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아시아 편입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70년, 74년, 78년 세번씩이나 우리의 발목을 잡아
본선 진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월드컵에 한번밖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호주가 월드컵 예선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입니다.
어떤 때는 아시아에 편입되어 예선을 치루었고,
먼 아프리카 원정까지 했어야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아시아, 유럽, 남미와 피말리는 플레이오프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그들의 숙원이 아시아 편입으로 인해
달성될지는 좀 더 지켜 보야야 하겠지만
아시아가 좀 더 용이한 환경이란 것은 사실입니다.
아시아-대양주 월드컵 티켓의 변천과 호주의 도전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먼저, 호주가 지역 예선에 참가하기 이전의 아시아 국가들의
본선 도전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 30년 우루과이대회
지역 예선 없었음
◈ 34년 이탈리아 대회
팔레스타인이 이집트와 함께 예선 4조에 배정되었으나, 1-4, 1-7로 패해 탈락, 이집트 본선 진출
◈ 38년 프랑스 대회
팔레스타인은 예선 5조에 헝가리, 그리스와 함께 배정, 그리스에 1-11로 패해 탈락.
예선 10조에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와 일본이 배정됨.
일본의 기권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본선 진출.
본선 1회전에서 헝가리에 0-6으로 져 탈락.
◈ 50년 브라질 대회
시리아는 터키와 함께 지역 예선 2조에 배정되었으나, 터키에 0-7로 패해 탈락
이스라엘은 유고, 프랑스와 함께 지역 예선 3조에 배정되었으나, 유고에 0-6, 2-5로 패해 탈락
인도, 버마(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지역 예선 10조에 배정, 타 3개국 기권으로 인도 본선 진출.
FIFA가 맨발로 출전하는 것을 금지하자 본선 포기(본선 출전하였으면 이탈리아, 스웨덴, 파라과이와 대전키로 되어 있었음).
◈ 54년 스위스 대회
이스라엘은 유고, 그리스와 함께 예선 10조에 배정, 4패로 탈락
한국, 일본, 중국 예선 13조에 배정, 중국이 기권하고 한국이 일본에 1승 1무를 거두어 본선 진출
◈ 58년 스웨덴 대회
아시아-아프리카 합쳐서 0.5장.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예선 승자가 웨일즈와 플레이오프.
한국은 사무 착오로 FIFA에 의해 엔트리 접수 거부됨.
1차 예선
1조 인도네시아, 대만, 중국(중국 기권, 인도네시아 1승 1패 골 득실차로 2차 예선 진출)
2조 이스라엘, 터키(터키 기권으로 이스라엘 2차 예선 진출)
3조 이집트, 키프로스(키프로스 기권으로 이집트 2차 예선 진출)
4조 수단, 시리아(수단 1승 1무로 2차 예선 진출)
2차 예선 타 3개국 기권으로 이스라엘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
웨일즈, 이스라엘을 2-0, 2-0으로 누르고 본선 진출
◈ 62년 칠레 대회
이스라엘은 이탈리아, 키프로스, 에티오피아와 함께 예선 7조에 배정. 키프로스, 에티오피아에 이겼으나, 이탈리아에 2-4, 0-6으로 패해 탈락
한국은 일본, 인도네시아, 유고, 폴란드와 함께 예선 10조에 배정됨.
인도네시아가 기권하고, 일본에 2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
유고가 한국을 6-1, 5-3으로 이겨 본선 진출
◈ 66년 잉글랜드 대회
1965년,호주는 드디어 월드컵 무대에 첫걸음을 딛게 됩니다.
호주는 66년 잉글랜드 대회 예선에 출전 신청을 합니다.
FIFA는 아시아-아프리카-대양주를 묶어 티켓 단 1장 만을 배분합니다.
21개국이 예선 참가 신청을 하였으나,
아프리카에 대한 푸대접에 반발하여 아프리카 국가 15개국이 집단으로 기권하였고,
남아공은 인종 차별 정책으로 FIFA에 의해 출전 거부되었으며,
한국은 북한과의 경기에 승산이 없다고 보고 기권,
그리고 필리핀과 콩고는 엔트리가 FIFA에 의해 거부되어
호주와 북한 단 두나라 만이 남게 됩니다.
