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
가깝다, 멀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다분히 심리적인 것일 텐데, 나는 시간적으로 5∼10분 이내의 거리를 가깝다고 본다. 서양에선 스프가 끓는 동안 오갈 수 있는 거리를 가깝다고 한다는데, 이것도 10분 내외가 아닐까 싶다.
내겐 몇 가지가 가까운 곳에 있어 편리하다. 우선 딸 네 아파트가 우리 집으로부터 5분 거리에 있다. 며칠 전 사위가 육회를 사왔다고 연락이 와서 아내와 함께 포식했다. 가족 외식 때도 종종 불러주어 자주 만난다. 딸네가 여행을 떠날 땐 고양이 세 마리를 돌봐준다. 손녀를 자동차로 등교시켜주고, 논술교재를 도서관에서 빌려다준다. 서로 돕고 산다는 게 기쁘다.
두 번째로 교회가 10분 이내의 거리다. 전북대 옆에 있는 H교회를 10여 년 넘게 다녔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고 싶었다. 두어 달 동안 집 근처의 교회를 둘러본 뒤 M교회로 옮겼다. 신도가 백여 명 정도인 가족 같은 교회로 편안한 마음으로 다니고 있다. 수요일 밤 예배에도 참석하고 있으며, 새벽잠이 멀어질 땐 새벽 예배에도 참석할 생각이다.
셋째, 삼천 마전교 옆 둔치에 마련된 파크골프장은 집에서 10분 거리다. 파크 골프를 배운 것은 완주 상관면 냇가에 조성한 상관 파크골프장이었다. 개활지를 공원으로 가꾸고 잔디를 입혀 멋진 골프장을 만들었다. 다만 오고가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불편했다.
그 뒤 혁신도시 공원에 파크골프장을 만들어 손쉽게 이용했으나, 인근 아파트 거주민들의 민원으로 폐쇄되었다. 다행히 마전교 옆 축구장에 잔디를 깔고 파크골프장으로 전용하게 됨에 따라 손쉽게 이용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18홀에다 공을 집어넣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리며, 이동거리는 1.5km가 된다. 2라운드를 돌고 나면 두 시간에 걸쳐 3km를 걷는 셈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필드에 나가면 그만이다. 삼천 바람 길을 따라 가을바람이 건듯 불면 억새와 갈대가 고갯짓을 하는 장관이 펼쳐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밖에 문학대 공원은 집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여서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고 산책을 즐긴다. 근린공원 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만여 평이 넘는 공간에 수천 그루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 인후동에 살 때엔 인근 산을 오르곤 했었는데, 이사를 한 뒤론 공원으로 대신하고 있다.
단골카페 트라움은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오후 세 시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독서를 하거나 수필을 다듬는다. 다른 다방과 달리 조용한 게 마음에 든다. 들리는 듯 마는 듯 음악소리도 볼륨이 적당하다. 이곳을 찾는 데는 몇 주가 걸렸다. 동네 카페 여섯 군데를 몇 번씩 섭렵하고 단골로 정했다. 무엇보다 주인 자매가 친절하고 커피 맛도 좋은 편이다.
아파트 맞은편에 대한방직 전주공장이 있다. 불원간 상업지구로 변경되어 주거, 상가, 문화 및 복지시설로 개발된다고 한다. 언제 착공할지, 완공은 어느 때나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방귀가 잦으면 큰일을 본다고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본다. 그때쯤이면 나의 행보가 그쪽으로 향하리라 보는 데, 거리가 10분 정도 걸린다. 아이들 같이 보채는 것은 경망스럽지만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상처(喪妻)한 친구가 울먹이며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심장발작의 위급한 상황에서 병원이 멀고 교통이 혼잡하여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자책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도 그런 횡액을 당할 수 있구나.’ 안타깝게 여겼다.
나는 의료시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걸 경계한다. 그런 이유로 귀촌도 꺼린다. 지금은 119 시스템이나 종합병원 응급실 체계가 양호해져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불행을 예방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멀리 있는 병원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름 난 동네 의원을 찾아보자.
옛일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일 것이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어느 집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혹시 우리 집일까 싶어 염려했는데,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너희 집에 불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본채 옆 헛간에 불이 붙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찌 할 줄 모르고 멍하니 서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몰려왔다. 다행히 헛간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우물이 있어 쉽게 진화할 수 있었다. 본채와 이웃집으로 불이 번졌으면 큰 재앙이 될 뻔했다. 아궁이에서 내다버린 재에 불씨가 남아 옮겨 붙은 거였다. 샘이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편이다. 동네 무당은 영험이 없다고 한다. 예수도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지 않았던가. 세상 살만큼 살았으니 이젠 가까운 곳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2018.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