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들을 다시 보건데...
몽골군이 고려군과 연합해 처 들어간 경로는...
현 대만인 대마도에서...동쪽으로 오키나와 군도들을 타는 원조 일기도로 예상돼는 항로는 맞는듯 한데...
살마주...이건 아무래도...
제가...전혀 틀려서 만리를 동쪽으로 잘못 비정한 듯 합니다.
왜(倭)란 종족들은...
인도양과 남동중국해양에 서식하던 여러 왜소한 종족들 전체를 이름이고...
그 중 백제계 신라계등의 지배자들은...점점 현 열도로 상당수 이동하고 전통적 왜왕늠도
현 열도에 또아릴 틀었단건 전과 마찬가진데...
구주(큐슈,九州)인 비전주 축전주 살마주는 정 반대 방향같습니다.
대마도에 또다른 일기도 라인이 있는데...필리핀으로 연결돼는 남쪽 군도들입니다.
이 남쪽 일기도를 타면...원조 구주(九州)의 하나인 비전,비후주인 필리핀인 듯 하고...자바(장기도?)...
인도네시아등지가 축전,축후주...수마트라섬이 살마전,살마후주...말레이반도 싱가폴이 유구같습니다.
사서기록등의...일본(倭)은...
조선의 동북끝인 함경도 동북끝단에서...흑여진지역이 부상국인 현 열도의 하이(백인국)과 맞다고...
서남으로 길게 조선의 남해를 두르는데...조선의 큰바다 5개를 사이에 두고 두른답니다.
예상하기엔...동북의 현 동해부터...현 서해(황해)...오키나와 안쪽인 현 동중국해..필리핀과 광동,광서성 사이인 남중국해...
말레이지아와 수마투라(살마주?) 사이인... 말라카해협과 인도양...
이리 큰바다가 사이에 있단 얘기로 전 해석됍니다.
고려가 만리대국이고...조선은 그보다 훨씬 강역을 늘렸다니...1만5천리 보면...
그를 동북에서 서남으로 몽땅 두른 왜들의 영역은...
몇천리란 건 대마도(대만?)부터... 동부 일본열도로 통하는 동해도 동산도 육오주 하이주..등을 따로 이르고....
대마도(대만?)부터 남으로 필리핀(비전주,비후주)...인도네시아(축전주,축후주?)...자바(장기도?)...
수마트라(살마전주 살마후주?)...로 이어지는...서해도이자...서해 구주(九州)인 큐슈는...
따로 분류됀거라 봅니다.
이를 중간기점이자 조선과 왜의 중립국지대인 대마도를 깃점으로...동과 남의 일기도(점점이 이어진 군도)를 따로 분류해...
크게 동북과 서남지역으로 왜를 나눈 거라 봅니다.
동경이란 육오주의 왜왕들 전통 아지트는 현 오사카나 교토가 맞고...
파벌이 천민집단인 서해구주의 대판성이란 서경(西京)은...현 필리핀정도일까 예상합니다.
그 물산과 풍속이 판박이기도 합니다.
명치유신기 전부터 명치 천민왜들은...양이들의 무기를 들고...
이 서해도(구주)방면에서..대륙조선 태평청국에 이은 동학을 토멸하러 들어가며 대륙을 접령해 가고...
미국배에 실려 현 열도의 왜왕이 있는 주인님(왜왕등)들 땅으로도 침범하며...
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양이들에 내 준거라 예상해 보니다.
고로, 나머지 대륙조선인&중국의 전쟁포로들이나 천민원주민들만이...양이들의 식민노예로 있다가...
독립투쟁이고 뭐고 한거라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집중력을 위해 다음에 상세히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필리핀(비전주,비후주?)이...
메이지 유신 전까진 일본였을 수 있단 정황 하나를 올려 봅니다.
일본은 현 정사에선...필리핀을 동남아전쟁인 1943년에나 정복합니다.
그 이전의 어떤 본격적 교류역사는 거의 전무합니다.
해적무역은 좀 햇다 볼 수 있어도,...이미 역사엔 확실한 스페인 식민지로...
