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아는 사람들만이 미래가 있다
- 양평 지평리 전투기념관 -
양평 지평리 전투는 6.25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강유역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이다.
더구나 이 곳은 미군과 프랑스군이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감수한 채
피로써 이 진지를 끝까지 사수한 결렬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양평 평생학습센터 앞 금속 조각 작품
지평리 전투는 지난 1951년 2월 13일 부터 15일까지 미 2사단 제 23연대가 그 휘하에 배속된
1개 프랑스대대와 함께, 서울을 다시 점령한 후 남하하면서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 39군 예하
3개 사단에 이르는 대규모의 집중공격을 전면방어로 막어낸 피어린 전투이다.
※ 당시 지평리는 국군과 유엔군의 병참선의 중심지이면서 유엔군이 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평 향교 돌담밑 고목 한 그루
이 전투에서 미 23연대는 전선의 우측의 국군 제 3. 8사단이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철수함에 따라 중공군 제 39군에 완전 포위당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미 23연대는 프랑스 대대와
함께 고립된 상황속에서 집요한 중공군의 공격속에 3 일 동안 이를 막아냈다.
그 후 미 제 5기병연대(특공대)가 여주쪽 후방에서 적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제 23연대와 전선을 연결
함으로써 중공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게 되었다.
지평리 길 가 옛 농가 집에서
지평리 길가에 어느 농가집 담벽에 있는 발로 구르며 추수하는 옛날 수확기(옛날에는 이를 "쿵그레
통"이라 불렀음)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필자는 얼른 이를 한 컷트 찍었다.
지평 향교 담벽
지평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의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직접 개입한 이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공세를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한 위대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
한 손실을 입고 제 4차 공세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이를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기념관측에서 자료 제공)
지평리는 정녕 뜻깊은 곳이다. 이곳은 조선말 무너져 가는 나라를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의 애초 발생지이다. 뜻깊은 양평사람들이 의롭게 분기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지평전투, 그리고 의병의 원천지라는 두개의 역사적 의미를 한 기념관에서 기리고
있으니 참으로 그 의의가 큰 곳이라 할 수 있다. (의병관계는 다음기회에 소개 할 예정입니다)
이 곳 의로운 사람들과 이를 후세에 기리는 양평 지평리 전투 기념사업과 관련
우리들의 선대의 뜻깊은 수많은 의병들과 그리고 외지 한국에서 자유와 정의
를 위해 목숨바친 유엔군들에게 묵념을 합장과 함께 보냅니다.
* 양평 역사 문화연구회는 지난 2016년 3월 7일 양평 지평리 소재 지평전투 기념관을
탐방하였다. 그리고 지평 향교를 찾아 그 속에 품겨져 있는 역사적 흔적과 거기에 깃든
정신들을 더듬어 가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미 이에 대한 탐방기를 다른 회원들이
기술하였기에 길가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었다. (강건너 언덕의 超堂 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