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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법화경유통회 경전회상 원문보기 글쓴이: 보운법사
經典會上
법화경 일일법문 권지품 제13: 세존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세존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탁세(濁世-오탁악세(五濁惡世))에 악한 비구들은
부처님이 방편(方便-법화경 외에 모든 경전)을 가지고
근기에 맞추어 설법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13-17
세존자당지 탁세악비구 부지불방편 수의소설법
世尊自當知 濁世惡比丘 不知佛方便 隨宜所說法
世尊自當知하오시리니 濁世惡比丘는
不知佛方便 隨宜所說法하나이다
1-이 게송은 1항에 20글자로 이루어져있다. 부처님의 경전을 나눔에 있어 크게 둘이 있으니, 첫째 방편경전이고 둘째 진실경전이다. 첫째 방편경전은 또 둘이 있으니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이고, 둘째 진실경전은 일승경전인 법화경뿐이다.
2-법화문구에서 천태보살이 방편품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방편품을 해석한다.
이를 해석함에 약석(略釋)과 광석(廣釋)이 있다. 약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니, 먼저 약석하고, 다음으로 요간(料簡)했다.
방(方)이란 법(法)이요, 편(偏)이란 용(用)이니,
법(法)에는 방원(方圓)이 있으며, 용(用)에는 차회(差會)가 있게 마련이다.
삼권(三權)은 곡척과 같으니 방(方)이요, 일실(一實)은 그림쇠 같으니 원(圓)이다.
만약 지혜가 곡척같은 상태에 이르러 있으면 편법(偏法)을 잘 써서 중생을 그 근기에 맞도록 교화하며, 만약 지혜가 그림쇠 같은 상태에 이르면 원법(圓法)을 써서 중생을 그 근기에 맞도록 교화하신다.
비유컨대 편벽되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편벽되이 한 곳을 가리켜 보이는 것과 같다. 이는 편벽된 법을 들어 지(智)를 가리켜 보이는 것에 해당하니, 모름지기 법(法)으로 방(方)을 해석하고, 용(用)으로 편(偏)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약 모두 손가락 다섯을 들어 원만히 모든 곳을 가리켜 보인다면, 의당 비(비)로 방(方)을 해석하고, 묘(妙)로 편(偏)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이 편법(偏法)을 들어 방편을 해석함은, 대개 중생의 욕구를 따르는 일이어서 부처님의 본뜻이 아니시다.
경에서 「여러 집착을 떠나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니, 이 때문에 여래가 간곡히 방편을 찬탄했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도리로 다른 경전들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나, 이 품(品)의 취지는 되지 못한다.
또 생각건대, 방편이란 문(門)이다.
문은 통하는 것에 이름 붙임이니, 통해지는 것에 통한다.
방편권략(方便權略)은 다 농인(弄引)이어서 진실을 위해 문이 된다.
진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 공이 방편 때문이니,
나타내는 작용을 따라 이름을 얻었으므로, 문(門)의 도리를 가지고 방편을 해석함이다.
경에서 「방편의 문을 열어 진실의 상(相)을 보인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 도리로 다른 경전을 해석할 수는 있으나, 이 품(品)의 취지는 아니다.
또 생각건대 방(方)이란 비(비 )요, 편(便)이란 묘(妙)다.
묘(妙)가 방(方)에 통달하니, 곧 진정한 비밀이다.
속옷 속에 달린 값모르는 구슬을 가리켜 보이니 왕의 정수리 위에 오직 하나의 구슬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머슴살이하는 사람을 가리켜 보이매 바로 장자(長者)의 아들이어서 또한 아무런 다름이 없다.
이 같은 말들은 바로 비(비)요 바로 묘(妙)라 해야 한다.
경에서 「오직 내가 이 상(相)을 알고, 시방제불(十方諸佛) 또한 그러하시니라. 그만 두라. 다시 설할 것이 없나니, 내 법은 미묘하여 생각키 어렵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비)로 방(方)을 해석하고 묘(妙)로 편(便)을 해석함이요, 이는 바로 이 품(品)의 취지이므로 방편품이라 말하는 것이다.
방편에 대해 가리건대, 첫 번째 해석은 체외(體外)의 방편이니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권(權)이어서 수타의어(隨他意語)라 보는 견해다. 다음의 해석은 또한 체외의 방편이나 자행(自行) 화타(化他)의 권(權)이어서 또한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라고 보는 견해다. 뒤의 해석은 동체(同體)의 방편이니 곧 자행(自行)의 권(權)이어서 수자의어(隨自意語)라고 보는 견해다.
처음에서 해석한 방편은 들어가는 도(道)도 아니요, 들어가게 된 진실도 아니다. 다음으로 해석한 방편은 들어가는 도이기는 하나 들어가게 된 진실은 아니다. 뒤에서 해석한 방편은 들어가게 된 진실일 뿐 들어가는 도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방편」이라는 이름은 같아도 그 도리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취지를 보지도 못한 채 함부로 방편품을 해석하고 있다…….
질문.「방편(方便)과 권(權)의 관계는 어떤가·」
대답.「사구(四句)로 분별컨대, 스스로 방편이 권(權)을 깨는 것과, 권이 방편을 깨는 것과, 방편이 권을 닦으며 권이 방편을 닦는 것과, 방편이 곧 권이며 권이 곧 방편인 네 가지가 있게 된다.
방편이 권(權)을 깬다 함은, 네 가지가 다 비묘(비妙)의 방편이라는 것이니, 이 방편은 수타의(隨他意)의 권(權)을 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權)이 방편을 깬다 함은, 권은 동체(同體)의 권이어서 체외(體外)의 방편을 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수(相修)한다 함도 또한 이해가 갈 것이며, 상즉(相卽)한다 함도 또한 이해가 갈 것이다.
삼구(三句)로는 다른 경을 해석할 수 있으나, 제사구(第四句)가 이 방편품의 취지다.
그러므로 정법화(正法華)에서는 선권품(善權品)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권(權)은 곧 방편이어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머리를 숙이며 손을 드는 행위도 다 불도(佛道)를 이루게 되는 것이어서, 방편과 선권(善權)은 다 진실인 것이 된다.
자세히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옛사람이 해석한 오시(五時)의 권실(權實)을 내놓으면, 「십이년(十二年) 전에 앞서 무상(無常)의 현상을 비추신 것을 권(權)이라 하며, 무상의 도리를 비추신 것을 실(實)이라 하니, 아비담(阿毘曇)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제 내 생각을 밝히건대, 석론(釋論)에서 무상(無常)은 대치(對治)의 법이어서 다 삼실단(三悉檀)에 속한다고 논파(論破)한 바 있으니, 어떻게 진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방편〔權〕은 지금 법화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채택할 것이 되지 못한다.