처음 출전한 호주로서는 절호의 본선 진출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본선 8강의 위업을 달성한 북한.
1965년 11월 21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6만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북한과의 첫 경기는 1-6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FIFA로부터의 제재로 1963년까지 국제대회 출전이 정지되었던 호주로서는
1958년 이래 무려 7년 만의 A 매치이기도 했던 그 경기에서
후반 25분 Les Scheinflug의 페널티킥 득점으로
월드컵 예선 첫 득점을 올린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11월 24일 벌어진 2차전에서도 1대 3으로 패배,
싸커루의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 70년 멕시코 대회
70년 대회에는 아프리카가 떨어져 나가고
아시아-대양주가 한 장의 티켓을 놓고 겨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FIFA는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지역 예선에 배정하기 곤란했던
이스라엘과 로디지아(현 짐바브웨)를 아시아-대양주 예선에 배정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한국, 일본, 호주, 로디지아가 한 조,
북한, 이스라엘, 뉴질랜드가 한 조로 편성되어 지역 예선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이스라엘과 같은 조에 편성되자 경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이 뉴질랜드를 누르고 최종 예선에 진출합니다.
호주, 한국, 일본은 서울에서 더블 리그로 승자를 가리고,
그 승자가 로디지아와 대결하고,
또 그 승자가 이스라엘과 경기를 벌여 이기는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입니다.
로디지아에게 특혜가 주어진 경기 방식이었습니다.
한국이 1승 1무 1패, 호주가 2승 1무인 상태에서
1969년 10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마지막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1차전에서 한국에게 2대 1로 이긴 호주로서는 비겨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한국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습니다.
올드팬들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 26분 박수일의 골로 앞서 나갔으나,
호주는 후반 13분 바츠(Baartz)의 골로 동점을 이룹니다.
그리고, 운명의 후반 20분, 임국찬이 페널티킥을 실축하게 되고
결국 호주가 2승 2무로 로디지아와의 경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임국찬이 죄책감과 팬들의 비난에 시달려 이민을 떠나게 되는
씁쓸한 과거를 남기게 되는 것이 호주와의 이 경기였습니다.
호주는 다시 먼 아프리카로 갑니다.
로디지아가 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모잠비크에서 경기를 벌이게 되고,
11월 23일과 27일의 1,2차전에서 1대 1, 0대 0으로 비겨 3차전까지 벌인 끝에
전반 12분 러드포드(Willie Rutherford)의 골, 전반 22분의 자책골, 후반 11분 워렌( Johnny Warren)의 골로 3대 1 쾌승을 거두고, 이스라엘과의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12월 4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로 가 경기를 벌였지만 0대 1로 지고,
8번의 원정 경기를 펼친 끝에 처음으로
12월 14일 홈인 시드니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1대 1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호주는 이스라엘에게 본선 진출권을 넘겨 줍니다.
어려운 원정 길의 악전고투였지만 그것은 다음의 영광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 74년 서독 대회
1974년 서독 월드컵은 호주 축구팬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당당히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대회이기 때문입니다.
호주는 1970년 라식(Rale Rasic)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본선 진출을 위한 4년 프로젝트를 진행시켜, 경쟁력 있는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예선 방식도 호주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았습니다.
조편성은
A 일본, 홍콩, 베트남, 한국,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태국
B 호주, 이라크,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이란, 시리아, 북한, 쿠웨이트
였습니다.
A조에서는 한국이 이스라엘을 꺾고 최종 승자가 되었고,
B조의 호주는 이라크, 뉴질랜드, 인도네시아와의 1차 예선에서 3승 3무로 1위를 차지하여, 이란과 B조의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됩니다.
1973년 8월 18일 시드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호주는 3대 0의 압승을 거둡니다.
알스톤(Adrian Alston), 아보니(Attila Abonyi), 윌슨(Peter Wilson)이 각각 골을 기록했습니다.
8월 24일 12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테헤란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전반 32분만에 두 골을 허용하여 위기에 처했지만 남은 시간을 필사적 수비로 잘 지켜 1승 1패 골득실차로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제 한국과의 마지막 대결.
