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하늘로 몰아치는 ‘태풍’ 유러파이터 타이푼
미국 랜드 연구소가 현존 최고의 제공기로 인정한 유러파이터 타이푼의 비밀은 무엇인가. 유러파이터 타이푼은 기동성과 자기방어능력, 그리고 복잡한 센서를 통합하는 퓨전 센서 기능을 갖고 있다. 조종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위급상황은 음성으로 알려주는 ‘내깅 노라’ 기능이 있고, 조종사는 말로 전투기를 조종할 수도 있다. FX에 도전하는 기종 중에서 가장 늦게 베일을 벗은 유러파이터의 모든 것을 공개한다.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영국·독일·스페인·이탈리아 4개국이 만든 최첨단 전투기 유러파이터 타이푼은, 한국 공군이 추진하는 FX(차기 전투기) 사업에 도전한 4대 기종 중의 하나다. 지난 4월21일부터 9일간 기자는 스페인·독일·영국의 유러파이터 타이푼 조립공장과 부품공장을 방문하면서 유러파이터를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번 기사는 FX 기종에 관한 기자의 세 번째 시리즈에 해당한다. 지난 해 가을 기자는 라팔 전투기를 제작하는 프랑스의 다쏘항공을 방문하고 그에 관한 기사를 신동아 2000년 11월호에 게재했다. 지난 겨울에는 F-15K를 들고 FX 사업에 도전한 미국의 보잉사를 방문 취재해, 그에 관한 기사를 2001년 1월호에 실은 바 있다.)
Airbus A310 MRTT (Multi Role Transport Tanker)로부터 공중급유를 받는 독일공군 Eurofighter Typhoon 전폭기
유러파이터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언을 실천하는 유럽인의 상징물이라는 사실은 이 전투기가 냉전시 소련이 이끈 바르샤바조약기구(WTO·1991년 해체됨)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산하 기관인 ‘넷마(NETMA)’의 통제하에 개발되고 배치된다는 데서 간접 확인된다. 넷마는 ‘나토 유러파이터 토네이도 전투기 운영위원회’를 뜻하는 영문 NATO Eurofighter Tornado Management Agency의 첫 글자를 딴 축약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러파이터는 소련이 개발한 걸작 수호이-27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련이 수호이-27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86년이었다. 그후 소련은 단좌형인 수호이-27을 개량해 복좌형인 수호이-27SB를 만들었다. 이어 대형 항공모함에서 뜨고 내릴 수 있는 ‘함재기(해군기)’ 수호이-33을 개발했다. 수호이-33은 날개를 수직으로 꺾어 올리는 것이 특징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항모 갑판에 내린 수호이-33은 공간을 덜 차지하게 되었다. 이어 러시아는 미국의 F-15E처럼 제공은 물론이고 전폭 기능도 할 수 있는 ‘다목적 전투기’ 수호이-35를 개발했다. 미국의 F-15E는 전부 복좌나, 수호이-35는 단좌가 기본이다(복좌형은 수호이-35SB). 러시아는 이러한 수호이-35를 들고 한국 공군의 FX 사업에 도전한 것이다.
Airbus A310 MRTT (Multi Role Transport Tanker)로부터 공중급유를 받는 독일공군 Eurofighter Typhoon 전폭기
NATO에는 유럽 국가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도 참여한다. 처음 NATO군은 미군 대장 지휘하에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NATO군 사령부가 벨기에에 본부를 둔 ‘유럽 동맹군 사령부’와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부를 둔 ‘대서양 동맹군 사령부’로 나뉘면서, 벨기에에 본부를 둔 유럽 동맹군 사령부가 일차적으로 유럽 방위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인에 의한 유럽 방위를 추구하는 유럽인의 자세를 보여준다.
NATO의 주력기
소련이 수호이-27을 내놓았을 때, 유럽인들은 “제때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또다시 유럽 방어를 미국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래서 ‘유럽 3강’이라는 영·독·불과 이탈리아·스페인 5개국이 모여 수호이-27을 능가하는 제공기 개발을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물이 유러파이터 타이푼이다. 유러파이터 개발에 참여한 5개국 중에서 프랑스는 NATO 회원국이 아니다. 1949년 4월 NATO가 출범할 당시 프랑스는 회원국이었으나, 드골 대통령 시절 NATO가 미국과 영국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반발해 탈퇴했다.
이러한 프랑스가 수호이-27을 능가하는 제공기 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은, NATO 회원국 여부보다는 유럽인에 의한 유럽 방어가 그만큼 더 중요했다는 뜻이 된다. 1999년 코소보 전쟁은 코소보를 침략한 유고군을 NATO군이 공동으로 쳐부순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참여해 NATO 국가인 영국보다 더 많은 공군기를 출격시켰다.