십이년(十二年) 후인 반야경(般若經)에서는, 가유(假有)를 비추심을 권(權)이라 하고, 가유즉공(假有卽空)을 비추심을 실(實)이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석론(釋論)에서 또한 이 도리를 논파(論破)하여, 「염상관(念想觀)이 이미 제거되는 곳에 언어도 다 없어진다」고 했으니, 가유즉공(假有卽空)을 비춘다 함은 아직 관상(觀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채택할 것이 되지 못한다.
다음으로 정명경(淨名經) 사익경(思益經)에서는 안으로 고요히 공(空) 유(有)의 두 대상을 비추어보는 것을 실지(實智)라 하며, 밖으로 변동응용(變動應用)하는 것을 권지(權智)라 한다고 옛사람은 해석했다.
이제 내 생각을 밝히건대 안으로 비추어보는 실지(實智)와 밖으로 신통묘용을 나타내는 권지(權智)를 둘로 보아 대립시키니, 이는 불이(不二)의 문에 든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에는 이를 채택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법화경에서는 삼삼(三三)을 비추심을 권(權)이라 하고, 사일(四一)을 비추심을 실(實)이라 한다고, 광택(光宅)은 주장했다.
이제 내 생각을 밝히건대, 세 가지 방편이 전적으로 진실에 합치(合致)되지 못하고, 하나의 진실이 세 가지 방편과 관련이 없으니, 이는 지금 채택할 것이 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열반경에서는, 금강(金剛) 이전에 설하신 무상(無常)의 도리를 권(權)이라 하고, 금강 이후에 설하신 상주(常住)의 도리를 실(實)이라 했다고, 광택은 주장했다.
이제 내 생각을 밝히건대, 도전(道前)의 진여(眞如)도 상(常)이요, 도후(道後)의 여량지(如量智)도 권(權)이니, 이 주장도 잘못이다. 이 오시(五時)의 권실(權實)은 다 지금에 채택할 것이 되지 못한다.
내지 반만(半滿) 사종(四宗)에서 밝혀진 권실이지(權實二智)도 지금에 채택할 것이 되지 못한다.
또 사람들이 있어서 각기 해석했으니, 방편은 권이(權爾)요 진실은 심실(審實)이라 하고, 또 방편은 권교(權巧)요 진실은 지혜라 하고, 또 방편은 권가(權假)니, 삼거(三車)를 문밖에 가설(假設)하는 일이라 하고, 또 방편은 권의(權宜)니 마땅히 삼승(三乘)을 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고, 또 권(權)은 비(譬)의 이름이니, 비유컨대 저울의 추(錘)에 있어서 이를 앞으로 밀면 무거워지고 이를 뒤로 물리면 가벼워지고 가운데에 놓으면 평평해 지는 것 같아, 불지(佛智)의 살피시어 칭량(稱量)하심에 들어맞게 됨이다 했다.
이런 등속의 해석들은 각기 일방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으니, 권이(權爾) 권가(權假)는 장소에 입각하고, 권의(權宜)는 법문(法門)에 입각하고, 권교(權巧)의 저울추는 지능(智能)에 입각해, 각기 다른 것을 널리 포함하지 못하여 도리에 있어서 원융미묘(圓融微妙)한데가 없다. 그러므로 이를 써서 금품(今品)을 해석할 수는 없다.
또 사람이 있어서 사종(四種)의 이혜(二慧)를 가지고 방편과 진실을 가렸다.
그 첫째는 하나는 방편이요 하나는 진실이라 함이다.
다음으로 둘째는 공유(空有)의 이지(二智)로 공(空)을 관(觀)하여 깨닫지 못하면 이승(二乘)을 떠나며, 유(有)와 관계하면서도 물드는 점이 없으면 범부의 경지에서 벗어난다 함이니, 전자는 방편이요 후자는 진실이다.
다음으로 셋째는 공유(空有)가 안에서 고요히 가라앉은 것을 진실이라 하며, 밖으로 나타나는 그 용(用)을 방편이라 함이다.
다음으로 금강전후(金剛前後)의 상주(常住) 무상(無常)을 권실(權實)이라 함이다.
처음의 이혜(二慧)는 신심(信心)을 생기게 하고, 다음의 이혜는 이해를 생기게 하고, 다음의 이혜는 남을 교화케 하고, 뒤의 이혜는 도과(道果)라고 주장했다.
이 여러 이혜(二慧)에는 무릇 세 단계가 있으니, 처음에서는 유(有)를 속제(俗諦)라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라 했으며, 다음에서는 공유(空有)를 속제라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를 진제라 했으며, 다음에서는 공유를 이(二)라 하고 비공비유를 불이(不二)로 보는 견지에서 이(二)와 불이(不二)를 다 속제라 하고, 비이비불이(非二非不二)를 진제라 하였다.
그리하여 가르침과 지혜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왜 그런가· 위인실단(爲人悉檀)인 까닭이니, 스스로 사람이 있어서 앞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못하다가도 뒤의 가르침을 듣고는 깨닫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二諦)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또 여래는 항상 이제(二諦)에 의거해 법을 설하시는 까닭에 이제에 삼문(三門)이 있게 됨이요,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록 많기는 하다 해도 이 삼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 같이 주장했다.
또 점차적으로 중생을 인도하시는 까닭이다. 범부는 심신(心身)을 실체(實體)라 여기거니와, 기실 이는 진실이 아니니 법성(法性)이 진제일 뿐이다. 그래서 유(有)는 속제요 공(空)은 진제라 설하신 것이나 이를 받아들인 범부들은 곧 유를 버리고 공을 취해 이것에 매이고 만다.
그러므로 다시 공 유는 다 속제요 비공비유(非空非有)가 진제라 설하신 것인데, 어떤 사람은 이를 듣고 이변(二邊)을 버리는 것까지는 좋으나 다시 중도(中道)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셋째 단계에서는 이변(二邊)을 멀리 떠나는 동시에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음이 진제라고 설해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오승(五乘)에 속한 사람을 위한 시설이시니, 처음에서는 범부를 이끌어 신심을 낳아 유(有)에서 나오게 하시고, 다음 단계에서는 이승(二乘)을 이끌어 중도에 들게 하시고, 다음 단계에서는 보살을 이끌어 중도와 편견(偏見)을 함께 버리게 하셨다.
또 중도를 배우는 자를 위해 시설하셔서 삼가(三假)를 세제(世諦)라 하고 삼가의 공을 진제라 함이니, 이는 다만 첫 단계의 취지일 뿐이요, 다음에서는 상가의 공과 유를 다 속제라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를 진제라 했다……. 이상이 그 주장이었다.
이제 저 길장(吉藏)의 해석을 살펴보건대, 혜관(慧觀) 계통의 오시설(五時說)에 의지하여 제 의견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니, 도리어 점차제등(漸次梯·)의 잘못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다른 경을 해석할 수는 있다 해도 이 방편품의 뜻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경에서 이르되 「다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한다」고 하시니 어느 때라고 전후의 개오(開悟)가 동일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르되 「정직히 방편을 버린다」고 하셨으니 어찌 점차적인 방법을 써서 원묘(圓妙)의 가르침에 돌아가게 할 것이 있으랴.
