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7
8월9일[연중 제1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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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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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Og9ozsCry0 (이용현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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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찬란한 생애!>
에디트 슈타인 혹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로 불리는 수녀님의(1891~1942) 기념일입니다.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그녀의 생애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철학자, 여성운동가, 가르멜회 수녀, 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대륙의 수호성녀. 그녀의 생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 그녀가 연출한 장엄한 삶의 연극은 총4막으로 구성됩니다.
제1막은 에디트 슈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년에 걸친 세월입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큰 결실을 맺던 날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철학에 깊이 몰입했으며, 인간됨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립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결과 그녀는 당대 뛰어난 여성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제2막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됩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성녀의 넘치는 매력과 영성에 흠뻑 빠진 에디트 슈타인은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랜 세월 찾아왔던 참 진리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음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가톨릭 신자이자 교사로서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제3막은 또 다른 10여 년간에 걸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로서 삶입니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열정을 눈여겨본 주변 사람들은 에디트 슈타인이 학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장해나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빛나는 업적을 홀연히 내려두고 쾰른의 한 가르멜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늦깎이 지원자로서 그녀의 초창기 수도생활은 크나큰 자기 낮춤과 겸손의 덕을 요구했습니다.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동기 수녀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오랜 세월 축척해온 학문적 성취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에디트 슈타인 인생의 절정인 제4막은 나치에 의해 체포된 이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신분을 감추고 은신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언니와 함께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져 소리소문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영성이 긴 세월을 건너와서도 찬란히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평생토록 지니고 살았던 진리를 향한 강렬한 역동성이요, 적극성과 개방성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한평생은 끊임없이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성숙시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더 가치 있는 삶, 보다 해방되고 성숙한 삶, 더 큰 진리와 자유를 찾아 떠난 부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유대교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 신자로, 그리스도 신자에서 가르멜 수도자로, 가르멜 수도자에서 사랑의 순교자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디트 슈타인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가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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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때 빵도 받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상외로 가나안 여인에게 불친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도 없나?’란 생각이 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대로 됩니다. 믿음도 없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나를 믿음이 하느님을 믿지 않음이고 하느님을 믿음이 나를 믿지 않음입니다.
‘포크포크’엔 ‘모두가 거부한 아이 입양한 여성. 20년 뒤 놀라운 운명 마주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잉게보르는 수년간 125명의 위탁 아동을 보살펴왔습니다. 조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의 생모는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아들이 잉게보르에게 입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흑인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게보르와 조던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친 모자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잉게보르는 어느 날부턴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의사는 너무 늦어서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신장을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잉게보르가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으려는 순간 조던이 어머니 몰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조던이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식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끝까지 주장하였고 의사들이 맞춰본 결과 놀랍게도 조던의 신장은 어머니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던의 마음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이제 제가 돌려드릴 때가 됐어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더 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생명을 무시하며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자수성가한 부자가 걸어 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10원이 있으면 주울까요, 줍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읽고 본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돈을 줍습니다. 돈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그 작은 것을 대하는 자세가 큰 것을 대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 같이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도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한 장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합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라 자기 새끼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회사 앞에 있는 거지에게 조금 큰돈을 주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잔돈을 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총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은총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큰 은총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받은 것에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혹시 작은 은총을 무시해버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도 더 많은 신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다 챙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 지역 요양원을 조사하여 신자들을 찾아내어 하루 따로 시간을 내서 봉성체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집에서 봉성체 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고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분들 먼저 챙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은총을 청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작은 것들은 무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부스러기부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를 잘 챙기는 우리를 보며 주님께서 큰 빵 덩어리 하나를 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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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신다.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한다.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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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 모임에서 ‘Mission Statement(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들으면서 ‘신앙 강좌 기획팀’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풋볼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신앙보다는 풋볼이 더 좋았던 형제님이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는 30분도 힘들었는데, 풋볼 이야기는 5시간을 해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완전히 바닥을 쳤고, 건강하던 몸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이 모두 신앙에 관련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형제님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가시못이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의 성구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음에 품은 성구는 필립비서의 내용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풋볼도, 재산도, 건강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가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9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쁘게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형제님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아도 이해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걱정하였습니다.