유러파이터 이전에도 유럽 국가들은, 공동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해온 적이 있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앙숙으로 알려진 영국과 프랑스는 세페캣(Sepecat)이라는 컨소시엄 회사를 설립해 고등훈련기 겸 경(輕)공격기인 재규어(Jaguar·아메리카 표범) 개발에 들어가, 1972년부터 이를 양산했다.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는 독일공군 Eurofighter Typhoon
유러파이터의 개발 주체인 ‘넷마(NETMA)’라는 이름 속에 토네이도를 뜻하는 T자가 들어 있는 것은, NATO 국가들이 유러파이터와 유사한 개념으로 토네이도 전투기를 공동 개발했다는 뜻이다. 두 개의 엔진을 가진 쌍발 전투기 토네이도(Tornado·돌풍) 개발은 1969년 영국과 서독·이탈리아 3개국이 서독 뮌헨에 파나비아(Panavia)라는 컨소시엄을 만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나비아사는 1974년부터 토네이도 양산에 들어갔는데, 제공기와 전폭기는 물론이고 전자전기·정찰기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토네이도 881대를 생산해 NATO 국가들에게 보급했다. 토네이도는 주로 3개국이 자급자족하는 형태로 생산했기 때문에 전체 생산량 중에서 다른 나라에 수출된 비율은 12%(120대)에 불과했다.
토네이도가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가 자극을 받아, 1975년부터 ‘미라지(Mirage·신기루)-2000’으로 명명된 새로운 전투기 개발에 착수했다. 단발 엔진을 장착한 미라지-2000은 1982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미라지-2000을 포함한 미라지 시리즈를 이집트·인도·페루 등 제3세계에 집중적으로 수출했는데, 이렇게 해서 팔려나간 미라지 시리즈는 무려 1762대였다. 미라지-2000을 제외한 미라지 시리즈의 수출률은 무려 69%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비율은 1960년대 미국이 기록한 F-104의 수출률 89.7%(2162대) 다음으로 높은 것이었다. 미라지-2000도 47%(289대)의 수출률을 기록했다.
독일공군 주력 전폭기 Eurofighter Typhoon
그러자 아주 가까운 동맹국에게만 첨단 전투기를 판매해오던 미국이 자기네 전투기 시장이 위축되는 것을 우려해, 기타 동맹국에 대해서도 F-16과 FA-18전투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F-16전투기 1953대(수출률 47%), FA-18 전투기 439대(수출률 29.8%)를 수출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이 KFP(한국형 전투기 프로그램) 사업을 벌여 120대의 KF-16 전투기를 도입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NATO 국가들의 토네이도 개발이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프랑스의 미라지 수출이 미국을 자극해 한국이 KF-16을 도입하게 된 것은, 세계가 유기체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5개국은 유러파이터 개발에 머리를 맞댔으나 곧 이 모임의 리더격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심각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영국은 “수호이-27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하니 유러파이터는 순수 제공기여야 한다”는 원칙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유러파이터는 제공 기능은 물론이고 항공모함에서 이·착함(離着艦)하는 함재기(해군기) 기능과 전폭 기능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수 제공기냐, 다목적기냐’의 논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처한 국가 상황이 다른 데서 나왔다.
미국과 구 소련 해군은 10만t급 내외의 초대형 항공모함을 갖고 있으므로, F-14 톰캣(F-15에 버금가는 미 해군용 제공기)이나 수호이-33 같은 대형 제공기를 이·착함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3만t급 내외의 중형 항모를 갖고 있어 대형 제공기를 운용할 수가 없었다.
영국이 수직 및 단거리 이착륙기인 ‘해리어(Harrier·사냥개의 한 종류)’를 개발한 것은 1969년이다. 영국은 이 해리어를 개량해 공격능력을 배가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영국은 그들이 갖고 있는 중형 항모에 전투기다운 전투기를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항모에 실려간 해리어기들은 아르헨티나 공군기를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해리어가 있기 때문에 영국은 “유러파이터는 순수 제공기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
영국이 주장하는 순수 제공기란 기동성과 적기(敵機) 제압 능력이 뛰어난 전투기를 말한다. 기동성이 좋으려면 많은 연료를 실어야 하고, 적기를 제압하려면 좋은 탐지 체제와 많은 무장을 실어야 한다. 때문에 순수 제공기는 F-15C/D처럼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다.