또 처음에 인용한 생신(生信) 생해(生解) 화타(化他) 도과(道果) 등이 어찌 금경(今經)의 오입(悟入)의 취지와 관련이 있으랴.
천친(天親)이 방편에 대한 17의 이름을 열거하는 중에 제 13을 대교방편(大巧方便)이라 이름 붙이고, 또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이 방편의 십종(十種)을 밝히면서 제 9를 선교(善巧)라 이름 붙인 것 같음은, 이승(二乘)을 옮겨 대승의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에 들게 하는 취지였다.
마땅히 금품(今品)은 여래의 방편이라, 일체의 법을 거두어들임이 마치 허공이 형상 있는 것들을 자기 안에 포용하는 것과 같으며, 바다가 물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음을 알 것이니, 어찌 여러 논사(論師)들의 조그만 견해를 가지고 법계(法界)의 취지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랴.
이제 권실(權實)을 밝힘에 있어서 먼저 사구(四句)를 만들고자 하니, 일체의 법이 다 권(權)이다 하는 구(句)와, 일체의 법이 다 실(實)이다 하는 구와, 일체의 법이 권이기도 하며 실이기도 하다는 구와, 일체의 법이 권도 아니요 실도 아니라는 구가 그것이다.
「일체의 법이 권(權)이다」라는 구(句)는, 경에서 「제법(諸法)의 이 같은 성(性) 상(相) 체(體) 역(力) 본말등(本末等)」方便品 이라 말한 것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말이 있는 바에는 다 권(權)인 것이 되다.
「일체의 법이 실(實)이다」라는 구(句)는, 경에서「교묘히 여러 법을 설하사 모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신다」方便品 고 하신 것과 같으니, 이 글은 진실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기쁨을 삼는다는 취지다. 또 「제법(諸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寂滅)의 상(相)일 뿐이다」方便品 하고, 또 이르되 「여래의 설하시는 것〔法〕은 다 일체지지(一切智地)에 이른다」藥草喩品 하고, 또 이르되 「다 진실이어서 거짓이 없다」壽量品 하고, 또 대경(大經)에서 「사구(四句)가 다 불가설(不可說)이다」 고 하신 것도, 이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법이 권(權)이기도 하며 실(實)이기도 하다」는 구(句)는, 경에서 「소위 제법(諸法)의 여실(如實)한 모습」方便品 이라 한 것과 같으니, 이는 온갖 법이 권이기도 하며 실이기도 한 것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부정관(不淨觀)이 실(實)이기도 하며 허(虛)이기도 한 것과 같다…….
「일체의 법이 권도 아니며 실도 아니다」라는 구(句)는, 경에서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壽量品 하고, 또 「또 상중하법(上中下法)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와 실법(實法) 부실법(不實法)을 행하지 않는다」安樂行品 고 하니, 허(虛)도 아니며 실(實)도 아니라는 것은 여실상(如實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일체의 법이 다 권(權)이라면 어찌 깨지 못함이 있으랴. 비록 백천 가지의 논사(論師)가 있고 그 하나 하나의 논사마다 백천 가지의 설(說)을 내세운다 해도, 권(방편) 아님이 없을 것이다. 여래께서 설하심이 있어도 오히려 권이거니, 하물며 인사(人師)로서 어찌 권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서 내세운 것 같은 주장은 다 권이라 해야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다 실(진실)이라면 어찌 깨지 못함이 있으랴. 경에서 「오직 이 한 가지만이 진실이요 다른 둘은 참이 아니다」方便品 하셨으니, 다만 하나의 구경도(究竟道)가 있을 뿐이지 어찌 여러 가지 구경도가 있을 수 있으랴. 앞에 나온 여러 논사도 다 논파(論破)되어 진실에 들어가게 되거니, 어찌 다시 그 소굴이 보존될 수 있겠는가.
만약 일체의 법이 권이기도 하며 실이기도 하다면 또 어찌 깨지 못함이 있으랴. 일체가 다 권이 있고 실이 있다면 어찌 일방적 견해로 타인의 다른 해석을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 하나의 법 속에 다 권과 실이 있는 것이라면 전적으로 권이라 하고 전적으로 실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일체의 법이 권도 아니며 실도 아니라면 또 어찌 깨지 못할 것이 있으랴. 그런데도 어째서 시끄럽게 굳이 건립(建立)을 낳으려 하는 것일까.
다만 사구(四句)의 이름을 열거해도 이와 같거니, 멀리 관찰하고 깊이 본다면 광탕고명(曠蕩高明)함을 어찌 이 같기만 하다고 하겠는가. 하물며 그 취지를 논함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나 이는 일이겠는가.
이제 「권(權)도 있고 실(實)도 있다」는 구(句)에서 다시 십법(十法)을 나누고 십법 중에서 여덟 차례의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덟이란 첫째는 십법의 이름을 세움이요, 둘째는 생기(生起), 셋째는 해석이요, 넷째는 인증(引證)이요, 다섯째는 십법을 결합해 삼종권실(三種權實)을 삼음이요, 여섯째는 삼종권실을 분별하여 삼종이제(三種二諦)를 밝힘이요, 일곱째는 여러 경에 입각해 권실을 판정함이요, 여덟째는 본적(本迹)에 이각해 권실으 판정하는 일이다.
첫째로 이름을 나열컨대, 사리(事理) 이교(理敎) 교행(敎行) 박탈(縛脫) 인과(因果) 체용(體用) 점돈(漸頓) 개합(開合) 통별(通別) 실단(悉檀)이니, 곧 열가지 이름이다.
둘째로 생기(生起)를 밝히건대, 무주(無住)의 근본에서 일체의 법이 성립하니, 무주란 이(理)요 일체의 법이란 사(事)다. 이 이(理)와 사(事) 때문에 교(敎)가 있게 되고, 이 교 때문에 행(行)이 있게 되고, 이 행 때문에 박탈(縛脫)이 있게 되고, 이 해탈 때문에 인과(因果)를 이루고, 이 과(果) 때문에 체(體)가 나타나 용(用)이 있게 되어, 그러기에 점돈(漸頓)의 교화가 있고, 점돈을 여는 까닭에 개합(開合)이 있고, 이 개합 때문에 통별(通別)의 이익이 있고, 이 두 가지 이익을 분별하기 때문에 사실단(四悉檀)이 있게 된다. 이를 열가지 어구(語句)의 생겨나는 차례라 한다…….
셋째로 해석컨대, 이(理)는 진여(眞如)니 진여는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어서 부처님이 계시건 부처님이 안계시건 언제나 변화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理)를 불러 실(實)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事)는 심의식(心意識)등이니, 청정하고 부정한 업을 일으켜 바뀜이 일정치 않다. 그러므로 사(事)를 일러 권(權)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이(理)가 아니라면 사(事)를 세울 수 없으며, 사(事)가 아니라면 이(理)를 나타낼 길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사(事)에는 이(理)를 나타내는 공능(功能)이 있는 것이 되니, 그러므로 간곡히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이교(理敎)에 있어서 이(理)란, 앞의 이(理)와 사(事)를 포괄하여 다 이름지어 이(理)라 한 것이니, 예컨대 진속(眞俗)을 다 일컬어 제(諦)라 함과 같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이(理)를 체득하사, 성(聖)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이니, 성(聖)이란 진실이다.
