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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창세기 15장 6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신칭의의 대표적인 근거 구절입니다. 바울은이 구절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롬4:3)와 갈라디아서(갈3:6)에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구절을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기 위해 야고보서 2장에서 인용했습니다. 희한하지요!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통해 구원파로 기운 칭의의 교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성경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장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4장과 야고보서 2장입니다.
로마서 4:2-3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야고보 2:21, 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처럼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지요!
이 때문에 루터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에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를 바울과 화해시키기 위해 땀을 흘리지만 소용이 없다.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말과 '믿음이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말은 완전히 모순된다. 누구라도 이 두 진술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로 하여금 나를 바보라고 부를 수 있게 하겠다."
알다시피, 루터는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서신의 가르침을 모든 신학의 시금석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과 비교할 때 "지푸라기 서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망언이지요!
또, 그는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연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를 우리 학교에서 내던져 버려야 한다!"
또한, 그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야고보서를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제일 끝에 넣고, 페이지 숫자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내심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달리,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은 이러게 말했습니다.
"구원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가 아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는 행함들이 있으며, 믿음은 언제나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보다 성경의 가르침에 더 근접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한 편지에서 필립의 주장에 어떻게 응수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하루에 수백만 번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이 어린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죄는 없다."
참으로 경악할 만한 말이지요!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성경적인 이단적인 발언입니다(마5:29, 7:21, 고전6:9-10, 갈5:19-21, 계21:8 참조).
다행히, 지금은 제임스 던을 비롯한 소수 외에는 로마서 4장과 야고보서 2장이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학자가 없습니다. 이런 표면적인 부조화가 각각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한쪽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 것임을 잘 압니다. 바울은 칭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도전하는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야고보도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인정하고(약2:23), 바울도 참 믿음에는 행함이 따름을 인정합니다(롬1:5). 그러므로 실제로는 둘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에 대한 의문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겨우 반만 해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그 장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21-25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안에 두 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는데, 왜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가?
둘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는데, 왜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가?
전자에 대해서는 앞에서 짧게라도 설명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인 반면,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믿음에 따르는 순종이므로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어렵습니다.
약 2년 전, 저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답을 깨달았고 원고 작업을 모두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주석들을 읽으며 연구하다가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구하고 정립해서 원고를 새로 썼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저는 한 가지 흉흉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야고보서 2장에 대한 저의 해석과 관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해져서 성경을 펴고 야고보서 2장 14-26절을 초집중해서 10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때 그 해석이 반만 맞는다는 것을 겨우 캐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구하여 새로운 해석을 완성했습니다. 그 후 정말 새 해석이 맞고 혹 제가 모르는 변수는 없나? 살피기 위해 이 단락에 대한 야고보서 주석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 해석이 맞다고 판단하고 원고를 새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 일 후인 목요일(2022년 12월 8일), 온종일 설교 준비를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차 안에서 새 해석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야고보서 2장 14-26절을 계속 초집중해서 수없이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그렇게 그날 저는 밤을 꼬빡 새우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새 해석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벽 3-4시경 하나님의 은혜로 비로소 온전한 해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말씀드린 대로, 심히 난해한 구절들은 완전하다고 느낀 해석이 3번은 뒤집히고 네 번째에 진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어째 이번에는 세 번째에 해석이 완성되었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결국 세 번째 해석이 뒤집어지고 네 번째에 온전한 해석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지난주 야고보서 2장을 연구하면서 깊이 절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히 난해한 구절들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구절이 아니라 단락 전체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한번 문맥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지 21-25절이 아니라 이 단락(14-26) 전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내용이 길기 때문에 편의상 셋으로 나눠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 구원은 믿음으로, 상급은 행함으로?
야고보서 2:14-2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먼저, 이 구절들을 한 절 한 절 살펴보겠습니다.
-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신칭의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렇다고 야고보가 바울과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야고보처럼 참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로마서 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그러므로 서로 다르지 않지요!