영국은 F-15보다는 작은, 그러니까 ‘중형’ 제공기 개발을 희망했다. 하지만 중형 제공기도 3만t급 항모에는 내릴 수 없다. 수직 및 단거리 이착륙기가 없는 프랑스는 3만t급 항모에서 뜨고 내릴 수 있도록 ‘소형’ 유러파이터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유러파이터의 크기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이러한 대립에 덧붙여 프랑스는 유러파이터의 최종 조립지는 프랑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1980년대 말까지 세계 민항기 시장을 석권한 것은 미국의 보잉사였다. 대항하기 위해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 4개국은 1970년 ‘에어버스’라는 민항기 제작 회사를 만들었다. 이때 프랑스는 ‘위대한 입심’을 발휘해, 에어버스의 최종 조립지를 프랑스 툴루즈로 유치시켰다. 20여 년 후 에어버스사는 보잉사와 대등한 규모로 성장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지분 참여에 의한 이득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 일자리 창출이라는 보너스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이러한 추억 때문에 프랑스는 유러파이터도 유럽의 중심인 프랑스에서 조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어버스의 성공에 입맛만 다셨던 3개국과 유러파이터사업에 참여한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속셈을 간파하고, 한 목소리로 ‘프랑스의 욕심’을 성토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한술 더 떠서 유러파이터에 사용될 엔진은 프랑스의 스네크마사에서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네크마는 F-15용 엔진을 만드는 미국의 프랫 앤드 휘트니에 필적하는 세계적인 엔진 제작 회사다. 하지만 영국에도 세계적인 항공기 엔진 제작 회사인 롤스로이스(이 회사는 세계 최고급 승용차를 만든 롤스로이스 자동차사의 자매 회사다)가 있고, 독일에는 기차와 선박·잠수함에 들어가는 엔진을 제작하는 세계적인 엔진회사 MTU가 있다.
4개국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마침내 프랑스는 유러파이터 프로그램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쏘사가 차기 전투기로 개념 설계를 해두었던 미라주-4000을 토대로 그들이 원하는 전투기 개발에 들어가 성공을 거뒀는데, 그것이 바로 라팔 전투기다. 라팔은 애초부터 제공기와 전폭기, 공군기와 해군기 겸용을 목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크기가 작은 다목적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인지 유러파이터와 라팔에는 흡사한 외양이 많다.
“강력한 기동성을 갖춰라”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유선형의 델타익(delta翼·삼각날개)을 갖고 있는데, 델타익은 초음속 비행에 유리하다. 유러파이터와 라팔은 초음속 비행에 유리한 델타익을 채택했다. 조종석 바로 밑에 ‘카나드(carnad)’라는 작은 ‘귀날개’가 달려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물고기가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듯이, 유러파이터와 라팔은 귀날개 덕분에 고(高)기동성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가 탈퇴하자 4개국은 넷마(NETMA)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공기를 개발한다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엔진 제작 문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엔진은 전투기의 부품 중에서 금액상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 전투기 전체 가격의 40%에 육박한다. 때문에 엔진 제작을 어느 한 나라가 독식한다면 나머지 세 나라에 돌아갈 ‘파이’는 너무 작아진다.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는 독일공군 Eurofighter Typhoon
넷마는 엔진 제작을 위해 ‘유러제트’라는 컨소시엄 회사를 만들었다. 이 컨소시엄에는 영국의 롤스로이스·독일의 MTU·이탈리아의 피아트(자동차 제작회사로 이름이 높다)·스페인의 ITP가 참여했다. 넷마는 유러제트로 하여금 엔진을 제작케 하되 4개국에 공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엔진을 최종 조립하도록 했다. 이로써 엔진 제작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락됐다.
이어 넷마는 유러파이터의 최종 조립회사로 역시 4개국 컨소시엄인 ‘유러파이터 GmbH’를 만들었다. 이 컨소시엄에는 영국의 BAE·독일의 다사(DASA)·이탈리아의 알레니아(ALN)·스페인의 카사(CASA)가 지분 참여를 했다. 이 컨소시엄은 독일 뮌헨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에 GmbH라는 독일어를 붙이게 되었다(GmbH는 영어로는 LTD Co.이고 우리말로는 주식회사쯤에 해당한다). 넷마는 유러파이터 GmbH로 하여금 4개국에 공장을 지어 4개국이 지분 비율대로 유러파이터를 최종 조립하도록 했다.
엔진 다음으로 중요한 레이더도 ‘유러레이더’라는 컨소시엄을 만들어 지분에 따라 공동으로 제작·조립케 했다. 그외 부품에 대해서도 넷마는 투자 지분에 따라 4개국에 공평히 일감을 나눠주었다. ‘낸 만큼 가져간다’는 이러한 결정에 대해 4개국은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4개국의 시험비행 조종사와 전투기 설계자들로 구성된 기술진은 유러파이터의 개념 정립에 들어갈 수 있었다. 4개국 기술자들은 수호이-27은 물론이고 미국의 F-15를 능가하는 운동성을 가진 제공기를 만들겠다는 데 합의했는데, 이들이 합의한 운동성이 강한 전투기는 이런 것이었다.