또 이교(理敎)의 교(敎)에 대해 말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법을 가져다가 아래로 중생을 교화코자 생각하시므로 이(理)에 말미암아 교(敎)를 시설하시니, 교란 곧 방편인 것이 된다. 교(敎)가 아니라면 이(理)를 나타낼 도리가 없으며 이(理)를 나타냄은 교(敎)에 말미암으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행(敎行)에 대해 생각건대 교(敎)에 의거해 진리를 구하면 바른 행(行)을 낳게 되는 바, 행에는 나아감에 있어서 깊고 얕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行)을 방편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교(敎)에는 나아감에 있어서 깊고 얕은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교(敎)를 진실이라 규정하게 된다.
대저 교가 아니면 행을 세울 수 없으며 행이 아니면 교에 합치할 수 없으니, 교에 합치하는 것은 전적으로 행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박탈(縛脫)에 대해 생각건대, 행(行)을 함이 도리에 어긋나면 박(縛)인 바, 박은 거짓된 것이므로 방편이라 일컬음이요, 행을 함이 도리를 따르는 경우에는 해(解)를 낳으리니, 해는 도리에 들어맞으므로 진실이라 일컫는 것이다.
박(縛)이 아니면 탈(脫)을 구할 도리가 없으며, 탈을 얻는 것은 박에 말미암음이어서 시체에 말미암아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시체에 기슭으로 건너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과(因果)에 대해 생각건대, 인(因)에는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점이 있어서 잠시의 작용이므로 방편이라 하며, 과(果)에는 궁극적인 것을 성취하는 점이 있어서 영구한 증득(證得)이므로 진실이라 한다.
만일 과(果)가 없다면 인(因)으로서는 바랄 것이 없음이 될 것이며, 인(因)이 없다면 과(果)가 스스로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관(二觀)을 방편도(方便道)로 삼아 혹(惑)을 끊어 인(因)을 이루는 것에 의해 중도(中道)의 해탈의 과(果)에 들어가게 됨이니, 만약 이관(二觀)이 아니라면 어찌 중도에 합치(合致)할 수 있으랴.
이 같이 과(果)는 인(因)에 말미암아 성취되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체용(體用)에 대해 생각건대, 앞의 방편을 인(因)으로 하며 정관입주(正觀入住)를 과(果)로 삼는 중에서, 십주에서 나오는 것을 체용이라 한다. 체(體)는 곧 실상(實相)이니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용(用)은 곧 칠체의 사물을 성립시키되 위계(位階)의 차등이 짐이 같지 않다.
대지(大地)는 하나지만 갖가지 싹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땅이 아니라면 싹의 생겨남이 없을 것이며, 싹의 생겨남이 아니라면 나타나는 것이 없으리니, 흐름을 따라 찾은 끝에 근원을 발견하고 용(用)을 미루어 체(體)를 알게 된다.
이 같이 용(用)에는 체(體)를 나타내는 힘이 있으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점돈(漸頓)에 대해 생각건대, 인(因)을 닦아 과(果)를 증득(證得)하여 체(體)로부터 용(用)을 일으키매, 함께 점교 돈교가 있게 된다. 이제 용(用)을 일으킴을 밝히건대, 점교를 쓰는 것을 방편이라 하며, 돈교를 쓰는 것을 진실이라 한다. 만약 점교를 가지고 인도함이 아니라면 돈교에 들어갈 도리가 없을 것이니, 점교를 따르는 것에 의해 진실을 얻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개합(開合)에 대해 생각건대, 돈교로부터 점교가 분개(分開)되니, 점교 자체만으로는 합일(合一)되지도 않고 또한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돈교에 합일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점교를 일러 방편이라 한다. 이에 비해 점교를 그 구경(究竟)에 이르게 하면 도리어 돈교에 합일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이를 일러 진실이라 한다. 분개로 하여 합일이 있게 되는 것이어서 분개에는 합일하는 힘이 있다. 이렇게 분개를 따라 방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됨이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통별(通別)의 이익에 대해 생각건대, 통교(通敎)는 반자(半字)의 가르침이니 그것이 끼치는 것은 무상(無常)의 이익인데 비해, 별교(別敎)는 곧 만자(滿字)의 가르침이므로 상주(常住)의 이익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상주의 이익을 받는 과정은 매우 긴 세월을 필요로 하므로 즐겨 타락하기 쉬우니, 그러므로 화성(化城)으로 접인(接引)해 편안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고, 그런 뒤에 화성을 치우사 인도해 보소(寶所)에 이르게 하셨다. 만약 반자(半字)의 가르침으로 이익을 끼치심이 없다면 상주(常住)의 도리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 같이 반자(半字)에는 만자(滿字)를 나타내는 힘이 있으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셨다고 할 수 있다.
사실단(四悉檀)에 대해 생각건대, 세 가지는 세간(世間)에 속하니 그러므로 방편이라 하며, 제일의(第一義)는 출세간(出世間)에 속하니 그러므로 진실이라 한다.
세간의 법이 아니라면 출세간에 이를 수 없으니 세 가지 실단(悉檀)에 말미암아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을 얻게 되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땅히 사구(四句)를 사용해 십번권실(十番權實)을 해석해야 하리니, 세 가지는 다른 경의 취지요, 한 가지는 이 품(品)의 취지다…….
넷째로 인증(引證)에 있어서는, 이 십의(十義)로 말하자면 대승 소승의 가르침에 공통하여 일체의 법에 jfcls다고 보아야 하겠으나, 잠시 금경(今經)을 인용하겠다.
「삼계(三界)의 범부가 삼계를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壽量品 고 하셨는데, 여기서 삼계란 사(事)요, 삼게의 범부가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함은 이(理)다.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마로 펼 일이 아니로되」方便品 라 하심은 이(理)요, 계속해서 「방편으로 오비구(五比丘) 위하여서 법을 설하니」라고 하신 것은 교(敎)다.
