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六臣]
단종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에게 내주었을 때 좌우에 있던 신하중에서 입을 열고 단종을 위하여 시(是)와 비(非)를 가려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성삼문(成三問)은 국새(國璽)를 안고서 크게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또 박팽년(朴彭年)은 경회루에 이르러 자살 하려 하였다. 이때 삼문은 이를 발견하고 굳이 만류하면서 "지금 왕위가 옮겨가고 국새가 전해졌지만 전왕이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죽지 말고 좀 때를 기다려 봅시다." 하고 박팽년을 달랬다. 박팽년도 보다 이상 고집하지 않고 삼문의 말에 응하였다. 한편 단종 상왕은 수강궁(壽康宮)에 칩거하여 우울히 그날 그날을 보낼 뿐 이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성삼문은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 塏), 유성원(柳成源) 또 전절제사(前節制使) 유응부(兪應孚) 및 삼문의 아 버지, 단종 상왕의 장인 등과 손을 잡고 단종을 복위(復位)시킬 계획을 비밀히 세웠다. 때마침 명나라 사절(使節)이 와서 태평관(太平館)에서 여장(旅裝)을 풀었 다. 그리하여 세조는 일정한 시일을 정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절 을 위하여 대연(大宴)을 베풀기로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삼문, 박팽년은 "좋은 기회는 왔다!" 고 좋아하였다. 그들은 연회일을 이용하여 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응부를 운검(雲劒) 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연회에 이르러 거사할 때 세조의 우익(羽翼)을 모두 삼제(芟除)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한명회는 세조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연회장으로는 창덕궁이 좁고 또 더웁소이다. 그리고 세자(世子)의 참석 도 운검의 입장도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조는 이 말을 이의 없이 받아 들였다. 성승(成勝)이 운검(雲劒=의장에 사용하는 큰 칼)을 허리에 차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려하자 이를 본 한명회 는 "운검을 차고서는 못 들어오기로 되어 있소. 공도 패검(佩劒)하고선 못 들어옵니다." 이 말을 듣고 분개한 승이 물러나 한명회를 격살하려 하자 삼문이 "세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한명회쯤을 죽인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하고 명회 격살을 말렸다. 그러나 유응부는 이 말에 찬동하지 않고 기어히 명회를 격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팽년과 삼문은 응부에게 차근히 말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 운검의 입장 도 불허하니 어찌한단 말이요? 만약 억지로 일을 일으키면 세자는 경북궁 을 중심으로 대항할 것 같소." "우리에게 해는 있을지언정 이(利)는 없을 것이요. 딴 날 수양과 세자가 같이 있을 때를 엿보아 거사를 하면 쉽사리 목적이 달성될 것이로 생각되 는데..." 그러나 응부는 여전히 우겼다. "이런 일은 신속히 끝을 내야 하는 것이요. 만약 딴 날로 연기하면 사전에 일이 누설되고 맙니다.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다 하지만 모신적자(謨臣賊 子)가 모두 수양에게 붙어 있지 않소! 오늘 이 무리들을 깡그리 도륙하고 상왕을 복위케 하며 호령을 내려 무사로하여금 일대(一隊)의 군사를 거느 리고 경북궁에 들어가게 하면 세자의 도망갈 데가 어디란 말인가? 때는 왔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때는 왔단 말이오." 그래도 팽년과 삼문은 여전히 호기가 아니라고만 고집하였다. 이때 삼문, 팽년의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質)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서 재빨리 장인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우리가 계획한 상왕 복위운동이 뜻대로 될 것 같지 않사온데 태도를 어떻 게 갖는 게 좋을까요? 사전에 밀고를 하면 그 공으로 부귀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사온데..." 창손도 사전 밀고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동조하였다. 그 리하여 창손은 즉일로 사위 김질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김질이 상왕복위 계획에 관여했음을 고하였다. 세조는 처음엔 창손과 질에게 형(刑)을 가하려하였으나 밀고한 것을 기특 히 생각하고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였다. 이 밀고에 의하여 복위운동 배후의 인물이 일일이 알려지고 성삼문, 박팽 년 등은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세조는 평소에 팽년의 재주 를 높이 평가하고 지냈음을 사람을 시켜 팽년에게 "네가 나에게 잘못을 깨닫고 계획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 주겠다." 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팽년은 이 전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음만 지우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칭함에 '상감'이라 부른 일도 없고 '전하'라 부른 일도 없었다. 