한국 팬들에게는 뼈아픈 기억이지만 호주 팬들에겐 영광스럽고 환희에 찬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10월 28일 시드니에서의 1차전, 호주는 고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여, 본선 진출에 암운이 드리워졌습니다.
이어 11월 10일 서울에서 벌어진 한국과의 2차전.
호주는 전반 14분 김재한, 전반 27분 고재욱에게 골을 허용하여 패색이 짙었지만, 전반 29분 불레비치(Branko Buljevic)가 한 골을 만회하고, 후반 3분 4년전 한국전에서 동점골을 넣었던 바츠(Ray Baartz)가 동점골을 성공시켜 극적으로 회생합니다.
사흘 뒤 홍콩에서 열린 3차전, 후반 25분 터진 맥케이Victorian Jimmy Mackay)의 그림 같은 발리 슛은 한국에게는 악몽이었으나, 호주에게는 커다란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왼쪽 골대 모서리를 파고 들어 한국 이세연 골키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골이었습니다.
맥케이는 한 순간에 호주 축구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월드컵 예선 참가 세 번만에 호주는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싸커루는 네 번의 A 매치를 가졌습니다.
우루과이와 두 번 대전하여 1승 1무, 인도네시아에 1승, 이스라엘에 1패를 기록하였습니다.
호주가 우루과이에게 거둔 1승, 그것은 호주에게 큰 희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커다란 불운이기도 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한국에게 결정적인 두 골을 터뜨렸던 바츠가 우루과이 수비수 가리스토(Louis Garisto)의 태클에 부상 당해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호주 축구 사상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당시 선수 생활의 절정기에 있었고,
바식 감독의 전술에 있어 키플레이어였기 때문에 호주의 손실은 컸습니다.
본선에 진출한 호주는 동독에게 0-2, 서독에게 0-3으로 패하고,
칠레와 0-0 무승부를 기록해 1무 2패 무득점, 5 실점의 성적으로
세계 무대의 높은 벽을 실감하였습니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 열린 칠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호주는 리챠드(Ray Richards)의 퇴장에도 불구하고 선전하였습니다.
호주 팬들은 서독 월드컵에서의 호주 팀 성적에 대해 그리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정상급의 서독, 동독에게 선전하였고,
칠레와의 경기에서도 투혼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향후 28년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 78년 아르헨티나 대회
78년 아르헨티나 대회 예선전을 앞둔 호주 팀에 대한 기대는 컸습니다.
예선은
1조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2조 한국, 일본, 이스라엘
3조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4조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5조 호주, 뉴질랜드, 대만
의 다섯 개 조로 나누어져 각 조 1위 팀이 홈 앤드 어웨이로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호주는 대만을 3-0, 2-1로 격파하고, 뉴질랜드에게는 홈에서 3대 1 승, 어웨이 경기 1대 1 무승부로 가볍게 5조 수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시 호주 대표팀은 74년 월드컵 멤버의 상당수가 교체되었지만,
주장 윌슨(Peter Wilson), 아보니(Atti Abonyi), 알스톤(Adrian Alston), 커렌(Col Curren), 루니(Jimmy Rooney) 등 월드컵 본선 무대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쇼울더(Jim Shoulder) 감독의 지도 아래,
싸커루에게 2회 연속 본선 진출을 안길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각 조 예선을 통과한 팀은 홍콩, 한국, 이란, 쿠웨이트, 호주의 다섯 팀.
한국이 최종덕의 40m 롱슛 등으로 이스라엘에게 3대 1로 이겼던 것이 바로 이 때입니다.
그런데, 최종 예선 대진 추첨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호주는 첫 네 경기를 모두 홈에서 가지고, 그 후 네 경기를 원정으로 치루게 대진 추첨이 된 것입니다.
아들레이드에서 벌어진 1차전을 코스미나(John Kosmina)의 두 골과 반스(Murray Barnes )의 골로 가볍게 승리한 호주는 멜버른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이란에게 충격의 1패를 당합니다.
시드니에서 벌어진 한국과의 3차전은 호주에겐 중요한 고비였습니다.