「만약 이 경을 듣는 자는 잘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는 것이 된다」法師品 고 하신 것은 교행(敎行)을 증명하심이다. 또 「너희들의 행하는 것은 바로 보살도니라」藥草品 하시고, 「불자(佛子)가 도를 행하고 나서, 내세에는 부처가 될 수 있으리라」方便品 하시고, 「갖가지 인연으로 불도를 구한다」譬喩品
하시고, 「다만 거짓을 떠남을 해탈이라 한 것뿐이니, 기실은 온갖 것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은 것은 아니다」譬喩品 하시고, 「다 온갖 부처님의 지니신 도법(道法)을 행한 끝에, 도량(道場)에 앉아 불과9佛果)를 성취할 수 있었다……」方便品 하시고, 「내가 불안(佛眼)으로 관(觀)해 육도(六道)의 중생을 보니」方便品 라 하시고, 「비로소 내 몸을 보고 내 설하는 바를 들어 곧 다 신수(信受)해 여래의 지혜에 들어가니, 먼저 닦아서 소승을 배운 자는 제외한다……」하시고, 궁자(窮子)가 처음에 도망쳤다가 중간에 머슴이 되어 똥을 치웠으나 뒤에 재산을 물려 주신 일이라든가, 처음에 화성(化城)에서 휴식하게 하시고 뒤에 보소(寶所)로 이끄신 일이라든가, 또 「갖가지 욕(欲), 갖가지 성(性) 상(相) 억념(憶念)」壽量品 이라 하신 것 따위는, 이는 일반적으로 일부(一部)를 인용해 증명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일품(一品)을 인용컨대, 비록 차례대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십법(十法)에 관한 글이 고루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부처님네 지혜란 심히 깊고 한량없이 그 지혜의 문은 이해키 어려우며 들기 어려우니」라 함은, 일체의 사리(事理) 경지(境智) 등을 다 지목하여 진실로 삼음이니, 아함경의 언교(言敎)를 시설(施設)하여 설하신 것은 다 지혜의 문(門)이다. 이는 이교(理敎)에서 권실(權實)을 논함을 증명하신 글이다.
「이해하기 어려우며 들기 어려우니 온갖 성문(聲聞) 벽지불(酸支佛)의 능히 알 바 아니니라」고 함은, 곧 박탈(縛脫)에서 권실(權實)을 논한 글이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 일찍이 무수한 부처님네 가까이해」로부터 「이름 널리 들리며」에 이르기가지는 곧 교행(敎行)에 입각해서 권실을 논한 것이다.
「심히 깊은 법 성취하여서」에서부터 「뜻이 이해키 어려움이니라」에 이르기까지는 곧 체용(體用)에 입각해 권실을 논한 것이다.
「내가 성불 이래」란 성불은 과(果)요 과(果)에는 반드시 인(因)이 선행(先行)할 터인즉, 이는 곧 인과(因果)에 입각해서 권실을 논한 것이 된다.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부터 「모든 집착 떠나게 하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돈점(頓漸)에 입각해서 권실을 논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방편과 지견바라밀(知見波羅蜜)을 다 갖추었기 대문이니라」한 말씀은 곧 개합(開合)에 입각해서 권실을 논한 것이다.
「온갖 부처님들께오선 오직 일대사인연(二大事因緣)으로 해 세상에 나오시나니, 중생들로 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개시오입(開示悟入)케 하고자 하심이니라」하신 말씀은 이익(利益)에 입각해서 권실을 논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이르건대, 부처는 온갖 것을 다 이루고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곧 삼실단(三悉檀)의 성취요, 「그만두라, 구태여 다시 이를 바 아니니」란 곧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니, 이를 사실단(四悉檀)에 입각해 권실을 논한 것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의 이룬 바는 제일의 희유(希有)한」에서부터 「제법실상」에 이르기까지는 곧 이(理)요, 「이르는 바 제법(諸法)의 이 같은 상(相)」은 곧 사(事)니, 이를 이사(理事)에 입각해 권실을 논한 것이라 한다.
이 일단(一段)의 장항(長行)은 오불(五佛)의 권실을 밝힌 것이니, 모든 부처님이 다 그러신 것이 된다.
그런데 법화론(法華論)에서는 「제불(諸佛)의 지혜란 심히 깊어」를 해석하여 증심심(證甚深)이라 했다. 그리고 이 심심(甚深)을 나누어 다섯이 있다 했으니, 의심심(義甚深) 실체심심(實體甚深) 내증심심(內證甚深) 의지심심(依止甚深) 무상심심(無上甚深)이다. 무상심심이란 대보리(大菩提)를 깨닫는 것을 이름이다. 그리고 「지혜의 문」을 지목해 설아함의심심(說阿含義甚深)이라 했다. 이상의 것은 앞에서 내가 말한 이교(理敎)의 권실(權實)과 취지가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부처 일찍이 백천만억 무수한 부처님네 가까이 해」를 해석해서 수행심심(修行甚深)이라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해 이름 널리 들리며」를 해석하여 증장공덕심심(增長功德甚深)이라 했다. 이는 교행(敎行)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심히 깊은 일찍이 없던 법 성취하여서」를 해석해서 미묘사심심(微妙事甚深)이라 하고, 「뜻이 이해하기 어려움이니라」를 해석해 무상심심(無上甚深) 입심심(入甚深)이라 했다. 이는 앞의 체용(體用)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내가 성불한 이래」를 해석하여 설여래공덕성취법(說如來功德成就法)이라 했다. 이는 인과(因果)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무수한 방편」을 해석하여 곧 교화성취(敎化成就) 설법성취(說法成就)라 했다. 이는 점돈(漸頓)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여래의 방편과 지견(知見)」이나 「가없는데 깊이 들어」 따위의 글을 해석해, 이는 제몸에 불가사의한 경지를 성취하여 다른 온갖 보살보다 뛰어났음을 보이신 것이라 했으니 이는 이(利)를 밝히심이요, 법화론에서 「능히 갖가지로 분별하여」로부터 「여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라」에 이르기까지의 글을 해석하여 언어성취(言語成就)를 가리킨 것이라고 했으니, 이는 익(益)에 해당한다. 앞의 이익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한 마디로 이르건대……」와, 「그만 두라, 구태어 다시 이를 바 아니니」 따위를 해석하여 가화중생성취(可化衆生成就)라 했다. 이는 사실단(四悉檀)에서 가화(可化) 불가화(不可化)를 분별한 것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또 법화론에서는 「오직 부처와 부처라사 능히 다 아시나니」를 해석하여 무량복성취(無量福成就)라 했는데, 모든 부처님이 능히 아신다 한 것은 여래의 법신(法身)의 체(體)는 불변인 까닭에 깨달음이 스스로 깨달아 성취함이요, 능히 중생의 근기를 따라 온갖 제법(諸法)의 상(相) 따위를 설하신다는 따위의 말씀은 화타(化他)를 이른 것이다. 이는 이사(理事)의 권실과 취지에 있어서 동일하다.
저 법화론(法華論)은 불경을 해석한 것이거니와, 이 소(疏)는 모르는 사이에 두 성인과 일치하니, 수다라(修多羅), 우바제사(優波提舍)와 다 합치한다고 할 만하다.
다섯째로 권실(權實)을 맺건대, 이 열 가지는 사교(四敎)에 통용될 것이므로 합쳐서 사십(四十)의 권실이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삼장교(三藏敎)의 경우라면 자증(自證)의 십법(十法)을 자행(自行)의 권실이라 하며, 자기의 십법을 설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화타(化他)의 권실이라 한다.
