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정선아리랑
 
 
 
카페 게시글
통합 게시판 스크랩 어긋남에서 어울림으로!
정선아리랑 추천 0 조회 35 16.09.21 09: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이상미 역, 2011, 두란노서원.

 

  1.

  세월에 등 떠밀려 어느덧 한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누구나 송구(送舊)와 영신(迎新)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리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 못내 부끄러워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가끔 한눈을 팔았던 일들도 선명한 채찍으로 마음을 할큅니다.

  옛 선인들은 군자가 누릴 세 가지 낙을 이렇게 표현했는데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1)

 

  군자에 못 미칠지 모르나, 일주일에 한 번씩 소일삼아 목사님을 만나는 시간들은 저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덮고 싸매주는 도타운 붕대였습니다. 지적 빈약함과 영적 부실함의 골을 메워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관계의 지속은, 삶의 결속을 넘어서, 실속으로 채워짐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일전에 가르침을 주셨던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1932-1996)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는 저에게 “사역자로써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그의 또 다른 책 「예수의 이름으로」를 읽고 느꼈던 감동이 오롯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에서 “예수를 아는 길이 무엇인가?”,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은 우리 삶의 <오르막 길>에서가 아니라, <내리막 길>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미래가 보장된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의 작은 정신 지체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 봉사생활을 했던 이유를 이해할만 했습니다.

 

  2.

  목사님께서 연이어 추천해 주신 헨리 나우웬의 책 「영적 발돋움」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대답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발돋움을 위하여 부름 받은 존재라는 전제하에 모두 세 가지 영역에서의 발돋움을 이야기 합니다. “자아를 향한 발돋움,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이 그것입니다.

  저자는 먼저, 자아를 향한 발돋움(1부)에서는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발돋움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고통의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가 그렇게도 대면하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그리 자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본질적인 외로움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저자는 “외로움으로부터 고독으로의 전환”이 해답임을 제시합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가고, 그것을 잊거나, 부인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 외로움을 지켜서 그것을 생산성 있는 고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외로움으로부터 고독으로 가는 움직임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삶의 시작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격리된 곳에서 혼자만 있는” 고독이 아닌 마음의 고독을 이야기 합니다. 마음의 고독이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소양 혹은 태도를 말합니다. 마음의 고독을 가지고 살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외로움에 쫓겨서 살 때는 자신의 갈급한 필요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만을 고르려고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그 경계가 정확히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이 두 양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내면의 민감성”을 계발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시작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존재를 향해 발돋움하라는 권면인 셈입니다.

 

  다소 이야기가 길어진 듯 하여 목사님께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는 목사님의 따뜻한 환대를 기억하며 간략하게 책의 내용을 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2부)”에 대하여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의 발돋움”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공포에 떨면서 자신을 방어하려 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천지입니다. 마음으로는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두려움과 거부감의 벽을 쌓고는 사람들을 피하며, 우리가 가진 선한 의도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장소를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원래는 사람들을 서로 가깝게 해주고 평안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기 위해 생겨난 많은 공간들도 정신적인 전투장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환대란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을 우리 삶 속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남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환대)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낯선 사람은커녕 함께 거주하며 살지 않는 가족들조차도 내 집에 맞아들이고 기꺼이 문을 열고 환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대세인 오늘날에는 타인의 방문은 곧 침해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방을 향한 발돋움을 위해서는 두 가지 형태의 가난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생각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그것입니다. 사상과 개념과 견해와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은 환대의 주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생각의 가난이란 우리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선입견과 걱정, 시기심이 비워진 상태입니다. 따뜻한 환대는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하며, 다채로운 인간 경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 향하는 발돋움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향하는 발돋움과 끊임없이 내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발돋움한 정도만큼 우리는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주저리 늘어놓은 말들이 공소한 메아리는 아니었나 싶어 사뭇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말없이 저를 바라보시던 목사님에게서 느꼈던 훈김에 기대어 조금 더 말씀 드릴 수 있는 용기를 갖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3부)”은 “환상에서 기도”에로의 발돋움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환상에서 기도로 향하는 발돋움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향하는 발돋움과 또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 향하는 발돋움을 뒷받침하고, 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며 또 우리를 영적인 삶의 핵심으로 이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발돋움으로써의 기도를 말하면서 저자는 헤시카주의(Hesycham)2)자들의 묵상기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세 가지 “규율”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읽는 것,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영적인 인도자에게 순종하는 규율이 그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영적인 삶은 그리스도 없는 복음과도 같음을 지적하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기도란 오로지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면서도 또한 진지한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면도 강조합니다. 개인기도와 동시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언어로써 기도를 말하고 있는 저자에게서 기도에 대한 균형감을 봅니다.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는 깍지 낀 양손처럼 한 짝을 이룹니다. 저자는, 공동체가 없을 때 개인 기도는 쉽게 자기중심적이고 별난 행동으로 전락해 버리지만 개인 기도가 없을 때 공동체의 기도는 쉽사리 의미 없는 상투적인 일과로 바뀌고 만다고 이야기 합니다.

 

  3.

  목사님께서 권해주신 이 책 「영적 발돋움」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불현듯 머릿속에 “어긋남과 어울림”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하고 있는 발돋움이란,  “관계의 어긋남에서, 관계의 어울림으로”라는 말이 기독교 영성의 지향점이라는 평소의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논어」<자로>(子路)편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3)-서로 다르되 잘 어울리기-을 인간관계의 핵심으로 삼고 계신다는 평소 목사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바 있지 않습니까?

  어긋난 나와 어울리기 위한 고독,

  어긋난 그와 어울리기 위한 환대,

  어긋난 하나님과 어울리기 위한 기도.

 

  미숙에서 성숙을 향해가는 아직은 철부지인 저에게 늘 따뜻한 환대의 주인이 되어 주신 목사님과 함께 해를 넘기기 전에 꼭 한번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메뉴는 비빔밥으로 정하겠습니다. 어긋난 다양함이 한데 어울려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는 그 비빔밥 말입니다. 겨울의 한 복판에 성탄이 있어 큰 기쁨이듯, 제게는 늘 목사님이 계셔서 훈훈합니다. 하수상한 시절에 예수 탄생의 기쁨으로 겨울을 지키시고, 어긋난 이들의 삶을 어울림으로 이끄시는 목사님 되어주십시오.

  건강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1) 논어, <학이조> 제 1장

2) 교재 155쪽. 179쪽.

3) 논어, 자로 편.  君子和而不同(군자화이부동), 小人同而不和(소인동이불화)의 일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