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 성질 좀 죽여라.”
엄마에게서 많이도 듣던 말이다. 느긋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지금도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매사에 뾰쪽한 송곳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찔러야만 직성이 풀리니 어물쩍 넘어가는 꼴을 못 본다.
나 자신을 향한 잣대는 오히려 허물거리면서 유독 타인이 나를 향한 일에는 ‘발딱’ 하며 성질을 부린다. 모난 성격을 죽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어렵다. 느긋해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별스럽게 폴폴 뛰어 봤자 별수가 없음을 알고는 후회한다.
바깥날이 싸늘해지고 고요한 밤이면
“차 한 잔 합시다.”
남편과 함께 따끈한 감잎차를 우려 마신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총총한 별만큼이나 많다. 화자는 주로 내가 되고 말수가 적은 남편은 듣는다. 빙긋이 웃거나 간간이 인색한 대답을 한 마디씩 할 따름이다. 그래도 마주보며 차 한 잔 기울이는 시간은 마냥 즐겁다.
감잎은 다른 나무보다 조금 늦게 새잎이 돋는다. 노란 잎이 병아리 주둥이처럼 뾰쪽이 나오다가 연둣빛으로 바뀌며 나풀거릴 때는 오월 초순 입하立夏무렵이다. 기름이 짜르르 흐르는 연한 잎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도록 반짝거린다. 일교차가 크고 오염이 되지 않은 산 밑에 있는 감나무 잎을 딴다. 잎을 따면서 나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에는 잎을 따낸 감나무에 감이 다섯 개밖에 열리지 않았다. 올해도 감이 열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잎은 주로 원형 그대로 쓰고 조금 큰 잎은 잎맥을 따라 세로로 잘라서 두 조각을 낸다. 정리된 잎을 하루쯤 그늘에서 시들게 한다. 이것을 위조라고 한다. 위조가 끝나면 푸른 기운을 죽이는 살청殺靑을 한다. 죽이지 않고 그냥 두면 살아 있는 기운이 발효된다. 그것도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서 찌기도 하고 뜨거운 솥에서 살짝살짝 덖으며 서서히 죽인다. 푸른 기운을 죽인다는 살청이 정말 묘한 이치라고 감탄한다.
다음에는 유념揉捻을 한다. 감잎을 공처럼 동그랗게 뭉쳐서 한쪽 방향으로 돌리기도 하고, 볏짚을 만든 방석 위에서 살살 비비기도 한다. 이때 너무 세게 문지르면 감잎의 형체가 망가진다. 표면의 막이 곱게 상처가 나면서 제거되어야 감잎의 바깥 표면이 뭉개져 즙액을 세포 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센 잎은 잘 주물러지지도 않고 따로 솟아난다. 강한 성격의 사람은 여린 사람보다 매를 더 맞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유념이 끝난 감잎은 덖는다. 달구어진 솥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소리가 차르륵 나면서 토란잎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또르르 구슬이 생기면서 금세 사라진다. 이때가 가장 적당한 온도다. 감잎을 넣어서 슬쩍슬쩍 덖는다. 감잎이 따끈한 열기를 고루 받았다 싶으면 채반에 꺼내어 부채로 살살 부쳐 김을 날려 보낸다
홍배烘焙라고 하는 과정이 아직도 남아 있다. 24시간 동안에 목욕물보다 조금 더 따끈한, 일정한 온도의 불 위에 올려 준다. 그 후에 한 달 정도 냉장이나 냉동 상태에서 숙성 시킨다. 참으로 길고도 정성스런 시간이 흘러야만 비로소 감잎차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차를 우려 보면 먼저 그 빛깔이 마음을 사로잡고 이어서 은은한 향기와 입에 착 달라붙는 맛에 만족한다. 잎이 원형 그대로 있는지 허리가 부서졌는지 우려진 감잎을 꺼내서 살펴보기까지 한다. 찻잔 속에 많은 시간과 정성이 녹아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감잎차를 만드는 사람의 열정과 혼이 녹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고품격의 차를 얻을 수 있을까.
흔히들 감잎을 적당히 쪄서 건조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다. 적어도 구별된 맛을 얻으려면 감잎의 표면을 잘 죽여야 한다. 그것도 함부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들여야만 깊고 은은한 맛을 내는 차를 얻을 수 있다. 순서에 따라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의 과정을 거친 차는 그 횟수만큼 우려먹을 수 있다. 먹다 남은 차에서 떫은맛이 난다면 일단은 불합격이라고 나 스스로 판정한다.
감잎차를 만들 때마다 엄마의 ‘성질 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의 성질을 어찌 하루아침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나는 언제 나의 겉사람을 죽이며 살았던가. 내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내면을 다 드러내기까지 인내하고 마음을 닦으며 이 세월까지 왔을까.
내가 뭉개지고 상처가 나고 뜨거운 솥에서 덖어질 때는 싫어서 울며 몸부림을 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에게도 남편도, 아이들도 또 형제나 친구까지 살청이고 유념일 때가 있었다. 단번의 살청으로 차가 완성되지 않듯이 앞으로도 남은 훈련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다. 오늘도 따끈한 감잎차를 마시면서 그 은은한 향기에 취해보고 깊은 맛에 잠겨본다.
(정희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