“아주 동글동글한 유리 구슬을 매우 매끈매끈한 유리 판 위에 올려놓아 보자. 유리판의 편평도가 눈꼽 만큼만 기울어져도 또 미약한 공기의 파장만 있어도, 유리 구슬은 ‘도그르르’ 구르다 가속이 붙어 ‘홱’ 굴러가 버린다. 자체 추진력이 없는데도 유리 구슬이 이러한 운동성을 가지게 된 것은 유리 구슬과 유리판이 가진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마찰력이 아주 작아졌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기 마찰을 최대로 줄이도록 전투기를 설계하고 여기에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다면, 이 전투기는 아주 운동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랜 연구 끝에 4개국 기술진은 운동성이 강한 기체를 설계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엔진 컨소시엄인 유러제트가 EJ-200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만들어 냄으로써, 고 기동성의 유러파이터가 탄생했다. 강력한 운동성을 가진 천리마(千里馬)라고 해서 모두 명마(名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등 위에 올라탄 기수를 마구 흔들어 떨어뜨리는 야생마 기질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코 명마가 될 수 없다. 유러파이터의 운동성이 아무리 좋아도 통제되지 않는다면, 전투기로서는 의미가 없다.
컴퓨터가 핵심
날렵한 차체와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 있어 가속기(액셀러레이터)를 살짝만 밟아도 급가속이 이뤄지는 자동차일수록 운전이 쉬워야 한다. 이러한 자동차에는 필수적으로 강력한 제동기(브레이크)와 부드러운 파워핸들이 있어야 한다. 회전시 차체가 반대쪽으로 쏠리는 경향도 적어야 한다. 고기동성을 갖춘 유러파이터에도 이러한 통제 장치를 설치해야 하는데 이러한 장치는 대용량의 컴퓨터와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된다. 고기동성 기체의 설계가 끝난 다음부터는, 어떠한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만드는가에 따라 그 전투기의 성능이 결정된다.
전투기를 설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끝에 4개국 기술자들은 이러한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조종사는 운동성이 좋은 유러파이터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도착 다음날 기자는 마드리드 교외에서 우연히 급기동 훈련에 들어간 유러파이터를 보게 되었다. FX 사업에 관여한 전문가들은 대개 “공중 기동성과 제공 능력에 관해서는 유러파이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하고 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기자의 눈에도 유러파이터는 급선회와 급상승시 회전 반경이 무척 짧아 보였다.
바가지 긁는 ‘내깅 노라’의 비밀
전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적기(敵機)나 적 지상 기지로부터의 공격을 재빨리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투기를 위협하는 미사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암람(AMRAAM·신형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이나 스패로우(sparrow·‘참새’라는 뜻, 해군에서 주로 쓰는 공대공 미사일이다)같은 ‘레이더 유도 미사일’이다. 이러한 미사일은 적기나 적의 지상 레이더 기지에서 쏘아 준 추적 레이더파의 유도를 받아 원거리에서 아주 빠르게 날아온다.
빠르게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하려면, 조종사는 자기 전투기가 추적 레이더파에 맞았다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첨단 전투기에는 조종사에게 추적 레이더파에 접촉된 사실을 알려주는 ‘레이더 경보 수신장치’가 설치된다. 유러파이터에도 이 장치가 설치됐다. 이 장치는 계기판에 위기를 표시하는데, 고도로 공중전 상황에 몰두한 조종사는 시선을 계기판으로 내릴 틈이 없어 이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활주로를 택싱중인 독일공군 Eurofighter Typhoon
최고의 전투기를 만들려면 공중전 상황에 몰두한 조종사의 심리상태부터 분석해야 한다. 고도로 공중전에 몰두한 조종사는 ‘눈’과 ‘손’을 바삐 움직인다. 4개국 기술자들은 아무리 조종사가 공중전에 몰두해 있더라도 그의 ‘귀’와 ‘입’은 느긋하게 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종사의 귀를 공중전에 참여시키자”는 결정을 한 기술자들은 계기판에 경보가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위험을 알리는 음성이 계기판에서 터져나오게 했다.
그러나 조종사가 과도하게 공중전에 몰두해 있으면 이 소리도 듣지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위험을 알리는 기계음은 아주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여성 고음(高音)으로 처리했다. 곤히 자다가도 이 소리를 들으면 소스라쳐 일어날 정도로 쇳소리가 나는 여성 음성이 나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공중전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조종사가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심적 여유를 갖고 전투에 임하는 조종사도 있는데,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터져 나오는 여성 고음이 그에게는 ‘고문’이 아닐 수 없다.
유러파이터의 시험비행조종사들은 그래서 이 기계음을 ‘내깅 노라(nagging Nora)’라고 별명 지었다. 내깅은 ‘잔소리 하는 것’ ‘바가지 긁는 것’이란 뜻이고, 노라는 일반적인 여성 이름이다. 내깅 노라는 우리말로는 ‘마누라의 바가지 긁는 소리’ 정도로 의역할 수가 있다.
레이더 경보 수신장치와 내깅 노라를 통해 위기를 파악한 조종사는 적 미사일을 피하는 회피 기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공중전에 과도하게 몰두한 다음에는 순간적으로 그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4개국 기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유러파이터에서는, 탑재된 컴퓨터가 자동 대응하도록 조치했다.