전반 24분 차범근에게 한 골을 허용한 호주는 홍콩전에서 두 골을 터뜨렸던 코스미나가 후반전에 두 골을 성공시켜 역전승,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1977년 10월 16일 시드니에서 벌어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1대 2로 패배, 자력 진출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란이 3승 1무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원정에서 전승을 거두어도 이란이 다른 팀에게 패하지 않으면 본선 진출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원정에서 호주의 꿈은 사라집니다.
서울에서의 원정 첫 경기를 비겨 본선 진출은 더욱 멀어졌고, 홍콩을 5대 2로 이겼으나, 쿠웨이트와 이란에게 연패, 3승 1무 4패로 예선을 마감합니다.
이란과 쿠웨이트 두 중동팀이 본선 진출에 결정적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란은 6승 2무(2무는 한국과의 경기)의 호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 82년 스페인 대회
아시아 출전 티켓의 두 장으로의 확대, 이란의 기권, 이스라엘의 유럽 예선 참가 등
우호적인 환경은 많은 나라들에게 본선 진출의 희망을 부풀리게 했습니다.
호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인 감독 구텐도르프(Rudi Gutendorf) 하에서 잘 조련된 호주팀은
같은 조에 위협적인 팀이 없어 무난히 최종 예선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4개조로 나누어진 예선에서
호주는 뉴질랜드, 피지, 인도네시아, 대만과 함께 1조,
사우디, 이라크,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가 2조,
쿠웨이트, 한국, 말레이시아, 태국이 3조,
중국, 일본, 마카오, 북한, 홍콩, 싱가포르가 4조에 배정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열린 첫 경기를 3대 3으로 비겼을 때만 해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81년 5월 16일 뉴질랜드와의 시드니 경기에서 0대 2로 완패하면서 두 경기만에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27년만의 뉴질랜드전 패배, 그 충격은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뉴질랜드가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길 것으로 예상되어 남은 경기는 무의미해졌습니다.
이후 4연승을 거두었지만 의미가 없었고,
신예들을 대폭 기용한 인도네시아전 0-1 패배, 대만전 무승부로 최악의 예선전 성적을 남겼습니다.
호주가 월드컵 예선에 출전한 이래 최종 예선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고, 한국도 쿠웨이트에 패해 1차 예선에서 탈락합니다.
70년, 74년, 78년 3개 대회를 통해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아시아/대양주의 양강 한국과 호주는 결국 최종 예선에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이별하게 됩니다.
이후 2006년 예선까지 두 나라는 지역 예선에서 한번도 마주치지 않습니다.
한편, 쿠웨이트, 뉴질랜드, 중국, 사우디가 격돌한 최종 예선에서는
쿠웨이트가 1위로 티켓을 확보한 가운데,
동률을 기록한 뉴질랜드와 중국이 플레이오프를 벌여
뉴질랜드가 2대 1로 이기고 첫 본선 진출에 성공합니다.
중국으로서는 2002년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본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대회였습니다.
뉴질랜드는 호주를 27년 만에 이긴 것 외에도 갖가지 기록을 세우며 신데렐라가 되었습니다.
44골로 지역 예선 최다 득점, 9 경기 무실점, 최다 점수차 승리(13대 0, 81년 8월 16일 피지전) 등이 그것입니다.
호주는 다음을 기약하며, 라이벌의 성공을 씁쓸하게 지켜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호주에게 다가온 운명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 86년 멕시코 월드컵
유고 출신 감독 아록(Frank Arok)의 지휘 아래 와신상담 86년 월드컵 예선을 준비하던 호주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FIFA가 86년 대회 예선에서 오세아니아를 아시아와 분리하고, 유럽과 플레이오프를 치루도록 한 것입니다.
유럽 플레이오프의 상대는 스페인,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이슬란드가 속한 7조 예선의 2위팀.
거기다가 국제 축구계의 왕따 이스라엘과 대만이 다시 오세아니아 예선에 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4년전에 비해 월드컵 예선 통과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역 라이벌 뉴질랜드가 건재한데다가 껄끄러운 이스라엘과 상대해야 했으며 그 벽을 넘더라도 유럽과 플레이오프를 치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유럽과 아시아 축구 수준의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커, 아시아에서 두 장의 티켓 중 하나를 노리는 것보다 유럽과의 플레이오프가 더 어려울 것은 자명했습니다.