이지역 해양무역은 스페인등의 양이들이 다 독차지한걸로 나옵니다.
문젠...
그럼, 그 땅에서...천한 식민지 필리핀원주민이 일본여자를 첩으로 둘 군번을 절대 않됐을 터인데...
필리핀 독립의 선구자 호세리잘"이란 스페인유학파이자 화교(?)출신가문 청년이 ...
강단사학대로면...
극동의 전통 가부끼 입은 일본여자와 바람이 날 조건은 전혀 없었는데...
분명 마닐라의 "호세리잘 박물관"엔...떡허니 스페인 혼혈로 보이는 정실부인사진과 함께...
연인(첩)였단 일본여인 "오세이"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런 희안한 미스테리를 아무리 찾아봐도 왜 그런지 설명이 없던데...
일제나 양이들이 어떤 변명을 하던...
이건 객관적으로 봐선..필리핀이 당대 천민왜들의 서해주(西海州)인
원조 구주(큐슈)의 하나인 비전,비후주등이 아니고선 벌어질 수 없던 현상이라고 전 예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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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리살의 연인(첩) 오세이.
리살 [José Rizal (y Alonso)]필리핀 정치가·의사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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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살 요약정보
세부정보 확인
태어난 때 |
1861. 6. 19 |
태어난 곳 |
필리핀 칼람바 |
죽은 때 |
1896. 12. 30 |
죽은 곳 |
마닐라. |
소속 국가 |
필리핀 |
직업 |
정치가·의사 |
정식 이름은 José Protasio Rizal Mercado y Alonso Realonda. 1861. 6. 19 필리핀 칼람바~ 1896. 12. 30 마닐라.
필리핀의 민족주의 운동을 고취시킨 애국자·의사·저술가.
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부유한 지주이며 사탕수수 재배 농장주였고 어머니 테오도라 알론소는 당시 필리핀에서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리살은 마닐라에 있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와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배웠으며 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에서 의학과 교양학을 공부했다.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곧 스페인에 유학온 필리핀 학생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고 조국에 대한 스페인 식민통치의 개혁에 힘썼으나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에 있어 최대의 적은 당시 심각한 혁명을 겪고 있던 스페인이 아니라 정치·경제면에서 필리핀을 마비상태에 빠뜨린 프란체스코·아우구스티누스·도미니쿠스 수도회 탁발수사들이라고 보았다.
파리와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고, 1886년 타갈로그어로 〈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이라는 첫번째 소설을 발표했으며, 여기에서 가톨릭 탁발수사들의 사회지배가 낳은 죄악상을 격렬하게 파헤쳤다. 이어 〈체제전복 El filibusterismo〉(1891)을 발표하면서 필리핀 개혁운동의 주요대변자로서 명성을 다졌으며 안토니오 모르가의 〈필리핀의 역사 Sucesos de las Islas Filipinas〉의 주석판(1890, 재판 1958)을 내어 필리핀 원주민은 스페인이 필리핀에 오기 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바르셀로나에서 간행되는 신문인 〈라 솔리다리다드 La Solidaridad〉에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색인 : 선전운동). 발표한 글에서 나타나듯이 리살의 정치강령은 필리핀을 스페인의 한 주(州)로 통합하고 스페인 국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 스페인 탁발수사를 필리핀 탁발수사로 교체할 것, 집회·결사의 자유와 필리핀인과 스페인인의 법적인 평등을 보장할 것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1892년 귀국하여 마닐라에서 비폭력 개혁단체인 '필리핀 동맹'(Liga Filipina)을 결성했으며 이 때문에 민다나오 북서부의 다피탄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서 4년 동안의 유배기간중 과학을 연구했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카티푸난이 폭동을 일으켰다. 