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36]우수雨水의 우수憂愁-대동강 물은?
어제가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날인 우수雨水였다. 입춘에 이은 두 번째 절기. 절기節氣를 잘 모르다해도 ‘우수’하면 맨먼저 떠오르는 게 ‘우수(양 2월 19일) 경칩驚蟄(양 3월 5일)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속담일 것이다. ‘처서處暑를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거나 ‘대한大寒이 소한小寒한테 놀러와 얼어죽었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그런데 ‘대동강大同江’을 생각하니까 왼종일 속이 답답했다. 최근 북한의 김정은은 한민족韓民族을 동족은커녕 철천지 원수인 주적主敵이라며 그들의 헌번 전문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은가.
어쩌다 남북한 관계가 이 지경까지 악화되었을까? 직통전화hot line를 폐쇄했으니. 이제는 대동강 물은 풀렸느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게 됐다. 분단된 것도 원통하거늘, 답답할 일이다. 비극 중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래도 육십 해를 넘게 살아온 우리야 마음을 비울 수 있다지만, 죄 없는 아들 세대 그리고 우리의 손자세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사휴의萬事休矣,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 겨울 눈도 몇 차례 오지 않았지만, 눈이 녹은 탓인지 하루종일 비가 왔다. 그것도 목요일까지 나흘내내 온다고 하니 우울증을 돋운다. 대문앞 꽃밭에 3년 전에 심어놓은 ‘백양사 고불매 주니어junior’(인생도반人生道伴 축령산 산신령의 선물이다)가 금세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같이 부풀어올랐다.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 안개비와 어울려 동양화 분위기를 풍긴다. 아아-, 진짜로 봄이 코 앞에 당도했음을 느낄 수 있다. Spring is at hand. 그래, 올 테면 오거라, 봄이여! 어차피 올 봄이니 오는 세월을 세상에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으랴. 하지만, 신기하다. 나무와 꽃은 어떻게 해마다 다시 살아 돌아오는 걸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한번 가버리면 완전히 그만인데 말이다. 그래서 시인묵객들은 이 허망함을 숱한 시나 수필로 읆펐으리라. 이 마음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막걸리 한잔으로 때워버리는 나의 둔재鈍才를 탓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명문의 ‘봄의 예찬’을 썼다지만, 내가 올해 특히 봄을 기다리고 싶지 않은 까닭은, 결코 다가온 농삿일이 심란해서가 아니다.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은 제21대 총선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 것같다. 정국政局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 터널이다. 딱 한마디만 하자. ‘국민의 힘’이라는 여당은 정당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지(아니, 처음부터 어떤 기능이나 역할을 못했다) 이미 오래 전이지만, 거대 야당 역시 대다수 의석議席을 가지고도 지난 4년간 대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면, 이렇게 ‘미련콤탱이’당이 있을까 싶다. 한 당은 아예 사당私黨이고, 한 당은 지리멸렬 느낌이다. 그렇다고 양비론兩非論에 빠지고, 더 말이 안되는 ‘제3지대’ 빅텐트 어쩌고하는 정상배들에게 ‘홧김에 서방질’을 하면 안되는 일이지 않겠는가.
코 앞에 다가온 봄을 차마 ‘바라보지’ 못할 것같이, 느낌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이 봄은 여지없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될 듯하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정녕코 봄이로구나/봄은 찾아왔겄마는/세상사 쓸쓸허드라’라는 ‘사철가’ 노랫말처럼 ‘쓸쓸하면’ 안되는데 싶어 속앓이를 하고 있다. 믈론 사철가의 ‘쓸쓸함’과 나의 ‘쓸쓸함’은 차원이 다르다. 나의 쓸쓸함은 무도한 현정권에 대한 보기좋은 심판(넉아웃)이 안될 것같다는 우려에서 오는 것이다. ‘섣부른 패배주의’여서가 아니다. ‘키발’과 ‘꽃게’로 상징되는 허섭쓰레기같은 비대위원장이 입만 열면 거친 말로 야당과 운동권을 싸잡아 비난일색인데, 정도正道를 벗어나 정치인의 금도襟度조차 아랑곳하지 않는데도, 현 야당대표의 지지율보다 높다는 여론조사에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믿어야 될까? 믿을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가 아닌가? 민심은 대체 어느 편일까? 궁금한데 500원 가지고 해결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여서, 우수날 하루종일 우수憂愁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