경보가 울리면 컴퓨터는 지체하지 않고 레이더파를 현란하게 반사하는 잘게 썬 금속 조각인 채프(chaff) 덩어리를 살포한다. 채프가 살포되면 레이더파를 따라 날아오던 적 미사일은 어느 것이 전투기인지 몰라 헤매다 자폭해 버린다(공대공 미사일은 추진제가 떨어지는 순간 자유 낙하하는데, 이 미사일이 떨어지는 지상에는 아군이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공대공 미사일은 추진제가 다 타는 순간 자폭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컴퓨터는 채프 대신 오른쪽 날개 끝에 있는 디코이(decoy·미끼)를 늘어뜨릴 수도 있다. 디코이는 전투기보다 더 현란하게 레이더파를 반사하는 물체인데, 전투기에서 사출된 티코이는 광케이블에 묶여 있어, 전투기를 따라 전투기와 같은 속도로 비행한다. 때문에 적 미사일은 디코이를 전투기로 착각하고 따라 들어가 폭사(暴死)해 버린다.
전투기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무기는 사이드와인더(sidewinder·‘방울뱀’이라는 뜻,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이다) 따위의 ‘열 추적 미사일’이다. 열 추적 미사일은 날아가는 전투기의 엔진에서 나오는 열을 감지해 스스로 추적하는 미사일로 비교적 단거리에서 발사된다.
이러한 미사일은 채프나 디코이를 살포해도 속지 않고 계속해서 전투기를 추적한다. 이러한 미사일을 속이려면 전투기보다 더 많은 열을 방사하는 ‘플레어(flare·불꽃)’를 사출해야 한다. 플레어가 사출되면 열 추적 미사일은 전투기를 버리고 더 강한 열을 내는 플레어 쪽으로 돌진해 들어가 폭사한다.
이러한 방어 장치와 함께 4개국 기술자는 유러파이터에 레이저(laser)와 접촉했음을 알리는 ‘레이저 경보 장치’도 설치했다. 아직 전투기를 공격하는 레이저 유도 미사일은 생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공격헬기(AH)에서는 레이저로 유도되는 미사일을 발사해 적 전차를 공격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아파치 공격 헬기에 탑재되는 ‘헬 파이어’ 미사일과 러시아의 카모프-52 공격헬기에 탑재되는 ‘비흐르(Vikhr)’ 미사일이다. 두 미사일은 헬기에서 발사된 레이저파를 따라 들어가 목표물을 파괴한다.
조종사를 해방시킨 전투기
최근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미사일 방어체계(MD)로 이름을 바꾼 미국의 국가 미사일방어체제(NMD)에는, 발사 단계에 있는 적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원거리에서 레이저로 파괴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레이저는 새로운 군사무기로 도입되고 있는데, 4개국 기술자들은 ‘레이저 경보 장치’를 유러파이터 전방 동체 우측에 탑재했다.
적을 속이는 기만이나 적을 따돌리는 기동만이 자기 방어의 전부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적의 레이더를 마비시키는 전자전(電子戰)도 훌륭한 방어 수단이 된다. 이를 위해 유러파이터는 왼쪽 날개 끝(wing tip)에 ‘전자정보 수집장치(ESM·Electronic Support Measure)’를 설치했다. 이 장치는 유러파이터가 비행하는 동안 적기와 적의 지상 기지에서 발사한 레이더 주파수를 자동 수집한다.
여기에는 또 ‘전자 방해장치(ECM·Electronic Counter Measure)’도 설치돼 있다. 이 장치는 주파수가 분석된 적의 레이더를 향해 강력한 방해 전파를 발사한다. 방해 전파가 발사되면 적의 레이더는 일순간 먹통이 되는데 그 사이 유러파이터는 작전 임무를 완수하고 유유히 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지로 귀환한 즉시 ESM이 자동으로 채집한 자료를 받아, 적이 사용하는 레이더 주파수 분석에 들어간다. 이렇게 분석된 정보는 향후 전자전 부대에서 적을 교란하고 감청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유러파이터에 탑재된 경보 수신 장치를 비롯한 자기방어체계를 ‘자체방어체제(DASS·Defensive Aid Sub System)’라고 한다. 이러한 체제는 자체 방어 컴퓨터(DAC·Defensive Aids Computer)에 의해 통제된다. 조종사가 자동 대응 모드를 선택하면, 이 컴퓨터는 추적해 오는 적 미사일을 분석해 채프를 쏠 것인가 디코이를 늘어뜨릴 것인가, 아니면 플레어를 방사할 것인가를 결정해 행동에 들어간다. 이러한 자체 방어체제 덕분에 유러파이터 조종사는 방어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걱정없는 조종술’
적의 미사일을 따돌리기 위해 채프나 플레어를 방사한 조종사는, 자폭하는 적 미사일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해 급선회 기동에 들어간다. 시속 100㎞로 달리던 자동차가 급선회하면 운전자는 물론이고 조수석과 뒷좌석에 있던 사람은 회전하는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운전자가 이러한 기동을 반복한다면 조수석과 뒷자석에 탄 사람은 물론 운전자까지 멀미를 하고 뻗어 버릴 것이다(시속 100㎞로 달리던 자동차가 급선회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가 그 정도라면 시속 2500㎞(마하 2 정도)로 날던 전투기가 급선회할 경우 조종사는 상상하기 힘든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충격은 중력을 나타내는 단위인 G(Gravity)로 표시되는데, 1G는 일상 생활에서 받는 지구 중력이다. 건강한 일반인은 짧은 시간이라면 4G까지 견디고, 훈련을 받은 조종사라면 7G까지 배겨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를 넘어서면 순식간에 정신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급선회에 들어가면, 불안해진 조종사들은 무심결에 시선을 계기판으로 내려, G-미터계부터 살펴보게 된다. 조종사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공포를 해결해 주기 위해 4개국 기술자들은 유러파이터의 급선회는 7G 이내에서만 이뤄지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이로써 유러파이터 조종사들은 급선회 공포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공포나 걱정을 뜻하는 영어는 care고 해방은 free다. 4개국 기술자들은 조종사들이 갖고 있는 급선회 공포를 없애준 유러파이터의 조작법을 가리켜 ‘Care Free Handling(걱정 없는 조종술)’이라고 명명했다.
