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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묵상글 ( 12월 21일. - 우리 만남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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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 만남은?
오늘 아가서 말씀은 연인이 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여인을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얘기이고,
그리고 태중의 두 아기 곧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연인 간의 만남과 같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기쁨과 설렘이라는 면에서는 두 만남에 공통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두 여인의 만남이 어떻게 연인들의 그 기쁨과 설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연인의 그것과 같다면 의미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사실 오늘 아가서의 표현들은 너무 간지럽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제 생각에 두 여인은 연인이 아니라 동지에 가깝고,
그러니 그 만남도 연인들처럼 사랑의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우선 연인처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공적인 만남이고
그러니 우연이나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저의 만남을 생각게 됩니다.
나의 만남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사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닌지.
공적이고 구원을 위한 만남은 얼마나 되는지.
만남 이전에 나라는 사람은 혹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닌지.
수도자가 되어 그저 자기 성취나 자기 복음화에 급급하고
그래서 세상의 복음화는 먼 나라 얘기인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더라도 혹 혼자 애쓰는 나는 아닌지.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세상의 복음화는 너무 거창하니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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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말씀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말씀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복됨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먼저 찾아오신 ‘말씀의 방문’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입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한 일입니다. ‘건너오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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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행복은 무엇인가? 만족한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품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새기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믿음은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였지만, 마리아는 믿었으니 행복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당대표가 되어도 임기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많은 일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소유와 지배의 욕구에서 벗어나 천상을 갈망하며 베푸는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에서 만족하는 삶은 ‘약속에 충실한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에 행복을 더하길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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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2006년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7년 전의 기억입니다. 성탄 무렵에는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주님의 성탄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오랜 기억도 있습니다. 1980년 성탄 예술제를 준비했을 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성당 친구들과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휴! 43년 전의 기억입니다. 의욕이 넘쳤던 저희는 밤을 새워 연습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감 선생님이 우리가 연습하는 강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밤을 새워 연습하라고 했나! 당장 돌아가!” 우리는 집에 허락을 맡았다고 했지만 신부님은 완강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분함 마음을 삭이며 모두 돌아갔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밤을 새워 연습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던 것은 성탄 예술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좋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후배 여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탄 예술제 연습은 하나의 구실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던 혈기 넘치는 학생 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43년 전의 성탄은 뜨겁고, 화끈했습니다. 2023년의 성탄은 아무래도 그때의 열정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는 열정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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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의 대화 주제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두 여인의 대화 주제는 주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살아가나요? 무엇이 우리 삶의 대화 주제일까요?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이 모여 하는 우리 대화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우리 대화의 주제도 ‘주님’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보다 세상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할 때가 있습니다.
돈에 관한 이야기, 권력에 관한 이야기, 세상 사건·사고에 관한 이야기.
맞습니다. 이건 이야기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화의 주제는 주님이어야 하고 기도여야 하고 기쁨의 신앙생활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반성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두 분은 밤을 새우며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쁨과 희망에 찬 웃음으로 밤을 지새우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화룡점정은 엘리사벳이 말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믿음은 두 성녀의 발걸음을 가벼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길을 갈 때도 믿음은 두 여인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은 두 여인을 주님의 행복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기를….
우리의 믿음이 우리 삶의 주제를 주님으로 바꾸기를 희망합니다.
빠지는 것은
성장을 의미합니다.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치아가 흔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흔들리는 치아에 실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반대쪽 실 끝은 화장대 서랍에 묶었습니다.
하나
둘
셋
서랍장은 닫혔고
제 치아는 하늘로 부상해 생애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치아가 빠지며 커왔습니다.
요즘 이야기입니다.
머리카락이 얇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힘없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샴푸를 써봐도 머리카락은 치아처럼 바닥으로 번지점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빠지며 저는 또 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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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 갑곶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미사 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미사 때 계속 저만 보고 계셔서요.”