어느 때나 세조를 칭하여 '나으리'라 불렀다. '나으리'란 나라 종친(宗親)을 부름에 있어서 경어(敬語)에 불과한 것이다. 세조는 대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팽년의 입을 난격(亂擊)케 하면서 "너는 벌써부터 신(臣)이라 칭하면서 내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 않으 냐? 네가 지금에 이르러 '신'이라 칭하지 않는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나 팽년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왕의 '신'이 되어 충정감사로 있을 때 '신'이라 써서 장계(狀啓)한 일 은 있으나 '나으리'에게는 한 번도 '신'이라 하고 장계한 일이 없소. 찾 아보면 아실 것이요." 세조는 팽년의 장계를 모두 검사해 보았다. 과연 팽년의 말과 같이 신 (臣)이란 글자는 한 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세조는 승지(承旨) 벼슬을 하고 있던 삼문을 무사에게 명하여 끌 어내게 하였다. 세조는 김질이 밀고한 내용대로 국문하기 시작했다. 삼문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김질이 밀고한 것이 모두 옳소이다." 대답하면서 김질을 돌아다보았다. "네가 밀고한 것이 좀 덜 분명하고 좀 덜 철저하다." 삼문은 김질을 비웃었다. 세조가 다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려 하는가?" 라고 묻자 삼문은 "일편단심(一片丹心) 전왕(단종)을 다시 모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마음은 모든 백성이 다 알고 있소. 나으리는 우리가 어째서 이런 맘을 갖게 된 것을 모르시오? 나으리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사람이요. 인신(人臣)이 되어서 임금이 망하는 것을 어찌 좌시한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일어난 것이요. 그런데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周公)을 들어 이말 저말 하십디다. 주공도 이런 일을 감행하였나요?"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이 대답에 세조는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왕위를 나에게 선양할 때에 받지 말도록 할것이 아니냐? 지금 와서 이말 저말 별 말을 다하면서 배반하려 하니 그게 무슨 심사냐?" 삼문은 이 말에 새삼스레 세조를 바라보면서 냉소를 했다. "나으리 야심이 전부가 왕위 찬탈에 있었는데 우리가 말린다고 들어 주시 겠소? 그런 말씀은 어린애게나 하시오." "그런데 너도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 부르는 모양이다. 도대체 그러면 너희가 먹고 사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니 모르느냐? 나의 녹(祿)을 받고 살면서 나를 배반할 수 있느냐? 너는 반복한(反覆漢) 이 아닐 수 없다." 세조가 이렇게 말하자 삼문은 "그게 무슨 말씀이요?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는 무엇을 가지고 나를 신 (臣)으로 부리고자 하시오? 또 나는 나으리의 녹(祿)을 받아 먹지 않았 소. 나의 말이 정말로 믿어지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우리 집을 털어 보면 알 것이요." 역시 거침없이 대답하자 세조의 노기(怒氣)는 한층 더 만면(滿面)해졌다. 세조는 무사를 불러 세우고 철봉(鐵棒)을 불 속에 넣어 달군 후에 그것으 로 삼문의 다리와 팔꿈치를 사정없이 지지게 하였다. 그러나 삼문은 태연 한 태도로 말했다. "나으리 너무 심하지 않소? 나으리의 형(刑)은 참혹하구료." 그런데 때마침 신숙주(申叔舟)가 세조의 곁에 있었다. 삼문은 숙주가 눈 에 띄자 크게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지난날에 너도 집현전의 한 사람으로 있었지? 그때 영묘(英廟=세종)께서 는 원손(元孫=단종)을 안으시고 정중(庭中)을 거니시다가 우리들에게 부탁 하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후라도 경 등은 모름지기 이 애를 염두에 두고 잘 수호해 달라>고 천탁(千托), 만탁(萬托)하시지 않았나? 그때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너는 하루 아침에 그 어른의 부탁을 잊고 말 았구나? 네놈의 마음이 그렇게 더럽게 변할 줄 뉘 알았겠느냐?" 삼문의 말씨가 이러하자 세조는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신숙주를 전각(殿 閣) 뒤로 피신케 하였다. 이때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도 국문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안도 굴복하지 않았다. 세조는 삼문에게 물었다. "희안은 너희의 음모에 가담한 일이 없느냐? 숨김없이 말을 해라." 삼문은 이 물음에 "희안은 당초부터 우리와 가까이 한 일이 없소이다. 나으리는 전조(前朝) 의 명신이라면 모두 다 참살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남은 사람은 강희안 뿐인 것 같습니다. 좀 남겨 두어서 등용하시는 것도 유리할 것입니다. 강 희안은 정말 현자(賢者)올시다." 하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강희안은 세조의 손에 죽지 않게 되었다. 다음으로 세조의 국문은 유응부에게로 옮겨졌다. 세조는 응부를 불러 세우고 "너는 연회석에 왜 참가하려 하였느뇨?" 묻기 시작했다. 유응부는 "연회일에 참가하려 한 것은 다름이 아니요. 