또, 야고보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없으면 ... "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즉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가 다룬 상대는 참 믿음을 가진 성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명목상의 교인들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야고보 둘 다 동의한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을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여기에 나온 "구원"이 미래의 구원 즉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 12-13절에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말했고, 1-13절 전체가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거나 차별하지 말고 사랑해야 할 것을 다뤘기 때문입니다. 그 후 15-16절에서 가난한 형제나 자매를 실제로 도와야 할 것을 예증으로 들었습니다. 때문에 야고보서 2장이 1-13절과 14-26절 두 단락으로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이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14절의 "구원"이 궁극적인 구원을 뜻함이 분명하지요. 그러므로 야고보는 결국 이 구절에서 행위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전에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존 스토트는 행위심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심판받음
신약성경 전체는 이것을 가리친다. 곧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지만'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니다. 사랑의 선한 행위만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개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것이다.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선행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약2:18, 20)이다. 심판 날은 공개적인 날이 될 것이므로 공개적인 증거, 즉 동정심을 보이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여러 번에 걸쳐 이것을 가르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이다."
다시 들어도 설명을 참 잘했지요! 그런데, 야고보만 행위심판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행위심판을 주장했습니다.
로마서 2:6-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른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 외에도 바울서신에 행위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다 소개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소개하지 않고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남성 동성애자)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처럼 바울과 야고보 모두 행위심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달아야 합니다. 절대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경고하신 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7:21).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정확히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최소한 천국에는 간다!" 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어리석은 말에 절대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만 이단이 아닙니다. 행위심판을 부정하는 것도 이단입니다. 전자는 율법주의 이단이고, 후자는 성경에 나오는 니골라당이나 영지주의 같은 무율법주의 이단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야고보서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15절에서 가난한 신자를 돌보는 것이 행함 있는 믿음의 기본이라고 말합니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설명한 야고보서 1장 27절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
또, 앞 단락인 2장 1-13절 전체에 이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2:1-4, 8-13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하.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어떻습니까? 야고보가 단지 행함이 아니라 긍휼(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시나요? 채영삼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경건, 참된 신앙생활에는 항상 긍휼의 행동이 뒤따른다. 지금 야고보가 다루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단지 신학적인 문제, 이론적인 문제 정도가 아니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 곧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1:27에서 소개한 참된 경건의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어려운 가운데 처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긍휼의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2:14-19에서 '믿음과 행위'라는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아도, 그 본질은 '긍휼'을 나타내는 참된 신앙, 참된 경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맞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힘주어 강조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고,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한 대로 오직 이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떠오르게 합니다(마25:31-46). 시간 관계상 그중 일부만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5:41-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아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또, 사랑의 사도 요한이 한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일서 3:17-19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하늘 문도 닫힌다는 뜻입니다.
또,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보인 놀라운 모범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도행전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사도행전 4:32-3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아래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
정말 도전이 되지 않나요? 존 맥아더는 "긍휼은 어떤 이가 진정으로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반드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풀고 나누는 일에 인색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무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구절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가 언급한 '행함'을 자선의 행위로만 제한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바로 앞에서 사랑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관해 언급했고, 15-16절에서 자선행위를 하나의 실례로 인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라합의 생애로부터 끌어낸 특정한 예(21-25절)는 분명히 자선의 행위와 관련이 없다. 특히 아브라함의 예의 경우 초점은 어떤 타인에 대한 자선행위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 자체에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과 야고보는 '행함'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섬김으로부터 나온 행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제 17절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제 역할을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14절에서 말한 대로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훨씬 더 최악입니다. 댄 매카트니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믿음은 무가치한 것보다도 더 못하다. 즉 역겹다. 야고보는 여기서 살살 말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단지 병들거나 죽을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네크라'(죽음), 즉 시체다(2:26). 경건한 유대인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을 제의적 부정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대인은 이와 같은 이미지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시체는 이방인에게도 역겨운 것이다."
제가 이 글을 읽을 때 다음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로마서 2:23-24 " ...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동시에, 한국 교회의 현실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신자는 주님이 말씀한 대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사람들을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됨됨이와 행동이 시체처럼 혐오스럽고 악취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디 이 말씀을 통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자신도 살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