한 자매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으로 직장 생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한 수도회의 영성을 알게 되었고, 그 영성에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도회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인을 보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과 함께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있는 신앙인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꿈과 열정은 좋았지만 평신도들만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도신부님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즈음에 저를 알게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이 정한 성구는 고린토후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평화신문과 함께하면서 주변의 오해도 풀렸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회계 업무가 늘어났는데 하느님께서는 회계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군대에 비하면 절대로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을 아시고 40년을 더 광야에서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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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강아지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이 이야기는, ‘우상숭배자’들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 가나안 부인,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여자가 이방인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히 거절입니다. 그러나 그냥 거절은 아니고,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반성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여자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평소에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답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도 거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으로 귀화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5-6)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도 거절인데,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먼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자’ 라는 점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총을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숭배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거절하시는데도 여자가 끈질기게 간청한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결국에는 믿음으로 이어졌지만…….>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침묵의 뜻도, 또 거절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아지들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라는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즉 ‘어리석은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우상숭배를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은, “제가 비록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라는 간청입니다. <사실 ‘간절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그 ‘간절함’만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함’ 때문에 더 심하게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자가 예수님에게로 온 것 자체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부르심과 여자의 응답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말씀은, 여자의 변화와 결심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올 때에는 믿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여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칭찬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제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만 보면, 여자가 금방 깨닫고, 금방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좀 더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간절함만으로 금방 우상숭배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즉 신앙인이면서도 ‘미신’을 믿고 ‘점’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이 스스로 ‘개’가 되는 일이고,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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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예루살렘 남쪽에는 오늘날까지도 “옹기장이 밭”, “피밭”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사제들에게 건넨 돈으로 산 땅이라 일컬어지는 곳입니다(27,3-10 참조). 사실 그 지역은 이스라엘의 몇몇 임금들이 우상 숭배를 하고 이방 신에게 제사를 바쳤던 곳입니다(2열왕 23,10 참조).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유다에게 받은 돈으로 그 지역을 사 이방인들의 무덤 터로 삼았습니다. 이른바 ‘더럽고 불결한’ 이방인들은 죽어서도 아브라함 후손들의 지역에는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 이방인 혐오와 차별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구하여 달라고 애타게 도움을 청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껏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자격 없음을 환기하는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이 말씀(결론)을 강조하여 극적으로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방인에게 지니는 태도를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 주시고,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으로 초대되고(5,48 참조), 모두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깨달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이입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낫고 선하며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이 그다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31) 함께 걷는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차별하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동료는 없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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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동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지평 확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한판 논쟁이다. 논쟁 주제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인들한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굳어진 믿음을 확인하며 예수님은 여인에게 빵(구원)과 강아지(이방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기지에 두 손을 드신다. 가나안 여인의 한판승이다.
가나안 여인의 극진한 사랑과 인내와 슬기와 진실한 신앙이 구원의 지평을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이방인, 곧 모든 인간한테로 확장시켰다.
현대 세계에서도 이러한 가나안 여인이 필요하다. 구원의 지평을 인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로 확대할 수 있는 가나안 여인이 필요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 고대하고” (로마서 8장 19절 ‐ 21절 참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피조물을 돌볼 책임을 뒤로하고, 스스로 창조의 정점이라 여기며 자신만을 위해 다른 피조물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며 착취하고 파괴했다. 그 결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모든 피조물의 공동의 집인 지구는 곤경에 처해 있다.
곤경에 처한 지구를 살리기 위해 가나안 여인의 극진한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인내로 생태적 삶을 추구하면서 오는 불편함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슬기로 이미 오염된 자연을 복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진실한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힘을 예수님한테서 얻어야 한다.
