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일태 한국해양대학교 국제무역경제학과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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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섣달 그믐날 아침이다. 휴대폰에서는 연달아 삑삑하며 문자메시지 걸려오는 소리가 난다. 하나 같이 지난 한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새해에는 복 많이 받고 건강하시라는 문자 메시지다.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歲暮(세모)에 보내던 연하장도 스마트폰의 문자메시지로 바뀌어 버린 지가 오래전의 일이다. 양력 설날에도 꼭 같은 문자를 받았는데 음력 설날도 챙겨주니 고맙기는 하지만 예전의 연하장만은 못하다. 오후쯤에는 몽땅 모아 한꺼번에 답장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일일이 문자를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다. 이번에는 통화음이 길다. 멀리 사는 친구가 문자메시지를 보았느냐고 묻기에 제가 보낸 문자 연하장을 말하거니 해서 문자메시지 보내주어 고맙다고 말하자 그게 아니란다. 동창생 댁에 초상이 났다는 訃告(부고)문자가 여러 번 왔는데 보지 않았던 것이 탄로가 난 것이다. 연하장인줄 알고 보지 않았는데 부고일 줄이야. 연하장뿐만 아니라 부고도 스마트 폰으로 보내는 시대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부고를 받으면 대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헛간의 지붕 서까래에 꽂아 두었다. 내가 만지면 不淨(부정) 탄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 부고를 요즘은 모두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니 오지게 부정이 탈 것만 같다. 조문을 갈 것이냐고, 혹시 조문을 간다면 대신 부조금을 부탁한다는 전화다. 부탁할 사람이 나 밖에 없다면서 혹시 조문을 간다면 조의금은 내 통장으로 지금 입금하겠단다. 부엌에서는 아내가 분주하게 설빔을 준비하고 있다. 통화하는 소리를 낮추고 얼른 다른 곳으로 가서 조용조용 통화를 한다.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이 뭐냐! 다들 내일 제사를 모시는데 부정 탄다고 갈 수 없다고 하네."라는 친구의 말이 전화기에서 새어나올 것만 같다. 이런 소리에는 아내 귀는 밝다. 나는 나직하게 말한다. "아직도 그런 것을 가리나. 부고를 호주머니에 품고 있으면서 몰랐다고 할 수도 없지. 알파고가 사람에게 바둑을 이기는 세상이다. 그런 것을 가리지 않은지가 오래되었으니 상관없다."라고 말은 했지만 왠지 찜찜하기는 하다. 무엇보다 겁이 나는 것은 아내가 이 사실을 알면 몇 달은 족히 잔소리를 들으면서 시달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장모님이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적 이었다. 아이의 돌이나 백일, 제사, 묘사, 이사, 집안의 혼사를 앞두고 있을 때 같이 齋戒(재계)해야 한다는 날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런 날의 앞과 뒤는 물론 어떤 때는 삼 일 전 후 심지어 한 달 내내 초상집의 문상은 금지, 결혼식까지도 가면 부정을 타서 당장 가족이 해를 입는다고 했다. 장모님은 아내를 통해서 출입을 못하도록 단속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종내는 직접 단속을 했다. 장모님의 말대로 이런 일 저런 일 다 가리다가는 사회생활에 왕따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장모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일이 생기면 연수, 세미나, 회식이 있다고 거짓말을 수십 번을 했지만 부정을 탄일이 없었다. 물론 장모님이나 아내가 알았다면 아이들이 감기에 걸린 것 까지 내가 부정을 저질러서 생긴 일이라고 우겼을 지도 모를 일이였지만…아직도 부정 탄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많은가보다. 제사, 손자 백일, 정초를 핑계로 대신 부조를 해 줄 것을 부탁 받은 것이 열이 넘는다. 혹 아내에게 들켜 지금까지 받아 놓은 부탁도 못 들어 주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틈을 내어서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정말 제사를 앞두고 상갓집에 조문하면 안 되는 지를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아내에게 외출할 핑계를 찾기 위해서다.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이다. [家禮輯覽 四時祭齋戒條]; 凡祭祀齋戒之目 不過曰不縱酒不茹葷 不弔喪問疾不聽樂 不行刑不預穢惡事(下略) "모든 제사의 재계조목은 술에 취하지 말고 냄새나는 것을 먹지 말며 상가에 조문하거나 문병하지 말고 음악을 듣지 말며 형벌을 집행하지 말고 더러운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하략)" 차례음식을 만드는 아내 옆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아내에게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친구가 고향에 왔다가 내일 일찍 간다고 얼굴이나 보면서 축하해야겠다면서 집을 나선다. 검정색 넥타이는 항상 차에 대기 중이다. 정장 대신에 평소 강의할 때 입었던 와인색 면바지와 회색 와이셔츠에 외투만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아내를 속이고 몰래가는 조문이 부정이 아니라 나도 남도 좋은 재계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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