리살은 그 단체와 무관했고 폭동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나 체포되었다. 스페인 군당국은 그를 재판에 회부, 유죄판결을 내려 마닐라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하였다. 그의 희생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형되기 전날, 산티아고 요새에 갇혀 있을 때 리살이 지은 〈마지막 이별 Útimo adiós〉은 19세기 스페인 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첫댓글 환인씨의 12환국은 5색 인종이 모두 더불어 살았던 다민족 연방국가임(환단고기 기록).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다 같았지요.왜란 환국의 해양세력을 총징하는 용어에요..단3한국이 붕괴되고 열국시대가 도래하자,진조선.번조선 유민들이 남한땅으로 유입되자 마조선 해양세력(해=왜)이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토착세력을 형성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발아래 두고 고구려에 대적을 하다가 결국 광개토태왕에게 개박살난 후에 열도로 이주해 감..광개토태왕비문에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열도는 그래서 일찌기 영산강 중심의 서남해 해양세력이 건너가 정착하면서 아이누족을 북으로 몰아 내며 일본문명을 건설함
열도에서는 고대 유물이 모두 영산강 중심의 서남해 마한계 유물이고, 무덤도 서남해 무덤양식인 고인돌과 전방후원분임..4명의 천황을 갈아 치운 백제귀족 소가씨 무덤은 거대한 남방식 고인돌 양식이고, 근구수대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응신천황릉은 세계 최대규모로 서남해 전방후원분 양식임...이러한 고고학적 유물,유적들은 열도 토박이들이 서남해 해양세력이고, 백제는 이들 서남해.열도 해양세력을 해양강국을 건설했다는 반증임....고인돌이 해로를 따라 중국동해안,동남아.인도.지중해.영국에까지 이르고 있는 걸 보면 거석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적석문화의 주역인 마고족의 후예인 고대 서남해 해양세력의 국제적 위상을 알 수 있음
사서증거 대 보십시여...
분명 사서엔..기자조선의 남부에 진(辰)이란 나라가 따로 있었고...
이를 기준이 위만에게 남으로 내밀리며 내려와 점령한게 삼한이라 나옵니다.
진한은 이 진(辰)에 유래하며...진국(辰國) 전체를 이르는 용어도 아니고...
서쪽의 마한54국의 월지(목지) 중심한 마한왕통치를 받던 동남의 12제국입니다.
그 마한과 진한의 중간 남부에 변한이 있는데...
왜놈들과 접경이라 문신을하고...그 산물은 온통 열대식물들입니다.
정확히 동남아 태국일대를 이릅니다.
그것도 조만간 증거사료 올리겠습니다.
[후한서-한전][환단고기][삼국지 위지-한전]"기준은 바다를건너 마한을 파하고 한왕이라 칭했다. 기준의 대가 단절되자 다시 마한인으로 진왕을 세웠다..동쪽과 서쪽이 큰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사방둘레가 4천리가 되는(현재 대한민국 남한땅을 의미함) 한에는 마.번.진 3한이 존재한다..서쪽이 마한의 가장 크며 마한인들이 3한의 왕노릇을 한다..3한은 78여개 읍단위 소국들이 있고 그 중에 백제국도 있다..진한 북쪽으로는 맥과 접하고 마한과 번한 남쪽으로는 왜와 접한다."
위 기록내용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남한땅을 면적이나 위치상으로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요서지역의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하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마조선=마한) 지역을 차지하고 한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준의 자손이 끊어지자, 다시 토착 마한인들이 왕을 세우니 진왕이라는 것이다. 왜 진왕이라 칭하냐하면 단군3한국의 임금이 진한이기 때문에 단군3한국이 붕괴된 이후 남한에 세워진 남3한의 대표자왕을 단군3한을 계승한다는 으미에서 진왕이라 칭한 것이다. 진국이라 함은 22대 색불루가 단제가 된 이후 국호를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 이후 진국으로 칭하게 된다.환단고기 마한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더 공부하십시오...지금 남한땅 어디가 얼굴에 문신을 한 시신들이 무더기로 나온답니까...?
변한과 진한은 왜와 가까워 문신을 한 자들이 많았고...꼬리가 긴 닭...즉,공작이 있단 곳입니다.
마한 54개국...변한 12국...진한 12국이 현 한반도 경상도와 전라도에 다 들어가려면...
동내리장님들이 다 왕였어야 가능한 구도입니다.