공중전에 들어간 전투기는 고속 기동을 위해 ‘애프터 버너(after burner)’를 사용한다. 애프터 버너는 전투기에 달려 있는 ‘또 하나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하 2니 마하 2.3이니 하는 전투기의 최고 속도는 애프터 버너를 사용할 때 나온다. 최고 속도를 얻는 대신 애프너 버너는 ‘쏟아 붓는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때문에 애프터 버너를 사용해 고기동에 들어갈 때 조종사는 기지로 돌아갈 연료가 남아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전투에 들어간 조종사가 계기판으로 시선을 내려 연료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개국 기술자들은 조종사의 이러한 고민을 ‘내깅 노라’로 해결해주었다. 즉 유러파이터에 탑재된 컴퓨터로 하여금 현 위치에서 기지까지의 거리를 자동으로 측정해 돌아가는데 필요한 연료를 산출케 한 뒤, 귀환 연료만 남게 되면 내깅 노라를 통해 여지 없이 “연료부족”을 외쳐대게 한 것이다.
또 공중전에 몰두해 급선회 급강하 기동을 반복하다 보면 잘못해서 지상에 충돌할 수도 있다. 4개국 기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유러파이터에 지상접근경보장치(GPWS)를 설치했다. 이 장치는 전투기가 일정 고도 이하로 내려오면 내깅 노라를 통해 “상승 상승”을 내지르게 한다(내깅 노라는 전부 영어로 나온다).
코를 제외한 모든 기관을 사용하는 조종사
공중전에 들어간 조종사의 문제점을 풀어주는 장치를 개발하던, 4개국 기술자들은 마침내 쉬고 있는 조종사의 ‘입’마저도 전투에 참여시키자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귀는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지만, 입은 조종사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뱉을 수가 있다. ‘조종사는 손을 통해 그의 의지를 전투기에 전달한다. 그렇다면 입도 손처럼 조종사의 의지를 전투기에 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생각을 한 기술자들은 계기판과 연결된 컴퓨터에 조종사의 음성을 인식시킨 후 다급한 순간에 조종사가 약정된 단어를 내지르면 컴퓨터가 이를 알아듣고 그 명령을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계기판은 바가지 긁는 소리를 내는 ‘마누라’에서 조종사의 명령을 고분고분히 들어주는 현모양처가 되었다. 조종사가 계기판을 향해 직접 명령하고, 계기판은 조종사에게 상황을 알려주는 목소리를 직접 내지르는 것을 영어로는 ‘Direct Voice Input-Direct Voice Output(목소리로 입력하고 목소리로 출력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DVI-DVO라고 한다.
최근 전투기들은 조종사가 양손을 올려 놓고 있는 스로틀과 스틱 위에 조작에 필요한 대부분의 버튼을 설치했다. 이로써 전투에 들어간 조종사는 시선을 계기판으로 내리지 않고도 손가락 터치만으로 전투기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종사가 양손을 스틱과 스로틀에 올려 놓고 전투기를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을 영문으로는 ‘Hands On Throttle And Stick’, 줄여서 ‘호타스’(HOTAS)라고 한다.
DVI-DVO는 호타스에 이은 또 하나의 조종 혁명이다. 4개국 기술자들은 호타스와 DVI-DVO가 같은 일을 한다고 판단하고 둘을 합쳐 ‘브이 타스(V-TAS)’로 이름 지었다. 이로써 전투기 조종사는 손·발·눈·코·입·귀 중에서 ‘코’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전투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조종사의 발은 페달을 밟아야 한다).