그리고 화타의 십법을 다 합쳐서 권(權)이라 하고 자행(自行)의 십법을 다 합쳐서 실(實)이라 하는 것, 이를 가리켜 자타(自他)의 권실이라 한다. 다른 삼교(三敎)에서 십법을 묶어 삼종(三種)의 권실을 삼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또 당교(當敎)에서는 각각 사리(事理) 교행(敎行) 박탈(縛脫) 인과(因果)의 네 가지를 자행(自行)의 권실이라 하며, 각각 이교(理敎) 개합(開合)의 두 가지를 화타(化他)의 권실이라 하며, 각각 체용(體用) 점돈(漸頓) 통별(通別) 실단(悉檀)의 네 가지를 자타(自他)의 권실이라 한다. 그 이름은 같다 할지라도 그 도리는 각각 다르다.
따로이 맺은 것에서 삼교(三敎)는 공통되는 것이건 독자적인 것이건 그 입장에서는 다 화타(化他)의 권실(權實)이니 수타의어(隨他意語)이기 때문이요, 원교(圓敎)는 공통되는 것이건 독자적인 것이건, 그 입장에서는 다 자행(自行)의 권실이니 수자의어(隨自意語)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타와 관계되는 삼교(三敎)는 다 권(權)이라 하며, 자행(自行)의 원교(圓敎)는 다 실(實)이라 하게 된다.
다음으로 사구(四句)를 결성(結成)컨대 수타의어(隨他意語)란 곧 일체법(一切法)이 권(權)임을 뜻하며 수자의어(隨自義語)란 곧 일체법이 실(實)임을 뜻하며, 쌍취(雙取)는 곧 일체법이 권(權)이기도 하고 실(實)이기도 함을 뜻하며, 쌍비(雙非)는 곧 일체법이 권도 아니요 실도 아님을 뜻한다.
다음으로 세 번에 걸쳐 석품(釋品)을 결성(結成)하겠다. 자행자의(自行自意)의 경우에는 이 경문(經文)에서 「도량(道場)에서 얻은 법」이라 하고, 대경(大經)에서 「도를 닦아 얻었기 때문」이라 하고,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여리여량지(如理如量智)」라 한 것이 그것이니, 다 원교(圓敎)의 자행(自行)의 권실(權實)이어서 수자의어(隨自意語)다.
부처님께서 능히 이 불가설(不可說)의 법을 방편을 통해 능히 설하신다 해도 중생 쪽에서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리니, 만약 처음에 단순히 이 법만을 설해 중생을 취(取)하려 든다면 능히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라 말씀한 것이다.
또 이 일을 젖혀두고 자행(自行)의 권실(權實)을 가지고 별교(別敎)의 구너실과 공통인 입장에 서서 함께 중생을 취하면, 대기(大機)의 이근(利根)인 자는 바로 그 도리를 얻고 둔근(鈍根)인 자는 불완전하게 얻고, 소기(小機)의 이근 둔근은 함께 얻지 못할 것이니, 대개 이는 화엄(華嚴)의 취지다.
또 이 일을 젖혀두고 단순히 삼장교(三藏敎)의 권실을 써서 중생을 취하면, 대기(大機)의 이근 둔근인 자는 은밀한 가운데서는 얻되 드러나게는 얻지 못할 것이고, 소기(小機)의 이근 둔근인 자는 다만 깨달음을 지킬 뿐이어서 취해도 또한 얻지 못할 것이니, 대개 이는 삼장교의 취지다.
또 이 일을 젖혀두고 합쳐서 사종(四種)의 권실을 써서 함께 중생을 취하면, 대기(大機)의 이근 둔근인 자는 곡직(曲直)을 함께 얻고, 소기(小機)의 이근 둔근인 자는 깨달음을 지니되 함께 얻지 못할 것이니, 대개 이는 방등(方等)의 취지다.
또 이 일을 젖혀두고 삼장교의 권실을 버린 뒤에 삼종(三種)의 권실을 써서 함께 중생을 취하면, 대기는 이근 둔근이 함께 얻고, 소기의 이근 둔근은 깨달음을 지키되 함께 얻지 못할 것이니, 대개 이는 반야(般若)의 취지다.
또 이 일을 젖혀두고 삼종의 권실을 버린 다음 단순히 원교(圓敎)의 자행(自行)의 권실을 써서 중생을 취한다면, 대기 소기의 이근 둔근이 함께 얻을 것이니, 대개 이는 법화(法華)의 취지다.
여래의 지혜는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밝게 시의(時宜)를 비추어 가부(可否)를 알아 작용을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품(品)의 취지를 해석하여 이르되,「방(方)이란 온갖 방법(方法)이요, 편(便)이란 잘 씀이니, 잘 방법을 써서 중생을 취해 얻는 일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은근히 방편을 찬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또 여래의 자증(自證)의 권실(權實)은 함께 설할 수 없으니, 중생을 가엾이 생각하사 자증의 권(權)을 설해 문(門)을 삼아 주셨으나,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에 중생으로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증 또한 설하실 수 없으셨다.
그래서 별교(別敎)의 권실을 설해 문을 삼으시니,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진실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근기가 둔한 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같이 중생에게 적절치 않았으므로 별교의 권실은 설할 것이 못되었다.
다음으로 삼장교(三藏敎)의 권실을 설해 문을 삼으시니,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남모르게 들어갈 수 있었으나 둔한 자는 역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같이 중생에게 적절치 않았으므로 이 가르침은 또한 설할 것이 못되었다.
다음으로 세 가지 화타(化他)의 권실을 설해 문을 삼으시니,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진실에 들 수 있었으나 둔한 자는 역시 들 수가 없었다. 이 같이 중생에게 적절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또한 설할 것이 못되었다.
다음으로 두 가지 화타의 권실을 설해 문을 삼으시니,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진실에 들 수 있었으나 둔한 자는 역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또한 설할 것이 못되었으니 중생에게 있어서 절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화타의 권실을 버리고 다만 자행(自行)의 권(權)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나 둔한 자나 함께 진실에 들 수가 있었다.
이렇게 처음에서 끝에 이르도록 방편으로 문을 삼으시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방편을 찬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從始至終 以方便爲門.是故如來稱歎方便.
품(品)의 뜻을 해석해 이르되, 「방편은 진실에 들어가는 문이다」라 한 것은, 곧 이 취지였다.
앞의 한번의 결성(結成)은 여래의 능히 방편을 아시며 능히 방편을 쓰심을 밝힌 것이거니와, 이 한번의 결성은 행자(行者)로 하여금 능히 방편에 수순(隨順)케 하심을 밝힌 것이다…….
다시 또 생각건대 여래의 자증(自證)은 스스로 도(道)를 닦는 것에 의해 얻으신 그것이어서 온갖 방편에 있어서 이것이 곧 진실이 되거니와, 이 진실은 설할 수가 없으시고 비록 설하신다 해도 중생 쪽에서는 진실에 합일(合一)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방편력(方便力)으로 부즉(不卽)을 띠고 하나의 즉(卽)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는 능히 진실에 합치할 수 있었으나 근기가 열등한 자는 합치하지 못했다.