그렇게 가나안 여인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아”(에페소서 1장 10절)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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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 (마태오 복음 15장 1절-20절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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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시다>
사제단 합동 미사를 드릴 때면 신자들이 제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제일 시커먼스예요. 제발 어느 신부님 옆에는 서지 마세요. 더 검어 보인다니까요.” 한여름 대낮에도 테니스를 즐기는 통에 관광객들이 미사에 왔다가 “동남아 출신 신부님이 우리말을 어떻게 그리 잘하느냐?”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 사목을 겸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주로 필리핀과 베트남 출신들인데, 저를 자기 나라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줘서 이 얼굴도 다 주님의 섭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미국으로 유학 간다며 인사를 왔습니다. 잘 다녀오라면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파란 눈 애인 데리고 오면 안 돼!” 그 학생은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지만 아차! 싶었습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입으로는 잘도 말하지만 한꺼풀만 더 벗겨내면 영락없는 인종차별주의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잘 적응한다고 하는 중국인들도 제대로 발 못 붙이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 사람의 피부색이나 출신과 관계없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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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부인’은 그 지방 토박이 부인이란 뜻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부인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제자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 하고 애원하는 이방인 여인의 간절한 바람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처음에는 침묵하셨고, 두 번째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말씀하셨으며, 급기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가나안 부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단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입니다. 이런 감동으로 예수님께서는 탄복하시며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1,25) 하고 고집스럽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청해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라는 확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을 만나고 기뻐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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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천교구 성직자 사진첩을 보다가 한 선배 신부님의 사진에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섬세하시고 또 애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야 한다면서 좋은 찻잔에 정성을 다해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셨지요. 만약 차를 담을 찻잔이 없으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 잔이면 어떠냐고 할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음식 역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겨 있어야 맛이 나지 아무 그릇에 대충 담으면 그 음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늘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그 음식에 맞게 멋진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에 맞게 접시가 꾸며질 때,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지고 실제로 음식 맛도 훌륭해질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접시에 우리 마음을 대입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주님을 담는 각자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습에 따라 주님의 영광이 더 환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고 있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와 모양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어느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청을 곧바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면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한다는 것,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겸손의 마음이 가나안 여인이 얻고자 했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담는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멋진 마음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가 원하는 딸의 치유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그릇이 될 때, 가장 멋진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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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큰 믿음>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큰 믿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나를 너머
너에게 맡기는
열린 믿음
나를 허물어
너를 품는
너른 믿음
사랑을 위해
모든 것 던지는
뜨거운 믿음
절망을 딛고
희망을 살리는
밝은 믿음
밀침을 뚫고
끝내 나아가는
곧은 믿음
가름을 건너
한데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믿음
온전히 있으려
기꺼이 사라지는
비운 믿음
내일 그곳을 낳을
지금여기에 충실한
사는 믿음
한걸음 또 한걸음
쉼 없이 내딛는
한결같은 믿음
마침내 선을 이루실
하느님만을 향한
오롯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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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러나>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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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
제가 아침 산책 중 자주 열창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늘 불러도 새롭고 힘이 납니다. 부르면서 영적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일부 가사를 변경하여 “이 강산”은 “수도원”으로, “군인이”는 “수도자”로, “푸른 옷”은 “검은 옷”으로 “30년”은 “41년”으로 바꿔 부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 내리길 어언 41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청춘
검은 옷에 흘러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비감한 느낌보다는 정신이 새로워지는 영적전의를 느낍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중 하나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니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영예롭고 자랑스런 칭호,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지요!
말그대로 수도자는 물론 믿은 이들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혼자의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함께 하는 영적전우들 사이에는 영적 전우애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을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모임이 있었습니다. 2005년 제가 재판받을 때 함께 했던 자매들이 모태가 되어 시작됐으니 무려 18년 역사입니다.