젤 영토가 작았던 진한의 초기사로신라의 6부 통합한 시절이 남북 2천리...동서 1천리라 나옵니다.
진한의 반만 먹은 영토가 이정도입니다.
현 한반도 경상도 전라도 다 합친 크기가 진한의 반이란 겁니다.
그럼 그와 맘먹는 12국이 있던 남서쪽의 변한은...남해바다속이란 겁니까...?
이 진한 변한의 상국이란 서역의 마한 54개국은...4배가 커야 하는데...
진한의 반이 또 황해바다고...그 서쪽 황해바다 용궁에 있던 제국였단 겁니까...?
얼굴에 문신을 한 시신?
그런 것이 있기는 하나요?
동남아엔 있습니다...동유럽 스키타이 유적에도 있고여...
허황옥 아시져...?
김해김씨들의 시조할머니인 인도 아유다국의 왕녀 허황옥이
현 한반도 경상도로 오려면..당대의 항해력으론 절대 불가능하고...
기적적으로 오더라도 중간에 왜놈들 해적단에 걸려도 수십번을 걸렸을겁니다.
허황옥은 인도에서 바로 옆인 가야지역인 태국등지에 해변을 타고 항해하며 도착했단 반증인겁니다.
변한과 가야의 풍습을 더 공부해 보십시오...딱 현재의 동남아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와우정사에는 인도산 돌덩이가 누워있었습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사람들은... 와불을 만들었답니다... 그 돌은 어떻게 왔을까요?
인도산여...?..인도에서 거대한 돌덩이를 가져다가 만들었다고여...?..여기도 돌은 많은데여...?
글쎄여...?
^^ 그렇죠? 여기도 돌덩이가 많은데 왜 인도산 돌덩이가 용인까지 들어왔을까요? 간단한 곳에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유조선이나 거대 상선들도 빈배로는 운항이 불가능합니다. 무게중심이 잡히지 않아 뒤집어져 버리거든요.^^
^^고대 인도인들도 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배 밑창에 돌덩이를 싣고 이 땅까지 온 것입니다...... 그 돌이 인도산임은 학자들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인도산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는데... 제주도에서 말을 싣고 육지로 나올때... 제주도 분들도 배 밑창에 돌덩이를 실어.. 갑판에 실린 말과 균형을 맞췄습니다...돌아갈때는 쌀이나 소금 등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물산을 싣고가므로 돌덩이는 버리고 갔습니다... 그 돌덩이들이 강진 등 전남해안에 널려있습니다.
돌덩이를 나눠 실었다면 몰라도...
한반도에도 있는 돌을...인도에서 궂이 거대한걸 무리하게 실었단게 이해가 않 갑니다.
그게 이미 완성품였고 중요 보물였다면 모르겠어도여...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돌의 크기가 약4~5미터에... 무게가 8톤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안전한 항해를 위해 그 정도의 돌이 필요했다면 싣는거죠... 싣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은진미륵을 세운 방법과 비슷한 방법이니까요.
항해를 위한다면..무개조절과 배밑까지의 수월한 이동을위해...작은 돌들로 나누는게 상식 아닐까요...?
완성품 보물이니 그 무거운 덩어릴 통째로 옮겼겠져...?
이건 실증의 문제이지 상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돌덩이가 우리나라까지 온 것은 사실이고... 돌덩이는 사람에의해 이 땅까지 왔습니다.........^^배 밑까지 수월한 운반이라고 하셨죠?... 누가 배 밑까지 운반을 했는데요?... 은진미륵을 어떻게 세웠는지를 모르시는군요?... 얘기가 엄청 길어지니 이 얘기만 합니다... 고대 인도인들은 배에다 돌을 싣지 않았습니다... 대신 돌덩이 아래에다 배를 만들면 간단하지요,..은진미륵도 같은 방법으로 세웠습니다.^^
倭가 구한말에도 필리핀에잇다면 대륙근세조선의 주장대로 과연 현 일본열도로 옮겨간건지...여기서 대륙조선 얘기해봤자 답답해서 얘기는관두는상태입니다 쨋든 잘보고갑니다
그 과정을 사서 증거들 제시하며 잘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