조종사의 코도 공중전에 참여할 수 있을까? 유러파이터 관계자들은 “조종사의 코가 공중전에 참여하려면 아마 수세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생존 방안이 단단하면 전투기는 자신을 갖고 본연의 임무인 공격에 나설 수 있다. 공격을 하려면 적부터 찾아내야 하는데, 이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레이더다. 유러파이터가 적의 레이더를 향해 전파 방해를 한다면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방법으로 자기 방어를 펼칠 것이다. 유러파이터에 탑재된 캡터(captor·체포자) 레이더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여러 개의 주파수를 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적이 전파 방해를 하면 주파수를 바꿔 탐색을 계속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캡터 레이더를 비롯해 전투기에 탑재되는 모든 레이더는 360도 전방위를 탐지하지 못한다. 100도를 약간 넘는 전방 상황만 탐지한다. 때문에 탐지각도 바깥에 있는 적기는 발견할 수가 없다. 전투기가 갖고 있는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지상에 있는 아군 레이더와 AWACS라는 공중 조기경보통제기다. 지상 레이더와 AWACS는 360도 전방위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탐지한 정보를 전투기에 전달할 수 있다.
지상 레이더나 AWACS가 잡은 정보를 무선으로 불러준다면 공중전에 돌입해 정신이 없는 조종사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조종사가 보는 HUD(Head Up Display)에는 이 전투기 레이더가 잡은 적기와 지상레이더와 AWACS가 잡은 정보가 함께 표시되어야 한다. 전투기 레이더가 잡은 적기와 지상레이더나 AWACS가 잡은 적기가 동일할 경우 HUD상에 한 개의 목표물로 표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 중복된 정보를 찾아내면서 정보를 교환하는 시스템을 ‘데이터 링크(data link)’라고 하는데, 4개국 기술자들은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개발해 유러파이터에 탑재했다.
센서 퓨전을 실현한 프로그램
조종사들은 지상 레이더나 AWACS의 지원을 받기 힘든 적국 상공에서 전투할 수도 있다. ‘이때는 사각지대를 어떻게 줄여야 하나’ 고민에 들어간 기술자들은 A라는 전투기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B라는 요기(僚機: 동료 전투기)의 레이더는 볼 수도 있음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아군 전투기끼리 데이터 링크를 시켜 사각지대를 줄여보자’ 기술자들은 이를 현실화하는데 성공했다. 내친 김에 이렇게 획득한 표적 중에서 어느 것부터 제거해야 하는지 선별해주는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이러한 시스템을 기술자들은 ‘다중정보 배포체계(MIDS·Multiple Information Distribution System)’로 명명했다.
유러파이터가 레이더 경보 수신 장치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피한다면, 적기 또한 이와 유사한 장치로 유러파이터의 공격을 회피할 수가 있다. 때문에 은밀한 공격을 위해서는 레이더 이외의 탐지 장비가 있어야 한다. 4개국 기술자들은 적기에서 나오는 엔진 열을 감지하는 적외선 장비에 주목했다.
적외선 장비는 사람 눈이 전파를 발사하지 않고도 물체를 보는 것처럼, 전파를 쏘지 않고도 열을 내는 물체를 발견하는 장비다. 비행중인 전투기의 표면에는 공기와 마찰로 인해 열이 발생하는데, 신형 적외선 장비는 200해리(약 360㎞) 바깥에서도 이러한 열을 탐지한다. 기술자들은 조종석 앞에 있는 전방 동체 왼쪽에 개구리 눈처럼 튀어나온 ‘적외선을 이용한 탐지 및 추적장치(IRST·Infra Red Search and Track)’를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유러파이터에는 캡터 레이더와 자체 방어체계(DASS)·다중 정보 배포체계(MIDS)·적외선 추적 및 탐지 장치(IRST), 그리고 적기와 아군기를 구별하는 피아식별장치(IFF) 등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연동돼서 움직인다면 유러파이터의 생존력과 공격력은 수십 배 높아진다. 그러나 연동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오랜 노력 끝에 기술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이를 센서 융합이라는 뜻을 가진 ‘센서 퓨전(sensor fusion)’으로 명명했다. 음식도 동서양 음식을 섞어 만들 때 더욱 맛이 좋아진다(퓨전 음식). 마찬가지로 유러파이터의 센서도 퓨전화함으로써 그 능력이 배가되었다.