또 오로지 하나의 부즉(不卽)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는 은밀한 중에 진실에 합치했으나 근기가 열등한 자는 합치하지 못했다.
또 셋의 부즉(不卽)을 띠고 하나의 즉(卽)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합치할 수 있었으나 근기가 열등한 자는 합치하지 못했다.
또 둘의 부즉(不卽)을 띠고 하나의 즉(卽)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합치할 수 있었으나 근기가 열등한 자는 합치하지 못했다.
또 셋의 부즉을 폐하고 오로지 일체(一切)의 즉(卽)을 설하시니, 근기가 뛰어난 자나 열등한 자나 능히 합치해, 방편에 있어서 진실을 볼 수가 있었다.
위의 두 가지 결성(結成)의 취지는 방편을 쓰며 방편을 쫓는다는 것이었으나, 이 하나의 결성의 취지는 방편에 상즉(相卽)해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것이니, 진실은 즉 원인(圓因)이요, 원인은 즉 자행(自行)의 방편이다. 이 같은 자행의 방편은 지금 법화경에 와서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위에서 품(品)의 이름을 해석하여 이르되 「방편이란 곧 진실이다」라 한 바 있듯, 자행의 방편에서 이름을 얻었으므로 방편품(方便品)이라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이제(二諦)를 비추는 사실을 분별컨대, 앞에서 이미 통별(通別)의 범위 안에서 권실(權實)을 결성(結成)한 바 있거니와, 이제 도리어 이 지조(智照)에 입각하면 도리는 매우 보기 쉬워질 것이다.
만약 일반적으로 십법(十法)을 가지고 자행(自行)의 이지(二智)를 밝힌다면, 이는 곧 수지(隨智)의 이제(二諦)를 비추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십법을 써서 중생의 근기에 적응시키면, 이는 곧 수정(隨情)의 이제를 비추는 것이 된다. 만약 넷을 묶어 둘을 삼는다면, 이는 곧 수정지(隨情智)의 이제를 비추는 것이 된다.
만약 당분(當分)에서 이제(二諦)를 비춘다면, 사리(事理) 교행(敎行) 박탈(縛脫) 인과(因果)가 자증(自證)인 것은, 곧 수지(隨智)의 이제(二諦)를 비춤이다.
이교(理敎) 개합(開合)의 이 둘은 화타(化他)에 속하니 곧 수정(隨情)의 이제를 비춤이다. 체용(體用) 점돈(漸頓) 통별(通別) 실단(悉檀)의 넷은 자타(自他)에 통하니, 곧 수정지(隨情智)의 이제를 비춤이다. 삼교(三敎)가 이제(二諦)를 비추는 일도 이에 준해서 이해가 갈 것이다.
또 삼장교(三藏敎)의 삼십종(三十種)의 이지(二智)는 화타(化他)의 이지니 다 수정(隨情)의 이제(二諦)를 비추며, 통교(通敎) 별교(別敎)의 육십종(六十種)의 이지는 자타(自他)의 이지니 곧 수정지(隨情智)의 이제를 비춘다.
통교는 어떤 때엔 앞의 삼장교와 함께 수정(隨情)의 이제(二諦)가 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원교(圓敎)의 삼십종(三十種)의 권실(權實)은 자행(自行)의 이지(二智)여서, 수지(隨智)의 이제(二諦)를 비춘다.
또 삼교(三敎)는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건 특수한 견지에서 보건 다 중생의 근기에 순응하는 가르침이니, 모두가 화타(化他)의 이지(二智)여서 수정(隨情)의 이제(二諦)를 비추는 것이 되며, 원교(圓敎)는 일반적 견지에서 보건 특수한 견지에서 보건 다 자행(自行)의 이지(二智)이어서, 곧 수지(隨智)의 이제(二諦)를 비추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삼교(三敎)의 실(實)을 묶어 권(權)이라 하고 원교의 권(權)을 묶어 실(實)이라 한다면, 이는 곧 자타(自他)의 이지(二智)여서 수정지(隨情智)의 이제(二諦)를 비추는 것이 될 것이다.
일곱째로 여러 경(經)에 입각해 권실을 가리건대, 화엄경의 경우는 교(敎)를 논하면 다만 만자(滿字)요, 시(時)를 논하면 다만 유미(乳味)요, 법(法)을 논하면 하나는 자행(自行), 하나는 화타(化他)다. 만약 교화받은 사람에 대해 논한다면 다만 보살이 해당할 뿐이니, 이승(二乘)은 귀머거리나 소경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생신보살(生身菩薩)도 자행(自行)의 권(權)과 수지(隨智)의 실(實)을 일으킬 수 없었다.
만약 금경(今經)의 글에 의거한다면,「일찍이 남을 향해 이 같은 일은 말한 일이 없었다」信解品 고 하심이 그것이다.
삼장교(三藏敎)에 대해 고찰컨대, 만약 교(敎)를 논하면 오직 반자(半字)일 뿐이요, 법(法)을 논하면 일종(一種)의 화타(化他)요, 시절(時節)을 논하면 낙미(酪味)요, 만약 금경(今經)의 글에 의거하면 「문밖에 서서, 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고 똥 치우는 기구를 든」信解品 이승(二乘)의 사람일 따름이다.
방등시(方等時)에 대해 고찰컨대, 교(敎)를 논하면 반자(半字)에 대립시켜 만자(滿字)를 논했고, 시(時)를 논하면 낙미(酪味)와 나란히 하여 소미(소味)를 밝히고, 법(法)을 논하면 삼종의 화타(化他)와 일종의 자행(自行)이 있는 것이 되니, 만약 금문(今文)에 의거한다면 「마음 서로 통하여 믿게끔 되어 들고 남을 어려워하지 아니했다.」信解品 고 한 것에 해당한다.
반야시(般若時)에 대해 고찰컨대, 교(敎)를 논하면 반자(半字)를 띤 속에서 만자(滿字)를 논함이요, 시(時)에 의거하면 생소(生소)를 낀 채 숙소(熟소)가 됨이요, 법(法)에 의거하면 이종의 화타(化他)와 일종의 자행(自行)이요, 만약 금문(今文)에 의거하면, 「출납(出納) 취여(取與)를 다 관장하게 했다」信解品 고 하신 것에 해당한다.
법화경에서 교(敎)를 논하면 반자(半字)를 폐기하고 만자(滿字)를 논함이요, 시(時)를 논하면 순수한 제호미(醍 味)요, 법(法)을 논하면 오직 자행(自行)이 있을 뿐이요, 금문(今文)에 의거하면 개권현실(開權顯實)인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이는 실로 내 아들이요, 내가 낳은 바니, 나는 실로 그 아버지니라」信解品 하고, 가업(家業)을 물려주어 수기작불(授記作佛)케 하셨다.