호주의 첫 경기는 1985년 9월 25일 오클랜드에서 열린 뉴질랜드전.
0대 0 무승부로 끝나 4년전 악몽이 되살아 나는 듯 했지만, 10월 8일 텔아비브 원정 경기에서 미첼(David Mitchell)과 코스미나의 골로 2대 1로 승리, 한 숨을 돌렸습니다.
10월 20일 이스라엘과의 홈경기에서 1대 1로 비겨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시화되었고,
이어 대만과의 두 경기를 미첼과 오차코프의 해트트릭으로 7-0, 8-0으로 완승,
뉴질랜드와의 홈경기만을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싸커루는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11월 3일 시드니에서 벌어진 뉴질랜드전에서 미첼과 코스미나의 골로 2대 0으로 완승, 4년전의 빚을 갚았습니다.
이제는 플레이오프.
상대는 스코틀랜드였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스페인을 홈에서 3대 1로 이기기도 했지만, 웨일즈에게 1무 1패를 한 것이 부담이 되어 스페인에 승점 1점 차로 뒤져 유럽 7조 2위가 된 팀이었습니다.
1985년 11월 20일의 스코틀랜드전은 모든 것이 불리했습니다.
여름 기후에서 스코틀랜드의 추운 겨울 날씨에 적응해야 했고, 햄프덴 파크를 가득 메운 스코틀랜드 팬들의 일방적 응원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0-2의 완패.
싸커루는 12월 4일 멜브론에 스코틀랜드를 불려 들여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지만 골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0대 0 무승부.
싸커루의 본선 진출 꿈은 이렇게 또 사라져 갑니다.
◈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호주는 아록 감독이 계속 지휘봉을 잡으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선 방식이 다시 변경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대양주를 3개조로 나누고, 3개조 승자가 홈 앤드 어웨이로 대양주 승자를 가린 뒤 남미 2조(콜롬비아, 파라과이, 에과도르) 1위팀과 플레이오프를 가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대만이 이번에도 대양주에 배정되었습니다.
1조는 호주와 피지, 2조는 뉴질랜드와 대만, 3조 이스라엘(부전승)로 조가 짜여졌습니다.
누구나 호주가 피지를 이길 것으로 생각했지만, 호주는 나디에서 벌어진 어웨이 경기에서 충격적인 0-1 패배를 당합니다.
7년전 뉴질랜드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88년 11월 3일 피지를 뉴케슬로 불러 들여 5대 1 압승을 거두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2 라운드 1, 2차전을 뉴질랜드에 4대 1 승, 이스라엘과 1대 1 무승부로 무난한 출발을 한 호주는 3차전 뉴질랜드 원정 경기에서 0대 2로 패해 티켓은 멀어져 갑니다.
이스라엘과의 홈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일전이었습니다.
1989년 4월 16일, 시드니.
선취골을 빼앗긴 호주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골문을 두드렸으나, 동점골을 뽑은 것은 후반 종료 2분전(Paul Trimboli).
너무도 늦게 터진 골이었습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이스라엘은 콜롬비아에게 1무 1패로 뒤져 탈락, 20년만의 본선 진출 꿈이 좌절됩니다.
◈ 94년 미국 월드컵
FIFA의 푸대접에 호주 축구 팬들이 분통 터질만했습니다.
이번에 대양주에게 배정된 티켓은 0.25장.
역사상 가장 어려운 예선 방식이었습니다.
대양주 승자는 북중미 최종 예선 2위팀(멕시코, 캐나다, 엘살바도르, 온두라스)과 플레이오프를 가지고
승자가 남미 A조(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2위팀과 플레이오프를 가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주의 숙적 이스라엘이 유럽 예선에 참가한 것이었습니다.
분통이 터지더라도 일단 대양주 예선은 통과해 놓고 보아야 했습니다.
대양주 예선 조 배정은 A조가 호주, 타히티, 솔로몬군도 B조가 뉴질랜드, 피지, 베누아투였습니다.
약체로 평가되던 타히티에게 홈에서 2대 1로 겨우 이겨 팬들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지만 남은 경기를 전승하고, 뉴질랜드와의 대양주 결승도 3-0, 1-0의 완승을 거두어 북중미와의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됩니다.