전투기를 만들 때는 경제성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경제성 중의 하나는 적은 연료로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까지 전투기는 애프터 버너를 써야만 초음속 비행이 가능했다. 애프터 버너를 쓰지 않고도 초음속 비행을 하는 것을 ‘슈퍼 크루즈(super cruise)’라고 한다. 기술자들은 슈퍼 크루즈는 미국이 개발 중인 F-22 같은 제5세대 전투기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예견해 왔는데, 4개국 기술자들은 유러파이터에서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유러파이터의 제공기적 특성은 탑재무장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전투기에는 기체 내에 장착된 27㎜포 외에 모두 열 세 군데에 미사일과 폭탄·보조연료탱크를 달 수 있는데, 이중 여섯 군데에 공대공 무기를 전용으로 달고 다닌다. 신형중거리 공대공미사일(AMRAAM) 네 개와 신형단거리 공대공미사일(ASRAAM) 두 개가 그것인데, 이러한 무기를 단다는 것은 이 전투기가 제공기로 개발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머지 일곱 군데에는 작전 목적에 따른 여타 미사일과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다. 함정을 공격할 때는 하푼이나 펭귄 미사일을 네 발씩 달고, 지상 폭격을 할 때는 GBU 같은 폭탄을 단다. 300㎞ 밖에 있는 목표물을 공격할 때는 ‘스톰섀도’라고 하는 크루즈 미사일을 장착한다.
유러파이터 탑재를 목표로 개발중인 무기 중에 주목할 것은 장거리 공대공미사일(BVRAAM)인 ‘미티어(METEOR)’다. 미티어의 성능은 탁월해서 미국조차도 이 무기의 정보를 뽑아내려고 한다는데, 미티어는 ‘스톰섀도 크루즈’ 미사일과 함께 영불 합작 기업인 MBD에서 개발하고 있다. 두 무기는 유러파이터와 라팔 모두에 장착될 전망이다. 유러파이터와 라팔은 이렇게 중복되는 분야가 많기 때문에 서로를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다.
유러파이터는 NATO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NATO 회원국인 미국이 생산한 모든 무기를 달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무기가 미국제인 우리로서는 미국제 전투기 못지 않게 거의 모든 무기를 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공기 중에서는 1등
소식통에 따르면 FX 4개 기종에 대한 공군의 시험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라팔이고 두 번째가 유러파이터라고 한다. 그러나 소식통들은 “제공 능력에 관한 한 유러파이터가 가장 우수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랜드 연구소가 미 공군의 용역을 받아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서방의 각 전투기를 수호이-27과 싸움붙인 후 승률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이 실험에서 1위는 현재 미국이 개발중인 F-22고, 2등은 유러파이터, 3등은 F-15, 4등은 라팔이었다고 한다(라팔이 수호이-27과 공중전을 벌일 경우 승률은 50대 50으로 조사됐다).
랜드연구소는 이러한 결과에 깜짝 놀라 ‘회색 위협(Gray Threat)’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국회와 각 싱크탱크에 보급했다. 랜드연구소는 유럽국가는 미국의 적이 아니지만 미국의 라이벌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보고서의 이름을 회색 위협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한국 공군은 제공 기능뿐만 아니라 전폭 기능도 탁월한 것을 FX 기종으로 원하고 있다. 타이푼은 전폭 기능에서 많이 뒤져 2등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4개국이 유러파이터를 개발하던 중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린 것이다. 1991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고 이어 소련마저 붕괴해 15개 공화국으로 쪼개졌다.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국제무대에서 러시아가 과거 소련이 맡았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러시아는 더 이상 공산국가가 아니었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된 원인으로는 미국이 추진한 스타워즈 계획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이 수호이-27에 대응하는 유러파이터를 개발하려고 뭉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새로운 변화에 대해 유럽인들이 응전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 것이 승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는 반대로 유러파이터 생산 규모의 축소로 이어졌다. 애초 4개국은 800여대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냉전 종식으로 인해 620대로 줄였다(영국 232대, 독일 180대, 이탈리아 121대, 스페인 87대).
생산 대수를 줄이면 그만큼 개발단가가 올라가므로 4개국은 유러파이터를 수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유러파이터 인터내셔널’이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유러파이터 인터내셔널은 가장 먼저 그리스를 두들겨 90대를 수입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그러나 그리스 측의 예산 부족으로 도입 시기는 연기됐다). 노르웨이와는 30대, 한국과는 40대 판매를 목표로 입찰에 응하고 있고, 브라질과 호주·네덜란드·싱가포르와도 비공식 교섭을 벌이고 있다.
다목적기 개발, 지금부터
예상치 못한 냉전 종식은 제공기만 아니라 전폭기로도 역할하는 유러파이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과 독일에서 특히 강하게 제기돼, 4개국은 곧 전폭기로의 개량 작업에 들어간다.
유러파이터 인터내셔널의 지아니 사장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처음에는 전폭과 제공을 겸하는 다목적기를 제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공군의 FX 사업이 끝나기 전에 전폭기로도 쓰이는 다목적기를 개발할 예정이므로 한국의 요구 조건을 채워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아니 사장은 “아예 한국은 다섯 번째 유러파이터 컨소시엄 국가로 참여하라”고 유혹했다.
유러파이터는 공교롭게도 닉네임을 여름철 동아시아에 몰아치는 ‘타이푼(typhoon·颱風)’으로 정했다. 그러한 별명에 걸맞게 유러파이터는 한국 하늘에 몰아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아 200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