첫째, 일척검(一隻劒)으로 족 하(足下)를 몰아내고 전왕 단종을 모시려 함이었소.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동지 중에 간물이 있어 그 자의 밀고로 일이 망쳐지게 되었소. 족하! 더 물을 것 없소. 한시 바삐 나를 죽여 주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너는 상왕의 이름을 빌어 일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의 심사를 알 겠다." 그리고는 무사로 하여금 몸의 가죽을 벗기고서 고문케 하였다. 이때 응부 는 삼문을 돌아다보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학자님들과는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니 그들 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지난날 연회일에 내가 칼로 세조의 도배를 도륙할 할 때에 당신들의 만류로 부득이 멈추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됐소. 당신들은 책략이란 것을 모르니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요? 더 말하고 싶지 않구료." 하고서 다시 세조에게 "딴 무슨 물을 것이 있으면 저 학자님들에게 물어보시오!" 세조는 이 말에 격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빨갛게 달군 철봉을 배 아래 두 다리가 회합(會合)하는 곳에 놓은 후 거기에다 기름을 부어 지지게 하였 다. 그리하여 그곳의 피육(皮肉)은 익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응 부는 비명도 울리지 않고 철봉이 냉랭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철봉이 이제 다 식었다. 다시 불에 달구어 가져 오너라." 하고 철봉을 땅에 내던졌다. 철봉은 다시 달구어져서 그의 사타구니를 지졌다. 그러나 응부는 최후의 일각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개(李塏)가 작형(灼刑)을 받게 되었다. 이개는 그때 "이런 형벌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 있소?" 세조에게 물었으나 세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작형은 다음으로 하위지(河緯地)에게로 옮겨졌다. 하위지는 "우리들의 행위가 반역(叛逆) 행위라면 참(斬)하는 게 국가의 정법(正法) 인데 무엇을 묻고 또 국문한단 말이요?" 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리하니 세조도 그말에 찔리는 게 있던지 하위지에는 작형을 가하지 않고 말았다. 국문을 다 받은 성삼문은 궁문(宮門)에서 나오려할 때 좌우신료(左右臣僚) 들에게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을 누려라. 삼문 나는 지하로 돌아가 고 주(故主=세종)를 뵈옵겠다." 하는 말 한마디를 남겨 놓은 후 수레에 실려 참형장(斬刑場=새남터)으로 끌려갔다. 때는 가을해가 뉘엿뉘엿 저물려하고 있었다. 삼문은 형을 받기 전에 다음 과 같은 절명시(絶命詩)와 시조를 남겼다. 擊鼓催人命, 西風日欲斜. (가을 바람 소슬하고 해는 저물려하는데, 북을 치며 죽이라 재촉하네)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저승엔 객주집이 없다는데, 오늘 이 밤을 뉘집에서 새울고?)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삼문이 죽은 후 그의 집을 검색하였더니 과연 을해(乙亥) 이후 곧 세조가 즉위한 후부터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다 별실에 넣고 월일(月日)까지 기 입해 두었다 한다. 이것을 보면 세조가 준 녹봉에는 손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개(李塏)도 역시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갔는데 그의 절명시(絶命詩) 는 다음과 같다. 禹鼎重時生亦大 (목숨이 우정처럼 무거워진 때엔 사는 게 명예롭지만) 鴻毛輕處死猶榮 (목숨이 홍모처럼 가벼워진 때면 죽는게 오히려 영광스러우리)
창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타는 줄 알더라.
이밖에 몇 사람의 절명시와 시조 같은 것은 입수(入手)되지 않아서 여기에 기록하지 못했다. 끝으로 유성원(柳誠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써보기로 하자. 성원은 사 예(司藝)란 벼슬을 가지고 성균관에 있었다. 성삼문 등이 국문을 받던 날 성균관의 여러 유생이 성원에게로 와 "선생님! 세조의 국문이 참혹한 모양입니다. 국장으로 끌려가시면 선생님 도 작형(灼刑)하에서 국문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성원은 당장에 수레 몸을 담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 기가 무섭게 자기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게 한 후 그 아내를 상대로 술을 마셨다. 이와같이 부부가 대작한 후 성원은 가묘(家廟)로 들어갔다. 그러 나 들어간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나오지를 않아 이를 의심스러이 생각한 부 인이 가묘로 들어가보니 성원은 관대도 벗지 않고 패도(佩刀)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었다. 부인은 물론 가인들도 왜 자살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경과되자 포교(捕校)가 와 죽은 시체를 가져갔다. 세조는 성원의 시체가 국문장에 이르자 형리를 시켜 다시금 육시를 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