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삼달리>.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제주도 삼달리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어서 흥미가 가기도 했고, 제주도에 출장 계획도 잡혀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맨틱 코미디가 주는 재미도 기대가 되었다. “개천 지킴이 지창욱과 추락한 개천 용 신혜선의 청정 짝꿍 로맨스”라는 드라마 홍보 문구가 사람을 끌 만도 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다. 결국,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주책맞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죽음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젊은 엄마 부미자는 해녀였다. 절친 고미자와 물질을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남은 가족뿐 아니라 살아남은 친구 고미자의 집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15년 동안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죽은 부미자의 남편 조상태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상처는 더 깊다. 그는 같이 물질을 갔던 고미자에 대한 원망이 컸다. 그녀가 그 위험한 상황에서 물질을 가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혼자 보내지 못해 따라간 길에서, 그의 아내 부미자는 죽고 고미자만 살아 돌아왔다. 그래서 원망스럽다. 바로 골목길 하나를 두고 마주한 집에서 조상태는 고미자를 미워했다. 화해를 청하는 그녀를 매몰차게 뿌리쳤고 악다구니를 쳤다. 고미자의 딸 삼달이를 사랑하는 아들 용필이에게도 원망을 나누었고,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앞집 삼달이에게도 못된 소리를 했다.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스틸컷. ⓒJTBC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실은 자살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이 드라마의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갈등은 유가족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마 작가는 죽음을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을 잘 아는 이 같다. 자살 유가족을 보면 그 아버지같이 주변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이 있다.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원망을 쏟아붓는다. 내 사랑을 그것으로 증명하려고, 나의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합리화해 보려고 말이다. 그러면서 가족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갈등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자살 이후에 남은 가족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서로를 비난하다 이혼하기도 하고, 부모 중 한 명의 자살로 자식과 남은 부모가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나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느냐’는 비난으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자살이 일어나면 가족 가운데서 고인의 죽음은 ‘공개된 비밀’이 된다. 그가 자살로 인해서 죽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면 서로에게 너무 상처가 되니까, 모두가 이야기를 안 한다. 그래서 이를 ‘공개된 비밀’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아버지 조상태만 그 죽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 앞에서 말을 못 꺼냈다. 조상태의 상처가 너무 컸기에, 그의 원망이 너무 컸기에, 그 아들도, 친구 고미자도, 심지어 고미자의 가족들도 그 비밀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러다 이게 자식의 문제로 번지니까 고미자가, 그 착하던 고미자가, 그렇게 죄인이 되어 당하기만 하던 고미자가 폭발했다. 조상태에게 “너만 아프고, 너만 부미자 보냈시냐. 나도 너만치 아프고 너만치 나도 보고 싶다게. 나도 친구 잃었다게”하며 대성통곡을 하며 쏟아 놓는다. 그동안 쏟아내지 못했던 그 말을 드디어 한 것이다. 그 말에 조상태는 후에 ‘너도 보고 싶었냐’고 묻는다.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내의 친구도 그 아들의 고통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드라마의 또 다른 포인트는 고미자의 손녀 차하율이다. 엄마가 스물한 살에 낳은 딸이다.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이제 여섯 살인 아이는 죽음의 그늘을 안고 산다. 이 아이가 할머니의 잠수복을 숨긴다. 심장병이 있음에도 물질을 나가는 할머니가, 그 친구처럼 바당(바다를 일컫는 제주 방언)에서 죽을까 싶어서다. 자신은 경험해 보지도 못한 할머니 친구의 죽음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자살 유가족들도 보면 항상 가족 중 누가 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을 안고 산다. 그 두려움에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못한다. 실은 자신이 위험한데 다른 가족의 안위를 더 걱정한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아니 더 즐겁게 사는 것처럼 지낸다. 혹여 나의 슬픔이 다른 가족을 자극할까 싶어서이다. 그렇게 슬픔은 슬픔으로 남지 못하고 상처가 된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가족의 죽음, 더군다나 자살로 인한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큰 고통을 가져온다. 자살 유가족과 처음 마주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위로할 자신은 없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기에 다가간다. 그런데 대부분 그들은 만남 자체를 꺼린다. 그럴 때 그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 ‘목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죠?’ 대부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찾아온다. 그들과 만나면 꼭 충고해 주는 말이 있다. 죽음의 상처를 이겨내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자포자기해서 내버려두지도 말라고 한다. 죽음의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에 따라 적당히, 조금씩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말이다. 동행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속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잊지도 말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해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공동체가 할 일이다.
조성돈 기독교 자살예방 센터 라이프호프 대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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