이 자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뵌 분이었고 또 미사 중에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 자매님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은 제가 미사 중에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 교수법 강의를 들을 때, 연극 배우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객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배우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선은 배운 대로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사람들은 제 시선을 피하려고 맨 뒤에 앉지만, 사실 제일 잘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삽니다. 운전할 때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줄을 서면 나의 줄만 짧아지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는 커다란 착각도 있습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사는 것 같고, 고통과 시련은 나만을 찾아서 오는 것 같다는 착각입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의 착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착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께서 만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통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는 찬양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사벳 성녀는 나이 많은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울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계셨기에,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삶을 원망하는 착각의 삶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삶이 새롭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잘살고 있구나. 나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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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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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연인(戀人)이시다
-주님과 사랑의 여정-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오,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소서.”
대림2부 다섯째 날, 12월21일 ‘O후렴’도 마음 설레게 합니다. 당신의 애인인 우리가 보고 싶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이자 이런 주님이 속히 오십사 애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연인인 우리를 일편단심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 사랑의 여정인지요? 요즘 간간히 내리는 흰눈을 보며 오래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불현듯 우리에게 전해지는 주님의 연서(戀書)같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임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임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더불어 떠오른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라는 시입니다.
“푸르른 밤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 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고독이
푸르른 사랑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오,
푸르른 고독이!
푸르는 사랑이!”-2001.2.11
22년전 2001년도 유난히도 참 많은 시를 썼던 해입니다. 주님의 푸르른 하늘 사랑에서 태어난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같은 존재가 주님의 영원한 연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배치도 이채롭고 적절합니다. 교회전통에서 한결같이 신비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 최고의 노래가 아가(雅歌)입니다.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아가1,5)
연인들끼리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신비가들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부인 교회에 대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또 우리 영혼에 대한 주님 사랑의 고백으로 읽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연인인 우리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감미로운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 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하는 계절이 다가 왔다오.’...‘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벌써 대림시기를 지나 꽃피는 부활시기가 온 느낌도 드는 오늘의 아가입니다. 그대로 연인이신 주님의 사랑의 방문에 황홀해 하는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다음 아가서(아가, 안소근 번역, 가톨릭 출판가, 2014, 11-12쪽) 설명에 공감합니다.
“아가는 성경 전체를 위한 열쇠다. 랍비 아키바의 말이 옳았다. 실상 구약성경은 여성 앞에서 외치는 남성의 기쁨에 넘친 탄성에서 시작되고(창세2,23), 신약성경은 신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부의 사랑의 외침으로 끝난다(묵시22,17).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한 가운데에는 아가가, 사랑의 책이, 성경의 심장이 있다.”
얼마나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가인지요! 아가가 없었다면 성경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했을까요. 말그대로 성경의 심장같은 아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은 우리가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오십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날마다의 미사전례를 통해 한결같이 끊임없이 찾아 오십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며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당신의 연인을 찾아 오듯 엘리사벳을 찾아 오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요, 마리아의 방문에 기뻐 환호하는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에 가득차 환호하는 엘리사벳의 고백은 늘 들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이런 엘리사벳 같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중 오시는 주님을 환대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 했습니다. 도반간의 덕담은 이러해야 하니 그대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두분간의 주님을 중심으로 한 더불어의 영적우정이 참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워 감동적입니다. 엘리사벳의 진심 가득한 지지와 격려와 환대가 마리아에게는 큰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갑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간의 우정의 여정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태중이 주님 앞에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은 흡사 마리아 감실 안의 주님앞에서 춤추는 모습이요, 이는 주님의 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췄던 다윗(2사무6,5)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께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표현인 시이자 기도이자 노래인 시편은 춤까지 이르러야 비로서 사랑의 완성이란 생각도 듭니다. 예전 써놨던 글도 생각납니다.
-“그리움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畵)이 되고
그리움
글자로 써내면
시가(詩)가 되고
그리움
소리로 부르면
기도(祈禱)가
노래(歌)가 되고
그리움
몸으로 풀으면
춤(舞)이 됩니다.”-1998.5.5
그리움을 긴 글로 써내니 강론(講論)이 되네요.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주님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자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의 표현인 한곁같은 수행이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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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12월 21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떠나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하늘에서
땅으로
먼 길을
떠나오시는
기쁨이신
아가님
고이고이 품은
여린 엄마
뱃속 아가처럼
몸소 기쁨 되러
숨어 지내던
외로운 벗 찾아
서둘러
험한 산길
한 걸음에
달려가시네
기쁨 모시니
기쁨이어야 할
우리도 함께
하자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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