상대는 캐나다.
홈팬들 앞에서 캐나다는 2대 1의 승리를 거둡니다.
호주의 경기력은 실망스러웠고, 상대의 자책골로 한 골을 뽑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호주는 시드니에서 다시 기력을 회복합니다. 전반 종료 직전 파리나(Frank Farina)가 선취골을 터뜨리고, 캐나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였으나, 후반 32분에 터진 두라코비치 Mehmet Durakovic)의 결승골로 2대 1 승리를 거둡니다.
동률이 된 양팀은 3차전을 치루지 않고 이어진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승자를 가리게 됩니다.
여기서 호주의 영웅이 탄생합니다.
골키퍼 쉬와처(Mark Schwarzer).
그는 승부차기 2개를 방어하며 호주에게 승리를 안깁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미와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콜롬비아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남미 예선 A조 2위는 놀랍게도 아르헨티나였습니다.
마라도나가 빠진 아르헨티나는 예선 마지막 홈경기에서 콜롬비아에게 0-5로 참패하며 플레이오프로 밀려난 것입니다.
다급해진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를 복귀시켰고, 그래서 호주와 아르헨티나의 플레이오프는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1993년 10월 30일 시드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호주는 마라도나가 활약한 아르헨티나(골 Balbo)와 1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골 비드마르 Aurelio Vidmar)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적인 아르헨티나 팬들의 응원 속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호주는 0-1로 패배, 다시 본선 진출에 실패합니다.
허용한 골이 토빈(Alex Tobin)의 자책골(공식 기록은 바티스투타 Batistuta의 골)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습니다.
◈ 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32개국으로 확대되어 2장이던 아시아의 티켓이 3.5장으로,
3장이던 아프리카의 티켓이 5장으로 늘어났지만
이번에도 대양주에게 혜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호주 축구 팬들은 플레이오프의 상대가 유럽이나 남미가 아니라 아시아란 것에 자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양주 예선에서 호주는 시드를 받아 2차 예선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2차 예선 조편성은
1조 호주, 솔로몬 군도, 타히티, 통가
2조 뉴질랜드, 피지, 파푸아 뉴기니
였습니다.
호주에게 대양주의 적수는 없었습니다.
4전 전승으로 1조 1위를 차지한 호주는 뉴질랜드와의 대양주 플레이오프에서도 2-0, 3-0의 쾌승을 거두며
아시아 4위팀과의 최종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아시아 4위팀은 일본의 오카노에게 연장 골든골을 허용하여 2-3으로 진 이란.
호주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한국, 이스라엘과 함께 호주의 숙적이라 할만한 팀입니다.
기대는 컸습니다.
대부분 해외파로 이루어진 스쿼드에다
잉글랜드 출신 베나블(Terry Venables) 감독의 지도력도 높은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문제라고는 유럽 클럽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차출 문제 정도.
97년 11월 22일 이란의 테헤란의 12만 관중이 들어찬 아자디 경기장에서 벌어진 1차전은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던 ‘떠오르는 별’ 케웰(Harry Kewell)의 활약에 힘입어 1대 1 무승부를 기록합니다.
97년 11월 29일,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호주 축구팬들은 이 경기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경기 시작 5분만에 두 번의 결정적 찬스를 놓쳐 실망하던 MCG의 9만 팬들은
전반 32분 케웰이 선제골을 터뜨리고,
후반 3분 비드마르가 두 번째 골을 터뜨린 순간 승리의 확신으로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24년전 한국이 그들에게 당한 것처럼 이번엔 그들이 이란에게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란의 바게리(Karim Bagheri)와 아지지(Khodadad Azizi)에게 후반 32분과 후반 35분 연속 골을 허용, 다잡았던 티켓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봅니다.
24년전 한국이 두 골을 리드하다가 호주에게 동점을 허용하며 다 잡았던 티켓을 놓치게 된 상황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그것도 홈 경기에서......
예선에서 한 경기도 지지 않았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호주의 탈락이 확정됩니다.
호주는 한 달 뒤에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예선에서 브라질과 비기고,
멕시코와 우루과이를 격파 한 뒤
결승에서 다시 만난 브라질에게 0-6으로 져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98 월드컵 팀을 사상 최강이라 생각하는 호주 팬들은 말합니다.
