에 12명, 중국공산당에 13명(헌병대 이송책들까지 포함)이 잡혀서 하바롭스크, 푸순, 선양, 타이위안 등지에서 심리와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6년 강제노동형, 만주의 푸순 유형 10년 노동교화제에 처해졌다. 이때 공산권의 추운지역 강제노동형과 노동교화제도는 사형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이들이 판치고 다니게 된 것에는 최대 피해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공산국가이며 냉전이라는 특성상 당시 자유진영이었던 일본이 자유진영 맹주 미국의 우방이라 미국이 덮어주기 쉬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25][26] 따라서 731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것에는 최대의 피해국인 러시아, 중국이 나서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큰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공론화해줘서 다행이라는 평이다. 중국이 일본을 GDP순위에서 추월하면서 나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꺼내들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기본 시설과 극비문서 일부, 그리고 731 부대의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거나 1950년대 발굴된 731부대의 기록물에 관해 발표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인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번 발표 자료는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 건의 문서, 70여 건의 시청각 자료로 상당한 수준이다. 관련 기사와 보도
1945년 10월, 731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은 731부대가 아닌 일본 내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되었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만 731부대를 비롯한 자국민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하였다.[27]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하였다.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28]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하나 더하자면 생체실험과 세균전이라는게 조금 쉬쉬했을지는 몰라도, 일본 육군과 전 일본 의학계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얻어 이뤄진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시이 시로의 지휘와 군부 밎 의학계의 높으신 분들의 뒷바라지 아래 인력과 돈이 광범위하게 들어간 사업이라는 건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731부대가 천황도 몰랐던 부대니 국화무늬가 없는 부대니 하는 말 자체가 그저 광범위한 전쟁범죄를 저거 하나로 물타기하려는 꼬리자르기용 어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 저 위에서 이시이 시로가 언급한 이시가와나 오카모토, 그리고 동상 연구반장 요시무라 등은 대체로 교토대 의학부 출신으로 1907,8년생 인물들로 부대 설립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비군인 의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이 부대로 보내고 이 연구결과를 기대하고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의학계의 거물 중에 있었다고밖에는... 그 점에서 일본 군부의 흑역사일 뿐 아니라 일본 의학계 전체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한편 한국인 피해자들도 그 규모는 미상이지만 일부는 그 신원이 밝혀졌다. 731부대 죄증진열관에 공개된 피해자 명단에 따르면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인 피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