이 같이 전교(前敎)에서 설하지 않으셨던 것을 이제 다 드러내사,「바로 방편을 버리시고, 다만 무상(無上)의 도를 설하시니,」方便品 그러므로 이는 자행(自行)의 권(權)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방편품이라 한 것이어서 그밖의 것은 혹은 자타(自他)의 이지(二智)거나 혹은 화타(化他)의 이지에 속할 따름이다.
다시 또 말하자면 화엄시(華嚴時)에서는 두 가지 보살을 상대해 하나의 자행(自行)과 하나의 화타(化他)를 설하시고, 이승(二乘)에게는 적용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로서는 듣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삼장교(三藏敎)에서는 이승(二乘)을 상대하여 하나의 화타(化他)를 설하시고, 보살에게는 이를 적용하지 않으셨으므로 자행(自行)은 없었다.
방등시(方等時)에서는 함께 소승 대승을 상대하시니, 이승(二乘)에게는 두 가지 화타(化他)를 설하시며 보살에게는 하나의 자행(自行)과 하나의 화타(化他)를 설하셨다. 반야시(般若時)에도 삼승(三乘)을 상대하사 하나의 자행과 두 가지의 화타를 설하셨으니, 이승(二乘)에게는 하나의 화타를 설하시며, 보살에게는 하나의 자행과 하나의 화타를 설하신 것이 그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널리 근기가 송숙한 사람들을 상대하사 다만 하나의 자행을 밝히실 뿐, 다시 화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경문(經文)에서 이르되, 「보살들 이 법 듣고 의혹을 모두 풀며, 천 이백 아라한들도 마땅히 부처 되리」方便品 하신 것이니, 일체중생이 다 자행(自行)의 방편에 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방편품이라 말한 것이다…….
여덟째로 본적(本迹)에 입각해 고찰컨대, 여래의 본지(本地)가 지극히 구원(久遠)하사 이미 일체의 권실(權實)을 증득(證得)하신 것을 일러 자행(自行)이라 한다. 중간에 수적(垂迹)하사 또한 겸대(兼帶)등의 설법을 하신 바 있거니와, 오늘 수적하사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별교(別敎)의 화타(化他)를 띤 채 자행(自行)을 설하셨다.
그리고 다음에 하나의 화타(化他)를 설하시고, 다음에 세 가지 화타를 설하시고, 다음에 두 가지 화타를 설하시고, 다음에 폐삼(廢三) 따위를 설하신 것을 다 화타의 권실이라 한다. 다시 본지(本地)의 권(權)을 묶어 실(實)이라 하며, 수적(垂迹)의 실(實)을 묶어 권(權)이라 하는 것이, 곧 자타(自他)의 권실이다.
이를 맺으면 사구(四句)가 성립할 수 있으니, 「일체는 진실이다」 「일체는 방편이다」 「일체는 방편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하다」 「일체는 방편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다」라 함이 그것이다…….
신자(身子)가 본래 일체의 권실(權實)을 증득(證得)했음은 곧 자행(自行)이다. 수적(垂迹)하여 녹원시(鹿苑時)에 있어서는 한 가지로 화타(化他)만을 받고, 방등시(方等時)에 있어서는 하나의 자행(自行)을 받으면서 세 가지 절복을 당하고, 반야시(般若時)에 있어서는 두 화타를 띤 채 하나의 자행의 가르침을 전교(轉敎)하고,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삼승을 폐기하고 일승을 깨달았으니, 다 화타(化他)의 권실이었다. 그리고 본지(本地)의 권(權)을 묶어 실(實)로 삼으며, 수적(垂迹)의 실(實)을 묶어 권(權)을 삼은 것은 곧 자타(自他)의 권실이었다.
신자(身子) 또한 사구(四句)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부처님께서 수적(垂迹)하시어 설하셨다는 견지를 따르면, 이것 또한 화타(化他)의 권실임이 분명하니, 역시 방편품(方便品)이라 일컫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만약 중생을 인도해 원인(圓因)에 들게 한다는 해석을 따르면, 자행(自行) 또한 방편품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신자(身子)의 수적(垂迹)해서 나타낸 방편이라고 보는 견지를 따르면 역시 그러기에 방편품이라는 말이 성립하며, 만약 신자가 수적해 진실로 들어갔다는 해석에 선다 해도, 또한 그러기에 방편품이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뜻 때문에 방편품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 품(品)으로부터 아래의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십구항게(十九行偈)에 이르기까지, 혹은 게(偈) 뒤의 현재의 사신제자(四信弟子)의 글에 이르기까지를 다 이름하여 정설분(正說分)으로 한다. 만약 두 가지 정설(正說)을 세울 때에는, 이로부터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이 끝나는 데까지가 적문(迹門)의 정설이다.
이제 잠시 가까운 것을 좇아 적문의 정설에 나아가 다시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니, 첫째로 이로부터 그 아래의 글은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이요, 둘째로 「사리불에 이르노니, 네가 이미 간곡히」 이하는 광개삼현일(廣開三顯一)에 속한다.
간략한 것〔略開三顯一〕은 다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니, 처음 「그때 세존께서」 이하는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이요, 둘째로 「그때 대중」 이하는 동집생의(動執生疑)다. 이 약개삼현일에 장항(長行)과 게송(偈頌)이 있고, 장항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말로 이지(二智)를 찬탄함이요, 둘째는 말을 끊는 것으로 이지를 찬탄함이니, 말을 쓰지 않는다면 능히 알 자가 없겠기에 말로 찬탄하는 것이며, 또 찬탄한다 해도 말로는 다할 수 없기에 말을 끊으신 것이겠다. 제불(諸佛)의 이지(二智)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말로 찬탄한 부분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니, 첫째는 제불(諸佛)의 권실(權實)을 밝힘이요, 둘째는 석가(釋迦)의 권실을 밝힌 것이 그것이다. 제불의 도(道)가 동일하시니, 그러므로 함께 찬탄하셨다.
위에서 광명이 타토(他土)를 비추시매 미륵이 횡(橫)으로 묻고, 문수보살이 옛 일을 이끌어 대답하매 대중이 수(竪)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나타낸 것이어서, 그러므로 첫머리에서 선정(禪定)으로부터 깨어나시자마자 제불(諸佛)의 도가 동일하심을 밝히신 것이라 생각된다.
제불(諸佛)을 찬탄한 글에 대해 생각건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니, 첫째는 쌍탄(雙歎)이요, 둘째는 쌍석(雙釋)이요, 셋째는 쌍결(雙結)이 그것이다. 쌍탄한 것에 대해 살피건대, 먼저 경가(經家)의 제기(提起)가 있고, 다음에 바로 찬탄했다. 이원섭보살 번역
世尊自當知 濁世惡比丘 不知佛方便 隨宜所說法
-偈頌-
-寶雲地湧 隨宜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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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잠시 쉬면서 즐강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부처님되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