이란과의 경기에서 골대만 맞추지 않았다면,
브라질과의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에서 비두카(Mark Viduka)가 초반에 퇴장 당하지 않았다면,
호주가 프랑스 월드컵에 나갔다면......
그러나, 가정은 가정일뿐입니다.
그 가정이 24년 비원에서 나온 안타까운 목소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독립적인 티켓을 받고자 하는 대양주의 숙원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다시 남미로 바뀌었습니다.
남미 통합 예선의 5위팀과의 플레이오프입니다.
대양주 예선은
1조 호주, 피지, 통가, 사모아, 미국령 사모아
2조 뉴질랜드, 타히티, 솔로몬 군도, 바누아투, 쿡 군도
의 2개조로 나누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약체팀들과의 1차 예선에서 호주는 갖가지 축구 세계 신기록을 양산합니다.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 A 매치 및 월드컵 예선 최다골차 승리
호주 22 : 0 통가(2001년 4월 9일 호주 콥스 하버)
종전 기록 2000년 11월 24일 이란 대 괌의 19대 0(월드컵 예선)
2000년 2월 14일 아시안컵 예선 쿠웨이트 대 부탄의 20대 0(A 매치)
* A 매치 및 월드컵 예선 최다골차 승리
호주 31: 0 미국령 사모아(2001년 4월 11일 호주 콥스 하버)
종전 기록 호주 대 통가의 22대 0
* A 매치 한 경기 개인 최다골
아치 톰슨(Archie Thompson) 13골(미국령 사모아전)
종전 기록 덴마크의 스포후스 니엘손 10골(1908년 런던 올림픽 프랑스전)
* 월드컵 예선 최다 득점
호주 73득점(1차 예선에서는 66득점, 무실점)
등 입니다.
통가와 미국령 사모아전에서 점수판을 작동하던 관계자는 쉴 틈이 없었으며,
미국령 사모아의 파티 피기아이가 후반 42분께 골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슛을 날렸을 때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했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싸커루의 기세는 뉴질랜드와의 대양주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4-1. 2-0 의 완승.
호주의 남미 플레이오프 상대는 경기 6일전에야 결정되었습니다.
인터 밀란 소속의 스타 레코바(Alvaro Recoba)가 이끄는 우루과이.
1963년 이래 최초의 호주 출신 감독인 파리나와 선수들은 홈경기에서 많은 골차로 이겨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01년 11월 20일 멜버른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호주는 후반 33분에 터진 무스카트(Kevin Muscat)의 골로 1대 0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골은 호주가 본선 진출하는데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 호주는 우루과이에게 압도 당한 끝에 0-3으로 완패, 골득실차에서 뒤져 그들의 숙원 달성을 또 4년 후로 미루게 됩니다.
◈ 2006년 독일 월드컵
싸커루들은 지금 독일 월드컵 대양주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대가 이번에는 솔로몬 군도로 바뀌었습니다.
이번의 대양주 예선 방식은 1차 예선에서 4개팀을 선발하여,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 6개팀이 호주의 아들레이드에서 2차 예선을 벌이고,
2차 예선 1,2위팀이 대양주 플레이오프를 벌이는 방식입니다.
대양주 플레이오프 승자는 남미 5위팀과의 플레이오프로 본선 진출팀을 가리게 됩니다.
솔로몬 군도가 2차 예선 1차전에서 호주와 비기며 복병으로 부상했고, 뉴질랜드는 솔로몬 군도에게 3-0으로 이겼으나, 호주에게 0-1, 바누아투에게 2-4로 패해, 솔로몬 군도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넘겨 준 상태입니다.
이상으로 호주의 월드컵 도전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와 월드컵 예선에서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는 호주.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낙관한다......
첫댓글 비드마르 쉬와쳐,, 아직까지 뛰고있더라구요,,아까 컨페드컵 재방송봤는데;ㅋ
아예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묶어서 5장으로 하는게 어떨지.. 솔직히 오세아니아에 0.5장 주는거 좀 안스럽고... 그렇다고 떡하니 1장 주는 것도 좀.... -.- 지역적으로도 비교적 가깝고.. 5장으로 묶는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