여전히 활동중인 분이 베로니카 형수와 수산나 자매입니다. 이 두분 역시 한결같이 빛나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특히 제 형수는 제가 제대후 1973년 교대 다니고 교편생활 때부터 지금 수도생활때 까지 한결같이 도움을 주고 있으니 무려 50년 반세기(半世紀)! 새벽 강론쓰면서 새삼스런 감동에 놀라움이었습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년동안 88세 고령의 연세에도 한결같기가 참으로 훌륭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제37차 세계 젊은이 날 행사후 귀국후 기내에서 회견중 교회법에 위반된 이들에 대한 사목적 지혜에 감동했습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교회내에는 규율하는 교회법이 있다. 교회법에 따라 어떤 이들을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회가 닫혀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각자는 교회내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부득이 교회법에 저촉되어 성사에 참여하지 못해도 하느님과의 친교는 계속되니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교황님의 목자다운 사목적 배려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또 교황님의 감동적인 사례는 해외 사목방문 전후로 꼭 성모경당을 찾아 마리아 성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목자, 주님의 전사로써 효성스런 면모입니다. 이번도 성공적 포르투칼 순례여정후 성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니 성모님을 만나기 무려 교황님 재위후 110회입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교회 수장의 믿음을 보고 배우는 우리 가톨릭교회신자들은 행복합니다. 믿음의 전사중의 전사가 믿음의 총사령관이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요, 민수기의 모세요 오늘 가톨릭교회의 교황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가나안 부인간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참 치열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믿었고,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영적승리를 이끌어낸 가나안 부인입니다. 영적전투의 진행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다가 제자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반응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좌절함이 없이 가열차게 영전전투를 이어갑니다. 겸손히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계속되는 자비송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스럽기까지 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은 주님을 깊이 신뢰했고 겸손했고 지혜로웠습니다. 가나안 부인의 좌절함이 없는 영적탄력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겸손의 절정입니다. 이어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항복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늘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부인은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했고, 주님과 싸움에 승리한 것이며 궁극에는 악마와의 싸움에 승리한 것이니 삼중의 승리입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악마는 가나안 부인이 포기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의 백절불굴 탄력 좋은 믿음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어제 복음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꾸중 듣던 수제자 베드로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군계일학처럼 주님의 전사로서 그 믿음이 참 탁월합니다. 믿음의 총사령관 모세의 믿음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위기에 처한 모세를 구한 분은 위 두 분입니다. 10대2의 열세이지만 모두가 좌절하는 상황에서 두분의 대응이 감동입니다. 우선 칼렙이 용감하게 모세 앞에 나서서 술렁대는 군중을 진정시킵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반대파들의 격렬한 저항에 모세와 아론은 온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칼렙이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이 두분의 믿음의 웅변이 감동적이라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그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느님은 개입하셔서 이들을 절멸하려 하자 백성을 살려 달라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반역의 공동체는 살아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려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가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공동체에 책임이 있는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세의 한계일뿐 모세는 여전히 위대한 주님의 종, 주님의 전사입니다. 결국 주님의 전사 칼렙과 여호수아의 승리는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복음의 가나안 부인과 제1독서 민수기의 칼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단한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으로 참 좋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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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15,28)
<누가 이방인인가?>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인 가나안 여자와 대화하십니다. 먼저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이 간청으로 시작된 예수님과 이방인 여인과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15,25)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15,26)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이방인 여인과의 대화가 끝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그 가나안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누가 이방인인가?'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이방인인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지 않을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이방인, 그 완전한 사랑을 살아내지 못한 이방인이지 않을까?
우리의 믿음은 그 완전한 사랑으로 향해 있는 믿음이어야 하며, 그 믿음 안에 머무는 사람 만이 가나안 여자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있고, 그런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열려져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요즘 독서 안에서 만나는 모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의 또 다른 이름은 '중재자'요, '겸손'입니다.
투덜거리는 교만이 되지 말고,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겸손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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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6naH6yA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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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 28)
고마움을
잃어버린 믿음은
호되게 병든
우리들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일상의
부스러기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건은
언제나
낮아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부스러기를
껴안는 시간이
실은 우리가
깨끗해지는
시간입니다.
떨어져 내린
부스러기가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부스러기를
만나는 시간이
내면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내려가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우리를 향해
하느님께서는
부서지는
부스러기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삶과 생활은
부스러기의
총집합입니다.
부스러기를
존중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가
우리 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려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머리를
숙여도
부스러기의
은총이 예쁜
꽃으로
피어납니다.
우리가 잡은
간절한
부스러기의
말씀
한 구절이
우리를 살립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이 고마움이
여인과 딸을
살리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란
부스러기조차
감사하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부스러기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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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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